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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판관기 16장-21장
판관 16,1-3 삼손과 가자 성문
“가자 사람들은 ‘삼손이 여기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에워싼 다음, 밤새도록 성문에 숨어 그를 기다렸다. 그들은 ‘내일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죽이자.’ 하면서 밤새도록 가만히 있었다”(2).
삼손은 또 다시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 죄의 늪에서 헤매게 된다. 삼손은 가자에 어떤 일로 갔다가 매춘부의 유혹을 받고 그녀와 동침하였다. 삼손의 이러한 행위는 분명히 주님의 뜻을 어기는 죄악이며 특히 이스라엘의 판관 위치에 있는 자로서는 도저히 취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이스라엘 판관의 일반적 풍조가 매우 문란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러한 죄악된 습성은 더 자라기 전에 근절되어야 마땅하며, 그러지 못할 경우 필경 엄청난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는 삼손의 경우에서 잘 입증되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삼손의 출현으로 삼손을 얼마나 두려운 존재로 여겼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자 사람들은 삼손의 출현 자체를 거리낌과 위해(危害)로 여겨 어떻게 해서든지 삼손을 죽이려고 했다. 곧 필리스티아인들이 성문 입구에 복병을 배치하고 또한 삼손을 감시하기 위해 기생집 부근에 파수꾼을 파견하였다. 필리스티아 병사들은 삼손이 있는 기생집을 에워싸며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새벽을 기다렸다. 그들은 삼손이 두려웠기 때문에 정면대결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기습 공격할수 있는 기회만을 노렸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삼손이 성문을 나설 때 뒤에서 기습 공격을 하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그들의 행동을 미리 알고 문을 부서 놓고 헤브론 맞은 편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판관 16,4-22 삼손과 들릴라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 삼손은 소렉 골짜기에 사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들릴라였다”(4).
가자에서 기생집에 들렀다가 큰 변을 당할뻔 했던 삼손(1-3절)은 이처럼 다시 육신의 정욕에 빠져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다'는 말은 삼손이 들릴라와 합법적인 결혼을 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추측컨대 들릴라의 신분은 기생이거나 적어도 그다지 도덕적인 여인은 아닌 것 같다. 한편 본문을 통해서는 들릴라가 필리스티아 여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들릴라'라는 이름이 '음탕한' 또는 '연약한'이란 뜻의 셈어이고 그녀의 거주지가 삼손의 고향인 초르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렉 골짜기인 것으로 보아 유다 여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당시 필리스티아 치하에서 유대인과 이방 인간의 통혼이 횡행하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들릴라는 필리스티아 사람과 결혼한 여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그녀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던 것(5절)으로 보아 충분히 타당한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소렉 골짜기는 '좋은 포도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서남쪽 약 21Km지점에서 지중 해변의 서북 방향으로 약 32Km나 뻗어 있는 골짜기이다. 오늘날 ‘와디 에스 사랄’로 불리우고 있는데 그 부근에는 초르아, 팀나, 레히 같은 성읍이 위치해 있다.
삼손을 향한 들릴라의 유혹을 유도한 필리스티아 사람의 제후들이 있다. 여기서 '제후들'이라 함은 3,3에 언급된 것처럼 필리스티아의 주요 다섯 도시인 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가드, 에그론의 다섯 제후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필리스티아족이 삼손의 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리스티아의 제후들은 삼손의 초자연적인 힘이 당시의 이방인들이 지니고 다니던 호신패(護身牌)나 부적(符籍)과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필리스티아 제후들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들릴라를 설득하고 은 일천 일백 세겔로 모종의 계약을 체결했다. 일반적으로 은 한 세겔(Shekel)은 일반 노동자의 4일간의 품삯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들릴라에게 있어서 은 일천 일백은 그녀가 십 년동안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한다 해도 모으기 힘든 엄청난 액수이다. 들릴라는 이와 같이 엄청난 재물에 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경우에 당할 보복이 두려워 어떻게든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려고 애쓴다(6-17절).
들릴라는 삼손에게 직접 묻는다. “그리하여 들릴라가 삼손에게 물었다. ‘당신의 그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어떻게 하면 당신을 묶어서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지 말해 주세요.’ 삼손이 그 여자에게 대답하였다. ‘마르지 않은 싱싱한 줄 일곱 개로 묶으면, 내가 약해져서 여느 사람처럼 된다오”(6-7). “삼손이 그 여자에게 대답하였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밧줄로 묶기만 하면, 내가 약해져서 여느 사람처럼 된다오”(11).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여전히 나를 놀리고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군요. 무엇으로 묶으면 되는지 말해 주세요.” 삼손이 그 여자에게 대답하였다. ’내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 날실로 땋아 말뚝에 매고 벽에 박아 놓으면, 내가 약해져서 여느 사람처럼 된다오”(13).
이처럼 삼손은 세번씩 거짓말을 하면서 그녀의 질문에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회피했다(7, 11, 13절). 그리고 또 삼손은 들릴라의 질문이 그 당시 필리스티아인들과 같이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임을 눈치채고 그럴듯한 미신적인 투로 대답을 한다.
애초에 삼손은 들릴라의 계획적인 질문을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그도 역시 농담로 답변하였다(7절).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결박 사건으로 미루어(8, 9절) 삼손은 여인의 간청속에 필리스티아인들의 계교가 담겨 있음을 충분히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들릴라의 질문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정욕에 빠져 삼손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유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아 들릴라는 끈질기게 유혹의 손길을 뻗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세번째 대답은 이전의 두 대답에 비해 더욱 사실에 가까와졌다. 즉 삼손은 나지르인의 특징이자 자신의 힘의 근원인 머리털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손에게 세 번씩이나 속은 들릴라는 이제 최후로 사랑을 빙자한 간책(奸策)을 동원한다. 눈물과 사랑에 호소하는 들릴라의 집요한 유혹으로 말미암아 이제 삼손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16절). 아무튼 이상으로도 우리는 삼손이 얼마나 들릴라에게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삼손은 자기 속을 다 털어놓고 말았다. ‘내 머리는 면도칼을 대어 본 적이 없소. 나는 모태에서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기 때문이오. 내 머리털을 깎아 버리면 내 힘이 빠져나가 버릴 것이오. 그러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처럼 된다오”(17).
