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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란
한강성당에서 4월24일 저녁 7시에 교우분들과 함께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허락해 주신 주임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부활이란? 무엇일까? 부활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나? 에 대해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몰라!..."라고 하시지는 않겠지만,
부활이란 것을 생각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으로 출발을 해봅니다.
부활에 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면 역사 이야기를 좀 해보아야 합니다.
역사적 흐름 위에서 부활이란 개념이 생겨났고 그것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어떤 식으로 해석되었는가? 오늘날 우리가 부활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에 관해 나눠볼까 합니다.
유배부터 생각해 보면,
다윗이 왕국을 세우고 솔로몬의 시기를 지나서 왕국이 분열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의 수도는 여러 군데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사마리아, 남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나라가 나뉘다 보니 신학적 갈등으로 번져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처럼,
유럽에 북쪽의 나라와 남쪽의 나라의 갈등이 종교 개혁이 원인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유다에는 성전이 있었고, 성전을 관리하는 이는 사제들(제관들)이 있습니다. 제관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에 관한 신학을 적립시킨 것이 남유다의 신학이었고,
남유다의 신학은 성전 중심의 신학, 제관 중심의 신학이었기 때문에 제의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미사 경본을 꼼꼼히 공부하시는 신부님들이 계시고, 어떤 신부님들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 시대의 징표와 같은 것에 관심을 보이시는 신부님들이 계십니다.
반대로 북이스라엘의 신학은 율법이나 말씀에 관한 신학에 관심이 있었기에 율법과 말씀에 대하여 해석과 권위를 갖고 있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남유다는 제관중심, 북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의 전승들 그리고 남유다는 성전중심, 북이스라엘은 말씀, 계약 중심으로 평행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722년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하고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율법 중심의 흐름들이 남유다로 흘러내려오면서 두 가지가 통섭 과정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이룬 사람이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성전 중심의 신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예언자들의 신학 내지는, 예언전승으로부터 물려받은 틀을 수용했습니다.
이사야는 거의 최초의 남유다의 예언자입니다. 물론 다윗시대에 나탄, 갓과 같은 예언자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중요한 예언자들은 거의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엘리야, 엘리사,
그러다가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두 신학이 통섭을 이루지만, 결국 587년 남유다도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배를 가고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역사를 뒤돌아 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망하게 되었나?
신명기 역사학파가 자신들의 역사를, 우리 하느님, 야훼 이외에는 하느님은 없다.라는 신조로 되짚어 보면서
자신들이 결국 하느님을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큰 불행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 테마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쓰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의 텍스트가 탄생합니다.
신명기,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들이 신명기계 역사서입니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룻기는 역사설화로 봅니다.
그들이 유배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신명기계 역사서(예언전승이 강한 역사서)를 썼다면
유배 중에 신명기계 역사서로는 좀 부족한 것 같다고 느낀 제관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또 하나 씁니다. 그것은 제관들이 쓴 역대기계 상하권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신명기계 역사서가 쓰고, 신명기부터~ 열왕기까지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역대기 상하권으로 씁니다.
그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숫자들이 조금 다르거나(왕의 재임기간이 열왕기에서는 5년, 역대기에서는 7년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지리적인 장소가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관점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 상하권에는 남유다의 역사와 북이스라엘의 역사가 같이 있습니다.
역대기 상하권에서는 북이스라엘의 역사가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북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야!라는 것입니다.
신명기계의 신학은 상선벌악이고 역대기계의 신악은 인과응보입니다.
신명기계의 신학은 할아버지가 잘못하면 손자가 벌을 받고
인과응보의 신학인 역대기계 신학은(신부님은 신학교에 가셨을 때 상선벌악과 인과응보가 뭐가 달라?라고 생각하셨다고...)
인과응보의 신학은 할아버지가 잘못했으면 할아버지가, 손자가 잘못했으면 손자가 벌 받는다.입니다.
상선벌악의 신학(신명기계 신학)을 생각해 봤을 때
'왜? 우리가 망했을까?'로 바라봤을 때, 유다를 정말 망하게 한 임금은 므나쎄였습니다.
그런데 망한 것은 그다음 임금에 와서였습니다. 나중에 손주 때 와서 유다가 망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우리 손주들이 고생을 합니다.
신부님은 어떻게 하면 다음 세대를 위해서 좀 더 괜찮은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시고 하느님의 지혜를 많이 청하신다고,
그런데 역대기에 와서는 인과응보 신학으로 바뀌고,
그 기저에는 유배를 갔던 사람들이 자꾸 조상 탓을 합니다.
