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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20. 2-17 | 신명 5. 6-21 |
*시나이 산에서 주어짐 *하느님에 의해 직접 체결된 계약 *제 10계명:‘이웃의 집’,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된다.’라고 되어있음 | *모압 평지에서 주어짐 *모세가 한 연설의 한 부분으로 제시됨( 호렙 산에서 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상기 하는 맥락에서 제시됨) *제 10계명: 탐내지 말아야 할 대상은 ‘이웃의 아내.’, ‘이웃의 집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것없이 이웃의 재산은 욕심내서는 안된다.’라고 되어있음 |
이 중요한 법률이 두 번 나오니까 동일하게 제시되면 좋겠지만 성서를 읽다보면 한 가지 사건에 대한 두세 가지 다른 보도를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대한 것은 신명기 설명할 때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집중적으로 설명할 것은 탈출기 십계명입니다. 광야 여정 중에 법률이 제정되었다고 보기는 좀 어려움이 있는데 왜냐하면 우상숭배에 대한 금령을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우상숭배문제는 그들이 가나안으로 이동하는 시기에 부각되는 위험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옮겨가기 때문에 다른 우상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던 시기이고 우상숭배가 가장 도전적으로 부각되던 시기는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가나안에는 이미 바알이라는 절대적인 신이 유포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런 바알 종교와 충돌이 됩니다.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는 정착해야 되기 때문에 매혹이 되고 강하게 도전이 되었던 겁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는 정착된 이후에 부각되었는데 이미 정착하기 전에 모세 때 주어지는 십계명에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이러한 것으로도 십계명이 사실은 후대에 만들어졌지만 성서저자에 의해서 모세 때 주어진, 그래서 후대의 법전에 핵심원칙으로 부각되는 것으로 재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집이나 전답 가축을 탐내지 말라는 것도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거죠. 이런 것들도 유목생활이 아니라 후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특별히 두 개의 십계명 중에서 부각되어 비교되는 것은 아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십계명에서는 아내를 다른 재물보다 위에 둠으로써 여성의 위치가 부상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이런 것 역시 후대의 상황이 반영됨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내와 종과 전답을 같이 보는 것(탈출), 아내를 따로 보는 것(신명) 으로 약간 달라집니다. 여성의 위치가 약간 높아진 후대의 상황을 반영한 게 아닌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십계명은 후대에 그들이 지켰고 만들어낸 법률이 모세에 소급되어 소개되고 있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십계명 말고 이제 또 등장하는 법전이 있는데요.
계약 법전 | 신명기 법전 | 성결 법전 | |
성경 구절 | 탈출기(20,22-23,33) | 신명기(12-26장) | 레위기(17-26장) |
제작 시기 | 왕정 이전 | 왕정 말기 | 유배 이후 |
제작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 대가족의 족장들이 분쟁을 통제함 | *예배와 사법권의 중앙 집중화로 힘의 중심이 이동됨. *가족중심에서 예루살렘 중심으로 이동됨 | *유배 후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 의식으로 선민 의식을 표방하게 됨. *행정과 사법계획이 절실히 요구됨 |
계약법전(왕정이전), 신명기 법전(왕정이후.), 성결법전입니다.
우선 계약법전은 탈출기 20장 22절에서 23장 33절에서 해당이 됩니다. 십계명 바로 다음에 등장합니다. 신명기 법전은 그냥 읽어볼 때 모세의 유언으로 되어있는데 이 유언이 법제화된 법이라는 겁니다. 유언을 할 때 “ ~하라, ~하지 말아라” 유언을 하시고 부모님들이 돌아가시잖아요. 이것이 법전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거죠. 성결법전은 레위기를 설명할 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한 자가 돼야 되고 어떻게 하면 거룩한 자가 될 수 있는지 레위기 17장에서 26장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서 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있지 않지만 적어도 3개의 법전이 왕창 들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거 말고도 사제계법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민수기에 산발적으로 들어가 있는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적어도 4가지 법전의 연합으로 5경이 구성되어있는데요. 계약 법전에 대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계약법전이라는 이름은 탈출기 24장 6절에서 7절에 근거하고 있는데요.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모세가 계약을 맺을 때 제단에 피를 뿌린 뒤 계약서를 읽었다고 하는데 이계약서가 계약법전에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계약서를 읽었으니 이 계약서의 이름은 계약법전이다 라고 이름을 짓겠다는 건데요.