결국 삼손은 나지르인으로서 주님의 게명을 끝까지 고수하기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욕정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즉 삼손은 사자를 찢어 죽일 만큼 강하였으나 사랑의 유혹에는 약했고 일천명의 필리스티아인들을 당나귀 턱뼈로 죽일 수 있었으나 사랑의 올무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들릴라가 말하였다. ‘삼손, 필리스티아인들이 당신을 잡으러 와요.’ 삼손은 잠에서 깨어나, ‘지난번처럼 밖으로 나가 몸을 빼낼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20). 주님께서 이미 삼손 자신을 떠나신 줄 몰랐다. 구약 성경에서 이보다 슬픈 장면을 묘사한 구절은 없다. 민수 14,40-45에는 이와 유사하게 모세가 자기 민족에게 이르기를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지 않으니, 너희가 적에게 패배하지 않으려거든 올라가지 마라”(42절)고 한 장면이 나온다. 아무튼 나지르인의 상징인 머리털을 깎겨 버린 삼손은 주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주님의 권능도 더 이상 그에게 머물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위기에 처한 삼손은 예전의 힘을 과시해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기력해진 자신과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이방 대적들의 능욕거리로 전락한 스스로를 발견하고 절망과 회한 가운데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절망케 만든 것은 주님의 손길이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승리자가 패한 자에게 이같이 잔인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민수 16,14; 2열왕 25,7). 유다의 마지막 왕 치드키야도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잡혔을 때 두 눈을 뽑히우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일이 있다(2열왕 25,7). 한편으로 삼손이 당한 이런 형벌은 그가 눈으로 여인을 '보고서는' 죄악에 빠진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4,1; 16,1). 본래 조그마한 맷돌은 가정에서 여인들이 돌리었다. 그러나 가축을 사용하여야만 돌릴 수 있는 정도의 큰 맷돌을 돌리는 일은 대개 노예가 맡아 하였는데 이는 노예의 활동 중에서도 가장 고된 일로서 천히 여기던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형벌은 로마와 헬라 시대에 유행하였다.
“그런데 그의 깎인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22). '시작하다'라는 단어는 이미 13,5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판관기 편집자는 이 단어를 통하여 삼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또 눈을 잃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중에 삼손이 서서히 영의 눈을 뜨기 시작하였음도 암시해 주고 있다.
판관 16,23-31 삼손의 복수와 죽음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자신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물을 바치며 한 곳에 모였다. 다곤은 필리스티아의 주신(主神)으로서 '날씨의 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곡물의 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명칭은 곡물을 뜻하는 '다간'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중세 율법학자들은 가자(Gaza) 지역이 해안 지방인 것으로 보아 다곤은 '바다의 신'이며 그 명칭은 물고기를 뜻하는 '다그'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성경학자도 있다. 그러나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자기들의 토지를 황폐화시킨 삼손(15,4.5)을 다곤 신이 자기들의 손에 붙였다고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곤은 곡물 신임이 분명하다.
필리스타이 사람들은 다곤 축제에 삼손을 끌어다가 제주를 부리게 하였다. 앞을 볼 수 없는 삼손은 그들에게 재주를 부렸다. 힘이 없이 보이는 삼손에게 재주란 춤을 추게 하였던 것이다. 삼손이 춤을 추다가 기둥 사이에 세워지게 된 것은 그에게 약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거나 아니면 필리스티아인들이 거기서 삼손을 더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삼손은 자기 손을 붙들어 주는 소년에게 부탁하였다. ‘이 집을 버티고 있는 기둥들을 만질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다오. 거기에 좀 기대야겠다”(26). 삼손은 이전부터 이 집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는 잠간의 휴식 시간을 통해 옆에 있던 소년으로 하여금 그 건물 전체 또는 지붕을 바치고 있는 기둥을 찾아서 그것에 의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당시 그 건물의 구조를 대충 묘사해 보임으로써 삼손이 행한 엄청난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즉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옥의 형태는 대개 앞쪽에 넓은 마당이 있고 단층의 가옥일 때는 거실 위에 평평한 지붕이 있다. 그리고 2층 이상의 가옥일 때는 거실은 2층에, 아래층은 하인들의 방과 창고로 되어 있다. 반면 그보다 더 큰 회당의 경우에는 지붕이 넓어서 3천명 이상이 올라갈 수도 있었으며 지붕은 대개 목재로 된 두 개의 버팀대로 받쳐져 있었다. 따라서 이 버팀대를 빼버릴 경우에 지붕의 가운데 부분은 파괴되어 위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 삼손이 단번에 수많은 필리스티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었던 것(29, 30절)도 바로 그같은 가옥 구조 덕분이었다.
“그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 하느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저에게 다시 힘을 주십시오. 하느님, 이 한 번으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저의 두 눈에 대한 복수를 하게 해 주십시오”(28).
삼손은 목말라 물을 주님께 청했던 것처럼 '엔코레'(15,19)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그때의 심정으로 다시 한번 주님께 부르짖었다. 삼손의 기도는 ‘주 하느님’(아도나이 야훼), ‘기억해주소’ 다시 힘을 주소서‘라는 간절함이 있다.
