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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지점 권 영 순 (59612824) 010-2701-7154
* 삭발
올 가을에는 유난히 낙엽 뒹구는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보험사무실 옆에는 ‘탑’미용실이 있다. 미용실 자매는 나의 우수고객이기도 하다. 서로 먹거리를 나누어 먹고 정보도 주고받으며 쌓은 정으로 진정한 이웃사촌이다.
미장원 거울 앞에 앉으면 늘 그러하듯이, 가운을 어깨에 두르고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다. 미용사는 잠시 후 울먹이는 목소리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끝났어”라는 말에 나는 감았던 눈을 지그시 떠보았다. 두 자매의 눈가에는 촉촉한 물기가 흐르고 있었다.
“내 머리통이 생각보다 잘생겼지? 예쁘네!”
오히려 내가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오버해서 말했다. 삭발한 머리통은 나이 들어 보이는 자상한 여승의 모습이었다.
그 후로 남편은 내가 투병하고 있는 대학병원을 <한양사>라고 명명하며 씁쓸한 웃음을 짓곤 했다.
* 예기치 않은 폐암 발병.
14개월 전인 작년 여름. H대학병원 주치담당 교수님의 권유로 가슴C/T를 촬영했다. 오른쪽폐에서 작은 종양이 발견됐다. 간단한 수술이려니 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마치고 조직검사를 하였다. 주어진 업무상, 고객들의 실비를 늘 청구하다보니 요즘처럼 흔한 조직검사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검사결과를 기다렸다.
수술을 하고서는 퇴원한 줄 알았는데 11층 혈종내과로 병실을 옮기고서야 심각함을 알게 되었다. 검사결과를 확인하러 간 남편은 한참 후에 돌아와서 조심스럽게 교수님의 말씀을 전한다. “폐암이다.”
갑자기 하늘이 노랗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왜? 어떻게? 나는 물론이고 남편도 담배를 안 피우고 친정집 식구들도 암환자가 한명도 없었는데? 청천벽력이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암세포가 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전이가 되었으니 ‘<원발부> 지점을 찾아야 된다‘고 한다. 폐암 원발부 지점을 찾기 위해 여러 날 동안 내 몸 구석구석까지 검사를 하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간, 췌장, 갑상선, 유방, 대장. 위내시경, 류마티스까지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해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곳에서 암은 발견이 되지 않았다.
의학계에서는 5%정도는 원발부 지점을 못 찾고 치료한다고 한다. 폐 만을 치료하는 표적치료가 아닌 무시무시한 전체 항암치료를 시작되었다.
대학병원의 11층은 머리를 깎은 스님들만 입원해 있는 병동인줄 착각했다. 분위기가 낯설고 두려웠다. 전염병도 아닌데 그동안 암환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은 “당신은 기독교 신자인데 왜 여기에 있어”하며 농담을 하곤 했다.
차츰 환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가까워지면서 나도 하루하루 병실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환자들은 한결같이 열심히 삶을 산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더욱 더 안타까웠다.
* 긴 투병생활 시작하다.
입원해서 수술, 검사, 첫 번째 지독한 항암주사를 맞고 40일 만에야 병실에서 퇴원했다. 정상세포까지 죽이며 치료하는 전체항암주사이어서 부작용이 심할 거라고 각오는 단단히 했다. 구토는 기본이고 온몸까지 쑤시고 통증이 시작되었다.
더욱 실감나는 것은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온 집안에 머리카락이 뒤범벅이고 심한탈모처럼 보기가 흉해 미리 삭발을 서둘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카락 없는 머리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여성의 상징인 풍성한 머리카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예쁜 가발을 사고 선물로 보내준 많은 모자를 골고루 써가면서 나의 기나긴 힘든 투병생활은 작년 8월 한여름부터 시작됐다.
3주마다 입원해서 항암주사를 14차례나 투여했다. 횟수가 더할수록 부작용은 더욱 더 심했다. 탈모, 어지럼증, 산모의 입덧보다 더 심한 구토, 온몸의 통증, 변비, 눈까지 침침해지며 정말 생지옥 같은 생활이었다.
2명의 자녀출산으로 제왕절개 수술과 중이염, 백내장, 비염, 유방종양 등 다양한 질병으로 수술을 해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완치가 되는 그런 질병과는 차원이 다른 지독한 병이었다. <암>이란 놈은 완치를 장담할 수 없으니, 평생 원수가 아닌 친구처럼 같이 살아야 한다고 경험자들은 말을 한다.
* 암에 대한 공포.