"우리가 할아버지 때문에 이 꼴이 된 거야.."
역대기계 신학에 맞물려있는 에제키엘 예언자는
"너희들이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은 너희들이 잘못해서야. 너희들은 바꿀 수 있는데도 너희들 할아버지 때처럼 그대로 살고 있어. 조상탓 하지 마." - 역대기계의 인과응보 신학 -
신명기계와 역대기계가 갈등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치게 잘못해석되고 있는 신명기계 신학을 보면서 역대기계 신학자들은 그것을 막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계 신학이 다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똑같은 현상이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생깁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북이스라엘의 예언자 중심의 신학적 흐름과 남유다의 제관계들의 중심의 갈등이 있었다면,
유배에 들어와서는 신명기계 신학과 역대기계 신학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배에서 돌아오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나라가 페르시아 제국입니다. 바빌로니아를 무너뜨리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라는 황제가
"우리가 이제 페르시아가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바빌로니아에 묶여있는 사람들,
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 너희들의 법을 따라서 너희들의 신을 섬기면서 자유롭게 살아라. 단지 페르시아 제국을 거슬러서 군대를 키운다던지 반대를 키워서는 안 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페르시아가 너무 넓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이 아시던 분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엄청나게 큰돈을 벌었고, 그래서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2년을 채 못살고 다시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떻게 되신 거예요?" 하고 물으니 "집이 너무 넓어서 관리하기가 힘들었어요. 아침에 청소하고 나니까 저녁때가 되었어요."
부러운 소리, 배부른 소리이기도 하지만, 적당한 것이 좋은 것 같으시다고...
그래서 페르시아는 각 지역에 총독 한 명씩 두어서 감시만 하고
"너희들 각자 자유롭게 살아."
그 때문에 그들이 바빌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서를 보게 되면은 바빌론의 유다민족들에게 빨리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였는데,
우리나라 역시 36년간의 일제의 통치 안에서도 제일 교포들은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삶의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다시 복원하고 성전을 짓는 제2 성전 시대가 시작됩니다.
또 여기서부터도 쉽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정책을 통해 바빌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세우게 될 나라를 꿈꾸는데, 그 나라의 형태가 서로 맞지 않았고...
하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메시아사상을 중시한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를 중심으로 한,
유배 전에 임금들이 잘못을 해서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다윗의 후손 중에 한 명을 임금으로 우리는 새로운 왕국을 세울 거야!라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제관들은,
"우리 왕정해봤자야 그러다 망했잖아. 그것은 안될 거야." 그래서 Theocracy(신정),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를 꿈꿉니다.
그들이 유배에서 돌아왔는데, 여기서부터 역사 기록이 그다지 충분하지 않습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문헌이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인 정보가, 오늘날 우리가 개념 하는 역사적일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냐? 에 관해서 오늘날 연구가들은 조금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갔다 와서 일시적인 신정국가를 세운 것 같습니다.(제관들이)
하느님을 대리해서 제관들이 통치를 하는데 그 통치가 이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의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만 국회의원들의 행태가 국민들로부터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정치를 하면서 변해가는,
그래서 누군가가 여의도에서 국회의원을 몰아내고 천주교신부들을 국회로 보내서 나라를 통치하게 하자.
잘될까요?
"몰라요."
"모른다는 분은 점잖게 대답하시는 것이고, 몇몇 분들은 자신 있게 '안 돼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제들이 잘 못하는 게 있습니다. 타협하는 것을 잘 못합니다. 사제들은 신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서 순교를 할지언정 타협은 안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정치가 힘들다고 하셨고, 정치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칼이나 총으로 싸워서 해결했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말로 문제를 풀어보자고 하였고, 따라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말을 잘해야 합니다.
신부님께서도 고등학교 때 영어공부를 할 때 좋은 영어지문을 가지고 공부를 했는데 미국 대통령들이 연설문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 가지 불행하게 느끼는 것은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국어 교과서에는 우리 대통령들의 연설문과 같은 것이 없을까? 우리 대통령들이 정치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두구두구 읽을만한 문장들을 남기는 그러한 분들이 아직은.. 만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몇몇 분들의 연설은 기억할 만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 그 얘기를 하게 되면 신부님께서 지난번 선거 때에 누구를 찍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말씀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통치라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고,
유배에 돌아와서 그들이 50년의 유배 시간을 보내면서 '이렇게 하면 잘될 거야!'라고 꿈꾸었는데, 그래서 그것을 했는데, 그게 안된 것입니다. 절망한 이스라엘..
