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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의미의 거리는 그보다 더 절대적이고 현실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교통상황 앞에선 부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그 교통상황이라는 것은 상수가 아니라 끔찍한 변수여서 언제 어디서 교통체증에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교통상황이 아니라, 내가 움직임으로써또 그 교통체증을 더욱 유발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생생한 계(system--feed back에 민감한 system, 나와 계가 이미 상호 연관하고 있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물어 보자. 서울역에서 고대앞이 더 먼가? 서울역에서 목동이 더 먼가? 모른다. 가 봐야 안다. 둘 다 1시간 이상 걸리리라는 것은 대강 짐작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은 시경 교통 관제 센타 에서도 모른다.
지겨운 교통지옥 이야기는 그만 하기로 하고, 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저러나 하는 사람들을 위해 결론을 먼저 조금 비추자면 우주 공간은 맹탕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 우리는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가 1억 5천만 km 라고 알고 있다.
왜 하필이면 그 거리인가? 지구와 태양간의 원심력과 중력(만유인력--지구와 태양의 질량으로 계산)으로 그 거리일 수 밖에 없다. 1억 5천만km 사이의 공간은 (공연한 공간이 아니라) 지구와 태양의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지표 위)도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중력장이다. 장(field)의 개념을 좀 더 쉽게 연상하기 위해선 전기장을생각하면 쉽다. (철가루 뿌리기 실험을 모두 다 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좀 더 나아가 보자. 원자 내부에서 원자 핵과 전자 사이에는 정전기적 인력이 작용하고,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거리는 일정한 에너지 비용으로 정해져 있다.
엄밀히 말해 오비탈(오비트--표면적 궤도--가 아니라 전자가 존재 혹은 포착될 수 있는 공간, 방)은 정해져 있고, 어떠한 에너지 상태에서는 전자는 몇 호실에 있어야 한다. 즉 연속적인 공간 속에 어디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공간, 여기 아니면 저어기아니면 저어어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 사이는 뭘까? 그 사이는공간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전에는 연속적인 공간을 생각하고는 그 속에 물질이 들어있는데, 그것이 인력으로 거리가 유지되면서 잘 배치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이엔 인력이 작용하고, 또 다른 것과의 거리도 다 이유(인력)가 있어서 유지, 존재되는 것으로 우주공간은 그렇게 타이트하게 조직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 생각도 -- 인력도 생각하지 않은 채 다만 우주라는 신의 밥그릇 안에 믈질이 그득그득하다는 식으로, 중력장으로서의 거리(즉 물질에 의해 오히려 규정되는 공간)도 무시한 채로의 절대 공간의 가상보다는 무척 진보한 생각이었지만, 고전 역학에서 보다 나아간 제반 문제들에 대해선 스스로 무력하였다.
가령 아까 의문을 제기한 '그 사이는 뭐냐' 는 질문이 그것이다. 연속의 시각에서 불연속을 바라볼 때 필연적으로 터지는 우문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상당히 이상하게 여겨지는 독자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좀 더 참고 읽어 주기 바란다.
우리는 공간에 대해선 공간만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어 보자.
A집에서 B집으로 가는데는 30분이 걸렸고, B집에서 A집으로 되돌아 오는 데는 1시간이 걸렸다. 왜 그런가? 답은 A집은 산꼭대기에 있고, B집은 산기슭에 있었다. 평면, 2차원적 생각에서는 도저히 이상한 이 시간차가 공간(사실은 중력 가속도)의 개념을 도입하면 아주 쉽게 풀린다. 그렇다면공간상의 이상한 궤적에 대해서도 시간성을 도입하면(4차원적으로) 이유를설명할 수 있다.
평면 지도(메르카토르 도법)위에선 휘어져 가는 항공도가 입체(지구)위에선 최단 거리로 가는 것이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듯이, 공간상에서의 휘어져가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서도 시공간적으로는 그것이 최단 거리 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아인슈타인은 행성의 운동도 고전 역학과는다른 방법으로 설명함으로써, 뉴튼의 '최초의 일격'이라는 외부 시발을극복할 수 있었다.(이해가 잘 가지 않더라도 좀더 읽어 보기 바란다)
우주는 무한한가 유한한가? 너무 어려운 문제이므로 쉬운 문제부터 해결해 보자. 원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원주 위를 따라 도는 점의 입장(1차원)에서는 무한하다. 그러나 그 면적도 낼 수 있으리만큼 원은 2차원적으로는유한하다. 그러면 구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구표면을 도는 점(2차원)의 입장에서는 무한하지만 3차원적으로는 유한하다. 그러면 우주는 유한한가무한한가? 3차원적으로는 무한하지만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다른 문제이다. 그 보다 높은 차원이란 무슨 뜻인가?
