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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들국화를 비틀스에 비견하는 것은 전혀 생뚱맞지 않다. 일단 전인권-최성원 투 톱 체제가 빚어내는 마술 같은 멜로디가 레논-매카트니 콤비의 그것과 형식ㆍ내용적으로 유사하고, 전 멤버 모두 연주 및 작곡에 참여하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공통점이다. 무엇보다 음악으로 '충격'을 준 점이 가장 많이 닮았다. 비틀스는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충격파를 던졌고, 들국화는 주류 음악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며 한국 대중음악판의 지형도를 단박에 뒤집어놓았다. 록밴드의 형식으로 팝의 내용물을 담아 모든 이의 공감을 끌어내는 대중성, 두 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통점으로 대중음악의 '전설'이 됐다. 만약 들국화가 1989년 해체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 펼쳤다면, 그리고 한국이 아닌 영어를 쓰는 국가 출신이었다면 세계 대중음악사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은 확연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데뷔 앨범을 발매 한지 25주년을 맞은 올해, 들국화 멤버들은 다시 기지개를 켰다. 현재 요양 중인 전인권(메인 보컬)을 제외한 3명의 멤버는 왕성한 의욕과 열정으로 바쁜 개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성원(베이스)은 최근 개봉을 앞둔 영화 '기타가 웃는다'의 주제곡을 부르며 활동의 신호탄을 쐈고, 미국 이민 생활을 접고 2009년 귀국한 조덕환(기타)은 최근 첫 솔로 음반을 냈다. 주찬권(드럼)은 엄인호ㆍ최이철과 함께 밴드 퍼 세션을 결성해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들국화 25주년을 기념해 후배 밴드들의 리메이크 음반도 4월쯤 나온다.
2000년대 아이돌 그룹의 홍수 속에 들을 노래 없다는 중장년층의 암묵적 비판과 무관심이 이어지자, 평단과 음악 애호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명반 순위를 매기는 일을 시작했는데, 들국화는 어김없이 1∼2위에 오르며 그 세를 과시했다. 들국화에 대한 팬들의 끊임없는 애정을 멤버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 시절 정치ㆍ사회적인 상황에선 우리 같은 팀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라이브를 제대로 하는 그야말로 언더그라운드 밴드를 하자고 서로 다짐했죠. 뮤지션으로서는 비정상적인 결정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혹자는 건전한 가사를 담아 밝고 명랑한 음악을 만들라고 조언도 했지만, 그건 우리가 음악을 하는 이유와 동떨어져 있었어요. 들국화는 그때부터 기존의 왜곡되고 권위로 포장한 미디어 시스템을 무시하고 공연장에서 하나둘 팬들을 확보하기 시작했죠. 과장을 보태자면 온실 속의 챔피언이 아닌 거친 광야에서 피어난 챔피언 같은 모습이었다고 할까요?"(최성원) "들국화의 음악적 특징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한 정서의 노랫말과 곡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노래와 연주로 잘 표현하기도 했고요."(주찬권) "한국 음악이지만 서양적 기법의 록이 완성도 있게 표현됐다고 생각해요."(조덕환)
자존심과 자부심 강한 이들이 '뮤지션스 초이스'에 응했다.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자존심을 지켜온 거장답게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지는 주제가 눈에 띄었다. '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한국의 명반'이 그것. "알고 보면 한국에 굉장히 훌륭한 명반들이 많은데, 쉽게 간과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소개해서 젊은 세대들도 많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 거장들을 직접 만나보니, 말수가 적어 좀 답답하기도 했다. 적어도 그들에겐 말로 친화력을 발휘하는 재주는 없어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진실된 음악의 언어로, 순수한 감성의 태도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킬 뿐이었다. 음악은 그런 것이다. 혀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감성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낚아채는 것이다.
