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11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7월 16일(을축) 1번째기사
문종 대왕과 현덕 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다
문종 대왕(文宗大王)과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였다.
“그 의절(儀節)은 신여(神轝)가 장차 악좌(幄座)에 이르려고 하면, 유사(有司)가 부알위(祔謁位) 2개소를 묘정(廟庭)에서 북쪽으로 가까운 가운데에 북향하여 설치한다.【대왕위(大王位)는 서쪽에 있고, 왕후위(王后位)는 동쪽에 있으며, 각각 상(床)과 욕석(褥席)을 설치한다.】 은 제향일(祭享日) 축시(丑時) 5각(刻) 전에【축시 5각 전이면 즉 3경(更) 3점(點)이며, 행사(行事)는 축시 1각(刻)에 한다.】 궁위령(宮闈令)이 그 요속(僚屬)을 인솔하고, 신실(神室)을 열고는 신악(神幄)을 정제(整齊)해 털고서 자리[座]마다 과 을 설치하고, 을 덧펴고, 오른쪽에는 조궤(彫几)를 설치한다. 종묘령(宗廟令)·전사관(典祀官)도 각기 그 요속(僚屬)을 인솔하고 들어가서 찬구(饌具)를 챙기고 나면, 찬인(贊引)이 감찰(監察)을 인도하여 로부터 올라가서【무릇 행사(行事)하는 집사관(執事官)이 오르고 내릴 때는 모두 조계(阼階)를 거친다.】 당(堂)의 아래 위를 살펴보며 의절과 같지 않은 것이 혹시 있지 않나 규찰(糾察)하고는 도로 나온다.
3각(刻) 전에 모든 향관(享官)과 이 각기 그 의복을 입는다.【향관(享官)은 제복(祭服)을 입고, 배제관(陪祭官)은 조복(朝服)을 입는다.】 집례(執禮)가 알자(謁者)·찬자(贊者)·찬인(贊引)을 인솔하고 동문(東門)으로부터 들어와서 먼저 섬돌[階] 사이에 있는 악현(樂懸) 북쪽 배위(拜位)로 나아가서 겹줄로 북향해 서쪽을 위로삼아 사배(四拜)하고 각기 그 위차(位次)로 나아가면, 아악 령(雅樂令)이 공인(工人)과 를 인솔하고 그 위차(位次)로 들어가서 문무(文舞)는 들어가 현(懸) 북쪽에 진렬하게 하고 무무(武舞)는 현(懸) 남쪽 길 서편에 서게 한다. 봉례랑(奉禮郞)이 배제(陪祭)할 종친(宗親) 및 문무 백관(文武百官)을 나누어 인도하고 들어가 그 위차로 나아간다. 알자(謁者)는 아헌관(亞獻官)을 인도하고, 찬인(贊引)은 모든 향관(享官)을 인도하여 함께 문 밖의 위차로 나아가며, 찬인이 감찰(監察)·전사관(典祀官)·대축(大祝)··재랑(齋郞)·종묘령(宗廟令)·궁위령(宮闈令)··봉조관(奉俎官) 그리고 준(樽)·뢰(罍)·비(篚)·멱(羃)을 잡는 자와, 의 축사(祝史)·재랑(齋郞) 및 준(樽)·뢰(罍)·비(篚)·멱(羃)을 잡는 자 등을 인도하여 들어가서 현(懸) 북쪽에 설시된 배위(拜位)로 나아가 겹줄로 북향해 서쪽을 위로 하여 선다.
집례(執禮)가 ‘사배(四拜)’라고 말하여, 찬자(贊者)가 ‘국궁(鞠躬), 사배(四拜), 흥(興), 평신(平身)’을 전하여 찬(贊)하면,
【무릇 집례(執禮)가 말이 있으면 찬자(贊者)가 모두 그대로 전하여 찬(贊)한다.】 감찰(監察) 이하 모두 몸을 구부려서 네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한다. 찬인(贊引)이 감찰(監察) 및 전사관(典祀官)을 인도하여 그 위차로 나가고, 찬인이 모든 집사(執事)를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씻고 수건에 닦고 나서 각기 그 위차로 나아간다. 1각(刻) 전에 알자(謁者)는 아헌관(亞獻官)을 인도하고, 찬인(贊引)은 종헌관(終獻官)·진폐찬작관(進幣瓚爵官)·천조관(薦俎官)·전폐 찬작관(奠幣瓚爵官)과 칠사 공신(七祀功臣)의 헌관(獻官)을 인도하고 들어가서 각기 위차에 나아가고, 또 찬인이 대축(大祝)·종묘령(宗廟令)·궁위령(宮闈令)을 인도하여 조계(阼階)로부터 올라가서
환조실(桓祖室)에 나아가 들어가서 감실(埳室)을 열고 대축·궁위령이 신주(神主)를 받들어내어 그 좌(座)에 진설해 모신다.
【신악(神幄) 안으로 나아가서 신주궤(神主匱) 왼쪽에서 궤를 열고, 좌(座)에 모시는데, 선왕(先王)의 신주(神主)는 대축(大祝)이 받들어 내어 백저건(白苧巾)으로 덮어 놓고, 선후(先后)의 신주는 궁위령(宮闈令)이 받들어 내어 청저건(靑苧巾)으로 덮어 놓되, 서쪽을 위로 삼는다.】 이렇게 차례로
태조(太祖) 이하의 신주를 받들어 내기를
환조실(桓祖室)에서의 의절과 같이 한다.