20여 년 전 사업실패 후, 우리가정을 이끌다시피 했던 내가 암환자가 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노후까지 3명중 1명이 암으로 사망한다는 통계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50대 중반인 내가, 차례가 됐다니?
‘왜 하필 내가?’
열심히 살았고, 긍정적으로 살았으며, 남한테 피해도 주지 않고 예쁘게 살았는데 무슨 죄가 있었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모르고 지은 죄가 있어 하나님이 형벌로 주었나하고 생각하니 한켠 부끄럽기도 했다.
가족들은 내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생각에 너무 미안해했다.
어린 소아암 환자의 순수한 미소와 천사 같은 눈빛을 보면서, 아픈 것은 죄가 아니다.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때문에. 나를 사랑하셔서 선택했을 거야 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고 위로하려고 했지만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 받아들이자! 내 친한 친구 암! 평생 동반자! 성질내지 않도록 다독거려서 같이 살아야 되는 운명적인 삶 인거야! 나도 모르는 죄의식에서 벗어나니 마음은 조금 평온해졌다.
성경책도 많이 읽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 질병도 치유해 주실 거야.....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성경 한줄, 기도 한 토막도 나오지 않았다. 담임목사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의 기도가 있었지만, 삶에 정장 매달려야하는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분명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아닌데..... 절실히 ‘살려 달라’고 안 매달리고 배짱을 부리는 걸까? 이토록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갓난아기는 보채치 않아도 엄마가 알아서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돌보아 주듯이, 지금의 자매님도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조용히 쉬는 것’이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준 천사(권사님)의 방문이 있은 후에야 조금씩 평안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은 함께 치료하던 환우들의 주검을 볼 때마다 내 자신까지 참담하고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환우들과 깊은 정을 나누지 못하고 회피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온갖 두려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미리 걱정하는 어리석음을 지닌 나약한 인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같은 병실에서 투병하던 40대 중반인 환우가 “언니! 내 소원이 뭔지 알아요?” 해맑은 미소를 뛴 그녀는 “친정엄마보다 하루만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빨리 완치하면 되지”라며 위로하지만, 내 가슴도 무너진다.
입원할 때 마다 병문안 오시는 친정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도 팔순이니까, 설마 ‘나는 엄마보다는 오래 살겠지’ 하는 마음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러나 그 젊고 예쁜 환우는 간다는 예고도 없이 며칠 후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인생무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사치였다. 삶이 허망하다.
같은 병동에 입원한 4명의 환우를 하얀 시트카버에 둘둘 말아 장례식장으로 옮기는 장면을 몇 차례 목격하니 무섭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병실에 입원하는 것조차 정말 싫어졌다.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병원에 재입원 할 생각만하면 우울하고 구토하기 시작했다.
* 삶의 삶터인 보험대리점 개설.
여상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남편과 6년 연애 끝에 사내결혼을 했다. 예쁜 남매를 키우며 사업을 시작하여 부유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명예교사 회장과, 아람단 후원회장 직도 역임했다. 30대 중반에 잘나가는 중소기업사장님의 사모님으로 70평이 넘는 2층 고급주택에서 잘 살아보기도 했다.
사업 실패 후, 오갈 데 없는 우리가족은 지인의 소개로 삼성화재대리점을 개설했다. 남편도 8월에 코드를 내고 사용인으로 등록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함께 한다.
우리부부는 매우 열심히 일했다.
사고 난 차량을 공업사에 대신 맡겨주는 서비스는 물론, 경찰서, 병원까지 찾아다니면서 ‘고객과 함께하는’ 대리점으로 성실하게 업무수행 했다.
매년 돌아오는 여름휴가는 남들만의 행사인 냥, 다녀본 적이 없다. 그 결과 ‘10년 연속 AMC회원’상을 수상하였고 ‘년도대상 특별상과 동상’을 받았다. 영업수기 또한 ‘2002년 금상’을 수상한 적이 있었다.
수년간 유지해온 억대 연봉은 우리가족의 10억이 넘는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딸과 아들도 잘 키워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었다. 나는 여고시절 내 꿈을 이루겠다며 30년 만에야 방송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을 하였고 4년 만에 졸업한 똑순이가 되었다. 내친김에 보험.재무 전문가로 더욱 발돋음 하고저 국민대학교 경영학과MBA를 마치며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금융.보험을 전공해서 덤으로 CFP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다.
나의 이런 모든 배움과 실무를 토대로 책을 쓰고 강의를 해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우리부부는 노후준비 대신, 딸이 운영하는 기획사에 투자하면서 아이돌 가수도 키우고 지상파 방송국출연도 하게 됐다. 일본을 오가며 공연을 펼치며 투자비도 조금씩 들어왔다.