그리고 ‘저의 두 눈에 대한 복수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이러한 삼손의 기도는 마치 자신을 불구로 만든 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삼손의 기도는 자신의 두 눈을 위해서 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고통을 준 원수들인 필리스티아 사람들에 대하여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삼손의 민족적 정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삼손은 이처럼 다시 주님께서 주신 완력으로 그 건물의 버팀대를 두 팔로 하나씩 끌어 안고 밀기 시작했다. 기도 후에 잇따른 이러한 즉각적인 행동 개시는 확신에 찬 믿음의 발로이다. 자기 한 몸을 던져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는 이러한 삼손의 살신 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은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에스 4,16) 라고 말한 에스테르의 정신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또 이러한 죽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이 된다. 한편 이와 관련 우리는 삼손의 죽음을 자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전사(戰死)였다. 즉 삼손은 최후의 장렬한 죽음으로써 필리스티아의 신 다곤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주님 주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 집안이 모두 내려와 그의 주검을 들고 올라가서, 초르아와 에스타올 사이에 있는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무덤에 장사 지냈다. 그는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31). 삼손은 독자(獨子)였다(13,2, 3). 때문에 여기서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라 함은 이스라엘 동포나 삼손의 부족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고대에는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의 왕이나 지도자가 죽은 뒤 그 시신을 처치하는 태도나 방법에 따라 생전의 업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손을 당대의 지도자로 예우를 다하기 위하여 가자(Gaza)의 무너진 필리스티아 신전으로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갔음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인들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무너진 선전에서 필리스티아인들의 시신들과 섞여 있는 삼손의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당시 그 주변의 필리스티아인들은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모두 도망가 버린 것 같다.
삼손은 비록 시력을 잃고 마지막 생을 장렬히 마감하였지만 분명히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판관이었기에 20년간 일했다는 것을 기록해 놓았다. 이상으로 파란 만장(波瀾萬丈)한 삼손의 생애는 모두 끝난다.
판관 17,1-12 미카의 신당
판관기 17-21장은 단과 벤야민에 관한 부록 기록이다. 이 부록은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 임금이 없었다”(17,6)라는 해설이 반복된다. 이런 표현은 편집자가 이 이야기를 무정부 상태의 예로 소개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앞에서 나온 판관들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주님의 영’이 군사 지도자를 세우지 않고, 이방인 압제자가 전쟁의 대상도 아니다. 대신 평화롭게 살언 라이스 사람들이 학살당하고(17-18장) 벤야민 자손들에게 대항하여 형제를 살해하는 전쟁이 소개된다(19-21장).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미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어머니가 은 천백 세켈을 잃어버리신 일이 있지요? 그때에 저주를 하셨는데, 제가 듣는 데에서도 그리하셨습니다. 그 은이 여기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가져갔습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가 “내 아들은 주님께 복을 받아라.” 하고 말하였다”(1-2).
부록은 에프라임 산악지방에 사는,나중에 미카라고 불리는 미카여후(‘누가 주님과 같으랴’)라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되는데(17,5) 과거에 행한 도둑질과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중간부터 소개된다. 이 이야기의 초기 형태에는 사건 내용 전체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미카는 자신의 ‘도둑질을 자백하고 많은 양의 은(천백 세켈,1세겔은 11그램)을 돌려준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신"(18,24; 18,27 참조)으로 묘사되는 야훼의 조각 신상과 주조 신상을 만든다. 왕정제도 이전에 존재하던 무정부 상태에 대한 편집자들의 언급(17,6)을 제외하고는,이 이야기나 신상과 관련된 다음 사건들 안에서 이 신상에 대한 어떤 반감도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 신앙의 어두운 기원을 들여다보게 된다.
“미카라는 이 사람에게는 신당이 하나 있었다. 그는 에폿과 수호신들을 만들고, 한 아들에게 직무를 맡겨 자기의 사제로 삼았다”(5).
미카의 신당은 주님의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실로(여호 18,1; 1사무 4,3.4)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프라임 산지에 있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실로가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그리고 미카가 주님의 성소 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파행적으로 개인적인 신당을 소지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문란했던가를 입증해 준다. '에폿'은 금실,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로 짜 어깨에 걸치는 의복으로 대제사장이 입는 예복이다(탈출 28,6-8). 그런데 이 에폿이 우상처럼 숭배된 것은 기드온 때이다(판관 8,27).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서 전리품으로 취한 모든 금으로써 에봇을 만들어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기념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기드온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섬겼던 것이다(판관8,27). 본문에서 미카가 다시 에폿을 만들어 우상 숭배에 사용한 것도 아마 그 같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호신들(드라빔)‘은 가정의 수호신 상으로서 고대로부터 근동 지방의 각 가정에서 숭배되던 우상이었다(창세 31,19; 1사무 19,13 ;2열왕 23,24). 드라빔은 미카가 세운 제사장이 점을 치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 같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제도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으로서 레위 지파 아론의 자손들이 그 직분을 세습토록 되어있다(탈출 28,1). 그런데도 에프라임 사람 미카가 이처럼 독단적으로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은 곧 주님에 대하여 월권(越權) 행위를 저지른 것일 뿐 아니라 죽어 마땅한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도 우리는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 사회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유다 땅 베들레헴에 유다 씨족의 한 젊은이가 있었다. 레위인인 그는 그곳에서 나그네살이하고 있었다”(7).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레위인들에게는 여섯 도피성과 40여개의 성읍을 각 지파에서 떼어 주도록 되어 있다(민수 35,6; 수 21,1). 그러나 판관기 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무질서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이 제대로 시행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본래 유다 지파의 땅에 살고 있던 이 레위인 젊은이도 자신이 거할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하여 이곳 저곳으로 방랑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서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고 생계의 방도를 찾기에만 급급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율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시대에는 주님의 사람들 역시 어렵게 생활하였던 것이다.
“미카가 그에게 말하였다. “나와 함께 살면서 나에게 아버지와 사제가 되어 주시오. 일 년에 은 열 세켈과 옷가지와 양식을 드리겠소”(10).