그 절망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은 두 가지 길로 나아갑니다.
첫 번째 노선은 묵시문학입니다.
묵시문학은 문학적인 형태고 콘텐츠 내부적인 내용은 종말론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항상
"그날이 오면... 우리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고(유배생활로 우리는 정화되었으니까), 멋진 하느님 나라를 꾸밀 것이고 그 하느님 나라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 그 영광을 보고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올 것이고, 거기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면 더 이상 사람들이 싸울 일이 없을 테고.
칼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고 창을 녹여서 보습을 만들 거야. 온 세상이 평화로울 거야."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그 정도보다 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늑대와 양이 서로 함께 뛰어노는 세상,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집어 넣어도 물지 않는 세상이 올 거야." 하는 우주적인 세상을 이야기하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웬 걸???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불의와 폭력과 타락이 만연해 있고, 그들이 절망합니다. 그러기에 종말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종말은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1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 땅 그 하늘이 끝나버린 것입니다.
"하느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로부터 우리가 꿈꿔왔던 그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끝내십시오.
끝내고 리셋ㅡ 그리고 새로 시작합시다!"
그래서 제3 이사야서 후반부를 읽다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창세기 1,1장의 하늘과 땅은 옛 하늘과 옛 땅이고 이제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시오.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시문학의 종말론입니다.
이제 두 번째 길이 있습니다.
"야~ 이제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안에서는 우리가 그런 희망을 좀 갖기가 어렵겠다."라는 면에서는 종말론과 결을 같이하는데 그 해법이 다릅니다. 차라리 굉장히 현실적으로 살아가자.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서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자.
그래서 사람들은 지혜에 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등장하는 이후에 헬레니스트 제국이 고대 근동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데 그 시기에 헬레니스트 세계의 중심 사상은 지혜사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새로 접하게 되는 헬레니즘에 지혜에 관한 성찰들을 수용하면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지혜의 방법을 생각해 보자. 두 번째 길이 생깁니다.
제2성전 시대의 갈등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 흐름과, 지혜사상적인 흐름으로
하지만 이 두 가지의 흐름은 전부다 한 가지 생각으로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 결코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인, 페르시아 제국의 시기가 끝나고(알렉산드리아에 의해서 멸망한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죽고 난 다음에 전체적으로 고대 근동의 세계가 5개 내지는 7개로 분할이 되는데 이스라엘에게 제일 영향을 많이 주었던 나라는, 초기엔 이집트 지역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고, 그리고 100~150년 정도 프톨레마이오스에 지배를 받다가 이스라엘 보다 더 북쪽에 있던 시리아 지역의 셀리오코스라는 왕조가 힘을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이 셀리오코스 왕조의 지배에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 셀리오코스의 황제가 안티오코스 4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라 했는데, 그는 막강한 군사력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중한 세금을 내게 하고 급기야 신전들을 약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피파네스라는 말은 현현이라는 말로 "나는 신의 현현이다."라고 하면서 신전들의 보물을 약탈했습니다. 그 신전의 보물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유다인들이 참지 못하고 마카베오 가문이 혁명을 일으켰고, 그들이 일으킨 혁명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내자, 안티오코스 4세는 마카베오 가문을 하나의 왕조로 인정하여 "이스라엘 지역은 너희들이 다스려라."라고 하면서 하스모니아가 왕조 시작됩니다.
그 하스모니아 왕조의 이야기가 바로 마카베오 상하권의 내용입니다.
마카베오 상하권은 사실 마카베오 상하권이라 부르면 안됩니다.
왜냐면 열왕기 상하권은 하나의 책이 너무 두꺼워서 둘로 나눈 것이고 역대기 상하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카베오 상하권은 마카베오 1권, 그리고 2권은 서로 똑같은 역사를 썼지만, 하나는 마카베오 1권의 관점에서 다른 하나는 마카베오 2권의 관점에서 썼습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두고 열왕기와 역대기가 있듯이~
똑같은 이스라엘의 하스모니아 왕조를 두고서 마카베오 1권이 있고 마카베오 2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구약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카베오 3권도 4권도 있습니다.(외경 쪽의 문헌)
그중에 어떤 책은 에티오피아어로 쓰여있는데, 신부님께서 학생 때 논문을 쓰기 위해 에티오피아어를 1년을 공부했고 결국 그 문장을 읽었는데, "이건 내 논문과 아무 상관이 없었구나."라는 것을 아셨다고...