80년대의 대중음악은 크게 방송을 타는 ‘제도권 음악’과 방송을 타지 않는 ‘비제도권 음악’이 있었다. 후자는 다시 일명 ‘운동권 음악’으로 불리는 김민기 등의 민중음악과 들국화로 상징이 되는 언더그라운드음악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들국화는 이름 그대로 들에서 핀 꽃처럼 비제도권에서 출발한 록그룹이다. 나이트클럽의 DJ나 통기타가수의 멤버 등 비제도권으로 출발한 그들은 철저하게 무명의 설움을 가슴에 품고 출발하였다. 2집은 들국화의 노래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것이기에 들국화는 사실상 1집만을 내고 해체한 것이라 보는 것이 대중들의 중평인데, 들국화는 딱 1장의 음반으로 80년대의 록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대단한 그룹이었다. 그들은 방송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해체할 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출발점이기도 한 콘서트에서 활동하였다. 실은 손담비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어색하듯이, 들국화가 TV에 비치는 것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언젠가 들국화의 멤버인 전인권과 고 이은주와의 사랑해프닝이 신문에 난 적이 있었다. 고 이은주의 매니저라는 사람이 전인권을 호되게 비난하고 이런 매니저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네티즌들이 전인권을 성토하였는데, 나는 그 매니저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예인 매니저가 연예인의 사랑이라는 사적인 감정까지도 manage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리고 사랑이라는 영역에는 짝사랑도 있으며 사랑하는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까지 아우르는 것으로 존재함에도, 특히 고 이은주 당사자가 아님에도 ‘고 이은주는 사랑을 하지 않았다.’고 강변을 하고 나아가 ‘언론플레이’ 운운하면서 전인권을 비난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언론플레이’ 운운하는 대목이었다. 전인권이 언제 언론플레이를 할 정도로 연예인기사에 자주 등장한 인물이었던가? 영화 한편 찍거나 앨범 한장 내면 뻔질나게 화면에 등장하여 광고하는 것이 전인권 본연의 모습이었던가? 전인권은 ‘영원한 반항아’요, ‘영원한 비주류’아니던가? 전인권뿐 아니라 전성기시절에도 들국화의 멤버들이 TV화면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고 멤버들 중에서 ‘언론플레이’를 한 사람도 없었다. 들국화를 존경하고 강렬한 영향을 받았다는 서태지가 정작 자신은 신비주의 마케팅을 한 인상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들국화의 가치는 신중현에서 출발한 한국록의 지향점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행진’을 연주하는 그들의 반주는 생동감이 넘친다. 음악에 미친 그들의 감정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래서 들국화라는 마약에 빠진 이들은 평생 그 맛을 잊지 못한다. 그것이 들국화 존재가치이기도 하다. 요즘 노래들은 컴퓨터가 반주를 하는 정형적인 노래들이다. 컴퓨터 음악의 취약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반주가 일정하기에 라이브 연주의 생동감이 죽어 있다.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평온한 것이 사람이 실제로 연주하는 음악의 진정한 맛인데, 컴퓨터의 기계적인 연주는 생동감 있는 음악감상의 맛을 앗아갔다. CD를 사서 들으면 족한 것을 라이브 콘서트를 고집하는 음악매니아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치에 기인한다.
나는 80년대 후반 전인권의 콘서트 표를 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갈 수가 없었기에 같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내 사촌 여동생에게 그 표를 줬다. 콘서트를 다녀 온 여동생은 마이크를 쓰지 않고도 실내를 찌렁찌렁 울렸다는 전인권의 가창력에 넋이 나갔다고 했다. 가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전인권을 극찬했다. 바로 이 전인권이 부르는 노래가 들국화 본연의 노래다. 이 전인권과 노래를 만드는 것에 발군의 역량을 지닌 최성원이 어우러져 결성된 들국화는 ‘들국화적인’ 그리고 ‘들국화적’일 수밖에 없는 개성이 물씬 밴 그들만의 노래를 불렀다. 거친 목소리의 전인권과 감미로운 목소리의 최성원이 구현한 하모니는 천상의 조합이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에서 록음악이 있는가 물으면 서슴없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들국화의 록이다.
들국화는 해체된지 이미 2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국화가
구현했던 록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들국화가 돌아왔습니다. 지난 여름 지산밸리락페스티벌의 뜨거운 무대와 얼마전 MBC '놀러와' 방바닥 콘서트의 무대로 다시 들국화의 열풍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무대에서 보여준 그들의 깊은 울림은 그들의 음악으로 성장한 기성 팬들 뿐 아니라 '들국화'라는 이름이 낯선 젊은 층에게도 음악이 주는 뜨거운 감동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들국화는 20년전 공연하던 대학로의 작은 공연장인 학전 소극장에서 다시 재결성 공연을 갖습니다. 그들의 이번 학전 소극장 공연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들국화와 학전 소극장이 인연을 맺은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1992년 전인권의 콘서트를 시작으로 들국화가 공식 해체를 선언하기 전 까지, 수 차례의 콘서트를 열었던 학전 소극장에서 오는 10월 1일 들국화가 다시 콘서트를 엽니다. 이번 공연의 제목은 [2막 1장]입니다. 여기엔 재미있는 사연이 담겨 있는데요.