일정한 거처 없이 생계에 곤란을 느꼈던 이 젊은이에게 해마다 일정한 봉급이 주어진다는 것은 매우 만족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돈으로 성직자를 고용하거나 고용되는 일은 물질 만능적인 타락한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시대를 막론하고 오직 주님의 일에 전념하는 성직자들은 보수보다 일 자체에 관심과 기쁨과 보람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비록 보수가 적더라도 그 일이 자신에게 맡겨진 주님의 사명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해야한다. 여기 레위 젊은이는 그러한 사명감과는 상관없이 보수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자 미카는 ‘레위인이 내 사제가 되었으니, 주님께서 틀림없이 나에게 잘해 주실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다”(13). 미카는 레위인 사제를 두고 있으니 주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리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미카의 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주님을 가나안의 우상과 동일 선상에서 미신적인 대상으로 섬겼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미카는 파행적인 방법으로 세운 레위인을 합법적인 제사장으로 여겼을 것이다. 비록 아론의 자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가 있다 할지라도(탈출 28,1;민수 17장) 미카는 레위인이면 모두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레위인을 통하여 미카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받은 저주(2절)가 자기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께서 자기 가정을 번영케 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즉 미카에게 있어서 주님은 드라빔과 같은 일개 가정의 수호신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주님에 대한 의식이 우상 숭배로 인한 혼합주의에 의하여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
판관 18,1-10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단 지파는 그때까지도 이스라엘의 지파들 가운데에서 상속지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바로 그 시대에 자기들이 살 곳을 찾고 있었다”(1).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라는 말은 17,6에 이어 판관기 편집자는 여기서 또다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 간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앞서 17,6에서는 개개인의 종교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했었다. 반면 여기서는 자기 땅을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밀려나는 약한 지파를 왕정제도에 의해 강대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온전케 보존 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본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 생존 시에 땅을 분배 받았었다(여호 19,40-46). 그러나 가나안 정착 초기에 분배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모리 족에 의해 쫓겨난 타 지파의 땅에 분산 거주하거나 새로운 정착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1,34). 단이 분배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유다 지파처럼 주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암시했었다. 그런데 1절에서는 그 이유를 왕이 없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따라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본서 편집자의 주석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견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손의 고향이자(13,2-5) 단 지파의 땅이던 초르아와 에스타올(여호 19,41)은 유다 지파와 단 지파의 경계 지역이다. 이 중 초르아는 예루살렘 동쪽 약 6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며 에스타올은 초르아의 동북쪽 약2.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본래 이 초르아와 에스타올은 유다 지파의 땅이었는데(여호 15,33) 훗날 땅을 재조정하면서 단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단 지파는 이곳에 안주(安住)치 못하고 많은 수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주하였는데(11절) 이는 아모리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단 지파는 그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땅을 찾기 위해 그들의 씨족 가운데서 용맹한 다섯 사람을 미리 정탐꾼으로 파견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아마도 단 지파는 이러한 준비를 하면서 마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재현하는 듯한 꿈에 젖었는지도 모른다(여호 2,1). 하지만 약속의 유업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자들이 신개척지를 얻는다 하여 거기서 신실한 계약 백성의 모습을 존속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으로 남겨질 수 밖에 없다.
정탐꾼들은 초르아와 에스타올에서 북쪽으로 가던 도중 에프라임 산지에 있는 미카의 신당(17,1)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레위 젊은이의 음성을 듣고 발을 멈추게 되었다. 레위 젊은이는 자신이 삯을 받고서 제사장으로 고용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종교인들이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즉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주님께로부터 세우심을 받는 성직(聖職)인데도 불구하고 레위 젊은이는 이에 대하여 천박한 직업 의식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정탐꾼들은 레위 젊은이에게 앞날에 대한 예견을 물어본다. “그 사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평안히 가시오. 그대들이 가는 길은 바로 주님 앞에 펼쳐져 있소”(6).
단 사람들과 달리 이 레위 젊은이는 '주님'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간접적이나마 단 사람들에게 자신이 주님께 신탁을 구할 자격이 있는 합법적인 제사장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그 길이 주님 앞에 있다'는 말은 주님께서 그 길을 주장하고 계시니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 다섯 사람은 길을 떠나 라이스에 다다랐다. 그들은 그곳 백성이 시돈인들의 방식으로 태평스럽게 사는 모습을 보았다. 조용하고 태평하게 사는 그들의 땅에는, 무슨 일로 남을 부끄럽게 만드는 권세가도 없었다. 그들은 시돈인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을뿐더러 누구와도 접촉이 없었다”(7).
라이스 또는 레센(여호 19,47)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오늘날의 '텔 엘 카디'(Tell el Qadi)에 해당된다. 필리스티아 최북단에 위치한 이곳은 헬르몬 산에 가려 아람과 단절되어 있고, 레바논 지역에 의해서 페니키아와도 단절되어 있어서 외침(外侵)을 받을 염려가 거의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 그리고 요르단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하여 용수(用水) 또한 충분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단 지파의 정착지로서는 안성마춤이었다. 더욱이 원주민들은 이러한 천연적인 조건에 타성이 젖어 외침에 대해 무방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빈약했으므로 단 지파가 정복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 동기는 여호수아와 칼렙이 제시한 가나안 정벌의 신앙적 동기(민수 14,6-9)와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일단 외형적으로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 땅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분은 태평하게 사는 백성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쪽으로 드넓은 그 땅을 정녕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세상에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10).
일반적인 성전(聖戰)의 구호에서는 야훼의 명칭을 '주님'(여호 2,24;6,2;10,8;1사무 7,8)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단 사람들은 '엘로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레위 젊은이에게 신탁을 구한 것과 관계 있을 것이다. 따라서 10절에 기록된 성전 구호는 단순히 형식만 따랐을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의 성전 구호와 비길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 지파의 전쟁이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욕심을 쫓아 행하는 전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저버리고(11절) 심지어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0, 31절) 마치 주님의 성전(聖戰)을 수행하고 있는 양 행동하였던 것이다.
판관 18,11-31 단 지파의 이주
“단 씨족 가운데에서 육백 명이 무장하고 초르아와 에스타올을 떠났다”(11). 단 지파 육백 명은 병기를 가지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장정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로서 이들 앞에 가도록 되어 있었다(21절). 따라서 현재 라이스 정복 길에 나선 단 지파의 총 인원은 어림잡아 이, 삼천명 정도였던 것 같다. 이와 같이 단 지파의 인구 수가 과거 장정만 6만 여명가량(민수 1,39;26,43)에서 이토록 현저히 줄어든 것은 아마 그동안 아모리 족과 필리스티아 족들의 압박에 의해 인원이 크게 축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이는 아직 초르아나 에스타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수는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유다 땅에 있는 키르얏 여아림으로 올라가서 진을 쳤다. 그리하여 그곳을 오늘날까지 ‘단의 진영’이라고 하는데, 그곳은 키르얏 여아림 서쪽에 있다”(12).
