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회 충북 槐山지역 답산을 마치고
회원 여러분 健康하시지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이 많아서 늦게 인사 올려 죄송합니다.
7월 답산은 여러 회원님 덕분에 무사히 마치게 되어 감사함을 느끼면서 다음 답산을 위하여 반성하는 의미로 하루를 더듬어 봅니다.
며칠 전부터 일기 예보에 일요일엔 구름만 끼고 비는 없다고 한다.
그래도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것은 노파심에서 일가?, 다행히도 상쾌한 아침이다.
건강하신 회원님들과 반가운 인사 나누고 아침 8시에 출발했다.
오늘은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충주나들목을 통해 충북 槐山郡에서 하루의 踏山을 할 예정이다. 사람들은 충북의 땅 생김새는 크게 보아 그믐달 모양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서 괴산군은 그믐달의 오목한 쪽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그런 까닭으로 괴산군을 `忠北의 中心`이라고들 표현한다. 불정면(佛頂面)에서 청천면까지는 끝에서 끝이다. 그 양끝에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정치가의 유택이 있으니 先賢의 말씀도 듣고, 삶의 의미도 느끼면서!.
달리는 차창에 槐山휴게소가 보인다.
마지막 휴게소란 의미도 있지만 더 깊은 뜻은 포항 남태현 회원님이 장만해 오신 文魚로 한잔하자는 것이지요. 싫다고!, 싫다고!, 했는데 다들 협조가 없어 결국 중환씨의 칵텔과 文魚 안주에 한잔하니 맛이 꿀맛이라!.
남태현 회원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세상에 여태껏 踏山을 다녀도 아침부터 술 파티는 처음이라 어찌 이런 일이!...누가 알면? 해 해 해..그래도.......!!
*드디어 첫 번째 답산지 朝鮮 전기의 문신이요 학자인 文成公 정인지(鄭麟趾) 선생 유택이다.
충주나들목을 통과 주덕방향으로 가다 좌회전 삼방리 방향 좌측으로 외령리(外嶺里) 능현(陵峴)마을 중앙에 陵같이 등근 묘역이 마을 어구에서 보인다.
도착하니 문화재의 성역화로 주변을 깨끗이 단장하고 齋室과 丁閣도 丹靑하였다. 문은 잠겨있어 뒷쪽 쪽문을 통해 墓所로 갈 수 있었다.
묘소 입구에는 서거정이 지은 신도비가 있었으나, 유실되고 1958년에 다시 세운 神道碑 옆길 나무층계를 따라 오르니 묘소에는 강희맹이 지은 묘비가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내용을 알 수 없고. 장명등과 문인석이 있다. 부인 묘는 선생의 묘소 십여 보 뒤에있다.
<文成公 정인지(鄭麟趾) 묘>
혈장에서 주위 사격을 살피니 定穴法으로 천심십도혈(天心十道穴)에 삼세심혈법(三勢尋穴法)으로 중정(中停)에 해당하는 인혈(人穴)로 보였다. 天心十道穴이란 혈(穴)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좌우에 열십자(十字)로 조응하는 산(山)이 있으면 이를 천심십도혈(天心十道穴) 이라 하는데 그러므로 이러한 혈(穴)은 극히 귀한 혈(穴)이므로 부귀(富貴)가 신속하고 자손이 대대로 발복(發福)할 것이라고 한다.
묘소의 용맥과 혈의 좌향(坐向)을 측정(測定)하니 간좌곤향(艮坐坤向)이며 정미파(丁未破)로 자생향(自生向)이다.
정자(丁字) 천간방(天干方)으로 흘러나가니 정(丁)은 고(庫)를 빌려 물이 사라지는 차고소수(借庫消水)로 양공(楊公)의 구빈하는 진신수법(進神水法)에 해당하며 크게 부귀(富貴)하는 좋은 혈장(穴場)으로 보인다. 그러나 看山하는 者의 생각이니 그저 참고하시길. 묘역에 앉아 생각에 잠긴 회원님들, 이상하다 王陵도 아닌데 웬 丁字閣 ?.
鎭山인 시루봉 아래 마을 중앙의 양지바른 곳에 선생의 묘소가 있어 능현(陵峴) 마을, 그 마을 인삼 밭 사이로 마을을 벗어나 다음 장소로 가자니 한낮이 조금 지났다. 시장기가 슬슬 발동하기 시작한다.
槐山邑내서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올갱이잡"에서 올갱이국과 반주 한잔은 땀 흘린 뒤의 시장기 덕분일까? 아니면 밀려드는 손님 덕분인가 맛나게 먹었다. 쉴 사이도 없이 出發이다.
*두 번째 踏山지는 청천면 화양구곡의 골짜기는 이중환이 "택리지"에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山水`라고 했듯이 예로부터 경치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이곳에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인 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先生 墓가 있다.
槐山읍에서 보은. 미원방향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 청천사거리에서 청천초등학교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100M 정도 올라가면 푯말이 보인다. 몇 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재실 왼쪽에 있고, 은행나무 옆에는 신도비를 안치한 비각이 있고, 묘는 그 옆으로 난 돌 계단을 따라올라 간다. 神道碑는 정조의 친필을 새긴 것으로 碑閣 안에 있다.