다시 인도하여 내려와 그 위차로 돌아가면, 찬인이 재랑(齋郞)을 인도하여 작세위(爵洗位)에 이르러서 찬(瓚)을 물에 씻어 닦고 작(爵)을 물에 씻어 닦고는 이를 비(篚)에 담아 받들고는 태계(泰階)로 나아가면, 모든 축사(祝史)들이 각기 계(階) 위에서 맞이하여 받아서 준소(尊所) 점(坫) 위에 놓고 나서는 그 전(殿) 위에 있던 모든 집사(執事)는 각기 편리한 쪽으로 계(階) 아래로 내려가서 서로 마주보고 차례로 서서,
문종 대왕(文宗大王)과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신여(神轝)가 전(殿)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려서 각기 다시 계(階) 위의 위차로 돌아온다. 모든 향관(享官)이 장차 들어와서 그 자리로 나아가면 판통례(判通禮)가 재궁(齋宮) 앞으로 나아가서 부복(俯伏)해 무릎을 꿇고 ‘중엄(中嚴)’을 계청한다. 조금 지나서 또 ‘외판(外辦)’을 아뢰면, 전하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나오며 산·선(繖扇)의 시위(侍衛)를 평상시의 의절과 같이 한다. 예의사(禮儀使)가 전하를 인도하여 동문(東門) 밖에 이르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圭)를 바친다. 예의사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집규(執圭)’를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잡는다. 이에 산·선(繖扇)의 장위(仗衛)는 문밖에서 머무르고 상서관(尙瑞官)이 보(寶)를 받들어 소차(小次) 곁에 진설해 놓고는 예의사(禮儀使)가 전하를 인도하여 정문(正門)으로부터 들어가면
【시위(侍衛)로서 들어가지 못할 자는 문밖에서 머무른다.】 협률랑(協律郞)이 무릎을 꿇고 부복하여 를 들고서 일어나고
【무릇 물건을 취(取)하는 자는 모두 무릎을 꿇고 부복하여 취하고서 일어나고, 물건을 드리게 되면 무릎을 꿇고 드리고 나서 부복한 뒤에 일어난다.】 공인(工人)이 축(柷)을 두들기면 헌가악(軒架樂)은 융안(隆安)의 악(樂)을 연주한다. 전하가 판위(版位)로 나아가서 서향하여 서면,
【서서 자리를 고정할 때마다 예의사(禮儀使)는 물러나 왼쪽에 선다.】협률랑이 휘(麾)를 누이고 어(敔)를 훑으면 악(樂)이 그친다.
【무릇 악(樂)은 모두 협률랑이 무릎을 꿇고 부복하여 휘(麾)를 들고 일어나고, 공인(工人)이 축(柷)을 두들긴 뒤에 시작되며, 휘를 누이고 어(敔)를 훑은 뒤에 그친다.】
처음에 전하가 장차 문에 들어오려고 하면, 섭판통례(攝判通禮)가 악좌(幄座) 앞으로 나아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악좌에서 내려 여(輿)에 올라 부알(祔謁)’ 하기를 계청하고는 부복하였다가 일어난다. 대축(大祝)이 대왕의 신주궤(神主匱)를 받들어 신여(神轝)에 봉안(奉安)하고 다음 궁위령(宮闈令)이 왕후의 신주궤를 받들어 신여에 봉안하며, 내시(內侍)는 각기 궤(几)를 받들어 신주궤의 오른쪽에 놓는다. 집례(執禮)
【당하집례(堂下執禮).】가 나아가 신여(神轝)를 인도하여 문에 이르면, 집사자(執事者)가 먼저 대왕의 신여를 받들고 다음 왕후의 신여를 받들어 정문(正門)으로부터 들어와서 부알위(祔謁位) 뒤 욕석(褥席) 위에 놓아 두고
【임시하여 각각 욕석(褥席)을 설치한다.】 대축과 궁위령이 각기 궤(几)를 받들어 부알위(祔謁位) 남쪽으로 가깝게 놓아 두고는 궤(匱)를 열고 신주(神主)를 받들어 내어 욕위(褥位)에 모시고 나서
【그 고명(誥命)·책보(冊寶)의 신여(神轝)가 장차 부알위(祔謁位)로 나가려고 하면 집사자(執事者)가 각기 여(輿)에서 취하여 가지고 따라 들어가서 신여 뒤에 나누어 섰다가 신주(神主)가 계(階)에 오르기를 기다려서 따라 오른다.】 섭판통례(攝判通禮)가 욕위(褥位) 서쪽으로 나아가 북향하여 부복해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이제 길신(吉辰)을 택하여
문종 공순 흠명 인숙 광문 성효 대왕(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과
인효 순혜 현덕 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를 부알(祔謁)하나이다.’ 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물러난다.
조금 있다가 섭판통례가 욕위 서쪽으로 나아가서 동향하여 부복해 무릎을 꿇고는 ‘여(輿)에 올라 부향(祔享)’ 하기를 계청하고는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다시 물러나 내려와서 본반(本班)으로 돌아가면, 대축과 궁위령이 함께 나아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각기 신주(神主)를 받들어 신여(神轝)에 봉안해 모신다.【그 신주궤의 덮개도 역시 신여 위에 뒤로 가깝게 놓는다.】 신여가 이미 오르게 되면【태계(泰階)로 부터 오른다.】 대축과 궁위령이 받들어 인도하여 제 6실(室) 지게문 밖에 이르러【임시하여 각기 욕석(褥席)을 설치한다. 대왕의 위차(位次)는 오른쪽에 있고 왕후의 위차는 왼쪽에 있다.】 궁의령은 왕후의 신주를 받들고 들어가서 왼쪽에 모시고는 청저건(靑苧巾)으로 덮고, 대축은 대왕의 신주를 받들고 들어가서 그 좌(座)에 모시고는 백저건(白苧巾)으로 덮는다.【서쪽을 위로 삼는다.】 내시(內侍)가 각기 궤(几)를 받들어 신좌(神座) 오른쪽에 둔다. 종묘령(宗廟令)이 각기 그 요속(僚屬)을 인솔하고 고명(誥命) 및 책·보(冊寶)를 받들고 들어가 안(案)에 두고, 선개(扇蓋)를 받들어 좌우에 나누어 설치하며, 그 요여(腰轝)는 동계(東階)로부터 내려가서 동문(東門)을 지나 나간다. 집례(執禮)가 ‘사배(四拜)’ 하고 말하여 예의사(禮儀使)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국궁(鞠躬)하였다가 사배(四拜)하고 일어나 평신(平身)’ 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몸을 구부려서 네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위차(位次)에 있는 자도 또한 같다.【찬자(贊者)가 또한 찬(贊)하며 먼저 절한 자는 절하지 않는다.】
집례가 ‘예의사(禮儀使) 계청 행사(啓請行事)’ 하고 말하면 예의사가 나아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는 ‘유사(有司)가 삼가 행사하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아뢰고는 물러나 그 자리로 돌아가면, 헌가악(軒架樂)은 경안(景安)의 악(樂)을 연주하고 를 추는데, 아홉 번 이루고서 그친다. 근시(近侍)가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 관세(盥洗)를 마치고 시위(侍位)로 돌아가면, 알자(謁者)가 진폐 찬작관(進幣瓚爵官)을 인도하여 폐(幣)를 드리게 한다. 찬작관(瓚爵官)이 관세위로 나아가 손씻고 수건에 닦고 나서 로부터 올라가 환조실(桓祖室) 준소(尊所)로 나아가 북향하여 선다. 집례가 ‘예의사(禮儀使) 도(道) 전하(殿下) 행(行) 신관례(晨祼禮)’라고 말하고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면, 헌가악(軒架樂)은 융안(隆安)의 악(樂)을 연주한다. 전하가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 북향하고 서면 예의사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진규(搢圭)’를 계청하여 전하가 규를 띠에 꽂는다.【만약 꽂기가 불편하면 근시(近侍)가 받아서 받든다.】 근시(近侍)가 무릎을 꿇고 이(匜)를 가지고 일어나 물을 부으면 또 다른 근시가 반(槃)을 가지고 그 물을 받는다. 전하가 손을 씻으면 근시가 무릎을 꿇고 비(篚)에서 수건[巾]을 가져다가 임금에게 바쳐 손을 닦고 나면 근시가 수건을 받아서 비(篚)에 놓는다.