학전 소극장에서 했던 공연 중 [2막 1장]이라는 부제를 달았던 예전 공연은 200석 규모의 소극장에 400여명이 들어올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고 합니다. 이번 공연도 그 때만큼 성황 이길 바라며 전인권이 직접 지은 제목입니다. 학전 소극장이 들국화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학전 소극장의 대표인 김민기와 들국화의 각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멤버들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힘들었을 때도 변함없이 걱정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김민기 대표는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장 의지하고 존경하는 형님입니다. 그리고 학전 소극장은 그들에게 언제나 그리웠던 돌아오고 싶은 고향 같은 곳입니다.
학전 소극장은 지난 2011년 개관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대학로에 20년의 역사를 가진 극장도 이제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화려한 극장이랑은 비교할 수 없지만, 붉은 벽돌의 200석 남짓한 학전 소극장을 찾는 이들에게는 이 공간 자체가 역사이고, 추억이며, 낭만 입니다. 역사가 오랜 만큼 주목할 만한 기록도 있습니다.
94년 초연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제작:극단 학전)은 한국창작 뮤지컬로는 최초로 15년간 4000회의 공연을 했고, 고 김광석은 학전 소극장에서 그의 1000회의 콘서트를 맞았습니다. 그를 기념해 학전 소극장 앞마당에는 김광석 노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음악인들에겐 관객들을 가까이 만나며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배우들에겐 열정이 뭔지 알게 해준 꿈의 무대로, 학전은 연극, 뮤지컬, 콘서트. 장르를 가리지 않고 따뜻한 사람들을 위한 공연을 20년이 넘게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학전 소극장은 그런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들국화는 올해 공식적으로 재결합을 선언하고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전국투어를 시작으로,지난 해, 지산 밸리 록페스티벌, 제천 국제음악영화제, 공지영의 의자놀이 콘서트, 제주 강연 콘서트 까지 어느 때 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데요. 항상 관객들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제대로 들국화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엔 학전 소극장 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 멤버들은 지금 열정적으로 학전 소극장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사진제공 : 중앙일보 권혁재 기자
20년전 학전 소극장에서의 콘서트를 회상하면 이번 공연에 객석을 메울 관객들은 누구일지 궁금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예전에도 이렇게 열심히 연습한 적이 없다는 전인권. 이제는 무엇보다 노래가 잘 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최성원은 진짜 음악이 홀대 받는 시대에 관객들이 들국화의 공연을 보고, "맞아, 음악이 이런 거였어. 공연이 이런 거였어. 그래서 내 돈 주고 판을 샀었지"하고 떠올리는 게 목표라고 말합니다. 이번 콘서트는 들국화와 함께 청춘을 보낸 그 때의 청년들과 들국화를 전설로만 전해들은 현재의 청년들이 모두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감동적인 시간이 될 것입니다.
'들국화' 드러머 주찬권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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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그룹 '들국화'의 드러머 주찬권(58ㆍ사진)이 돌연 별세했다.
매니지먼트사 들국화컴퍼니에 따르면, 주찬권은 지난 2013년 10월 20일 오후 6시47분께 숨을 거뒀다.
이날 오후 5시께 경기
성남 분당 자택에서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들국화컴퍼니 관계자는 "평소 지병을 앓고
있지 않았다"면서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우리도 당혹스런 상황이다. 병원에서 현재까지 사인을 원인 불명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1973년 미8군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한 주찬권은 1974년 '뉴스 보이스', 1978년 '믿음 소망 사랑', 1983년
'신중현과 세 나그네'에서 활약했다. 1985년 그룹 '들국화'에 합류, 1집 '행진'을 발표했다.
지난해 솔로 6집을 발표하는
등 최근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같은해에 또 들국화 원년 멤버들인 전인권(59), 최성원(59)과 16년 만에 다시 뭉치기도 했다.
지난 8월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로 나서 신곡을 발표했던 이들은 올해 하반기 발매를 목표로 들국화의 새
앨범을 작업 중이었다.
