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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74) - 하나님의 주권대로
본 문 : 계시록17 : 16 ~ 18
계17:16-18절입니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또 네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지난번에 이어 계속해서 17장의 음녀,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데, 음녀 바벨론은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하고 왕의 옷인 붉은 옷을 입고 그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세상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어서 결국 사망으로 끌고 들어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반면 우리 성도들은 그 음녀와 짐승의 공격을 잘 분별해서 술 취함으로 대표되는 방탕한 삶을 피하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경주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확인해 가고 있습니다.
그 음녀의 세력은 교묘하게 세상 전체를 힘의 논리로 취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그 속에서 성도들이 어린양의 연약한 모습으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삶을 ‘어린양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숙, 양육’에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가 치르는 영적 전쟁의 내용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역사도 우주도 심지어 대적들까지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을 만들어 내는 훈련소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좀 특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천사가 계속해서 음녀의 비극적인 최후를 언급하는데, 열 뿔로 상징되는 열 왕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사를 것이라는 의외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나열하는 데 있어서 ‘미워하고(μισήσουσιν) →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함(ἠρημωμἐνην ποιήσουσιν αὐτὴν καὶ γυμνὴν) → 그 살을 먹고(ϕάγονται) → 불로 철저히 사르다(κατακαύσουσιν)라는 순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순서를 보면 점점 그 강도가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 왕과 짐승 그리고 음녀는 불가분의 운명 공동체인데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하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음녀에 대한 짐승과 열 왕의 태도 변화는 그 자체 안에 내포된 ‘악의 자기 파괴적 능력’(self-destroying power of evil)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음녀의 멸망은 바로 악의 세력은 결국 상호간의 미움 때문에 궁극적으로 상호 멸망의 결과를 가져올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입니다. 저자 요한은 이러한 음녀의 멸망을 통해 바로 악의 세력의 속성을 알려 주는 목적뿐만 아니라 그 음녀가 어떠한 방법으로 망하게 되는 가를 보여 주려는 목적을 갖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면, 16절에서 일어난 음녀의 멸망의 현상이 어떠한 맥락에서 일어났는가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17:17절을 보지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원문에 의하면 17절 상반절,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ὁ γάρ θεὸς ἔδωκεν εἰς τὰς καρδίας αὐτων ποιησαι τὴν γνώμην αὐτου)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7절은 ‘왜냐하면’(γάρ)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면서 16절과 결합하여 원인과 결과를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17절은 16절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라면, 16절에서 기록되는 짐승과 음녀 사이에 발생한 자기 파괴적 내전은 외형적으로는 음녀 바벨론에 대한 열 왕과 짐승의 연합 공격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용하신 기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라고 한정하시기 때문에 열 왕과 짐승이 단결하여 득세하는 것은 한시적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적들의 공격을 포함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인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지지난 강해 때부터 계속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입니다. 이 거룩은 주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직접 명령식으로 요구하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거룩하라(벧전1:15-16 살전4:3)’과 ‘온전하라(마5:48)’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입니다.
특히 ‘거룩함’과 ‘온전함’은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변화의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기에 거룩한 자만이 온전해 질 수 있고, 온전한 자만이 거룩함을 나타낼 수 있기에 온전함이란 거룩함에 수렴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계속해서 ‘거룩’을 강조하여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슬픈 일, 기쁜 일, 행복한 일, 고단한 일’ 이 모든 일들이 전부 하나님의 ‘거룩’을 이루기 위해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성도인 우리에게 바로 그 본보기로 주어진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한 번 따라가 봅시다.
요셉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받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 형제들이 들에서 양을 치고 농사를 지을 때 요셉은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그 형제들의 잘못을 고자질이나 하던 아주 철없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꿈을 꿉니다. 요셉이 들에서 그 형제들과 함께 곡식 단을 묶는데 형제들의 곡식 단이 자기의 곡식 단에게 절을 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제 그 요셉에게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형들이 그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를 하고 팔아버립니다. 그 형들이 어떻게 했는지 보지요.