세모, 네모가 평면의 잘린 모양이 다른 것일 뿐 평면의 모양(평평하다)은 같은 것이듯 구, 뿔도 잘린 모양이 다를 뿐 공간의 모양(균일하다)은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모, 네모의 귀퉁이를 접으면, 구기면 달라진다. 다시 말해 평면에 이미 입체 -- 즉 원래 평면과 다른 방향의 평면이 같이 있게 된다. 다시 말해 평면은 3차원적으로구겨져 3차원 입체가 된다.
마찬가지로 공간도 시간성을 부여하면, 시간적으로 구기면 4차원이 된다. 시공가 된다. 즉, 이러한 시공체로서의 우주를 아인슈타인은 생각한 것이다.
말 안장 모양의 구겨진 평면(이것은 - 평면이라 부르고, 반구모양으로한 쪽으로 볼록 혹은 오목한 평면은 + 평면이라 부른다) 위에서, 한 점에서 최단거리를 잇는 폐곡선을 그으면 그것은 보통 평면위에서의 경우처럼 원모양이 나오지 않고 늘어진 풍선껌 모양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듯이, (상상해 보길 바란다) 우주(시공간에서 휜 공 간)에서도 마찬가지로 최단거리이어야할 전파가 휜다. 전파가 휜다는 것은 공간이 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 방향으로 휜 공간이고, 시공간적으로는 유한한 우주이다. 그리고, 아까 대부분의 독자들이 의아해 하던 불연속의 문제도 조금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종이를 부채 모양으로 접어 놓고 선을 그은 후 펴면, 선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것으로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유치한 비유였지만 설명의 용이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지나친 질책은 하지 않기 바란다)
좀 정리를 해 보자.
최초로 공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 즉 태초의 무한히 큰 빈 밥그릇.
그 속에 물질이 노닐기.(죽 퍼 담기 -- 죽의 모양과 부피는 밥그릇에 따라 결정 -- 부피는 물, 성령, 혹은 에테르, 혹은 공기로 조절한다) 그 후 물질과 물질과의 필연적 인력으로 인해 사이가 뜸으로서 그 뜬사이와 물질이 점유하고 있는 것과를 합친 총계로서의 공간을 생각함.
물질 없이 빈 밥그릇 없다! 밥그릇에 담긴 밥이 아니라 주먹밥이다.
(밥그릇 없어도 주먹밥은 밥알 자신과 밥알들 사이의 공간으로 자기 공간--부피--를 지님) 그 후 물질에 의해 규정되고 종속된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물질의 운동에 의해, 물질의 운동과 함께 존재(물질 혹은 에너지)의 존재 양식이며, 인식(빛--후술)의 포착계기이며 동시에 스스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시간, 에너지(장 field 의 위치 에너지, 중력 혹은 전자기력 등)와 연관된 채로의 통일적 공간이 그것이다.