원년 멤버 셋이 전원 참여하는 것은 1986년 '제발'을 내세운 2집 '너랑 나랑' 이후 27년만이다.
전인권은 1989년 들국화가 해체한 뒤 1995년 새로운 멤버들을 이끌고 들국화의 이름으로 3집 '우리'를 내놓은 바 있다.
발인은 2013년 10월 23일 오전.
한국 가요사상 최고의 전설로 꼽히는 밴드 들국화가 원년멤버인 전인권(보컬), 최성원(베이스, 보컬), 故 주찬권(드럼, 보컬)이 모여 레코딩한 새 앨범 [들국화]를 27년 만에 발표하며, 전설의 봉인을 해제한다. 들국화는 1985년, 원년 멤버로서 첫 앨범인 1집 [들국화]를 발표, 언더그라운드에서만 활동하던 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성과 대중성을 완벽히 갖추면서, 평단과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세계로 가는 기차', '매일 그대와' 등 수록곡 전곡을 히트곡 반열에 올렸다. 이어서, 86년 11월, 2집 [너랑 나랑]을 발표, '제발',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쉽게' 등을 히트시키며 '소포모어 징크스'를 가볍게 깨면서 음악성과 대중성 양면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들국화는 두 장의 앨범을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음은 물론, 음악적 르네상스를 열었다는 극찬까지 얻은 바 있다.
들국화의 이번 앨범은 1집 앨범 타이틀인 '들국화'와 동명 타이틀로 선정, 27년간 변하지 않은 '들국화'의 음악적 자아를 재현할 예정으로, 12월 3일 '걷고, 걷고' 선공개를 시작으로, 12월 6일, 신곡 앨범과 들국화의 이전 앨범 수록곡 12곡이 담긴 리메이크 앨범이 포함된 2CD 구성의 총 19곡을 온, 오프라인을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27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살아있는 에너지와 슬픔을 동시에 전달하는 전인권의 보컬, 최성원의 섬세하고 감성 어린 연주와 보컬, 주찬권의 명불허전의 드러밍까지 조화를 이루며, '전설의 재림'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이번 앨범은, 지난 10월 안타깝게 별세한 드러머 故주찬권이 모든 레코딩에 참여한 유작이기에, 원년 멤버로는 마지막 앨범이 되는 것이라 더욱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네이버 뮤직에서는 들국화의 컴백에 앞서, 특별한 컨텐츠를 공개한다. 27년을 한결같이 함께한 팬들의 추억을 모아 발간된 포토북의 주요 자료들이 바로 그것으로, 멤버들도 미쳐 갖고 있지 못한 소중한 자료들이 이곳에 담겨 있다고 한다. 들국화의 역사를 돌아보며, 그들이 27년만에 선보이는 새 음악을 기대해 보자.
들국화의 명곡들이 시간의 풍상을 거친 뒤 새롭게 재탄생한다. 1980년대 중반 오리지널 버전의 긴장감과는 또 다른 맛을 풍긴다. 그동안 이들 각자가 거쳐온 인생의 굴곡,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이들 앞에 모여선 오랜 팬들의 삶의 편린이 만났을 때, 이 곡들은 단순한 노래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들국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신비로운 시너지에 있다. 이 앨범을 통해 들국화는 단지 건재(健在)할 뿐만 아니라 부단히 진화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주찬권의 허망한 죽음으로 원년의 주역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는 시점에 만들어진 이 음원들은 문자 그대로 소중한 기록(recording)이다. (신현준)
들국화가 돌아왔다. 그들은 여전히 젊다. 그때 그 음악들이 돌아왔다. 21세기의 옷을 입고. 30년에 가까운 세월도 그들의 음악을 앗아가지 못했다. 다만 그 세월만큼의 깊이를 선사해줬을 뿐이다. 그들이 돌아와 줘서 감사하다. 이런 음악들을 다시 우리에게 선물해줘서 감사하다. 들국화는 이렇게 시대와 동기화됐다. 이 열두 곡의 노래들은 그 오래된 기억을 환기 시킨다. 더 나아진 사운드와 풍성해진 편곡, 그리고 달라진 목소리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시길.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때의 '소리'도 또한 있지 않은가. 같은 음악이다. 다만, 다른 소리일 뿐이다. (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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