창37:20입니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정말 철없는 동생이자 악독한 형들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가시는지의 이야기가 창세기 후반부 전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요셉의 이야기를 ‘성도가 비전을 갖고 꿈을 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수 없이 많이 쏟아낸 한국 강단의 설교에 초점을 두고 보시면 안 됩니다.
이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 것인가를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열 두 족장들의 삶을 통해 미리 preview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아 형들과 부모를 기아에서 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삶 속에서 ‘거룩’을 만들어 가시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 이것을 구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목적으로 두고 계십니다. 성도인 우리들에게 당신의 일을 시키시고 그 일을 이루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선교나 전도나 심지어 순교까지도 우리의 ‘거룩’이 빚어져 가는 과정에서 도구로 혹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이것을 놓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좀 솔직히 말하면 오늘날 기독교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 내는 만사형통의 무당 종교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그리고 당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성경 이야기를 보면 오늘날 우리식의 만사형통 신앙의 이야기를 눈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서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형통’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자기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거룩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형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39:1-3, 20-23절을 여십시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멜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
.....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여기 분명히 ‘범사에 형통케 하심’(萬事亨通)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를 보면 ‘범사에 형통케 하심’이라는 말 앞에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신다’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범사 형통’의 상황은 잘 보십시오. 요셉이 친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서 남의 노예가 되었을 때,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셨다’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러한 상황을 ‘범사 형통’(萬事亨通)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당해서 억울하게 옥에 들어갔을 때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요셉의 만사를 형통케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강단에 말하는 만사형통의 교리로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아예 처음부터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한 모함에 빠지지 않고, 옥에 갇히는 일도 없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어야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면서 형들이 요셉을 팔 때 안 말려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면서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해서 도망간 요셉이 모함을 당해서 그 처참한 옥에 들어가는 것을 안 말려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고 가시고는 그것을 ‘범사 형통’(萬事亨通)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뭘 하고 계신 것이지요?
채색 옷을 입고 형들을 고자질이나 하던 철없는 요셉을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범사 형통’(萬事亨通)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7장과 39장의 요셉의 만사형통 사건 사이에 뜬금없는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끼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형통한 길로 끌고 가시는 자의 삶과 자기의 쾌락을 위해 며느리인줄도 모르고 창녀로 알고 찾아가는 것도 서슴지 않는 자들의 모습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가 가지고 있는 환난과 즐거움과 화려함은 너무나 달콤한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을 자꾸 차단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부릅니다. 그 삶이 얼마나 힘든 길이면 성경이 요셉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겠습니까?
시105:16-19절을 찾습니다.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에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여기 18절에 보시면,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말이 나옵니다. 그 구절은 히브리어로 ‘바르젤 바아 나프쇼’(וֹשׁ האָ ל)입니다. 직역하면 ‘그의 혼이 날카로운 철로 관통 당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보면, 요셉은 그의 삶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 1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 고통스러운 삶 속으로 ‘보내셨음이여’라고 밝히고 있고 19절을 보시면 오늘 분문 계17:17절과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를 단련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만사형통한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한 번 비교해 보고 가지요.
계17:1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시기까지 하심이니라”
음녀와 짐승이 연합해서 우리를 공격하고 미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될 때, 그러니까 성도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 곧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열리게 될 때까지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녀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구원에 세 시제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분적, 운명적인 면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지만 지금 현재에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며 미래 어느 시점에 구원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므로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되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때로는 마귀의 공격이, 환난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롬5:1-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맞는다면(과거 시제) 그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현재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시제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현재에 살아야 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이 어떤 삶인가요? 죄를 멀리 하는 삶, 다른 말로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이어서 롬5:3에서 무엇을 제시합니까?