예의사(禮儀使)가 ‘집규(執圭)’ 하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규를 잡으면,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조계(阼階)로부터 올라가고 나면【예의사와 근시도 따라 올라간다.】 악(樂)이 그친다. 환조실(桓祖室) 준소(尊所)로 나아가서 서향하여 서면, 등가악(登歌樂)은 숙안(肅安)의 악(樂)을 연주하고, 열문(烈文)의 춤[舞]을 춘다. 준(尊)을 잡은 자가 멱(羃)을 들고 폐(幣)을 바치고, 찬작관(瓚爵官)이 울창(鬱鬯)을 따르면 근시(近侍)가 찬(瓚)으로 울창을 받는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신위(神位) 앞으로 나아가서 북향하여 서면, 예의사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진규(搢圭)’ 하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무릎을 꿇고 띠에 규를 꽂으면, 위차(位次)에 있는 자도 모두 무릎을 꿇는다.【찬자가 또한 찬한다.】 근시 1인이 향합(香合)을 받들어 꿇어앉아 바치면, 또 근시 1인이 향로(香爐)를 받들어 꿇어앉아 바친다. 예의사가 ‘삼상향(三上香)’ 하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삼상향을 하게 되면 근시가 향로를 안(案)에 드린다.
근시가 찬(瓚)을 진폐 찬작관(進幣瓚爵官)에게 주면 진폐 찬작관이 찬을 받들어 꿇어앉아 바친다. 예의사가 전하에게 ‘집찬(執瓚)하여 관지(祼地)’ 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찬을 잡고 땅에 강신(降神)하고 나서 그 찬을 전폐 찬작관(奠幣瓚爵官)에게 주고 전폐 찬작관은 이를 받아서 대축(大祝)에게 주어 준소(尊所)에 놓아 둔다. 근시가 폐비(幣篚)를 진폐 찬작관에게 주면 진폐 찬작관은 폐(幣)를 받들어 꿇어앉아 바친다. 예의사가 전하에게 ‘집폐(執幣)하여 헌폐(獻幣)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그 폐를 잡아 폐를 드리고 그 폐를 전폐 찬작관(奠幣瓚爵官)에게 주어 안(案)에 드린다.【무릇 진향(進香)·진찬(進瓚)·진폐(進弊)에 있어서는 모두 동쪽에서 서향하여 하고, 전로(奠爐)·수찬(受瓚)·전폐(奠弊)에 있어서는 모두 서쪽에서 동향하여 한다. 진작(進爵)·전작(奠爵)도 이에 준한다.】 예의사가 전하에게 ‘집규(執圭)’ 하기를 계청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 하면 전하가 규를 잡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 하며, 위차(位次)에 있는 자도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찬자가 역시 찬한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지게문으로 나와 다시
태조(太祖)의 신실(神室)로 나아가고, 그 다음에는
공정 왕실(恭靖王室)로 나아가며, 다음에는
태종실(太宗室)로 나아가고, 그 다음에는
세종실(世宗室)로 나아가며, 다음에는
문종실(文宗室)로 나아가서 향(香)을 올리고 울창(鬱鬯)을 강신하며 폐(幣)를 드리기를 아울러 위의 의절같이 하고나면, 등가악(登歌樂)이 그치고, 진폐 찬작관과 전폐 찬작관이 모두 내려와 그 자리로 돌아간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지게문으로 나오면 헌가악(軒架樂)은 융안(隆安)의 악(樂)을 연주하고 조계(阼階)로부터 내려와 그 자리로 돌아가면 악(樂)이 그친다. 등가악(登歌樂)이 그칠 때를 당하면 모든 축사(祝史)는 각기 과 을 앞 기둥[前楹] 사이에서 취하여 모두 신위(神位) 앞에 드리고
【모혈반(毛血槃)은 등(㽅) 뒤에 있고, 간료등(肝膋㽅)은 변(籩) 왼쪽에 있다.】 모든 축사(祝史)가 다같이 간(肝)을 가지고 문으로 나와 화로(火爐)의 숫불에 구워서 준소(尊所)로 돌아와 한다. 전하가 이미 올라가서 강신하고 나면, 찬인(贊引)이 전사관(典祀官)을 인도하고 나와서 진찬(進饌)하는 자를 인솔하고 주방(廚房)으로 나아가 로 소[牛]를 에서 들어 올려서 정(鼎)에 채우고, 다음은 양(羊)을 올려 한 솥에 채우며 그 다음에는 를 올려 한 솥에 채우고는
【실(室)마다 소[牛]·양(羊)·시(豕) 각각 한 솥씩 한다.】 모두 을 설치한다. 축사(祝史)가 마주 들고서 찬만(饌幔) 안으로 들어가면 알자(謁者)가 천조자(薦俎者)를 인도하여 나가서 찬소(饌所)에 이르고 봉조관(奉俎官)도 따른다. 임금이 강신하고 나서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악(樂)이 그친다.
