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2장 38-45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종교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과는 자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왜 그렇게 충돌을 일으켰는가?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고 하지 않은 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모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까지 하셨느냐? 성령으로 행하신 일에 대하여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한 일인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어떠한 죄보다 심각한 것으로서, 다른 모든 죄에 대해서는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것이 성령 모독 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고민해 봐야 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성령을 모독하고 있으며 그것은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분명 신성으로서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분명히 알고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매가 나쁜 것은 열매를 맺는 나무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의 교리로 볼 때 선택받은 자가 성령을 모독할 수 있는가?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철저히 유기자들과 관련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 저들이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38절을 보시면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간단히 말하면 표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뜻입니다. 믿을만한 증거를 보여주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적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병을 고치신 일 역시 표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말씀하실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증거와 같았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일을 귀신의 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악용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표적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편으로는 그것보다 더 큰 표적, 더욱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표적 보여주시기를 구하는 것 자체가 핑계요, 오히려 이것 역시 예수님을 향한 비난의 일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거기서도 표적을 구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과는 약간 다른 어조로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16:1) 표적을 보기 원한다고 요구하고 있지만 그런 요구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표적만 보여주면 믿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뭔가 걸고넘어지려고 하는 의도 속에서 요청이 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역시 다르지 않는 의도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저들은 이미 안식일 논쟁으로 인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뭔가를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태복음 16장과 동일하게 시험하여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요청하고 있을 뿐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들의 요청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3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여기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답변하는 형태로 있지만 실상 그들만이 아니라 그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대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란 그만큼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미 그 세대가 그러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세대 중에서도 더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실상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이란 것이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마치 영적인 간음을 행하는 자들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심각할 정도로 금이 간 상태에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그 신앙을 구축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도 하셨느냐 하면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요8:39). 표현하기로는 그들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상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행하고 있느냐?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칼빈은 이 ‘음란한’이라는 말에 대하여 ‘음란하게 태어난’ 혹은 ‘사생아’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거룩한 족장들로부터 타락했다는 뜻을 가진다고 주석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아는 것이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에 태어나실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만큼 외적 지식에 있어서는 탁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을 통해 말씀하신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런 표적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할 만큼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해 볼 수 있는 것은 저들이 표적을 구한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에 대하여 악하고 음란하다고 말씀하시는가? 성경의 여러 증거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드온을 부르실 때 그는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삿6:17).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하여 노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는 구하지 않았는데도 징조를 주시되, 해시계의 해 그림자가 십도나 뒤로 물러가는, 오늘날 과학적 이해로 하자면 지구가 본래 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돌게 되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사38:7-8). 심지어 아하스의 경우에는 징조를 구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자 그 일에 대하여 책망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사7:11-13).
따라서 표적 자체를 구하는 것에 대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 하셨다 기보다는, 그들의 숨은 의도를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표적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들 앞에 보이고 있었지만 그것을 마치 표적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성령의 일이 아니라 귀신을 힘입어 행하는 일처럼 악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그런 마음을 숨기고 표적을 보여주시면 믿을 것처럼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에 대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이런 질문도 가능할 수 있는데,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가 악하고 음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숨은 의도를 아시고 악하고 음란하다고 말씀하셨다면 오늘날 표적을 구해도 되지 않느냐?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표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맞는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늘날 기록된 성경 66권을 통해 다 알리셨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계시의 종결을 말합니다.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성경 66권을 통해 자신의 모든 뜻을 다 알리시되,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및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을 기록의 형태로 남기셨습니다. 또한 이 성경으로부터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들을 추론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장 6항).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성경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구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이미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들 속에서 예수가 곧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성경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받고 있기 때문에 표적 자체가 필요치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표적을 구하는 자가 되어선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뜻을 알리신 그의 말씀, 그것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인 이 성경만을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 내용으로 오시면 적지 않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어 표적을 구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라 이미 그 세대가 그러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에 기록된 것이지만 바울은 고린도 지역의 교회에 편지할 때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고전1:22). 그만큼 유대인들은 표적에 민감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0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그러니까 표적 중의 표적, 다른 표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표적이 무엇인가 할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어서 땅 속에 있게 되는 일, 다시 말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모든 표적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의 역사들이 분명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지만, 그 모든 것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표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일한 표적이 바로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물론 저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그리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부활하신 것이 맞지만, 그들은 어떻게 그 사실을 거짓으로 바꾸었는가? 