그렇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 속에 무엇이 도구로 쓰여 진다는 것입니까? 바로 ‘환난’입니다. 그래서 3절에 그 유명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는 구절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내’라고 번역된 ‘휘포모네(ὑπομονή)는 ’경험‘의 뜻이 포함된 ’견딤‘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은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을 경험으로 완성시켜 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론으로 알고 있는 교리가 우리 삶 속에서 경험되어지는데 환난이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군인이 훈련을 통해 강력한 군인으로 성장하듯이 영적 군사인 우리들도 대적과 싸워 이기려면 환난이라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강력한 영적 군사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연단’이라고 번역된 ‘도키메’(δοκιμή)라는 단어는 ‘성숙’ 혹은 ‘증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환난은 성도들이 겪어도 되고 안 겪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된 자들은 성숙하게 양육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성도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그 환난을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그 삶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기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환난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들이 성도인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준다는 것이 바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는 말씀이 갖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그러한 고통의 세월을 통해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을 흔쾌히 용서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지, ‘신앙생활 잘하고 비전을 품으면 언젠가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듯이 너희도 너희의 꿈을 이룰 수 있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눅 21:16-19절로 갑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너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엄청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환난을 잘 견뎌내면 너희는 너희의 영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성도가 가지고 있는 성도됨의 증거를 ‘감격이나 기쁨이나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등으로 제시하지 않고 ‘환난’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은 성도들에게는 유익입니다. 사람들은 환난을 겪게 되면 그때서야 마땅히 할 일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그렇게 음녀의 금잔에 취해서 사는 꼴을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알고 있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시작 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성도들을 진정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서 하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만드시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롬5:8-10절을 잠시 보고 넘어가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를 잘 보시면, 구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과 그분의 ‘살아나심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시고 승천하신 후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도들 안에 들어오셔서 그 구원 사역을 계속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지금도 성도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는 지금도 구원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잖아요? 그들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그들은 ‘광야’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 광야에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이 되어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진리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롬6: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가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구원의 목적지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광야가, 환난이, 마귀의 공격이 동원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열심히 그 광야를 두 발로 우뚝 서서 잘 걸어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벧전4:12-13절을 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의 삶 속에 성도들이 이상하게 여길 일이 생긴다는 것인데요, ‘왜 예수 믿는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까?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막아 주시지 않으실까?’ 이런 의문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성도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당신의 종을 모함과 환난과 배고픔과 옥에 가두게 놔두실까요? 그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세요.
고후11:23-27절입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게 말이 됩니까?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축복을 받아야 할 바울인데 어떻게 이 모양 이 꼴로 내버려둔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니고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여행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바울 사도로 통해 하실 일보다는 사도 바울 자신에게 관심이 더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인간입니다. 그의 로마서를 통해 한 고백을 들어봅시다.
롬7:19, 24절을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깨달았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 사도에게는 우리 인간이 겪을 그 어떤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을 통해 바울의 ‘거룩’을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교수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번 토요일에 성령을 하늘로 소환하시면 그 다음 날 주일에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마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들 소원이나 빌고 자기들끼리 축제를 벌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안 됩니다. 그렇게 멸망할 자처럼 사셔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자기의 소원이나 빌고 문제나 해결하는 것으로 오도하는 자들은 모두 다 멸망 속으로 던져 질 것입니다. 예수를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18절에서는 천사가 ‘여자’의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계17:18절을 엽니다.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여기 ‘여자’를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해석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큰 성’은 바벨론(계16:19 ; 18:10, 18, 19, 21)이라고 말합니다. 요한 당시의 ‘큰 성’은 로마제국을 말합니다.
로마제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의 백성을 압제했던 바벨론제국을 답습했다는 점에서 바벨론과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를 통하여 볼 때 바벨론제국과 로마제국은 비도덕성, 성전 파괴, 우상숭배, 사치, 성도의 핍박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의 삶의 중심이었던 성전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18절에서 ‘여자’가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일까요?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1절에 의하면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라고 했고, 3절에서는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라고 했고, 7절에서는 여자가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을 탔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은 지속적으로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녀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6-18절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악의 세력은 자기 파괴적 성격에 의해 음녀의 파멸이 자신이 타고 앉았던 짐승에 의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면 그 존재의 명성에 엄청난 흠집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다시 한 번 18절에서 음녀 바벨론을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냉소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스리는 왕들에 의해 멸망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온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강력한 나라인 바벨론으로서의 로마 제국도 얼마든지 멸망할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첫댓글 항상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주시는 말씀에서 많이 깨닫습니다.
건강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