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양규
"언제 제대할 수 있소! 빨리 군복 벗고 회사에 입사 하시요".
군복 입고 전방에 있는 것 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요.
슬리퍼 질질 끌면서, 전라도 사투리로....
친구 소개로 이렇게 인연을 맺었던 ㅇㅇ그룹 회장이 몇 일 전 하늘 나라로 가셨다.
그룹이 IMF로 부도가 나고,풍지 박살이 났다.
국가의 신용도가 떨어지니, 외채 상환 압력 때문에 기업들이 연쇄 부도였다.
빚쟁이들과 은행의 압류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뇌졸증으로 고생하면서도 부동산 개발 사업에 전념하셨던 그 분이 휠체어 생활을 마감하고 요양원에 가셨다가 영면하셨다.
결재 들어가면 건설쟁이 들이 들고 다니는 삼각자로 내 머리를
때리며 자기를 김일성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면 밥은 먹고 살 것이라 던, 그 였고, '흐르는 땅이 돈이 된다'는 오묘한 부동산 개발 철학을 가지고 있던 그 분이었다.
짜장면과 실 붕어 시레기 찜을 좋아하고, 음식 남기는 것을 싫어했지만,남을 접대를 할 때는 최고의 식단의 식당을 이용했다.
논현동 언덕 배기 땅을 싸게 사서 개발하고,
서초동 낮은 물 고인 땅을 개발하여,취득한 이익금으로
대한중석을 인수하고, 포스코 켐을 인수하여 사세를 키운 다음
27개 기업과 수개의 상장회사, 새한종금등 금융회사를 연달아 인수하여,30대 기업 집단 그룹으로 성장 하다가, IMF 때 그룹이 무너지고,
대한중석은 대구텍으로, 거평화학은 동양제철화학으로,
기타 회사들은 은행관리로 27개 회사의 주인이 바뀌고, 회사는 뿔뿔히 흩어졌다.
그는 이발소 머리 감겨주는 직업을 시작으로, 돈벌이에 나섰고,
어린 시절 서울에 와 독학으로 세무사 자격증을 땄고, 기업에서 직장생활과 자영업으로 무역업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남산에 올라, 밤의 야경을 보고
'나는 저 많은 집 중에 내 집 한 채 없이 가난하는냐! 죽어 버리자'고,
남산을 내려와 죽어 버릴려고, 광화문 큰 거리를 가로질러 차에 치어 죽을려고 했으나,
명이 길어서 인지 죽어지지 않더라는 과거담도 술자리에서 가끔 하셨던....
서민적이고, 소탈하고, 베짱이 크고, 추진력이 강해
다시 일어서 주택 사업으로 성공했지만
경영관리에 실패하여 결국은 많은 재산을 은행에 헌납했다.
군에서 총 질 하는 것 밖에 몰랐던 나에게 경제와 경영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하다.
노조와의 노무 업무인 총무 업무를 시작으로,
군화 만드는 가죽 사러 다니는 구매,판매 영업 활동과
아파트 분양, 제조업에서 생산 활동,
대표이사로서의 경영 활동, 그리고 그룹의 비서실 기획 활동,
그리고 회사의 인수 합병 업무, 부도 후 기업 회생,
처벌 받는 일까지 기업의 흥망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준 은인이라 할 수 있다.
술은 빈 속에 한 잔해야 기분이 좋아진다며, 공복 술을 좋아 했고,
비서와 나와 셋이서 밤세 진토닉을 두 병을 마시고, 그분의 댁 앞에서 쓰러져 이마를 다쳐 놓고는 아침에 나에게 전화하여,
"장사장! 너가 어제 내 머리 받아버렸지!'하며
농담했던 멋진 분이셨다.
블 알 두 개 차고 서울 올라 왔으니 그 많은 재산(10조원) 다 날려도
나는 본전이라는 그의 명언이 기억 난다.
상가에 들려, 머리가 백발이 되신 사모님을 뵈니
회사에서 고생하면서 보좌했던, 그리고 옥바라지 했던,
기억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부디 영면 하소서....
흥보는 박씨 집안의 양반이었으나 돈이 없어 죄인의 매를 대신 맞아주고 돈을 벌어와 자식들을 먹였다는 데,
뼈가 부서 지도록 정직하게 일하여 번 돈이나, 대신 매 맞아
주고 번 돈이나 도둑질하여 번 돈은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돈에 얽매이다 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
오천은 말한다.
我有三寶,是心肉骨,(나에게 세가지 보물이 있으니,마음과 살과 뼈이다)라고,맹자는 "사람들이 개나 닭이 도망가면 찾을 줄 알지만 제 마음을 잃고는 찾을 줄 모른다" 라고 했고,'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라든가,재물을 소중하게 여기되 남의 재물울 탐하지 말라 하였다.
친구들! 돈보다 건강 챙기시게, 죽으면 모두 빈손으로 가는데....사랑해! 한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