지금 저희가 알고 있는 법전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제정된 법으로 봅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에 판관시대가 지나면서 왕정이 들어서게 됩니다. 왕정이라는 이 독특한 제도가 들어서고 나서는 이스라엘의 삶의 패턴이 굉장히 바뀌게 되는데요. 계약법전을 읽어보면 왕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왕정이전에 마무리 됐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나안에 정착해서 왕정이 도입되기 이전에 그들의 공존체제 안에서 지켰던 여러 법들이 이 계약법전안에 들어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신명기 법전이 등장하는데요. 북이스라엘이 망하게 되고 남유다가 망하게 되고 이러면서 왕정이 붕괴되게 되거든요. 이렇게 붕괴될 즈음에 만들어진 거라고 보고요. 특별히 계약법전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계약법전 자체가 너무나 고대, 왕정이 들어서기 이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걸 계속해서 사용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후대의 상황에 맞추어서 계약법전을 수정하고 증보시킨 확장판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내용이 신명기 12장부터 26장까지 들어가 있다고 보는 거고요.
그다음에 성결법전은 유배이후라고 봅니다. 유배를 가게 되면서 왕정은 무너지게 되고 이제 이스라엘 안에서 왕의 역할을 대신했던 분들이 나오는데 누구냐 하면 사제들입니다. 사제정치가 시작이 되고 왕만큼 큰 통수권을 가진 인물로 대사제가 등장하게 되죠. 이게 유배 이후부터 있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제들은 그들의 정치를 어떻게 하면 좀 더 거룩하게 될 수 있을지 이런 부분들에 대한 것을 강조했고 그래서 레위기에 ‘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고 말씀드렸고 결국 이 표현은 유배이후에 만들어진 표현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굉장히 후대에 사제정치가 시작되면서 그들에 의해 제공된 내용이고요. 지금 이 표에 등장하진 않지만 사제계 법전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이 법전도 성결법전처럼 사제들에 의해서 강조되고 시도되고 이런 겁니다. 그러면서 성소, 성전, 제사, 사제, 정결례 이런 것들이 많이 강조되어서 전례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 전례규정들이 제시되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법전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면서 민수기 내용으로 들어가시겠습니다.
민수기는요, 이야기도 있고 법조문도 들어가 있습니다. 5경전체가 이야기와 법조문의 연합으로 되어있다고 했었는데 민수기도 이야기부분도 나오고 법조문부분도 나온다는 거예요. 특별히 민수기에 많이 나오는 법전은 사제계법전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 이야기들과 함께 필요하다고 하면 법전들이 연합이 되어서 제작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특별히 민수기에는 굉장히 많은 숫자와 목록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제목이 민수기예요. 이렇게 숫자와 목록이 등장하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이 행정적으로 조직화되고 체계성을 갖추게 됐다란 걸 의미합니다. 탈출기에서 모세에 의해 굉장히 많은 여러 사람들이 오합지졸처럼 그냥 뭉친 거예요. 이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 겁니다. 그런데 단순히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이 행정력을 갖춘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 민수기입니다.
그래서 민수기의 책 제목이 히브리말로 ‘바에다바르’라고 하는데 이 제목은 ‘그리고 그가 말씀하셨다’ 입니다. 말씀하셨다라는 건데 그 말씀은 법조문 일수도 있고 이야기일수도 있는 겁니다. 아무튼 말씀은 법조문, 이야기를 통해서 제시가 되고 있는 거고요. 이런 제목이 있었지만 제목으로는 약하다고 보고 이스라엘 안에서 부제목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제목이 더 유명해지게 되죠. 그게 뭐냐 하면 ‘광야에서’ 라는 제목입니다.