집례(執禮)가 ‘진찬(進饌)’을 말하여 축사(祝史)가 빗장[扃]을 빼어 솥 오른쪽에 두고, 멱(羃)을 제거하고는 비(匕)와 필(畢)을 정(鼎)에 얹어 둔다. 전사관이 비(匕)를 가지고 소[牛]를 올려 생갑(牲匣)에 채우고 그 다음에는 양(羊)·시(豕)를 올려 각기 그 생갑에 채운다.【실(室)마다 소[牛]·양(羊)·시(豕) 각각 1갑(匣)이다.】 다음 천조관을 인도하여 환조실(桓祖室)의 를 받들고 봉조관이 각기 생갑(牲匣)을 받든다. 전사관이 예찬(禮饌)을 인도하여 정문(正門)【남문(南門).】으로부터 들어온다. 조(俎)가 처음 문에 들어가면 헌가악(軒架樂)은 옹안(雍安)의 악(樂)을 연주하고 모든 축사는 함께 나아가서 모혈반(毛血槃)을 거두어 조계(阼階)로부터 재랑(齋郞)에게 주고 나온다.
예찬이 태계(泰階)에 이르면 모든 대축이 이를 맞아 계상(階上)으로 인도한다. 천조관이 환조실 신위(桓祖室神位) 앞으로 나아가 북향하고 꿇어앉아 드리는데 먼저 소[牛]를 드리고, 다음 양(羊)을 드리며, 그 다음 시(豕)를 드린다.【모든 대축이 도와서 드린다.】 드리기를 마치면 생갑(牲匣)의 뚜껑을 연다. 그리고는 태조실(太祖室)로 나아간다. 다음에 공정왕실(恭靖王室)로 나아가며, 그 다음 태종실(太宗室)로 나아가며, 다음에 세종실(世宗室)로, 다음에 문종실(文宗室)로 나아가서 받들어 드리기를 모두 위의 의절과 같이 하고 나면 악(樂)이 그친다. 알자가 천조관(薦俎官) 이하를 인도하여 조계(阼階)로부터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면 모든 대축이 각기 소(蕭)·서(黍)·직(稷)을 취하여 기름[脂]에 적시어【아주 정성스럽게 한다.】 화로 숫불에 구워 가지고 준소(尊所)로 돌아간다. 또 알자가 진폐 찬작관과 전폐 찬작관을 인도하고 올라가서 환조실(桓祖室) 준소로 나아가 북향하여 서면, 집례가 ‘예의사(禮儀使)가 전하를 인도하라.’고 말하여, 헌가악(軒架樂)은 융안(隆安)의 악을 연주하고 전하가 조계(阼階)로부터 올라가기를 마치면 악이 그친다. 전하가 환조실의 준소로 나아가서 서향하여 서게 되면, 등가악(登歌樂)은 수안(壽安)의 악(樂)을 연주하고 열문(烈文)의 춤[舞]을 춘다.
집준(執尊)한 자가 멱(羃)을 들고 진폐 찬작관이 를 따라서 올리면 근시(近侍) 2인이 작(爵)을 가지고 술을 받는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신위(神位) 앞으로 나아가서 북향하여 서면, 예의사가 다시 부복해 무릎을 꿇고는 전하에게 ‘진규(搢圭)’를 계청하여 전하가 꿇어앉아 규를 띠에 꽂는다. 위차(位次)에 있는 자도 모두 무릎을 꿇는다.【찬자가 역시 찬한다.】
근시가 작(爵)을 진폐 찬작관에게 주면, 진폐 찬작관이 작을 받들어 꿇어앉아 올린다. 예의사가 전하에게 ‘집작(執爵)하여 헌작(獻爵)’ 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작을 잡아 헌작하는데, 작을 전폐 찬작관(奠幣瓚爵官)에게 주어서 신위(神位)앞에 드린다. 근시가 부작(副爵)을 진폐 찬작관에게 주면 진폐 찬작관이 작을 받들어 꿇어앉아 올린다. 예의사가 전하에게 ‘집작하여 헌작’ 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작을 잡아 헌작하는데, 작을 전폐 찬작관에게 주어서 왕후 신위(王后神位) 앞에 드린다. 예의사가 전하에게 ‘집규(執圭) 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조금 뒤로 물러나 북향하여 꿇어앉기’를 계청하면, 규를 잡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조금 뒤로 물러나 북향하여 꿇어앉는다. 악(樂)이 그치고 대축이 신위 오른쪽으로 나아가서 동향하여 꿇어앉아서 축문(祝文)을 읽고 나면, 악이 연주된다. 예의사가 전하에게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평신(平身)’ 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위차(位次)에 있는 자도 모두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지게문으로 나오면 악이 그치고 다음 실(室)로 나아가서 작헌(酌獻)하기를 모두 위의 의절과 같이 한다.【환조실(桓祖室)에는 위명지곡(威明之曲)을 노래하고 태조실(太祖室)에는 소명지곡(昭明之曲)을 노래하고, 공정 왕실(恭靖王室)에는 순명지곡(純明之曲)을 노래하고, 태종실(太宗室)에는 인명지곡(仁明之曲)을 노래하고, 세종실(世宗室)에는 흠명지곡(欽明之曲)을 노래하고, 문종실(文宗室)에는 문명지곡(文明之曲)을 노래한다.】
곡(曲)이 끝나면 악이 그친다. 진폐 찬작관과 전폐 찬작관이 모두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고,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지게문 밖으로 나가면 헌가악은 융안(隆安)의 악을 연주하며 조계(阼階)로부터 내려가 자리로 돌아가면 예의사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입소차(入小次)’ 하기를 계청하고는 전하를 인도하여 장차 소차에 이를 무렵에 가서 예의사가 다시 부복해 무릎을 꿇고 ‘석규(釋圭)’ 하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규를 놓으면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전하가 소차로 들어가면 발[簾]이 내려지며, 악(樂)이 그친다. 문무(文舞)는 물러나고 무무(武舞)가 나간다. 헌가악(軒架樂)은 서안(舒安)의 악을 연주하고, 무자(舞者)가 지정된 자리에 서면 악이 그친다.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은【칠사 공신(七祀功臣)의 작헌(酌獻)도 붙여서 한다.】 전하가 장차 자리로 돌아올 무렵에 집례가 ‘행(行) 아헌례(亞獻禮)’라고 말하면, 알자(謁者)가 아헌관(亞獻官)을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 북향하고 서면, ‘홀(笏)을 꽂으라.’고 찬(贊)하고 손을 씻고 손을 수건에 닦으면【손을 씻고 수건에 닦는것은 찬하지 않는다.】 ‘홀을 잡으라.’고 찬하고는 아헌관을 인도하여 조계(阼階)로부터 올라 가서 환조실(桓祖室)의 준소(尊所)로 나아가 서향하여 서면, 헌가악(軒架樂)은 수안(壽安)의 악을 연주하고 를 춘다.