아들도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자격 인증을 취득하고 강의도 하고 방송국도 나가면서 밝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활동량이 많은 남편은 지난 6.4 지방선거에 출마했었다.
이 모든 것이 나와 우리가족이 잘나서 이루어진 일이었을까?
내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예기치도 않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암 발병이라니? 투병 후 얼마 전에야 비로서, 모든 것이 나의 교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펑펑 흘리고 나니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금의 모든 상황에도 감사했다. 그리고 성숙해진 믿음생활을 시작하려고 주일예배와 성경말씀 공부도 새롭게 시작했다.
* 절실한 암 보장(로또).
남편은 6년 전, 갑상선암이 발병했다. 양쪽 호르몬을 절개하고 5년 동안 잘 관리를 해서 완치판정을 받았다. 주위에서는 우리부부가 보험 업무에 종사하니까 보상을 많이을 거라며 추측하며 수군거렸다.
우리가정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보험료 부담 때문에 적은금액을 불입하여 진단비 1천만 원과 수술비 3백만 원 그리고 실비보상을 받았다.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기왕 암 걸릴 거라면 보상이라도 넉넉하게 받았으면 살림에라도 도움이 되었을 텐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며 기 가입된 나의 증권을 살펴보았다. 내가 암에 걸릴 거라는 생각은 1%도 안하면서.....
다행히 가입된 생명보험 2건이 있어서 유지만 잘하면 되겠구나하는 마음으로 증권을 잘 정리해 두었다.
나의 암보험 구성은 진단비, 수술비, 연금, 실비, 입원일당 등. 조금 넉넉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폐암 발병 후, ‘암 로또에 당첨 되었네’ 하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첫 번째 퇴원하고 보상청구를 같은 날 해보았다. S생명, K생명, S화재 순서대로 보상금이 나왔다. 회사시스템인가보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보험을 취급하는 RC로써 우리회사가 조금 더 빨리 입금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늘 고객들의 보상을 신속하게 청구를 대신 해주는 내가, 직접 보상을 받아보니 환자에게는 보상금(돈)이 제일 위로가 되었다.
진단비는 나의 소득을 대신해 주는 역할을 하여서 1년 동안 생활비를 보태주었다. 실비는 검사와 수술 입원 등 병원비로 사용했다. 입원일당은 계속 반복해 입원을 하게 되어, 교통비와 지출이 많은 외식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보상을 직접 받아보니, 고객의 형편을 지레 고려하고 다들 힘들겠지 하는 나의 착각으로 적은 월 보험료에만 초점을 맞추고 컨설팅을 해왔던 RC로써 반성을 했다.
과연 최적의 컨설팅을 했을까?
몸이 조금만 더 회복하면 고객들에게 들려 줄 말이 많아졌다.
20년 동안 이론과 실무에서 공부한 것 보다 1년 동안 투병하면서 많은 환자와 정보를 나눈 산지식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고객들의 가입된 증권을 분석하면서 기존보험을 유지시켰다. 정액보험을 실비보상으로 리모델링하는 정도로 설계를 했었다.
질병사망과 후유장애의 적은 보상이 염려가 되었다. 빨리 몸을 회복해서 고객들의 보관. 관리 해 온 증권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봐야겠다고 몰두했다.
* 영원한 RC이고 싶다!
3년 전, 삼성화재 15주년 근속 감사패를 받았다.
그때 30주년 감사패를 받는 선배 RC님들이 너무도 멋있고 훌륭해 보였다.
나도 기어코 그 패를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1년 동안 항암치료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육체와 황폐한 정신력으로서는 도저히 고객들과 상담을 할 수가 없다.
나는 평범한 사회인(RC)이 아니라 암환자라는 사실이 제일 슬펐다.
다행히 자동차계약은 갱신이 잘되었고 장기 계속분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영업활동을 하지 못해 신계약이 부족했다.
나의 자격은 M3에서 S1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작년까지 10년 이상 유지하던 연봉 1억의 기록은 무참히 깨졌다.
그래도 감사하다. 만약 내가 할 일이 없었다면, 더 우울하고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많은 분들이 보험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어떤 일이던지 스트레스 안 받는 업종이 있을까? 되려 의문 간다.
스트레스를 주던 고객 3명은 아프다는 핑계로 과감하게 계약을 거절했다.
그 외의 고객들에게로부터 전화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그 순간 내 목소리가 씩씩하고 차분하니까 대부분의 고객들은 나의 상태를 모르고 있었다.
고객들이 그립다. 보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퉁퉁 부은 얼굴로 만날 자신이 없다.
이제 머리카락도 자라서 단발머리가 되었는데 다시 희망을 가져본다.