왜냐하면 민수기는 여전히 시나이에서 모압으로 가는 광야여정을 계속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공동체가 어떻게 조직화되는지 얘기하고 있고 특별히 이스라엘이 굉장히 불평하는 모습이 부각됩니다. 오죽하면 모세를 이스라엘이 죽이고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일종의 반역행위를 공모할 정도로 광야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 이 제목이 유명해지게 되는 겁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말로 ‘아리스모이‘라는 제목인데 이것은 한국말로 번역하면 ’숫자들‘ 이라는 제목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민수기를 읽어보시면 몇 명, 군사들은 몇 천명 등등 숫자가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리스사람 헬레니즘에서 번역된 책에서도 ’숫자들‘ 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고 저희도 민수기(사람들, 백성들의 숫자)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민수기의 내용은 학자들마다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통일성을 갖고 있지 않아서 구조를 잡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가설들이 나오는데요. 저는 제 책 통권에서 장소를 통해서, 지정학적인 요소를 통해서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 1장 1절부터 10장10절까지는 시나이에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10장11절부터 21장 35절까지는 시나이에서 모압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그다음에 22장부터 36장 까지는 모압에서의 여정이죠. 그래서 시나이에서의 여정, 시나이에서 모압으로 가는 여정 ,그리고 모압에서의 여정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게 가장 알기 쉽게 접근하는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많은 분들이 민수기에 인명과 수효가 너무 많이 나오니 이걸 다 읽어야 되냐고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시는데 읽으셔도 되고 안 읽으셔도 됩니다. 또 이 숫자가 절대적인 숫자다. 확실한 숫자라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의 문헌 안에서 몇 십만 명 이런 숫자를 다 세어서 기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구수라던가 장정의 수라든가 이런 것들은 후대에 조사했던 내용들이 반영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 내에서 성서 경시대회를 많이 하시잖아요. 교구마다 성서암송하시고 성서시험도 보시고 성서열풍이 대단하신데 시험문제에 민수기에 나와 있는 어떤 것에 그 사람은 모두 몇 명입니까? 이런 것은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확실한 수치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정신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그 부분이 더 중요하겠죠. 어쨌든 이런 숫자들을 외우는 게 큰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숫자들과 함께 광야에서의 여정이 많이 제시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불평하고 의심하고 불만을 갖고 이런 모든 것들은요, 원인을 하느님 현존에 대한 망각이라고 봅니다. 하느님이 지금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고 때로는 악과 고통까지도 이용하신다는 부분을 망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탈출기 부분에서도 말씀드린 바가 있는데, 이스라엘이 이집트라는 곳에서 탈출을 하죠. 그들은 이집트에서 굉장히 많은 부당한 조건들에서 살았는데 그 힘든 장소로부터의 도망이 곧 구원이 아님을 말씀드렸어요. 이유는 뭐냐 하면 탈출하고 나서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탈출이 곧 구원인데 그렇지 않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탈출기 후반부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몽땅 대부분 다 광야여정을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광야라는 모티브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굉장히 크다는 겁니다.
그러면 광야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기능이 뭐겠느냐? 광야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고 앎의 부족으로 나오게 되는 현상들이 불평 불만 의심 의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광야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미드바르’라고 하는데요. ‘미드바르’라는 말이 뭐냐 하면 ‘다바르’ 즉 말씀이라는 어휘가 포함되어있는 내용입니다. 즉 광야라는 곳이 어떤 곳이냐?
말씀을 만나는 곳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보고...
왜 히브리말에서는 광야라는 말을 말씀이라는 어휘가 들어가 있는 미드바르라고 했는가? 사실은 광야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거든요.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이 없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는 거고 그 목소리를 들어서 길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이나 광야의 여정을 제시하고 있는데 사실 이 40년이란 숫자는 굉장히 상징적인 숫자죠.
고대근동 안에서 4라는 숫자는 완벽함을 상징했습니다. 고대근동에서는 4가 왜 완벽하냐하면 방향을 제시하는 동서남북 네 방향이 네 방향이 있으면 주변이 완전하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4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상징했고 십진법이 개발되면서 10이라는 숫자역시 완전함을 상징하게 됩니다. 그래서 40은요. 그야말로 완전한 숫자예요. 40년을 해멧다는 건 계속해서 못 알아들어서, 계속해서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지독하게 해맷다는 얘기죠. ‘이스라엘이라 쉽게 만났구나’ 이게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끝까지 한번 해봤다는 겁니다.
그러니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되는데요. 저희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 그분을 만나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로 제시되고 있는 게 성당이죠. 그래서 성전에 가면 그분의 현존을 보여주는 사인으로 감실에 등도 켜있죠. 탈출기를 보시면 하느님 현존이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제시됩니다. 이 불기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빨간 감실 등이예요. 그래서 ‘그분이 여기 계시다’ 이것을 얘기해주는 겁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가장 좋은 곳이 성전인데 성전이 굉장히 많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건축물도 굉장히 화려한데 사실 원칙은 하느님의 집은 장식이 필요 없는 곳이죠. 왜냐하면 광야라는 곳은 아무것도 없어서 내 눈을 사로잡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고 하느님밖에 보이지 않는 곳이니까요. 하느님의 얼굴은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또렷하게 부각되는 것이고요.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 성녀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얼굴은 보여 지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뭐라고 얘기 하냐면 그분을 지복직관하는 것. 즉 그분을 직접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신앙의 갈등 같은 것은 없어진다는 거죠. 그런데 안 보이니까 문제가 되는데 그분이 직접적으로 보여 지는 것은 죽고 나서 라고 했어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거울에 비춰보듯이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그분을 보면 신앙에 확실한 한걸음들을 내딛으시기가 쉬우실 수가 있지만 하느님은 그런 신앙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거울에 비춰보듯이 더듬더듬 훑어가며 그분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확실한 것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가능하게 되죠.