단 지파가 라이스를 향하여 북쪽으로 길을 떠난 뒤 처음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머문 곳은 예루살렘에서 몇 시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키르얏 여야임'(Kirjath-jearim)이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도로상에서 약 15km 떨어진 지점이다. 일찍이 이곳 키르얏 여야임은 교활한 간계로 여호수아와 동맹을 맺어 멸망을 피했던 기브온족의 네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여호 9,17). 이 지역은 단 지파에 의해 '마하네단’, 즉 '단의 장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는데 초르아와 에스타올 사이 유다 지경 내에 위치한 이곳은 삼손이 처음 주님의 영이 그를 움직에게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13,25). 단 지파는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내 라이스 정복 길에 나선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단의 사람들은 미카의 집으로 갔다. 다섯 사람의 정탐꾼들은 레위 젊은이를 잘 설득하여 동료들이 있는 문 밖으로 내보내어 함께 있게 하고 신당 안으로 들어갔다. 단 자손들은 미카의 우상을 강탈하기 위해 600명의 군사로 삼엄한 경계를 폈음이 분명하다.
단 지파의 사람들은 미카의 집에 들어가 조각신상과 에폿과 수호신들과 주조 신상을 꺼려다가 사제에게 발각된다. 사제 역시 자신의 삶의 변화에 대한 좋은 기회로 삼고 미카의 소유물이었던 신상들을 가지고 단의 자손들에 합류한다.
단 지파는 다시 라이스 땅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미카와 그의 이웃들이 뒤에서 따라와 공격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한 조치였을 것이다(22절). 미카는 제사장과 자기 신상이 없어진 것을 한참 후에 알고는 곧장 추격대를 조직하여 단 자손을 따라갔다. 배경은 다르지만 이 장면은 마치 라반이 야곱을 추적하는 장면(창세 31장)과 유사하다. 특히 둘 다 가정의 수호신을 훔쳐갔다는 점(창세 31,19)어서 그러하다. 아무튼 미카는 추적길에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단 사람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단 사람들이 어린아이들과 짐승들과 물품들로 인해(21절) 빨리 진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카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내가 만든 나의 신을 가져가고 사제도 데려가고 있소.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그런데도 당신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오?’ 하고 물을 수 있소?”(24). 미카는 은으로 만든 신상과 에폿, 가정의 수호인이 드라빔(17,4.5)들을 가리켜 스스럼없이 '나의 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참된 신이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치 못한 영적 무지의 발로(發露)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단 지파 사람들은 힘의 우위를 내세워 자신들이 미카의 소유물 뿐만 아니라 미카와 추격대 전원의 생명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이 단지 자기 손으로 만든 신상을 소유하는 것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기대했던 미카(17,13)였기 때문에 이처럼 그는 자기보다 강한 자와 대적하면서까지 신상을 되찾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현세적인 복에 몰두했던 미카로서는 자신의 목숨에 대해 남다른 애착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미카가 만든 것과 그에게 딸린 사제를 데리고 라이스로, 조용하고 태평하게 사는 백성에게 가서, 그들을 칼로 쳐 죽이고 그 성읍을 불살라 버렸다”(27).
단 지파는 처음 라이스를 향하여 출발할 때부터 이 전쟁을 '성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바(10절) 라이스를 정복할 때도 철저히 그러한 의식으로 수행한 듯하다. 한편 이에 대하여 여호 19,47에서는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서 편집자는 여기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적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라이스 땅은 본래 단 지파의 영토가 아니므로 그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정복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본래 기업을 차지하지도 못한 채 약한 민족을 공격하는 침략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 단 지파의 타락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집이 실로에 있는 동안 내내, 미카가 만든 조각 신상을 그곳에 두고 섬겼다”(31).
판관 19,1-10 어떤 레위인과 그의 소실
19-21장에서는 심각한 폭력이라는 주제로 단일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거스르는 형태다. 이것은 형제 학살 이야기인데 레위인의 소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강간으로 시작된다.(19,1-28)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던 그 시대에, 에프라임 산악 지방의 구석진 곳에서 나그네살이하는 레위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어떤 여자를 소실로 맞아들였다”(1). 여자는 남편과 다툰 뒤 유다의 땅 베들레헴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4개월 후 남편은 아내를 찾아 베들레헴에 가서 장인과 더불어 5일간 잘 대접을 받고 사랑하는 아내를 고향으로 돌아 가던 중 기브아인들의 만행이라는 큰 사건을 당하게 되었다.
19,11-30 기브아인들의 만행
“그들은 기브아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으려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가서 성읍 광장에 앉았지만, 하룻밤 묵으라고 집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15).
