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정사 방문기 - 7
송광사에는 때마침 늦은 여름이어서 매미 소리가 요란하고 목백일홍이 여기저기에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대개의 꽃이 10일을 못 가는데, 목백일홍은 백일홍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나뭇가지에 분홍색이나 빨강 색깔의 작은 꽃이 백일 동안 계속 피는 꽃이다. 관상수로 적당한 꽃나무이다. 꽃 중에서 또 하나 여름 내내 계속 볼 수 있는 꽃은 우리나라꽃 무궁화이다. 무궁화는 끊임없이 피어나는 분홍빛 꽃이 은은하여 아름답지만 떨어진 꽃잎 또한 아름답다. 대개의 꽃이 떨어지면 꽃잎이 흩어지고 지저분한데 비하여 무궁화는 질 때에, 피어나기 전 모습으로 오므라진 후 곱게 떨어진다. 곱게 늙어 가는 우리의 옛날 할머니들을 연상시킨다.
송광사 옆에는 시원한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연담 거사의 설명에 의하면 절 옆에 물이 흐르면 일단 그 절은 교(敎) 중심인 절이라고 볼 수 있고, 개울물이 없으면 선(禪) 중심이라고 볼 수도 있단다. 참선을 하려면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장소가 좋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 불교에 관해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연담 거사에게서 배웠다. 절에 가면 제일 큰 기와집(그러니까 법당채라고나 할까)의 이름이 어느 절에는 대웅전 또는 극락보전이라고 써 있다. 나는 그전에는 몰랐는데, 모신 부처님의 이름에 따라 법당 이름이 달라진단다. 대웅전에 앉아 있는 큰 부처님은 석가모니이고 극락보전에 앉아 있는 분은 아미타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좌우로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경우에 양쪽의 부처님을 협시보살이라고 한단다. 협시보살 중에서 머리에 관을 쓰고 앉아 있는 분은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이 쓰고 있는 관의 특징은 가운데에 작은 아미타 부처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또 지팡이처럼 생긴 것을 오른손에 들고 있는 분은 지장보살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불교에는 수많은 보살이 있는데 보살이란 ‘깨달은 사람’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기독교에서 신으로 인정하는 예수를 나름대로 깨달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여 ‘예수 보살’ 이라고 부른다니,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기가 막힌다고 해야 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절에서 스님의 식사(불교 용어로는 공양)를 담당하는 아주머니들을 존칭으로 모두 보살님이라고 부른다니, 세상에 이렇게 보살이 많아서야···. 불교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 건물 저 건물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다가 위쪽으로 올라가니 작은 부도(돌아가신 스님의 묘비)가 있는데 불일 보조국사의 부도라고 설명문이 붙어 있다. 아하, 그렇구나, 법정 스님이 계시던 암자가 불일암이었는데, 불일이란 보조국사의 호였구나!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서 매우 반가웠다.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서 잘 수도하고 계시다가 어느 해 초파일 불일암의 일상생활을 TV로 찍어 방영하도록 허락하였다. 그 방송은 나도 보았는데, TV에서 보는 불일암은 아름다운 암자였으며 법정 스님의 하루 일과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여 나도 저렇게 한번 살아보았으면 하면서 부러워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방송이 나간 후 너도 나도 법정 스님을 만나 보겠다고 불일암으로 구름같이 몰려오는 통에 법정 스님은 ‘자업 자득이지!’라고 후회하면서 가는 곳도 말하지 않고 그만 달아나 버리셨다. 소문에 의하면 법정 스님은 강원도 대관령 근처 어디에 화전민이 버리고 간 오두막집을 수리해서 전기도 없이 혼자 사신다고 하는데, 누가 또 찾아오면 다시 도망가겠다고 엄포를 놓아서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 나도 옛날에 국토개발원 근무할 때에 금강산댐 때문에 괜히 매스컴을 탔다가 혼쭐이 난 경험이 있어서 법정 스님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환경 문제, 그 중에서도 쓰레기 문제 해결에 가장 모범적인 곳이 절이다. 절에서 공양을 할 때에는 밥이나 반찬을 필요한 만큼만 주기 때문에 음식 쓰레기가 생기지 않는다. 밥을 다 먹고서 그릇에 남은 밥알도 김치 조각 같은 것으로 훑어서 먹고, 거기에 물을 부어 마시기 때문에 음식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다. 송광사에서 부엌 쪽으로도 가보았는데, LPG 통이 다섯 개나 연결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엌 옆으로 개울이 흐르는데 푸성귀 조각은 물론 밥알 하나 보이지 않았다. 환경 친화적인 사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송광사에서는 재가불자들이 4박 5일의 출가 수련을 하고 있었다. 현수막에는 ‘짧은 출가 긴 깨달음’이라고 써 있었다. 연담 거사도 세 번인가 이 같은 수련회에 참가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청자가 많아 2, 3년 기다리는 사람도 있단다. (최근에는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절에서 불교를 경험하기가 매우 쉬워졌다.) 참가자들 중에는 천주교의 신부와 수녀도 더러 끼어 있는데 개신교의 목사님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니, 종단의 포용성 또는 개방성을 보여 주는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나는 원래 30년 동안이나 성당에 다니다가 그 후에는 개신교에 나가는데, 언젠가는 이러한 4박 5일 출가에 참여하여 불교를 맛보고 싶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종교적 성향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색깔이 분명하지 않다고 말한다. 내 답변은 이렇다. 나는 아직도 진리의 구도자이다. 지금까지도 진리를 찾고 있는 중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진리를 체험하고 싶다. 내가 아직 진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어떤 사람이 진리를 체험했다고 말하면 그의 체험을 존중한다. 그런데 ‘진리의 세계는 이런 것이다’라고 자꾸 이론적으로 설명하려 드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 사람의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진리는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체험하는 것 또는 느껴지는 것이다. 종교의 창시자가 나타나기 이전에도 인간의 삶은 있었고, 바른 삶의 길, 즉 진리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언어니 종교 체계니 하는 것들이 나타났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하나이되, 진리의 이름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것은 눈 앞에 존재하는 ‘빨갛고 주먹만 하고 맛있는 과일’의 이름을 우리는 사과라고 부르고 서양 사람은 apple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눈앞에 존재하는 과일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 아니고 사람이 먹으면 맛있는 과일이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사과 맛을 알 수 있는가? 사과 맛의 설명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먹어 보면 된다. 먹어 보는 체험이, 경험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해서도 설명보다는 체험이 중요하다.
- 계속
첫댓글 깨달음의 길 - 진리를 체험해 본다. 잘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