대제사장 및 장로들이 모여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군인들이 잘 때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소문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마28:12-13). 그만큼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으뜸이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으로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어떤 사건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느냐 하면 요나의 사건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지만 요나의 경우 이스라엘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니느웨 성까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나도 싫어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왜 원수와도 같은 저들에게 죄를 지적해야 하느냐? 죄를 지적하였을 때 혹시라도 회개하여 돌이키면 어떻게 하느냐?”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죄를 지적하도록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그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실 것이란 사실을 요나 선지자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야 했지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겁니다. 그리고 배가 다시스로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게 되고, 폭풍을 만나게 된 것이 요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바다에 던지지는 일이 있었던 겁니다. 바다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물고기 배 속에서 3일을 있게 하셨는데, 지금 이 사건이 무엇을 예표 하는 사건이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 하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결국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물론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였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그것 또한 중요한 사실입니다. 회개하였다는 것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이방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었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면 결코 버리시는 일은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앞서 무엇을 보여주셨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 하는 한 사건을 보여주셨습니다. 말씀도 중요하고, 그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가 아니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요나가 니느웨 성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선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요약적으로 말하자면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전하였지만(욘3:4) 그것만 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요나가 전한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다고 할 때 그들의 회개가 참된 회개라면, 그리고 그런 회개가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회개라면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그 모든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언급하는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30)고 말씀하시는데,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물고기 배 속에서 삼일 있었던 것이 표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일이 증거가 되었고, 그것을 통해 단순히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으로만 증거가 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그런 내용으로서 증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그와 같이 예수님 역시 장차 있을 죽음과 부활이 표적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표적이 되되 결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말씀하시는데, 41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쉽게 말하자면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일컫는 자들은 니느웨 성에 있었던 저들보다 훨씬 악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요나의 전도, 즉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주신 말씀을 통해서 니느웨 성에 사는 사람들은 회개를 했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은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관하여 한 마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방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설교(전도)를 통하여 회개를 했었지만, 너희는 어떤 자들이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그를 기다리는 자가 아니냐? 그 그리스도가 때가 되어 오셨고, 오셨다는 사실을 여러 방면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표적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바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런 분 앞에서는 회개하는 자로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4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남방 여왕에 관한 내용은 열왕기상 10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 보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 왔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왕상10:1). 특별히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 남방 여인에게도 구원의 은총이 주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며, 그런 차원에서 단순히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 왔다는 것 이면에는 분명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 즉 그 마음에 솔로몬을 찾아가도록 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악함을 정죄하시기 위해 비교적인 차원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남방 여왕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다가 솔로몬에 대한 명성과 그 지혜에 대하여 듣고 직접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왔다면 너희는 과연 어떤 자들이냐는 겁니다.
특히 예수님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느냐? 요나보다 더 큰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분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이 실상 무엇을 예표 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유명하지만 그 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셨던 겁니다. 직분으로 하자면 선지자보다 크신 분, 이스라엘의 왕보다 크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것입니다. 그런 분이 표적도 보이시고 말씀도 전하시는데, 너희는 어떻게 회개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방인조차 회개하고 주의 지혜를 배우는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 심지어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고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악함이 크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방인들로부터 정죄함을 받는다고까지 말씀하시는데, 유대인 입장에서 보자면 이방인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대상, 무시되고 있는 그런 대상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로부터 정죄를 받는다는 말씀까지 하고 계시니, 저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런 비교를 통해 더욱 드러내고 계시는 겁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말씀은 단지 그들에게만 말씀하셨던 내용이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를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저들이 그런 자들이 있었다는 정보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를 향한 교훈으로 주고 계신 것이란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하는 저들이, 저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런 정죄를 당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가를 다시금 돌아보셔야 합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은 아니지만, 주께서 세우신 목사를 통하여 정당한 말씀을 배우고 있다면 우선적으로 정당한 말씀 자체에 신적 권위가 부여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셔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람의 말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베뢰아 사람들처럼 한편으로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은 상고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증거 하고 있다면, 물론 사람이기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그 말씀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은,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심으신 진리의 내용과 교리들을 파괴하지 않고 잘 세우는 자로서 그 말씀을 증거 하고 있다면, 결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정당한 반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죄를 지적한다면 니느웨 백성들처럼 회개해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남방 여왕이라는 이방인조차 선한 열심을 가졌던 것처럼 그렇게 선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한 역사가 앞서지만,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우리가 선한 열심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내 탓이 아니라 하나님 탓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정당한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 은혜에 대한 정당하게 반응하도록 주께 구하면서 반응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땅한 바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저들을 정죄하고 계시는 것처럼 정죄 외에는 받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자녀 문답 교육으로 살핀 제네바 요리문답이 이런 부분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는데, 칼빈은 선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말씀을 말합니다(300). 