이렇게 하느님 얼굴 보기가 어려운데 오히려 성전은 굉장히 화려한 장식들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요. 사실은 맨 처음부터 성전이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벽화들이라던가. 여러 데코레이션들을 했던 이유는 뭐냐 하면 중세시대 혹은 초기교회에서 대부분 신자들이 문맹이시잖아요. 글을 읽을 수가 없어 성경을 읽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성경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쇄술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다 필사를 하거든요. 그러니 성경도 없지, 있다하더라도 읽을 줄도 모르지 이러니 분명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 교리교육차원에서 전달이 되어야하는데요.
글로써는 할 수가 없으니 시청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성화들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떠셨고 성모님이 어떻고 애기를 어떻게 낳으셨고 이것도 회화기법이 굉장히 정교하게 나오고 나서부터는 굉장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화들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 이전에는 굉장히 투박한 조각상들 -목화라고 하죠- 나무를 새겨서 만들게 되는데 돈도 많이 들고 이러니까 유럽에 가보시면 액자하나에 가운데에 그림이 있고 그 주변에 만화처럼 여러 내용들이 제시가 된 것들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짧게 여러 그림들, 모습들을 재현, 소개해 드림으로써 교리교육을 하는 것, 이게 목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인쇄술도 발달이 되고 교회도 굉장히 비대해지고 풍요로워지고 이러니까 그 본질적인 의미가 오히려 퇴색이 되면서 그냥 멋지게 장식하면 하느님이 기뻐하시나보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거 같아요. 하느님께 최대한의 공경과 흠숭을 드린다는 자세로 금은보화를 많이 드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아까 제가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런 말씀을 드릴 때도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보다도 그런 마음을 봉헌하고 마음으로 하느님을 알아드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이게 가장 좋은 제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금은보화, 다이아몬드 다 하느님의 것이죠. 하느님 것을 가져다 봉헌한다 이렇게 얘기했을 때 이게 얼마나 어불성설입니까. 물론 무엇인가 하느님이 기뻐하시게끔 여러 가지 내용물들로 성당을 채우는 것도 좋은 모습일 수도 있겠죠.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런 장식물들이 다 배제된 상황에서 다른 것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그분만 볼 수 있게 하는 분위기도 성전을 짓는데 반드시 고려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부분을 잘 알고계시는 건축가들은 오히려 성당을 지을 때 큰 공간, 비어있는 공간으로 오히려 그런 공간을 온통 채우고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죠. 예를 들어서 상본을 보시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서양여성으로 성모님이 그려져 있고 아기예수님도 금발의 예쁜 아기로 되어있는데요. 성서학자들이 볼 때는 이것은 참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게요. 왜냐하면 유다인들 이셨거든요. 유다인 들은 약간 독특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서양인들하고는 좀 다릅니다. 그런 서양적인 모습으로 토착화된 예수님이나 성모님 얼굴이 등장하는 것은 유럽교회에서 자기네 식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묘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질적으로 예수님 모습은 지금 아랍사람들 비슷한 모습이시겠죠. 그래서 하느님의 모상을 왜 함부로 만들지 말라고 하냐면 우리의 상상력으로 그분의 모습을 투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서 투사된 모습으로 존재하시지 않고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어서 존재하십니다. 그런데 이걸 우리식으로 자꾸 표현을 하려고하니까 오히려 하느님의 존재가 축소되거나 부정적으로 왜곡되기도 하는 문제가 있어서 그분의 모습을 만들지 말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함부로 추정할 수 없고 우리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으시지만 분명히 우리의 광야여정 속에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이런 부분에 대한 인식이 분명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성서 안에서 항상 광야씬이 많이 나오거든요. 이유는 뭐냐 하면 광야 없는 인생은 불가능하죠. 인간의 실존입니다. 불안, 고통 이런 부분들은 한번 없앤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의 도전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도 성서 안에서 굉장히 많은 광야여정들을 샘플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여정을 무사하게 마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민수기가 얘기하는 것처럼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스라엘이 민수기에서 숫자나 목록들을 제시하고 이러면서 체계화 되지만 민수기 저자가 얘기하는 이스라엘의 생존은 군사력이라던가 국제정치력이라던가 전쟁에서의 승리라던가 이런 것으로 확보되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민수기가 이야기하는 비법은 뭐냐 하면 경신례, 정결, 어떻게 하면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서 이런 정결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이게 관건이라는 거예요.
끊임없이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이걸 의식 하는 게 여러 군데 다니면서 로비하고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러는 거보다도 훨씬 더 본질적인 힘임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민수기에 등장하는 여러 지루한 숫자들, 지루한 광야얘기들 이런 것들이 사실 우리들 안에서도 여전히 해당되는 삶의 모습이라는 거 숙지하시고 읽으시면 조금 지루함이 덜하시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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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녀님의 명료한 설명을 읽으니 민수기를 훨씬 쉽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닌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김을 묵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