앞서, 짜증나는 교통체증을 예로 든 것은, 거리는 물리적 거리 외에시간 거리, 비용거리(real한 이야기로 택시의 미터기는 시간 거리 병산제 이다)가 있고, 그 거리는 도로망 등 주어진 교통상황에다가통행인에 의해 다시 언제나 영향 받는 변화하는 교통상황에 따라 그거리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우주에서의 공간도 시간, 그리고 에너지 비용(에너지 준위가 낮다, 높다. Potential Energy)과함께 연관되며, 우리가 시간과 비용을 동시에고려하여 (가령, 택시를타면 20분 걸리고 2천원이 나오고, 전절을 타면 갈아타야 해서 250원에 40분 걸리고, 버스를 타면 170원에 50분 걸리고, 좌석버스를 타면 470원에 30분 걸릴 때 -- 적당히 따져 봐서 아주 급하지 않으면 좌석버스나 전철을 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거리를 생각하고, 경로를결정하듯, 자연계에서의 공간도 시공간적으로 최단거리, 에너지가 낮은 단계를 골라 잡고, 정 급하면 택시를 탄다.(화학반응에서 전이상태)단, 에너지, 돈이 있어야 한다.( 비유적인 의미로서 쓰인 돈일 따름이니 정치 경제학적인 자본의 문제를 연상하지 말기 바란다) 또한 그계(system)는 물질의 운동(통행인에 의한 교통체증)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헬기가 있다면 꼭 정해진 도로망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것과마찬가지로, 시공간적(4차원적) 생성 소멸은 꼭 연속적 공간을 탈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장기판에서 장기알이 몇 칸씩 도약할 수 있듯이 중간 과정이 시간에 따른 공간의 연속함수로 설명될 수 없어도 여기에서저기로, 저기에서 또 여기로 출몰이 가능한 것이다.그리고, 속도가 빨라지면 그 가는 방향으로 공간이 수축(다시 말해 광속과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스프린터는 키가 커지고 등짝과 가슴팍이 납작해 진다)하게 되는데, 이는 공간과 시간이 주어져 그것들을 나눈 값으로서의 속도가 주어진 시간, 공간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속도에 의해 시간, 공간으로 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시간, 공간이 선험적이지 않고 실제(속도)가 속에녹아져 있는 계기라는 것이 밝혀 졌다(특수 상대성 이론)
속도에 의해 시간, 공간이 변한다는 것은 계(system)가 더이상 물질과 독립된 채 다만 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와 물질은 상호 교류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물론 여기서 수축하는 공간은 외부 공간이 아니라 운동하는 물체 내부의 공간이다) 계 안의 물질들이 빠른 속도로 운동하면 계의 공간(부피)은 늘어난다. (열에 의해 팽창되는 기구를 생각해 보라)사실상 기체의 부피라는 것은 녹피(사슴가죽)에 쓴 가로 왈자로, 그것은 기체 분자들이 차지하는 부피나 인력은 매우 작고 기체 분자들 사이의거리는 무지하게 큰데, 그 거리는 온도와 압력이 일정하면 일정하게 유지되고, 온도(기체분자의 운동량--속도--을 늘릴 수 있는 열 에너지)와 압력(외부에서 이 계에 주어지는 일 에너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P V = n R T 즉, 기체의 부피는 온도와 압력, 이 기체 분자의 갯수에 의해 주어지는데 이것은 온도와 압력(이 계의 내부 에너지)에 따라 부피, 공간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공간을 좀더 구체적으로 느꼈기를 바란다.
덧붙여 말하자면 빛에 대한 이야기 인데, 빛에 대해 파동설과 입자설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이에 대해 좀더 설명을 하자면, 빛은 파동인 것도 아니고, 입자인것도 아니고, 또는 입자이면서 파동인것도 아니다. 입자도 파동도 아닌그 어떤 것이다.
대체 그게 뭐냐? 무엇인가가 꼭 무엇이거나, 무엇일 필요는 없다.말하자면 오리너구리가 오리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고, 오리이면서 너구리인 것도 아닌 것과 비슷하다.(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기 바람)이 세 번째의 부정 항목은 조금 중요하다. 혹자 중에는 빛이 입자(광량자)가 파의 모양을 하고 흘러간다는 식의 절충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것은 이미 거시적이다.
가령, 오리너구리에게 오리냐 너구리냐고 묻는 말은 그에게는 불쾌하다.
좀더 설명을 하면, 빛(광량자)뿐만 아니라 입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전자도 사실은 파동성을 지니고 있고, 거시적 세계의 입자들(당구공 등)도 미세하나마 물질파를 가지고 있다. 드 브로이의 물질파. 그러니 너무딜레마적 상황으로 가엾은 우리의 애완동물을 몰고가지 말기 바란다.
빛은 초기, 파동의 성질을 띄었다는 것이 먼저 밝혀졌고, 그 후 입자성이 밝혀졌고, 그 후 연속적 파동(슈레딩거의 파동 역학)이거나 불연속적입자(하이젠베르그의 행렬 역학)이거나 결국 빛에게는 마찬가지라는 것, 왜냐하면 연속의 수식을 지닌 파동 역학도 일단 실험을 한 후에는 불연속이 되므로(이 점에 관해서는 '우연과 필연'에 대한 필자의 앞의 글 중에서 슈레딩거 고양이 실험을 참조하라) 이 두 역학응 결국 수학적으로 등가가 되기 때문이다.