* 비싼 영양제를 맞는 여자.
지난 금요일에는 14번째 항암주사를 맞았다.
다행히 부작용이 적기 때문에 통원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항암주사액을 투여하고 나면 1주일 정도는 고통이 뒤따른다.
처방 세부내역과 영수증을 살펴보니 <알림타 주 500MG/V>주사액이 2백만 원이 넘는다. 약이 좋아서 비싼가보다.
나는 중증장해자로 환자부담금은 5%만 지급하는데, 그 금액도 실비에서 보상을 받아 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보험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신약이 나오는 경우 비급여가 많아서 고액의 약값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환자들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산으로 가는 환자가 많은가 보다.
병원에 대한 트라우마를 없애자.
미리 구토를 걱정하고 부작용을 생각하니까 병원 가는 것 자체가 우울하고 두렵기만 하다. 담당교수님 말씀처럼 ‘3주에 한번 씩 고급 영양제를 맞으러 간다’고 생각하자.
‘고혈압, 당뇨보다 조금 더 기분 나쁜 성인병을 치료하러 간다’고 생각하자!
완치를 향한 나의 도전에서 내 몸속에 같이 생활하는 불쌍한 친구야! 사이좋게 잘 지내 보자꾸나! 하며 안위를 삼는다.
‘암을 이긴 사람들’의 저자인 김의신박사는,
한국인 환자들은 유난히 웃지도 않고, 잘 먹지 않으며, 구역질 해대고,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할 것’과 ‘마음편이 먹을 것’을 부탁하면서, 병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며 우울하면 암에 지는 싸움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살지 묻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롭다’는 이야기다.
내가 살아할 이유를 찾아보았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 친정엄마 내 동생들, 시댁식구, 친구 금선이, 교인, 동료, 동문.
감사한 고객들이 모두 나에게 소중하듯이 나도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남아야 되기에 살아가야할 이유가 충분하다.
* 늦게나마 여유 없는 휴식을.
축령산의 가을이 시작되었다.
온 산야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에 남편과 함께 2박3일 머물면서 자연에서 얻는 햇빛, 바람소리, 물소리, 나뭇잎소리, 새소리, 다람쥐소리. 그리고 잣나무의 솔잎냄새, 흙냄새, 물 냄새와 함께하며 모든 것이 귀하고 아름다웠다. 인적이 없는 산등성이를 따라 산책하면서 잣, 밤, 도토리를 주웠다.
힘들면 돗자리 펴고 누워서 쉬다가 도시락도 먹고, 간식도 먹고, 낮잠도 자면서, 둘이서 에덴동산의 가을소풍을 즐겼다.
축령산 자연휴양림은 항암주사를 맞고 회복하기위해 3주에 한번 씩 쉬러 가는 것이다. 서울에서 1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여서 그 곳을 다니게 된다.
작년가을, 겨울, 올해 봄, 여름, 또다시 가을이 오니 벌써 1년이나 지났다.
건강할 때 가끔 이런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프니까 누릴 수 있는 여유 아닌 여유가 매우 아쉬웠다. 늦게나마 온 휴식시간, 그래도 행복했다.
생(生)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소중한 명령(命令), 그래서 생명(生命)이라고 한다.
너무도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모든 환우들이 잘 극복했으면 하곤 두 손 모아 기도드리며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한다.
남편의 글입니다
* 낙엽 뒹구는 소리가......
을씨년스런 가을바람에 낙엽이 도로 위를 나뒹군다.
작년 가을엔 듣지 못했던 낙엽 뒹구는 소리가 귀전에 연신 다가온다. 악몽 같았던 지난 해 7월 여름,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현실이 내게 찾아왔다.
무시무시한 아내의 폐암 발병이다. 아내의 투병시간이 해를 넘겨 1년 4개월째다. 독한 항암주사를 14차례나 투여하고 회복하기위해 오늘도 몸부림친다.
* 바닥이 흔들리고 하늘이 노랗다?
아내의 수술을 집도한 외과교수는 “자녀들이 있느냐?”하면서 “폐암 4기다”라는 청천벽력같은 호령이다. 정신은 혼비백산한 상태에 귀를 의심하며 눈을 뜨기가 싫었다.
아내가 벌서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는 억울함에 만감이 교차했다. 고된 역경을 헤치고 30년밖에 부부로 살지 않았는데? 50대 중반의 젊은 나이의 아내와 벌써 세상과 이별해야 된다는 생각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외과교수는 내가 측은하기나 하는지 “폐암 3기 말이다”며 위로하듯 기수를 조금 깎아준다. 순간, 3기말이라는 말에 희망을 가졌다.