벤야민 지파의 기브아인들은 에프라임 출신의 레위 가족을 문전 박대하였다. 그런데 한 노인이 고향이 같은 사람이라 환대를 하고 집에 머물 수가 있었다. “그들이 한참 즐겁게 지내고 있는데 그 성읍의 남자들이, 곧 불량한 남자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드리며, 그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였다. “당신 집에 든 남자를 내보내시오. 우리가 그자와 재미 좀 봐야겠소”(22).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내어 몰았던 이 비정한 레위인은 간밤에 당한 공포스런 일을 생각하며 일찌기 그 성읍을 떠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의 행방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최소한의 관심 조차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이 레위인에게는 그의 소실에 대한 육적인 사랑은 있었을지 모르나 진정한 사랑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앞서 그의 장인이 계속해서 떠나려는 이 레위인 사위로 하여금 자기 집에 하루라도 더 묵도록 한 것도 아마 자기 딸에 대한 이 레위인 사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브아 성읍에서 일어난 이 범죄는 무엇보다도 손님에 대한 박대인데,소돔의 범죄(창세 19,1-11)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떤 천사도 희생자를 구하지 않는다. 레위인은 기브아인들이 저지른 이 만행을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희생자인 소실의 몸을 토막 내어 그 조각을 온 이스라엘에 보낸다(19,29). “그리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칼을 들고 소실을 붙잡아, 그 몸을 열두 토막으로 잘라 낸 다음에 이스라엘의 온 영토로 보냈다. 그것을 보는 이마다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자, 생각하고 의논하여 말해 보시오”(29-30). 본문만으로는 그녀가 그때 살아 있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데 이미 죽은 상태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현대의 관점으로 레위인인 자기 소실을 불한당들에게 내어 주는 것은 비열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악으로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해도 부정의한 행동이다. 집주인은 자기 집에 손님에게 음식과 잠자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변까지 보호해야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국법 체계가 세워지지 않았던 당시, 자칫 적대적일 수 있는 집단들이 흩어져 살던 상황에서, 종교와 씨족을 뛰어넘는 이러한 의무는 인간 세상을 받쳐 주는 기본적인 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집주인은 딸을 내놓음으로써, 이 지고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이때 손님이 나서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경우 집주인은 오히려 치명적인 명예 훼손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 레위인은 집주인 딸을 보호할뿐더러 손님 접대 법의 위반을 막고 집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소실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실에 대한 집단 강간이, 용납될 수 있는 작은 악이라고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더군다나 그 여자는 윤간의 결과로 목숨을 잃는다. 이것 역시 피로써 보복되는 속죄되어야 하는 커다란 죄악이다.
집에 도착한 레위인은 즉시 아내의 시신을 각을 뜨듯이 열 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냈다. 이같이 시체를 절단하여 지파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온 이스라엘 앞에 공개하며 응당한 징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울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소 한 겨리를 각을 떠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성을 촉구한 적이 있다(1사무 11,7). 이와같이 이것은 당시 중앙 통제 기구가 없었던 시절에 본문과 같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즉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고대 그리스에서 볼 수 있었던 인보 동맹(隣保同盟)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지파 간의 결속이 해이해지고 중앙 통제 기구가 결여된 상태였기 때문에 본문의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고소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따라서 그 레위인은 소실의 시체를 12등분하여 각 지파에게 보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벤야민 지파의 기브아 사람들의 죄상을 강력히 고발하고 전 민족적 차원의 징계를 호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의 이같은 끔찍스러운 행동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주님의 공의와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
판관 20,1-48 벤야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의 전쟁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나섰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길앗 땅에서도 온 공동체가 일제히 미츠파로 주님 앞에 모여들었다. 온 백성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수장들도 칼로 무장한 보병 사십만 명으로 이루어진 하느님 백성의 회중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1-2).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츠파에 모인 것은 지도자들의 통솔하에 각 지파 간을 연결하는 연락 조직에 의해 된 것이지만, 본서 편집자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 앞에 모인 것'을 부각시키므로써 주님의 통치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단에서부터 브에르 세바까지라는 말에서 단은 가나안 최북단의 성읍이고(18,29) 브에르 세바는 최남단의 성읍이다(창세21,31). 따라서 이 같은 표현은 요르단 서편의 가나안 땅 전역(全域)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미츠파는 '망대'(watchtower)이라 뜻을 가진 이 지명이 가리키는 곳은 두 곳이다. 한 곳은 길앗 땅의 미츠파이고(10,17;11,11), 다른 한 곳은 베냐민 지파 변방에 위치한 미츠파이다(여호 18,26). 본절의 미츠파는 물론 후자이며 기브아 북쪽 7.5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스라엘이 미츠파에서 모인 이유는 미츠파가 기브아에서 가까왔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에게 크게 위협을 가하기에 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모인 군사의 수가 40만이었다는 것은 이집트 탈출 시 장정의 수가 60만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민수 26,51) 실로 엄청난 것이다. 또한, 훗날 사울이 암몬과 싸우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였을 때 그 수가 33만이었던 것만 보더라도(1사무 11,8) 여기에 모인 수는 이스라엘 장정 전체가 다 모인 수임을 알 수 있다.
살해된 여자의 남편 레위인은 기브아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에 대해 미츠파에서 증언을 하였다. 죽은 아내의 시신을 토막내어 분노를 삼키면서 이스라엘 상속지에 보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일어나 말하였다. ‘아무도 자기 천막으로 가서는 안 된다. 아무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가 기브아에 할 일은 이러하다. 제비를 뽑아 그곳을 치러 올라가자”(8-9).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위하여 제비 뽑았는지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의견들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기브아를 치는 대는 전체 보병 40만(2절)이 다 동원 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 가운데 1/10을 제비 뽑아 기브아를 치게 하고 나머지는 그들을 위해 군량미를 준비케 하거나 사상자가 생길 때 병력을 보충케 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둘째, 여기서 제비 뽑은 이유는 가나안을 정복할 때와 같이 기브아를 정복했을 때 각 지파가 그 땅을 나누어 취하기 위해서였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본절 이후에 나타난 제비 뽑은 결과를 보면 땅분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후자의 견해는 옳지 않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비 뽑은 것은 기브아 땅의 분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브아를 칠 자들을 선출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전투는 치열했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두 번이나 패전한다. 첫 번째 전투에서 22,000명, 그리고 두 번 째 전투에서 1,8000명이 땅에 쓰러졌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온 군대가 베텔로 올라가 그곳에서 주님 앞에 앉아 통곡하였다. 그날에 그들은 저녁때까지 단식하고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26).
첫 번째나 두 번째 전투에서 패했을 때에 그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저녁때까지 주님 앞에서 통곡하였다. 반면에 이번에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즉 그들이 또다시 힘으로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려고 했다면 단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 앞에서 간절함을 갖고 단식과 번제물 그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아론의 손자이며 엘아자르의 아들인 피느하스가 그 궤를 모시고 있었다. ― “저희가 저희 동족인 벤야민의 자손들과 다시 싸우러 나가야 합니까? 아니면 그만두어야 합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올라가거라. 내일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28).