집준(執尊) 한 자가 멱(羃)을 들고 앙제(盎齊)를 따르면 집사자(執事者) 2인이 작(爵)을 가지고 술을 받는다.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신위(神位) 앞으로 나아가 북향하여 서면, ‘꿇어앉아 홀(笏)을 꽂으라.’고 찬(贊)한다. 집사자가 작(爵)을 아헌관에게 주면 아헌관이 작을 잡아서 헌작(獻爵)하되 작을 집사자에게 주어 신위 앞에 드리고 집사자가 부작(副爵)을 가지고 아헌관에게 주어 아헌관이 작을 잡아서 헌작하되, 작을 집사자에게 주어 왕후의 신위 앞에 드린다. 알자가 아헌관에게 ‘홀을 잡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 하라.’고 찬(贊)하고는, 인도하고 나와서 〈각실(各室)에〉 차례로 작헌(爵獻)하기를 모두 위의 의절과 같이 하고 나면 악이 그친다. 알자가 인도하여 내려와 그 자리로 돌아가는데, 아헌관의 헌작이 장차 마치면 집례가 ‘종헌례(終獻禮)를 행하기’를 말하며, 알자가 종헌관을 인도하여 행례하기를 아헌의 의절같이 하고 인도하여 내려와 그 자리로 돌아간다.
처음에 종헌관(終獻官)이 이미 오르게 되면 찬인(贊引)이 칠사(七祀)의 헌관(獻官)을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서 홀(笏)을 꽂고는 손씻고 수건에 닦고 나서 홀을 잡고 준소(尊所)로 나아간다. 집준(執尊)한 자가 멱(羃)을 들고 술을 따르면 집사자가 작(爵)을 가지고 술을 받으며 헌관이 신위 앞으로 나아가 서향하여 꿇어앉아 홀(笏)을 꽂으면 집사자가 작을 준다. 헌관이 작을 잡아 헌작(獻爵)하고 나서 홀을 잡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조금 물러나서 서향하여 꿇어앉는다. 축(祝)이 헌관 왼쪽으로 나가 북향하여 꿇어앉아 축문(祝文)을 읽고 나면 헌관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자리로 돌아간다.
처음 칠사(七祀)의 헌관이 장차 관세위로 나가려고 하면 찬인이 배향 공신(配享功臣)의 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로 나아가서 홀(笏)을 꽂고서 손씻고 수건에 닦고 나서 홀을 잡고 준소(尊所)로 나아간다. 집사자가 멱(羃)을 들고 술을 따르면 집사자가 작(爵)을 가지고 술을 받으며, 헌관(獻官)이 신위 앞으로 나아가 동향하고 서서 홀을 꽂으면 집사자가 작을 헌관에게 주어 헌관이 작을 잡고 헌작(獻爵)하여 드린다. 이렇게 차례로 잔을 다 드리고 나서 홀을 잡는다. 축사(祝史)가 교서(敎書)를 받들고 문종실(文宗室)의 배향(配享)한 오른쪽으로 나가서 서서 읽고 나면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자리로 돌아간다. 음복(飮福)은 처음 종헌관(終獻官)이 이미 자리로 돌아가고 나면, 알자가 진폐 찬작관과 천조관(薦俎官)을 인도하여 조계(阼階)로부터 올라가서 음복위(飮福位)로 나아가 북향하고 서면, 대축(大祝)이 환조실(桓祖室)의 준소(尊所)로 나아가서 작(爵)으로 상준(上尊)의 복주(福酒)를 따르고, 또 대축이 조(俎)를 가지고 나아가 신위 앞의 조육(胙肉)을 덜어 담는다.
집례가 ‘예의사(禮儀使)가 전하를 인도하여 음복위(飮福位)에 나가라.’고 말하면, 예의사가 소차(小次) 앞으로 나아가서 부복해 무릎을 꿇고는 ‘음복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계청한다. 발[簾]을 걷고 임금이 소차에서 나오면 헌가악(軒架樂)은 융안(隆安)의 악을 연주한다. 근시가 꿇어앉아 규(圭)를 올리면, 예의사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집규(執圭)’ 하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규를 잡는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음복위로 나아가 서향하여 서면, 악(樂)이 그치고 등가악(登歌樂)은 수안(壽安)의 악을 연주한다. 대축(大祝)이 작(爵)을 진폐 찬작관에게 주면, 진폐 찬작관이 작을 받들어 북향하여 꿇어앉아 올리며 예의사가 부복하고는 전하에게 ‘궤(跪)하여 진규(搢圭)’ 하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꿇어앉아 규를 꽂는다. 위차(位次)에 있는 자도 모두 꿇어앉는다.
