[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6. 난주 병령사석굴 가는 길
환상의 석굴…가는 길도 무릉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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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석굴 제169굴> |
사진설명: ‘서진(西秦) 건홍(建弘) 원년(420)’이라는 묵서명이 남아있는 병령사 석굴 제169굴. 지상에서 40m나 높은 곳에 있는 이 석굴은 병령사를 대표하는 석굴로 ‘특굴’로 불려진다. |
2002년 10월2일 수요일. 창문을 통해 방안에 들어온 햇살과 함께 난주(옛 이름 금성)에서의 첫 날을 맞았다. 호텔 방에 준비된 따뜻한 물을 마시며 일정을 정리했다. 난주에 도착하기 전부터, 아니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기획을 준비할 때부터 가고 싶었던 병령사(炳靈寺) 석굴에 제일 먼저 가기로 했다. 이름만 들어도 흥분되는 병령사 석굴! 쿠차 키질석굴, 투르판 베제크릭석굴, 돈황 막고굴 등과 함께 항상 ‘몽환적 환상’을 자극했던 석굴이 아니던가.
천마호텔을 벗어나 난주 시내를 달렸다. 〈대당서역기〉의 주인공 현장스님(?~664)도 난주에서 하루 묵었다. 정관 3년(629)년 음력 8월 천축에 가고자 장도(壯途)에 오른,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불법(不法)으로 장안을 출발한 현장스님은 효달스님과 함께 난주에 도착해 하룻밤 지냈다. 당시 26살의 청년이었던 현장스님을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얼굴에는 가벼운 혈색이 돌았고 눈에서는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기품과 범절이 넘쳤고, 표정에는 우아함과 광채가 흘렀다. 목소리는 맑고 투명했으며, 거기서 우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 말에는 기상과 품위와 조화가 배어 있었다. 스님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지겨운 줄 몰랐다.”
그래서 현장스님의 설법이 끝나면 “시주한 보물이 너무 많아 금이나 은전(銀錢), 구마(口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시주물을 받은 현장스님은 “반은 불전(佛殿)에 공양하고 나머지는 모두 여러 절에 나누어 주었다.” 아마 병령사 석굴사원에도 희사했을 것이다.
차창으로 본 난주 거리는 붐볐다. 난주는 주지하다시피 서북 지역 교통의 요지. 난주 - 우루무치선, 난주 - 서령선, 난주 - 포두 - 북경선, 난주 - 서안선 등 4개의 철도선과 감신공로·감청공로·난서공로·감령공로 등 4개 육로선이 사방으로 뻗어있다. 서북 중국의 중심지고, 감숙성 성도(省都)가 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교통의 요충지인 것이다. 난주에서 병령사 석굴로 가는 길은 건설 중이었다.
2시간 동안 달린 끝에 난주 서쪽에 위치한 유가협(劉家陜)댐에 도착했다. 새로 생긴 유가협시(원래 지명은 永靖縣 新城)는 청해성을 지난 황하가 감숙성 서부에 이르러 S자형으로 굽이친 다음 다시 동북 방향으로 틀어 난주시로 흘러들어 가는데, 바로 이 S자의 허리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병령사 석굴은 유가협 댐에서 더 들어간 곳에 있다.
유가협댐 건설은 대약진운동이 한창이던 1958년 시작됐다. 댐 바로 밑에 수력발전소가 있는데, 1969년 제1호 발전기가 설치돼 발전을 개시했다. 현재 5대의 발전기가 가동되고 있는데, 용량은 122만kw에 달한다. 발전소 위에 있는 유가협 댐은 높이 147m, 길이 213m에 달하며 57억㎦의 물을 담는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발전 이외에도 홍수·유빙(流氷)의 방지·관개·수산양식 등 다목적 기능을 갖고 있다.
1951년 10월 세상에 처음 공개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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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위에서 부터 병령사 계곡 입구, 병령사 석굴 서벽 전경(오른쪽 끝이 대불), 병령사 와불. 병령사 석굴은 지면으로부터 10~30m 높이에 남북 190m에 걸쳐 분포돼 있다. |
유가협 댐에서 병령사 까지는 50km. 고속보트를 타고 1시간 가야하는 거리다. 고속보트를 탔다. 안전복을 입고 난간을 잡자 보트가 출발했다. 10분 정도 달리자 거대한 호수의 전모가 보였다. 과연 호수는 컸다.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길이 65km, 너비가 평균 4.5km, 면적은 137만㎢에 달한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고 주변의 풍광도 일품이었다. 이렇게 멋진 곳이 또 있을까 - 마제사 석굴, 금탑사 석굴, 천제산 석굴 등 석굴이 위치한 곳은 항상 주변 풍경이 수려했다 - 흥이 절로 났다. 호수 가장자리엔 집들도 보였고, 고기 잡는 배들이 가끔 보트 옆을 지나갔다. 유람선도 지나가고, 고속보트도 굉음을 울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갔다. “호수가 참으로 거대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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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석굴 서벽 전경> |
가도 가도 병령사 계곡은 나타나지 않았다. 출발한지 30분이 지나도 석굴은커녕 계곡도 보이지 않았다. 석굴에 갔다 돌아 나오는 지 보트는 많았지만, 석굴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경치는 여전히 좋았다. 달린지 40분을 넘어서자 저 멀리 높이 솟은 봉우리들이 보였고, 봉우리 사이에 계곡이 있음직한 곳이 나타났다.