빛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나눌 기회가 있을테니 그 때로 미루도록 하고, 우선 여기에서는 빛이 지니는 인식론적 의미에 대해서만 간략하게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빛은 인식의 극소 단위이다.즉,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왜? 장님도 세계를 인식하지 않느냐? -- 장님은 개인적 문제이지 류적 문제가 아니다.다시 말해서 개인적인 장애는 류적인 인간의 한계라는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장님은 그 외의 많은 다른 사람들이 앎으로써 시각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의 파장보다 작은 물체는 볼 수 없다. 수은등이나 나트륨등(한강 다리의 가로등)밑에선 사전을 읽을 수 없다. 가로등이 무척 밝아 보여도 왠지 서늘해 보이는 것은 파장이 길기 때문인데, 긴 파장보다 작은 물체는 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장이 길다는 것은 에너지가적다는 뜻이고, 반대로 파장이 짧다는 것은 진동수가 많다, 즉 에너지가크다는 뜻이 되는데, 에너지가 큰 단파는 큰 광량자를 배출해, 사전의 글자처럼 없어질 리 없는 것이야 그렇지만, 그 빛을 받는 대상도 소립자이면, 그 큰 광량자에 맞아 튕겨져 나가므로, 결국 위치를 알려고 단파를쪼이면 운동량이 크게 차이가 나고, 운동량을 그대로인채 관측하려면 보이질 않으니 위치를 알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는데, 이것이 유명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이것은 인식론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대상은 대상그 자체로 인식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불가지론을 성급히 주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즉, 대상을 인식한다는 작용은 이미 대상에 대해영향을 미치므로 그 원래의 대상(칸트의 물 자체, 인식이전의 물체)은인식으로는 인식될 수 없다는 것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물 자체'라고 주장함으로써 불가지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식이라는주체와 객체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인식된 대상을 주체와 객체간의 관계로서 파악하여 그 속에서 어떠한 식으로든 존재하는 그 물체를우리가 불러 보자는 것이다.
자꾸만 인식으로부터 유리된 물 자체를 주장하여 인식을 무의미하게 하고 물 자체도 공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된 대상으로부터 그 속에들어 있는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객체와 그들의 관계를 함께 인식해 보자는 것이다. 이미 운동하고 있는 것, 이미 인식한 것, 이미 인식된 것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 '인식하기 이전을 인식할 수 없으므로 인식은 무의미하다'라고 주장하지 말자는 것이다. 인식은 인식하면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인식하기 이전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무의미한 말이다.
칸트는 인식이라는 작용에 의해 이미 타락되고 오염된 채 우리의 오성에 포착된 대상을 부정하고, 그야말로 오염없이 존재하는 물 자체와, 오염없이 존재하는 인식 주체의 이성을 전제한 채 거기에서 일어나는, 인식 주체의 이성에 의한 나름대로의 인식이라는 식으로 유리벽의 비극을 창출하였는데, 그가 인식이 작용함으로써 물 자체가 인식의 물이 들어 버린다고 본 것을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포착하여, 유리벽저 속에서 정지된 채 화석화(추상화, 관념화로 사멸)되고 있던 물 자체를 인식의 살아있는 장으로 끌고 나와, 인식의 주체와 어울리게 함으로써, 인식의 과정을 통해 인식의 대상이 변함과 마찬가지로 인식의 주체도 변함을 인정하여, 인식의 이전과 전혀 새로운 주체와 객체,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보자고 해, 인식을 존재와 유리된 별스런 장난이 아니라, 또 존재를 인식과 별 상관 없는 무심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일적으로, 존재론, 인식론적으로 함께 발전(실천 혹은 살기)시켜 나가기를추구했던 것이 헤겔이다.
사실, 이 문제는 무척 심각하고 심오한 것이다. 컴퓨터 통신과 같은매체를 통해 제대로 환기되고,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일 지모르나, 독자들과 어느 정도의 문제 의식만이라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 필자의 목적이다. 인식론의 문제는 과학철학 부분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중점적인 부분(아니 전체인지도 모른다)이므로, 이후 또 기회가 닿는대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매끄럽지 못한 글을 참을성 있게 읽어 주신 독자분들께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