세 번째 전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님께서 승리를 보증하는 이같은 약속을 주신 것은 26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번제물과 친교 제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친교 제물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평화을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회개하고 서원함으로 드려진다. 그러므로 28절에 기록된 주님의 승리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스라엘 연맹군들은 두 번의 패배를 교훈삼아 이번에는 현명하게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매복시키는 등 사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는 저들이 더 이상 베냐민 지파를 얕보는 것과 같은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한 증거이다. 이는 마치 과거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략할 때 사전 준비를 갖춘 것과 흡사하다(여호 8,4).
세 차례의 전투를 통해 벤야민 지파는 무장한 용사만 25,000명이 죽었다. 이로 인해 벤야민 지파는 거의 전멸된 상태가 되었다. 무사히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은 21,13절 이하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4개월간을 지냈다. 주님께서 이렇게 육백명을 남겨 두신 것은 진노 중에라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대한 당신의 계약을 잊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에 기인한 것이었다(창세 35,12;탈출 24,4). 만일 당시에 베냐민 지파가 전멸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 지파의 후손인 사도 바오로(로마 11,1)의 이름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벤야민의 자손들에게 돌아가, 성읍의 남자 주민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대로 모조리 칼로 쳐 죽였다. 나머지 성읍들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48).
이스라엘 사람들은 림몬 바위 동굴에 숨은 600명을 색출해 내는 대신에 베냐민 성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선 그곳에 있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모두 죽이고, 성읍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인들이 이같이 베냐민 주민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은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베냐민 각 성읍이 기브아 사람들을 옹호하며 동일한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 뿌린 씨앗의 열매를 그에 곱하여 몇 배로 거둔 셈이 되었다.
판관 21,1-25 벤야민 지파의 복권과 회복
벤야민 지팡 성읍들의 주민들은 몰살당하였다. 이제 이 지파를 다시 일으키려면 광야로 피신한 육백 명에게 여자들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에 관련해서 적어도 두 개의 다른 전통이 이 21장에 합쳐진다. 첫째 전통에 따르면, 야베스 길앗 성읍을 멸망시킨 다음에 그곳 여자들을 벤야민들에게 데려다 준다(12절 참조). 둘째 전통에 따르면, 벤야민들이 민속 축제를 기회 삼아 실로에서 젊은 여자들을 데려 온다.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 하느님,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일어나, 오늘 이스라엘에서 지파 하나가 없어져야 한단 말입니까?”(3).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츠파 총회에서 맹세하여 가결하였던 사항들(20,1-11) 중에서 미처 밝히지 않았던 사항을 회상하여 기록함으로써 본장에 기록된 사건의 배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에 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기에 사로잡혀 주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맹세하였던 두 가지 사항이다. 첫째는 자기 딸을 베냐민 자손에게 아내로 주지 않겠다는 것과, 둘째는 온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미츠파 총회에 참석치 아니한 자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5절) 등이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 앞에서이 두 맹세를 이행치 않을 수 없었는데 이로써 또 다른 살상(8-12절)과 무모한 납치극(13-25절)이 벌어진다.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미츠파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지파가 있다. 그 지파는 요르단 동쪽에 있는 야베스 길앗 땅에 있는 가드 지파의 성읍이다. 이 성읍은 요르단강의 지류 중 갈릴리 바다 남쪽 32km 지점의 동쪽으로부터 요르단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엘 야비스(Wadi el-Yabis) 근처에 위치하였다. 이 성읍을 진멸하기 위해 1만 2천 명의 군사만을 보낸 것(10절)으로 볼 때에 그리 큰 성읍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견해는 그 성읍에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4백 명 밖에 되지 않았던 사실로도 뒷받침 되어진다(12절). 이러한 야베스 길앗은 훗날 사울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성읍이다(1사무 11장). 야베스 주민이 아모리 사람 나하스에게 포위당했을 때 사울이 성읍을 도와 구출해 주었다. 그리고 야베스 사람들은 훗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필리스티아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벧산 성벽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야베스에 묻어 주었다(1사무 31,11-13). 때문에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용감하고 경건한 이들 야베스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2사무2,5).
“그들은 야베스 길앗의 주민들 가운데에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아 사내를 모르는 어린 처녀 사백 명을 발견하고, 가나안 땅에 있는 실로의 진영으로 데려왔다”(12). 남은 베냐민 자손들(20,47)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야베스 길앗을 치게 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겉으로 주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교묘히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즉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이 서원한 것(1절)을 어김이 없이도 베냐민 자손들에게 아내를 구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때까지 약 넉달 동안(20,47) 림몬 바위에 숨어 지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평화를 공포하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아무튼 이스라엘 회중이 이처럼 남은 베냐민 자손들에게 평화를 공포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야베스 길앗 성읍에서 데려온 처녀들은 400명이고(12절) 베냐민 사람들은 600명이었기 때문에(20,47) 약 200명의 처녀가 부족한 셈이다. 이를 위해 부득불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계책을 짜내었는데 곧 실로 여인 납치극이다(19-23절).
“그들은 마침내 말하였다. ‘그래, 해마다 실로에서 주님의 축제가 열리지!’ 실로는 베텔 북쪽, 베텔에서 스켐으로 올라가는 큰길 동쪽으로, 르보나 남쪽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벤야민의 자손들에게 명령하였다. “가서 포도밭에 숨어 살피다가 실로의 젊은 여자들이 윤무를 추러 나오거든, 그대들도 포도밭에서 나와 그 실로 처녀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에 여자 하나씩 잡아 벤야민 땅으로 돌아가시오”(19-21).