그때부터의 풍경은 지금까지완 비교도 안될 만큼 월등히 좋았다. 가히 ‘무릉도원’이자, ‘선경(仙境)’이었고, ‘비경(秘境)’이었다. 산모퉁이를 끼고 좌회전해 들어가니 풍경은 더욱 기묘해졌다. 선착장도 보였다. 사람들도 붐볐다. 병령사 석굴 입구에 도착한 듯 했다. 선착장에 배를 대고 내리니 오후 1시. 선착장에서 점심 요기를 했다. 중국의 컵라면과 국수로 배를 채웠다. 라면 맛은 우리나라보다 못했다. 계란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신토불이(身土不二)’인 것 같았다.
입장권을 사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자매봉으로 불리는 거대한 암괴(巖塊)를 지나 들어가니 계곡은 생각한데로 비경(秘境)이었다. 마침내 병령사 석굴에 도착한 것이다. 점점 안으로 들어가니 바위엔 온통 불보살 조각 뿐이었다. 서있는 부처님, 앉아 있는 부처님, 설법하는 부처님, 아름다운 장식을 자랑하는 보살상 등 한 순간도 다른 곳으로 눈 돌릴 수 없을 만큼 조각은 화려하고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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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석굴의 와불> |
병령사 석굴은 1951년 10월 세상에 존재가 알려졌다. 물론 인근의 주민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학계나 문화재계에 공식적으로 보고된 것이 1951년이라는 것이다. 병령사 계곡은 그 옛날 캐러밴들이 황하를 건넜던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병령사 옆 절벽에 ‘세계의 첫 다리’라는 글귀가 조각돼 있는데, 629년 천축으로 떠난 현장스님이 황하를 건넌 것도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건기엔 계곡에 물이 마르기 때문이다.
병령사 석굴은 4세기 말부터 개착되기 시작했으며, 183개의 석굴이 현존한다. 석굴 사이의 가파른 바위틈엔 무수한 불보살 조각이 남아있다. 병령사 계곡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역도원이 지은 〈수경주(水經注)〉에 - 북위(北魏)때 학자 역도원이 저술한 중국의 하천지(河川誌) - 남아있다. 중국 당(唐)나라 도세(道世)스님이 지은 〈법원주림〉 권53에도 “병령사 계곡에 석문(石門)이 있는데, 이는 서진(西晉. 265~316) 태시(泰始. 265~274) 연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물론 〈법원주림〉이 편찬된 것은 668년, 태시와는 약 400년의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병령사 석굴이 적어도 서진(西晉)시대부터 개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굴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은 서진(西秦. 385~431)시대 만들어졌다. 사마의 중달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 265~316)이 아니라, 선비족의 일족인 걸복(乞伏)씨가 세운 5호16국 중 한 나라를 말한다. 유중지방(楡中地方. 감숙성)에 있던 선비족(鮮卑族) 추장 걸복국인(乞伏國仁)은 당초 전진(前秦) 부견왕의 신하였다. 비수전투에서 전진(前秦)이 동진에 패배한 385년, 대도독대선우령진하이주목(大都督大單于領秦河二州牧)이라 자칭하고 연호를 정하는 등 반(半) 독립체제를 취했다.
초기석굴은 西秦시대 만들어져
아들인 걸복건귀(乞伏乾歸) 때에는 금성(난주)에 도읍하고, 대선우하남왕(大單于河南王)이라 칭했다. 동시에 주변의 저·강·선비 등의 민족들을 평정하고, 농서·파서(巴西)를 점령했다. 그러나 400년 후진(後秦)에게 파멸되고, 한때는 그의 신하가 되어 왕호(王號)를 버렸다. 후진이 쇠퇴하자 다시 독립해 진왕(秦王)이라 자칭했다. 아들인 걸복치반(乞伏熾磐)이 왕위에 올라 토곡혼(吐谷渾)을 격파하고 양주(무위)을 병합하는 등 국세가 왕성했으나, 걸복모말(乞伏慕末) 때 혁련발발이 세운 하(夏. 407~431)나라에 멸망되고 말았다.
서진(西秦)이 국세(國勢)를 떨칠 당시 병령사 일대는 서진국의 불교성지였다.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이래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했지만, 걸복씨의 서진(西秦)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석굴사원이 조영됐다. 서진시대 사원의 명칭은 분명하지 않지만, 당나라 때에는 용흥사(龍興寺), 송나라 때는 영엄사(靈嚴寺)로 불렸다. 티베트가 병령사 일대를 장악하고부터 이 지역 불교는 밀교로 변했고, 이름도 ‘천불만불(千佛萬佛)’이라는 뜻의 병령사로 개칭됐다.
실크로드 연변에 자리 잡은 병령사 석굴예술은 석조(石彫)의 불상에 특색이 있다. 서진(西秦)·북위·수·당을 거쳐 청나라에 이르는 1500년 사이에 각 시대의 석굴들이 만들어졌다. 불상들은 대개 홍사암 암벽에 새겨졌는데, 지금 있는 석굴과 불감(佛龕)의 수를 합치면 총 183개, 석불은 694위(位), 소상(塑像)은 82위(位), 벽화의 총 면적은 900㎡에 이른다. 병령사 석굴은 주로 계곡 서쪽의 가파른 절벽에 조성돼 있는데, 지면으로부터 10~30m 높이에 남북 190m에 걸쳐 분포돼 있다. 석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169굴. 40m 높이의 암벽 안에 있다. 병령사와 하서주랑의 역사를 생각하며 서서히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관람객들이 엄청 많았다. 10월1일부터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 휴일 때문에 인파들이 몰려든 것 같았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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