3기 말이나 4기나 똑같은 중증인데도 우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심정은 보호자가 아니면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장성한 딸과 아들에게도 수술결과를 바로 알리지 못하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들려줬다.
* 지독한 투병생활을 시작하다.
아내는 폐에서 작은 종양을 떼어내고 본격적인 항암치료를 받기위해 혈종내과로 입원실을 옮겼다. 여자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삭발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카락 없는 머리를 본단다. 내 마음이 찢어지는 데 아내의 마음은 오죽할까. 너무 안쓰럽다.
담당교수께 회복가능성을 6개월 동안 물었으나 항암주사액만 투여하고 신통한 대답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음은 초초하고 두려워진다. 6개월이 지난 후에야 돌아온 대답은 “암 발부지점을 모르니 결과를 대답하기 어렵다”는 저승사자와 같은 냉랭함이었다.
“의학계에서는 보통 5% 정도는 암 발부지점을 모르고 치료를 한다. 생존여부는 하느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는 야속한 대답뿐이었다.
더 이상 담당교수께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렵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고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수 없이 남의 일로만 들었던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나에게 점점 밀려왔다. 암 발병 1년이 지난 후에야 담당교수는 “당뇨병처럼 평생을 같이 갈 준비를 해라. 좋은 약들이 많이 있으니 치료하자”는 말씀에 ’아 이제는 살겠구나!‘하는 희망이 싹 텃다.
사업실패 후 20년 동안 무진 어려움을 겪어내고 열심히 살았던 그토록 강인한 아내는 투약할 때마다 고통스러워한다.
“항암주사를 못 맞겠다”며 마음약한 소리를 내뱉는다.
나는 “약물을 투여할 때가 좋을 때다.
주사를 못 맞게 될 때는 가망이 없을 때다”며 내심 두려웠지만 용기를 낼 것을 독려한다. 아내가 암에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했다.
* 미래에 대한 불안감.
우리부부는 “정년이 없는 보험 일을 80세까지는 할 것이다“고 장담하곤 했다.
예기치 않은 아내의 발병으로 60세도 안 돼 낙오해 야 된다는 생각에 또한 미래가 암담했다. 우리가족은 평범하지만은 않은 많은 일에 도전했다. 아내는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딸은 아이돌가수를 키우며 기획사를 운영하고 나는 지난 6.4지방선거에 출마했었다.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 남들이 하지 않는 특별한 일들을 도전하면서 사는 과정이라 더욱 심난했다. 아내는 고단한 삶을 겪어내면서도 평생 남을 험담하고 짜증내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도대체 어떤 원인으로 암에 걸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병실에서 아내를 간호하며 암 환자들은 유심히 살펴본다. 환자들의 마음씨가 대부분 착하고 부지런하게 생활했던 사람들이다. 혼자서 발병원인을 곰곰이 진단해 본다.
첫째, 암은 누구나 발병할 수 있다. 다만 운이 없는 사람이 걸린다. 둘째, 휴식 없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온다.
* 뒤늦게야 찾아 온 휴식과 진로.
아내와 나는 사업 실패 후 보험 업무를 20년 동안 휴일 없이 일했었다.
여상을 졸업한 아내는 못 다한 공부를 하겠다며 50세 늦깎이에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암 발병은 업무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합작품으로 이루어진 얼룩진 상처다.
발병 후에야, 1개월에 5일 정도는 휴양림을 찾는다. 건강할 때는 산을 찾을 엄두조차 못 냈던 귀한시간을 건강을 잃고서야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산을 찾는 미련한 곰탱이처럼.
20년 동안 삼성화재대리점을 운영하고 최선을 다했던 아내가 발병 1년 만에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큰 거래처들이 빠져나가고 10여년 동안 달성했던 연 소득 1억 원의 소득액이 현저히 떨어진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모진치료를 감내하느라 영업활동을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아내가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잔소리를 한다.
사업실패 후 우리가족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삼성화재. 이제는 당신이 메인이 되고 자기가 서포터가 되겠단다. 보디가드 역할만 해왔던 내가 동요된다.
60세 나이에 딱히 일할 수 있는 직종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투자비용 없는 보험대리점 업무가 최적이라는 사실에 변함없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20년 동안 길들여진 결과다.
지점장님도 매출이 떨어졌다고 닦달하기보다는 건강을 챙기라고 우선한다. 그는 회사와 가족을 위하는 오너같은 마인드다. 상인의 현실감감을 갖추고 전쟁터에 나서야하긴 하는 데, 용기가 선뜻 나지 않는다.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 배가 덜 고픈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