돌 층계를 몇 구비 돌아 묘역에 오르니 石物로는 床石 옆에 두 개의 墓碑가 서 있고, 앞쪽으로 망주석과 문인석상이 양쪽에 서 있다. 尤庵 송시열의 묘는 처음에는 수원에 있었으나 영조 때 이곳으로 移葬하였다. 이곳 宋時烈 墓는 風水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라 하는데 장군대좌형에 얽힌 이야기로 장군에겐 兵卒이 필요한데 兵卒이 없으면 장군으로서의 위력이 없고 따라서 發福도 없다. 그래서 묘의 발복을 위해 앞쪽에 병졸에 해당하는 사람의 무리가 있어야 했다. 후손 송종수는 청천의 동민과 의논하여 시장을 개설하게 되었다고 傳 한다.
정말 將軍對座形의 이야기대로 자손들이 번창했을까?.
묘지 앞쪽으로 바라보니 귀한 봉우리들이 우둑우둑 솟아 전진(戰陣)을 알리는 깃발 같기도 하고, 학자의 붓을 보는 필진사(筆陳砂)로 보여 풍수가들이 선호하는 物形論으로 장군대좌형이라 하겠다.
그러나 강 건너 먼 산들이 이곳을 향하여 똑바로 보고 있는가? 깃발을 높이 세운 軍陣이 아니라 어디론가 行軍하는 것은 아닐까?. 物形論이란 보는 者 마음의 표상인 걸......
(將軍對座形 尤庵 宋時烈 墓)
尤庵 墓는 龍脈 乾亥方에서 壬子 入首하여 壬坐丙向으로 보이는데 右水到左로 水口巽破가 되어 八十八向法이나, 또한, 淨陰淨陽法과 포태법에도 문제가 있는 듯 생각된다, 그러나 案山尋穴法으로 보면 눈부시게 좋은 곳이다. 가까운 案山의 꽃봉에 혈은 맞추고, 겹겹이 싸여있는 朝山들을 바라보면 각양각색의 砂格들은 무엇에 비교하랴. 尤庵선생 다운 기상이다.
그런데 자세히 看山해 보면 주변 산과 물이 穴을 감싸주지 못한, 靑龍과 白虎, 內水와 外水가 완전히 환포한 것으로 보기에는?. 나만이 섭섭함일까?. 보는 者에 따라 달라지는 것 그저 參考 하시길 바랄 뿐이다.
청천면을 흐르는 박대천을 사이에 두고 墓所 쪽은 한남금북정맥이고, 건너편은 백두대간의 봉우리다. 두 산맥 사이로 화양구곡(華陽九谷)이 형성되고, 달천이 만들어지고 충주호로 合水하여 남한강을 만든다. 이곳 청천면은 펑탄하고, 편안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분지의 땅으로서 공기 좋고 물 맑은 신비의 福된 明堂이라 하겠다. 풍류객이라면 이 넓은 반석 위를 거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화양계곡의 九谷들, 화양동의 仙境에 빠져 神仙이 되고자 했던 尤庵 송시열 선생 !.
당대의 最高 學者인 尤庵선생은 歷史上 가장 극심했던 黨爭의 시대에 自身이 중심人物 이였다.
政治와 文脈를 30년이 넘도록 한 손에 쥐고 흔든 인물로서, 83 歲로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명으로 賜死되었으니 人生無想이라 !.
踏山이 거의 끝나니 나무 거늘밑이 그립다. 옷자락을 풀고 백호쪽 소나무 그늘에 앉으니 잠이 쏫아진다. 잠시 눈을 감고 우암 송시열이 젊어서 점을 보았는데 점괘의 마지막 구절에 '초산야월 절죽행장(楚山夜月節竹行裝)'이란 괘가 떠올랐다.
우암은 왕세자(경종)의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유배되고, 그 후 국문(鞫問)을 받으러 상경하다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아 죽었다. 그러니 점괘가 신통하게 맞은 셈이다.
<정읍의 옛 지명은 초산(楚山)이고 그곳에서 야밤에 사약을 마셨으니 '楚山夜月'이고, 그때는 죄인의 몸이라 시신을 대나무로 말아 장사를 치르었으니, '대나무에 말아 장사를 치른다'라는 '節竹行裝'이다.>
점괘라!!. "楚山夜月節竹行裝" 점이라?. 점이라?.
벌써 申時다.
회원님들 툴툴 털고 이젠 고향으로 출발하십시다. 화양 계곡과 선유동 계곡을 거쳐 상주 화북면에 들어서니 신선들의 쉼터인 정자가 있어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한잔 마시는 기분은 누가 알리요. 정말 꿀맛이다.
이곳에서 오늘 하루의 피로를 풀고 즐거운 기분으로 대구에 무사히 도착했으니 더는 무엇을 바라고 원하리오.
더운 날씨에 고생 많았습니다. 특히 중환 씨 감사해요.
회원 여러분 항상 健康하시고, 가내 두류 平安하시길 기원합니다.
丁亥년 7월 10일 淸虛堂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