그리고 그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사용해야 합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굳은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하늘에서 내려온 진리로써 받아 들어야 하며, 올바른 순종 안에서 이에 복종해야 하고, 참되고 온전한 열정으로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따르며 이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 넣어야 합니다.”(302)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님을 통해 그렇게 되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30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이 우리의 열심과 노력을 무익하다고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애쓰고 열심을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304). 즉 하나님께서 다 하시기 때문에 안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자로서 나도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의 말씀으로 하자면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역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안 하겠다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내 속에서부터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나도 할 것이다. 말씀 앞에서의 반응이란 이런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3절 이하 45절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일컫는 자들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경고하시는 내용인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우선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데,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귀신에게 사로잡혀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인류는 아담의 타락 이후 사탄에 매여 사는 자들로 있습니다. 사탄은 한시적이긴 하나 공중 권세를 잡고 있으며, 모든 인류는 바로 그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자를 따르며 살고 있습니다(엡2:2). 한 예로 우리가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다 이런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엡2:3).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요한일서를 통해 잘 증거 되고 있는 것처럼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입니다(요일3:8).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가? 단순히 외적인 병만 고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영적으로 병든 자를 고치며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들을 자유케 하신다는 뜻을 드러내고 계셨던 겁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봤지만 마태복음 12장 22절 이하에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단순히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인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고, 나아가 그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까지 베푸시고자 하시는 모든 내용을 담고서 행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의 성격이라고 할 만한 것도 말씀하시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베드로 사도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자들입니다(벧전5:8). 예수님께서 저들에 대하여 ‘더러운’ 귀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자신이 부정하고 더러운 본성을 지니고 있고, 그가 하는 일이 사람들을 유혹해서 영적인 더러움인 죄를 짓게 하는 것이기 때문인데(매튜 풀 주석), 바로 그런 악행을 중단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분주하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한 사람이라도 더 멸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그의 권세로서 자유케 하시는 일들이 있을 때 귀신들은 그 먹이를 되찾기 위해서 더더욱 이를 갈게 되는 일이 있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라는 말이 나오는데, 물 없는 곳으로 다닌다는 것에 대하여 칼빈은 사람들의 밖에서 거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슬픈 방랑의 길이요 거친 사막 길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의 쉼은 그렇게 물 없는 곳으로 다닐 때가 아니라 사람들 안에서 역사할 때, 그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더러운 죄를 짓도록 할 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도록 하며 하나님과 원수처럼 지내며 살도록 할 때 그것을 쉼으로 여기는 자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쫓겨난 그 집을 되찾기 위해서 다시금 찾아와 유혹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 가시적인 신앙 고백을 통하여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분명 그들은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어떤 자들이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마치 나갔던 귀신이 다른 귀신들을 데리고 들어온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비록 집이 비고 청소가 되어 있고 수리가 되어 있지만, 귀신이 나가고 난 뒤 그 안에 어떤 주인이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빈 상태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너희 마음에 주인으로 삼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너희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가? 예전보다 더 많은 귀신이 들어와 너희를 주관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결코 한번만 공격하고 안 되면 그만두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본래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자들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쫓겨난 자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쫓겨난 그 자리를 찾기 위해서 이를 가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자들, 단지 외적으로만 부르신 자들이 아니라 유효적으로 부르신 자들에 대해서는 견인의 은총까지 분명히 주십니다. 지난주 히브리서 6장의 말씀을 살펴보았지만,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가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결코 타락할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유효적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타락할 수 없기 때문에, 견인의 은총이 주어지기 때문에 사탄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그런 대상으로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쫓겨났다면 쫓겨난 그곳을 정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달려드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사탄의 권세 아래 정복 당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예수님까지 정복하고자 했던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한번 정복한 대상에 대하여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유효적으로 부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따라 선택 받은 자들은 결코 다시금 정복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안일해도 된다가 아니라,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을 때 사탄의 역사가 아예 없는,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은 어떤 면에서 미뤄두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5장 섭리에 대한 부분에 보면(5항)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여러 시험들과 그들 자신의 마음의 부패함에 일시적으로 놔두시는데, 이 이유에 대하여 그들의 이전 죄들에 대하여 벌주시거나, 그들에게 부패의 숨겨진 세력과 그들의 마음의 속임수를 발견토록 하여 그들이 겸손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탱시키고자 하나님을 보다 가깝고 지속적으로 의지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라고도 합니다. 나아가 그들로 미래의 모든 죄의 경우들을 대적하여 보다 경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의롭고도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죄조차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의롭고도 거룩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의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시험과 부패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목적을 실행하신다는 것이요, 특별히 우리의 겸손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만을 더욱 의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경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또한 사탄의 역사는 끊임없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에 따라 우리는 그 모든 일 가운데 경성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기에, 그리고 주께서 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에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그리고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의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겸비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적지 않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는 자들로 있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바로 그 은총의 결과로서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더욱 좋아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서 주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