앞서 미츠파 총회에서 자신들이 베냐민 자손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한 이스라엘 자손들(1절)은 아무도 그 같은 서원을 범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냐민 자손들이 자기들의 딸을 납치해 가려는 일이 탄로 나면 싸움이 일어날 것임이 분명하다. 바로 그 같은 사태를 가리키는데 만일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이스라엘 원로들은 자신들이 친히 베냐민인들을 위해 변호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스라엘 원로들이 자신들의 딸을 납치당한 실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무죄성을 납득시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논거(論據)가 있었을 것이다. 야베스 길앗과의 전쟁에서 베냐민 사람들의 아내를 다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한 이스라엘의 공동 책임이 있기 때문에(10-14절) 실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을 납치당한 것은 실로인들의 책임만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실로인들이 고의로 자신들의 딸을 내준 것이 아니라 베냐민 사람들이 강제로 납치해 간 것이기 때문에 실로인들은 그들이 한 맹세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전쟁 때에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달리 이방인들에게도 딸을 빼앗길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원로들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베냐민 사람들은 원로들의 계획대로 실로에서 춤을 추던 여인 200명을 데리고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갔다. 베냐민 사람들이 아내를 얻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 가장 시급했던 일은 거의 잿더미로 변한 성읍들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베냐민들에게 속한 성읍은 앞서 이스라엘 연맹군과의 싸움에서 대부분 완파(完破)되었기 때문이다(20,48).
“그제야 이스라엘 자손들도 저마다 자기 지파와 자기 씨족에 따라 그곳을 떠나 흩어져 갔다. 저마다 그곳을 떠나 자기 상속지로 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24-25).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는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자기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이제서야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미츠파에서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 종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판관기 편집자는 판관기의 역사를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서' 그러한 불법적인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21장에 걸쳐 기록된 불법적인 일들에 대한 본서 편집자의 이러한 결말은 판관이기 시대의 예비적인 성격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판관기의 신학>
1. 죄와 벌
신명기계 저자들이 판관기를 편집했기에,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억누르는 이야기는 역사의 우연한 사건이 아니며 하느님의 원칙을 따르는 것으로 소개된다. 그것들은 백성이 저지른 죄의 결과다. 이야기 서문에 나오는 죄는 대부분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으로 애매모호하게 묘사된다. 그 죄들은 바알숭배(3,7; 10,6; 2,10-19 참조)라는 형태로 두 차례 구체화된다. 후에 편집자들이 삽입한 내용에도 율법이나 율법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선과 악의 기준은 하느님,그리고 그분이 사건을 어떻게 보시는가하는‘그분의 눈’에 달려 있다.
그 시대의 비윤리적인 무정부 상태는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21,25)라는 묘사로 요약된다. 그렇게 개별적인 판단을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인에게 중요하다. 판관기 저자와 편집자는 이런 표현을 통해 하느님의 이끄심이 부재하는 심각한 상황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판관기는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주님의 잣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분은 개인들을 한 민족으로 결합시켜 그 민족에게 축복을 보증하신다.
2. 격정의 하느님
판관기는 폭력과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책이다. 이야기들은 일반적으로 억압 장면으로 시작되는데,그 억압의 원인을 백성이 저지른 죄 탓으로 돌린다. 판관기는 벤야민 자손들의 학살과 그 후에 일어난 일로 마무리된다. 드보라의 찬가를 제외하고는 기쁨과 낙관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잊은 백성이 낳은 전쟁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완전히 부재하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종종 나약하고 적합해 보이지 않는 사람을 ‘구원자-전사’로 세우신다. 폭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판관들은 하느님 아래에서 행동한다. 그들은 하느님께 특별한 영, 폭력의 카리스마라고 부를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이 선물은 그들을 ‘거룩한’ 사람, 최소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거룩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지 못했다. 기드온은 고문에 참여하고 사람을 죽인다.
입타는 자기 딸을 희생제물로 바쳤으며,삼손은 여성들과 문제를 일으켰다. 하느님의 영은 판관 대부분을 상처 입게 하고 삼손도 죽게 내버려 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지도자들,특히 비극적인 영웅 삼손에게 감탄하게 된다. 그들이 지닌 폭력의 카리스마는 그들을 돕지는 않지만 백성을 억압에서 구해 낸다. 어떤 이는 주저하지 않고 그 책임을 받아들이고(오트니엘,에훗),어떤 이는 조건을 걸고 주저하며 책임을 받아들인다(바락,기드온). 어떤 이는 아무런 책임의식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냥 자신이 싫든 좋든 하느님의 도구가 된 것처럼 보인다(삼손). 판관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불완전한 대리자들을 통해 행동하시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하느님이 돌보아 주셨지만 인간적인 결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던 인물들이다.
판관기에서 폭력은 종종 필수적이다. 폭력 또는 보복하기 위한 폭력이 심지어 하느님의 영에서 나오기도 한다. 폭력은 사람을 ‘구원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폭력은 필요한 한계를 넘어 확산된다. 에프라임 사람들의 불화에 대한 묘사(8,1-3; 9,22-49; 12,1-6)와 판관 기의 마지막 부분(17-21장)은 폭력이 어떻게 형제를 살해할 수 있는지 묘사하기 위해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판관기에서 폭력의 카리스마는 매우 위험한 카리스마로 등장한다. 하느님은 군사 지도자들을 세우셨다. 그러나 폭력이 인간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적 무력으로 바뀔 때 하느님의 구원은 왜곡된다. 하느님이 이런 장면들에 함께하신다 해도 그분은 침묵하실 뿐이다.
3. 중간기의 하느님
판관기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판관기 이야기들을 그 시대의 관점과 이야기들의 ‘시대’ 안에서 보는 것이다. 우리는 판관기에서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을 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백성의 기원을 연구할 때 정제되지 않은 생생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악한 시대의 이야기를 읽는다. 판관들은 억압의 시대에 등장한다. 폭력의 카리스마는 그 시대에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먼저 폭력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판관의 상황을 총괄적으로 보아야 한다. 신명기계 편집자들은 그 상황이 백성의 불충실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구원의 중간기 이야기를 읽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으로부터 친숙하게 알고 있는 비폭력 윤리는 ‘종말론적’ 윤리,마지막 왕국의 윤리다. 판관기의 폭력 윤리는 종말론적이라기보다는 ‘중간기의 논리’, 중간 시대의 윤리다. 폭력은 인류가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성취에 의해 아직 변화되지 않은 세상에 필요한 것으로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