전하가 작을 받아 마시고 나면 진폐 찬작관이 빈작을 받아서 대축에게 주고 대축은 받아서 도로 점(坫) 위에 갖다 놓는다. 대축이 조(俎)를 천조관(薦俎官)에게 주면 천조관은 조를 받들고는 북향하여 꿇어앉아 올리고, 예의사가 ‘수조(受俎)’ 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조를 받아서 근시(近侍)에게 준다. 근시는 조(俎)를 받들고 조계로부터 내려가서 문으로 나가 사옹(司饔)에게 주며 진폐 찬작관과 천조관이 모두 내려가 자리로 돌아간다. 예의사가 전하에게 ‘집규(執圭)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평신(平身)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잡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바로 하며 위차(位次)에 있는 자도 모두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면 악이 그친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면 헌가악은 융안(隆安)의 악을 연주하고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면 악이 그친다. 집례가 ‘사배(四拜)’를 말하여 예의사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국궁(鞠躬)하였다가 사배하고 일어나 평신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몸을 구부려서 네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하며 위차에 있는 자도 같이 한다.【찬자가 또한 찬한다.】 집례가 ‘철(撤)·변두(籩豆)’라고 말하면, 모든 대축이 신실(神室)로 들어가서 변과 두를 걷는다.【걷는다는 것은 변·두(籩豆) 각각 1개를 두었던 곳에서 조금 옮겨 놓는다.】 등가악(登歌樂)은 옹안(雍安)의 악을 연주하며 칠사 공신(七祀功臣)의 축사(祝史)·재랑(齋郞)도 각기 그 변과 두를 걷는다. 걷기를 다하면 악이 그치고 헌가악은 경안(景安)의 악을 연주한다. 집례가 ‘사배(四拜)’를 말하여 예의사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는 ‘국궁하였다가 사배하고 일어나 평신하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몸을 구부려서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며 위차에 있는 자도 같이 한다.【찬자가 또한 찬한다.】 악(樂) 하나를 이루어 그치고는 예의사가 부복해 무릎을 꿇고 ‘예(禮)가 끝났음’을 아뢰고는 전하를 인도하여 재궁(齋宮)으로 돌아가면, 헌가악은 융안(隆安)의 악을 연주하며 문을 나가면 악이 그친다.
예의사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무릎을 꿇고 ‘석규(釋圭)’ 하기를 계청하여 전하가 규를 놓으면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으며, 산·선(繖扇)의 시위(侍衛)를 평상시의 의절과 같이 한다. 전하가 재궁으로 들어가 면복(冕服)을 벗는다. 집례가 ‘망예(望瘞)’라고 말하면,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망예위(望瘞位)로 나아가 북향하여 서고, 집례가 찬자(贊者)를 인솔하고 망예위로 나아가 서향하여 선다. 모든 대축이 서·직반(黍稷飯)을 취하여 흰 띠[白茅]를 바닥에 깔아 이를 묶고, 비(篚)에 축판(祝板) 및 폐(幣)를 담아서 서계(西階)로부터 내려가 에 넣는다. 집례가 ‘가예(可瘞)’라고 말하면 흙으로 감을 반쯤 메우는데 종묘령(宗廟令)이 감시(監視)한다. 알자는 아헌관을 인도하고, 찬인은 모두 헌관(獻官)을 인도하여 나가며, 집례는 찬자를 인솔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봉례랑이 배제(陪祭)한 종친 및 백관을 인도하여 차례로 나가고 찬인·감찰(監察) 및 모든 집사(執事)는 함께 현(懸) 북쪽 배위(拜位)로 돌아간다. 집례가 ‘사배(四拜)’라고 말하여 감찰 및 모든 집사가 모두 몸을 구부려서 네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하면, 찬인이 차례로 인도하여 나가며, 아악 령(雅樂令)은 공인(工人)과 를 거느리고 나간다. 종묘령·대축·궁위령이 신주(神主)를 들여 모시기를 평상시의 의절과 같이 하고 집례는 알자·찬자·찬인을 인솔하고 현(懸) 북쪽 배위(拜位)로 나아가서 네 번 절하고 나간다. 칠사(七祀)의 헌관(獻官)은 서문(西門) 밖으로 나아가 칠사의 예감(瘞坎) 남쪽에 북향하여 서면, 집사자가 축판(祝版)을 예감에 넣고 묻은 뒤에 물러나며, 그 배향 교서(配享敎書)는 축사(祝史)가 서문 밖의 정결한 곳에서 불사른다. 전사관(典祀官)·종묘령은 각기 요속(僚屬)을 거느리고 예찬(禮饌)을 거두며 궁위령은 창문을 닫고 내려와서 곧 물러간다.
북[鼓]이 초엄(初嚴)을 알리면 병조(兵曹)에서 모든 위(衛)를 통솔하고 대가(大駕)의 노부(鹵簿) 및 군사들을 진열하게 하고 북이 이엄(二嚴)을 알리면, 종친 및 문무 백관이 조복(朝服) 차림으로 종묘(宗廟) 앞 다리 밖의 길 남쪽 좌우에 차례대로 선다.
북이 삼엄(三嚴)을 알리면
노산군(魯山君)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연(輦)을 타고 나가면 백관이 모두 국궁(鞠躬)하고 연이 지나가서야 몸을 바로 한다. 시위(侍衛)는 평상시의 의절과 같이 한다. 전후의 고취(鼓吹)가 요란하게 울리고 잇달아서 이 앞에서 인도한다. 잡희(雜戲)도 갖추어서 전개된다. 대가(大駕)가
종루(鐘樓) 아래에 이르자, 성균 생원(成均生員)
김유부(金有孚) 등이 가요(歌謠)를 바치니, 그 가사(歌辭)는 이러하였다.