인생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고.....^^
마카베오 1권과 2권은 두 개의 역사를 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쓴 이야기더라. 여기까지 이해하셨으면 이제부터 부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2 마카 7,14 그는 죽는 순간이 되자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기억하시겠지만 이게 일곱 형제의 순교 다음에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아들이 죽으면서 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약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세 번 중에 한 번입니다.
2 마카 12, 43-45
43 그런 다음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은 이천 드라크마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훌륭하고 숭고한 일을 하였다.
44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마카베오가 전쟁을 하는데 유다인들이 많이 죽습니다. 그 죽은 이들을 보니까 품 안에 이상한 우상들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위해서 유다 마카베오가 속죄 제사를 바치기 위해 돈을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위한 속죄 제사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거기에서 마카베오 저자는 44절에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 마카베오는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중요한 부분은 2 마카 7,14절의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그러나 나는 누릴 것이오!^^)
이 뜻은 고대 유다 사상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부를 때도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그러고 나서 "온 세상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다." 축복!
그런데 고대 세계에서 축복은 죽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나서는 지하 세계에 들어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죽고 나서 천국에서의 삶은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살아있을 때 복을 받아야 합니다.
A라는 사람이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데, "너가 하느님을 부인하면 너에게 맛있는 것을 많이 주고,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너를 죽여버릴 거야"라고 했을 때 "나는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겠소. 차라리 나를 죽이십시오." 하면 그는 하느님께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했으니까.
그런데 그냥 죽어버린다면?????!!!!!!!
그래서 구약에서 부활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욥기도 읽어보세요.
욥도 살아서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았습니다. 현세적이고 현실적인...
부활의 이 질문에 대해서 2마카베오의 저자는
"죽는다고 해서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의 주권자로서 우리를 다시 부활시켜, 그래서 그가 살아있을 때 받지 못한 상을 받게 하시는 것이야."
우리 그리스도교의 개념에서 보면, 여기서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부활이라기 보다는 "회생" 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죽었던 라자로를 불러내십니다. 그건 부활이 아니라 회생입니다.
언젠가 다시 라자로는 죽어야 할 운명으로 불러 나오고, 예수님의 주권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부활은? 회생이 더 가깝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개념을 에제키엘 예언자가 이야기합니다.
에제 37,11-14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라고 말한다.
유배 갔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느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내용입니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
앞부분의 뼈들에게 예언하는 장면, 또 숨들에게 예언하는 장면에서 창세 2장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는 대목처럼 무덤에 있던 시신들, 뼈만 남은 시신들에게 다시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넣어서 그들을 되살린 다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이런 그림을 에제키엘 예언자는 그려줍니다.
그런 구약의 초보적인 부활관이 신약 성경에서도 발견됩니다.
마태 27,50-53
50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53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성전 휘장은 하느님이 계시는 지성소와 성전의 일반적인 영역을 구분합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성전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구약에서 사울이 하느님의 명을 거스르자, 하느님의 영이 사울을 떠납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다윗에게 도유 하자 하느님의 영이 다윗에게 가 머무르는 것처럼,
지금까지는 하느님의 영이 성전에 있었지만, 성전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지면서 하느님의 영이 성전을 떠납니다. 그러면서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신적 현현의 징표들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를 좀 더 섬세하게 읽으신 분들은 다음 문장에서 걸리셨을 겁니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이건 뭐야? 뭐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마태오 복음서 신학에서는 종말이 예수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종말이 시작되었으니까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종말신학과 부활에 대한 사상이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부활을 믿던 사람들이 있었고,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활을 믿던 사람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고,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처럼 부활을 죽었던 시신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장례를 지낼 때 무덤을 파서 시신을 묶고 돌로 막는데, 시신을 묻을 때 세워서 묻었습니다.
예루살렘 방향으로~~~
종말이 시작되었을 때 빨리 예루살렘으로 와야 하니까, 좋은 스타트를 끊어야 해서,
바리사이파의 부활관은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회생관이 맞을 텐데.
신약성경의 문헌임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부활관이 마태 27장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능에 관해 이야기하시면서
요한 5,28-29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유다 전통의 부활관, 회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생각들이 신약성경의 텍스트 안에서도, 물론 그리스도교의 부활과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들을 우리들이 이렇게 만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바리사이파의 부활관이 옳다면 20대 때 죽어야죠 ~ ㅠㅠ
나중에 부활했는데 무릎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고 이러면 곤란하잖아요~ ㅜㅜ
피부도 탄력도 있고 생생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 아닙니까?? 에효
그런데 여기서 바리사이파의 부활관 첫 번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은,
사두가이파의 부활을 부정하는 모습입니다. 구약에서 부활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지혜사상입니다.
지혜 사상과 같이 사두가이 파는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은 복을 빌어준다. 축복한다. 는 말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이해합니다.
오늘날에도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질문을 했습니다.
"개종한 이유가 뭡니까?"
90%가 넘는 개종한 유다인들이 "유다교에는 사후에 관한 가르침이 없습니다.(After Life) 나에게는 그게 궁금한데..."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물론 랍비들의 가르침을 보면, 죽음 이후에 관한 여러 가지 랍비들의 사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교의 교리로서 사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두가이들이 있습니다.
사도 4,1-2
1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이 다가왔다.
2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
왜 부활을 가르치지? 부활 같은 것은 없는데?? 사도들의 입장입니다.
마태 28,13-14
13 "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하여라.
경비병들의 보고를 받고 대사제들이 이야기한 부분입니다.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이 잘못해서 시체를 뺏겼습니다. 그러면 빌라도에게 혼날 텐데, 우리가 그런 일을 없게 해 줄 테니까 제자들이 저 시체를 훔쳐갔다고 전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면 자신들의 처지가 난처해질 테고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흔들리게 되는 것으로,
실제로 이 문제는 중요했습니다.
성경에 있지 않는 성경 외에 문헌 중에서, 고대 역사가 중에 유다 출신으로 플라비우스 요세피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쓴 작품 중에 "유대 고대사", "유다 전쟁" 이 유명한데, 이것에서 모두 바리사이가 사두가이를 소개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느 점에서 구별되느냐?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었고, 바리사이는 부활이 있다고 믿었다.
라는 내용을 강조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제자들의 주장을 부정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주장 :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
두 번째 주장 :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나중에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과는 다른 사람이다.
이런 사두가이들의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그리고 내 손과 발을 만져 보아라.(루카)"
"내 손에 있는 못자국을 만져보고 내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만져 보아라." (요한 복음서에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따라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예수와 부활한 예수는 동일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사두가이 주장에 맞서서)
살아계신 예수님께 찾아온 사두가이들의 질문
마태 22,23-28
23 그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4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죽은 이의 아내와 혼인하여 그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25 그런데 저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혼인하여 살다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서 아내를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26 둘째도 셋째도 그러하였고 일곱째까지 그러하였습니다.
27 맨 나중에는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8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 일곱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그들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렇네 그렇네 하면 여러분들은 아이큐가 150을 넘는 분들입니다. 설명이 필요한 텍스트입니다.
모세의 이야기가 이해가 안 되지만,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 중에 아들이 없는 형에게 아들을 양자로 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마태오복음에서는 유다 사회에서 형수가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해서, 다소 징그럽고 이해가 어렵지만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두가이가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세의 율법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틀릴 리가 없는데 하느님께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괴상한 일을 만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없고 죽으면 끝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답이 정말로 놀랍습니다.
"야~~~ 너희는 몰라도 정말 너무 모르는구나, 너희들이 나중에 부활하면 천사들과 같아져, 그리고 서로 결혼하는 일이 없이 형제자매로 살게 돼^^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 신부님께서 독신으로 살고 계십니다.
성직자분들은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미리 지상에서부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로 평등하게 어떤 특혜나 특권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윤리 신학자들은 천국과 지옥이 다른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혜나 특권을 쫓는 이들은 불행할 수 있을 것이므로.....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늘나라를 미리 살아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 안에서 우리를 조금씩 낮추고 조금씩 상대방을 배려하고 조금씩 더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하고 돌보는 세상.
성전은 하느님의 공간이지만, 그 현실이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집만 있다고 가정이 아니듯이, 가족들이 나누는 사랑과 사건들이 있어야 합니다.
시신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 시신이 회생한 것을 부활이라고 믿는 바리사이파, 신약성경의 텍스트는 그 점을, 바리사이파의 회생과 예수님의 부활이 같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홀연히 그 가운데에 나타나....(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사이파가 이야기하는 시신의 회생도 아니고 부활한 예수님 육신인 시체가 되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종말론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옛 생명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죽었다가 부활해야 한다는, 그런 인간의 육신은 옛 육신이 아닌, 즉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는
"홀연히 등장하시는 예수님" "홀연히 거기에서 떠나실 수 있는 예수님" 예수 부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복음서의 텍스트들은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이야기하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부활은 사두가이파의 이야기도 바리사이파의 부활 이야기도 아닙니다.