“엎드려 보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빛나게도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으시고 효(孝)로써 다스림을 더욱 돈독히 하시어 이미 를 마치시고는 즉시
종묘(宗廟)에 제사를 행하시고 드디어 금월 16일에 공경히
문종 공순 대왕(文宗恭順大王)과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에 부묘(祔廟)하심에 있어 몸소 을 입으시고 공손히 규폐(圭幣)를 드리셨습니다. 이로써 의 예(禮)를 닦으시고 추모(追慕)의 회포를 펴시니, 이 다 기꺼워하고, 모든 복(福)이 아울러 이르렀습니다. 신 등은 그윽이 듣건대, 백성을 교화시켜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게 함에는 효(孝)에 앞서는 것이 없으며 조종(祖宗)을 공경함에 있어서는 예(禮)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옛 성왕(聖王)들이 오직 상제(喪祭)를 소중히 여겨 그 효도하는 생각을 본받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전하께서는 인효(仁孝) 성경(誠敬)하신 덕이 옛 선대에 높이 뛰어나셨던 것이니 바야흐로 중에 계실 때는 그 애훼(哀毁)하심이 이미 지극하셨으며, 겨우 상기(喪期)를 마치시고는 문득 융숭하신 예를 거행하시니 등강(登降)·천헌(薦獻)하심이 모두 법도에 맞으셨으며, 욕의(縟儀)를 이미 이루시고 가 곧 움직이니, 경도(京都)의 사녀(士女)들이 바라보고 탄식하면서 모두 다 성효(聖孝)의 크심을 우러르며 더욱 감모(感慕)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이 보기 드문 성거(盛擧)는 거룩하고도 아름다왔습니다.
신 등이 모두 재능 없는 사람으로서 다행하게도 밝은 국운을 만나서 성군(聖君)의 은택에 싸여 오랫동안 인재를 기꺼이 기르시는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그 거룩하신 일을 목격해 보고 기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문득 비루하고 졸렬함을 잊고 성덕(聖德)의 만분의 하나라도 찬양할까 하여, 신 등이 삼가 계수(稽首)하고 이에 을 올립니다.
그 송은 이러합니다. ‘밝고 밝으신 우리 임금, 하늘같이 어지셨네. 성학(聖學)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니, 원손(元孫)으로 책봉(冊封)되셨네. 바른 칭호 높은 지위, 일국 여망(輿望) 달렸다오. 사부(師傅)에게 나가던 날, 강원(講院) 열고 배우시니, 속의 그 칭예(稱譽)가, 서도 일반이라. 소심(小心)하심 더하시어 을 다하셨다. 별처럼 진중(珍重)하고 바다같이 충융(沖瀜)하셨네. 백성의 구가(謳歌)도 같아, 서차(序次)를 이으셨네. 속에 계실 적엔 경경(惸惸)하심 보이시나, 갱장(羹墻)의 그 추모는 더욱 간절하셨다네. 성효(誠孝) 지극하시니, 황제(皇帝)는 조휼(弔恤)하고, 인국(隣國)도 열복(悅服)했도다. 세월은 빨리 달려, 고제(告祭)가 임박했네. 그 애모(哀慕) 더욱 깊어 용어(龍馭)에 오르시니, 는 뛰어 나르고, 모여(旄旟)는 펄럭이네. 뒤따르는 백관들의 패옥(佩玉)도 찬란하데, 혹좌(或左) 혹우(或右) 시신(侍臣)들이 신주(神主)를 받들고서, 묘(廟)에 올라 부(祔)하실 제, 를 진설하니, 곤룡포(衮龍袍)도 화려하다. 서직(黍稷)은 향기롭고, 관경(管磬)도 쟁쟁(鏘鏘)한데, 성신(聖神)이 즐기시어, 내리신 복 양양(穰穰)하다. 신석(申錫)함이 그지없이 법가(法駕)를 돌리실 제, 백기(百技)가 앞을 다퉈, 앞뒤가 잡답(雜畓)하네. 어린이 늙은이가 거리를 메워, 성덕(聖德)을 다투어 칭송하여 우리 임금 만수무강,
요(堯)의 이마 닮으시어, 그 덕이 외탕(巍蕩)하시도다. 우리 님의 지극한 효성이어, 색소(色笑)로 인도하사, 만민이 본을 받게 하시도다.’ 바라건대 과질(瓜瓞)처럼 면면하게 성대하여, 주실(周室) 역년(歷年) 훨씬 넘어, 천만 억년(千萬億年) 드리우소서. 노비(駑鄙)한 신의 무리 성미(盛美)한 양 얻어보고, 환희에 작약(雀躍)하여 긴 말로 노래하여 강구(康衢)에 바치노니, 우리 말이 아유(阿諛)이겠습니까?”
연(輦)이 혜정교(惠政橋)에 이르니, 여기(女妓) 담화지(擔花枝) 등이 침향산붕(沈香山棚)을 만들고 가요(歌謠)를 바쳤다. 그 말은 이러하였다.
“엎드려 보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7월 16일 을축에 공경히
문종 공순 대왕(文宗恭順大王)과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시니, 예(禮)를 이루시고 환궁(還宮)하심에 있어 첩(妾) 등이 경사(慶事)에 기뻐서 손뼉을 치며 지극한 기꺼움을 누를이 없어 삼가 가사(歌詞)를 올리고 아울러 짤막한 을 올리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기를 가을에는 상제(嘗祭)를 지내고 여름에는 형(衡)을 행하여 신어(神馭)에 올라 높이 부(祔)하시고,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선반(仙班)에서 내려와 맞이하시니, 이를 우러러보는 자 장벽(墻壁)을 이루었고, 환호(懽呼)하는 소리는 길을 메웠습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 열성(列聖)이 쌓아 이룩하신 큰 업(業)을 이어받으시니,
한나라 신민의 구가(謳歌)가 쏠려서 돌아가는 바가 되었습니다. 상중(喪中)에는 예절을 다하고 제향(祭享)에는 정성을 다하시니, 는 공(功)이 있으시고, 은 덕(德)이 있었습니다. 용곤(龍衮)의 의표로
종묘(宗廟)에 제향하시고, 난가(鸞駕)를 움직여 궁으로 돌아가시니, 아름다운 길상(吉祥)은 온 삼한(三韓)을 화기에 차게 하고, 칭송하는 소리는 사방 영역(領域)에 들끓어 오르고 있습니다. 비록 필부 필부(匹夫匹婦)라 할지라도 그 누가 우러러보지 않으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의 봉함(封緘)을 받들어 올리니, 화봉인(華封人)의 송축하던 그 마음을 절실히 느끼는 바입니다.”