세 번째로는 부활에 관해서 그리스도 신앙이 받아들이지 않는 또 하나의 주장입니다.
"영지주의의 부활관"입니다
1. 사두가이파
2. 바리사이파
3. 영지주의 (Docetism, 犌現說)
예수님이 실제로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3D 영상처럼 나타나신다. 그리스 철학이 이야기하는 영적이 상태로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육신을 갖는 인간이 겪는 고통을 함께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 영지주의에 가현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유령이 아니야?" 하고 두려워하는 장면이 요한 복음서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유령이 아니야, 나를 만져봐...."
루카 복음서에서도 요한 복음서에서도 우리가 보면 조금 웃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먹을 것이 좀 없냐?" 하시면서 생선을 달라고 하시고, 제자들에게도 먹이시는 장면
어느 신학자가 이 대목을 묵상한 책의 제목은
"그때 그 생선은 어떻게 됐을까?"입니다. 로마 기초신학자가 쓴 책의 제목입니다.
이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부활한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었다. 영적인 존재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신이 갖고 있는 그와 같은 부활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육신 부활을 이야기하고 성경은 육신 부활을 뒷받침합니다.
우리는 부활했을 때 단지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도 부활하는데, 그 시체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그러면 김대건 신부님은 큰일이 납니다; 합체하시려고 하신다면... 요)
혹시나 까칠하신 분들이 계셔서
"아니 손에 상처도 있다면서, 육신의 부활이라면서 그 육신 부활과 다르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야?"
신약성경의 시대에도 이런 분들이 계셨을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1요한 3,2 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 말로 쓰여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개가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특히 이 마지막 문장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냐 하면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에 관해서 중요한 것은 그 앞에 나와있는 문장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가 신부님께 "부활이란 게 뭐에요?" 하고 묻는다면
"부활은 우리가 죽었다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인데 그게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사두가이파처럼 누군가 부활이 없다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아니야.
바리사이파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체가 되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아니야.
영지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영혼만 부활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한다면 그것도 아니야."
"그럼 육신 부활은 무슨 의미입니까?"
"교회가 가르치는 육신 부활은 인간이 나중에 부활을 할 때 온전하게 다시 부활한다는 뜻이야. 우리 인간의 어느 한 부분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전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우리와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을 때, 온전한 인간이셨듯이, 우리도 온전한 인간으로 하느님 나라에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라는 의미로 우리는 육신 부활을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이것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쯤 들어본 프리메이슨이라는 그룹인데, 다빈치 코드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빈치 코드는 신학적으로 보면 신부님께서 점수를 주신다면 D- 를 주실 것 같다로 하셨습니다. 신학자들의 조언을 받아서 썼으면 좋았을 텐데...
영화의 흥미성에 비해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많다는 생각으로 보셨다고...
프리메이슨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이었는데, 아이작 뉴턴, 모차르트,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등
요즘도 프리메이슨은 비밀 조직이기에 있을 것 같은데 부시와 트럼프는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미국식 조크^^)
그 프리메이슨은 인간이 영혼만 부활한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프리메이슨이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을 표현하고자 "화장"을 했습니다. 인간은 영혼만 부활하니까 육신은 태워도 상관이 없다. 그 바람에 천주교회에서는 한동안 화장을 금지했었습니다.
오늘날도 누군가가 "나는 육신의 부활하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화장해라."라고 하면은 그 사람이 신부님의 제일 친한 친구라고 할지라도 장례 미사를 해주실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 부활을 부정했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도 화장을 허용합니다만 그분들 중에 누군가가 육신부활을 부정한 경우에서 화장을 하였다면 장례 미사를 해 주실 수 없다고,
우리는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온전한 인간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 온전성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지 부활에 관해서만 온전성이라는 말을 쓸 것인지에 대해서 묵상을 해본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매일매일의 일상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도 우리는 온전한 인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을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다른 한 부분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다른 한 부분은 세속적으로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앉아있던 서 있던, 깨어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난 항상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살아가다
그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부활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부활시기에 함께 묵상해 볼 수 있는 좋은 주제가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강의를 기다리며.....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멘! 참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