가사(歌詞)는 이러하였다.
“옥(玉)을 드리니 궁전이 더 엄숙하고, 방울이 울리니 연(輦)길이 맑도다. 생황의 노래는 길에 가득하고 또 환호의 소리, 아름다운 그 기운이 장안(長安)에 피어나네. 여덟 채색
요(堯)임금의 하늘에, 겹 동자(瞳子)
순(舜)임금의 해가 밝았도다. 로 헌수(獻壽)한 그 영화 몇번이런가? 억만년 길이길이 승평(昇平)을 누리소서.”
임금이 연(輦)이 도관(都官) 앞에 이르니, 기로(耆老)인 전 상호군(上護軍)
이형(李逈) 등이 가요(歌謠)를 바쳤다. 그 말은 이러하였다.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주상 전하께서 이미 를 마치시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날을 택하여 재숙(齋宿)하게 하시고는 금월 16일에 백료(百僚)를 거느리시고 공경히
문종 공순 대왕(文宗恭順大王)과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시어 거룩하고 밝은 일을 이루시고 가 돌아오시니, 신 등이 길가에서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고 우러러 하늘의 해를 바라보고 환희와 경축을 이길 수 없어 삼가 긴 가요를 올립니다.”
그 가사(歌辭)는 이러하였다.
“하늘이 동방(東方)을 도우시어, 우리 신성(神聖)을 낳으시니, 겸손한 뜻으로 학문에 힘쓰시고, 온인(溫仁) 효경(孝敬)하셨네. 여망(輿望)은 때부터 지니셨고, 그 덕은 중정(中正)에 맞으셨네,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이 에 은혜를 주었네. 속에 공묵(恭默)하며, 갱장(羹墻)의 모(慕) 간절하다. 쉽게 흘러 기마(驥馬)가 과극(過隙)하듯
순(舜)의 효심 더욱 깊어 하늘의 끝 없듯이 망극하네. 를 거행하니, 태실(太室)에 큰 행사라 전례(典禮)는 옛을 좇고, 에서 날을 가려, 에 멍에하여, 에 오르셨네. 취화(翠華)를 높이 세워, 우위(羽衛)도 다 가추었다. 검은 용곤(龍衮) 푸른 홀[圭]로, 신주(神主)로 부묘(祔廟)하시니, 좌우의 허리 굽히고 분주하다. 등가(登歌)가 연주되니, 소관(蕭管)이 춤을 추고 필분(苾芬)이 떠오르네. 그 직(稷) 그 서(黍)에서, 을 다 바치고, 에는 를 드려, 조고(祖考)께 하고, 많은 복을 받으셨네. 을 울려 을 돌리시니, 중천에 해가 떠있고, 늙은이 어린이에, 사녀(士女)마저 분운(紛紜)하다. 전후하여 뛰며, 미친듯한 환호(懽呼)소리,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우리 임금 나의 부모, 내가 추우면 데워주시고, 내가 주리며는 곡식주며, 몸소 본받게 하여 교도할제, 효도가 으뜸이라. 재계(齋戒)하고 제사하사 백복(百福)을 받으셨네. 바라건대 병 없이 만수(萬壽)를 누리소서. 신(臣) 등을 돌아보니, 서산에 지는 해이나, 흔쾌(欣快)하게 성사(盛事)만나, 눈을 씻고 목을 늘여 바라보네. 지척(咫尺) 땅 속에, 하늘 낮고 해 비치네. 우리도 은파(恩波)에 잠겨 마음껏 유영(游泳)하며, 서로 서로 소매잡고 떼를 지어, 노래하고 읊어보세.”
일본인(日本人) 64인도 또한 순청(巡廳) 길 서쪽에 차례로 서있었다. 연(輦)이 광화문(光化門) 밖에 이르니, 좌우의 에서 온갖 희롱을 다 지었으며, 와 도 함께 근정전(勤政殿) 뜰로 들어갔고, 연(輦)은 근정문(勤政門)에 머물러 두어 사람들이 보게 하였다. 오시(午時)에 이르러 임금이 근정전에 앉아 백관들의 하례(賀禮)를 받고는 하였다. 그 반사하는 글은 이러하였다.
“상제(喪制) 3년을 마치고 이에 아름답고 밝은 예(禮)를 거행하니, 그 기쁨은 사역(四域)이 같은지라, 어찌 관대한 은전(恩典)을 가하지 않으랴? 내 미세(微細)한 몸으로 참람하게도 큰 기업을 이어받고는 바야흐로 의 아픔을 품고 있던 중, 어느덧 의 시기가 다달았음으로 7월 16일에 공경히 황고(皇考)
문종 공순 흠명 인숙 광문 성효 대왕(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과
황비(皇妣) 인효 순혜 현덕 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 신주(神主)를 받들어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고 검은 용곤(龍衮)의 의절을 엄히 하여, 친히 밝고 깨끗한 제향을 하였노라. 이 경사스런 거조(擧措)에 즈음하여 마땅히 관대한 법전(法典)을 포시(布施)하여야 할 것이다.
경태 5년 7월 16일 이전에 관리(官吏)·군(軍)·인민(人民) 등이 범한것 중에서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 자손으로서 조부모(祖父母)와 부모를 모살(謀殺) 또는 구매(歐罵)한 자, 처첩(妻妾)으로서 지아비를 모살(謀殺)한 자, 노비(奴婢)로서 주인(主人)을 모살한 자, 다른 사람을 모살(謀殺) 또는 고의로 살인한 자, 또는 한 자, 다만 간·도(奸盜)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는 발각(發覺)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또는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사유(赦宥)하여 면제하니, 감히 유지(宥旨) 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줄 것이다. 아! 밝은 일을 이루어서 이미 조고(祖考)로부터 의복을 받았으니, 큰 은사(恩賜)를 넓혀서 마땅히 인민에게 복을 고르게 하리로다.”
제도(諸道)에서는 또한 하례하는 전문(箋文)과 방물(方物)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