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중국과 수교 이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화교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부동산 문제, 비자 문제, 화교에 대한 정책이 대부분 좋아졌습니다. 중국과 수교가 되면서 대만 대사관처럼 공적인 공간은 중국에 넘어가고 화교 학교의 거취가 문제가 되었는데, 화교 학교는 정치 성향이 없다고 인정되면서 대만령으로 인정하기로 되었습니다. 지금 부산화교협회와 학교는 청나라 때부터 지켜 온 대만 땅입니다. 조선과 청나라가 조청 수륙 무역 장정을 맺고 조선에서 청나라 상인들에게 주었던 바로 그 땅입니다. 1884년부터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속 대만입니다.
처음 우리가 한국에 넘어올 때는 중국 산동성 출신으로 넘어왔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이념 때문에 중국 국적이 아닌 대만 국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만 국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교육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화교 학교는 대만에서 교과서를 받아서 교육을 시킵니다. 모든 교육 과정이 대만과 똑같습니다. 한국에 있다 뿐이지 모든 것이 대만식입니다. 한국어 선생님 빼고는 선생님들도 모두 대만에서 교육받고 오신 분들입니다. 여기서는 한국어가 외국어입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우리 때와 다르게 자기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또 부모 중 한 사람이 한국 사람이면 특별히 대만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우리 아이들은요?
나는 딸이 둘 있습니다. 둘 다 대만으로 대학을 보냈는데 하나는 대만 사람과 결혼해서 대만에 살고 있고, 둘째도 대만에서 살고 있습니다. 결혼도 거기서 할 예정입니다. 내 경우는 아내를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만났습니다. 대만 사람이지요. 아이들 외가가 대만이니 더 자연스럽게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한국 남자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대만으로 대학을 보냈다는 게 맞습니다. 뭐 지금은 한국 사람들의 성향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엔 한국 사람에게는 딸을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매 맞고 사는 여자들이 많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특히 딸을 가진 아버지들은 딸이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막았지요. 하지만 요즘은 그런 부분이 많이 개선되지 않았습니까. 맞고 사는 여자들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만약 우리 딸이 한국 사람과 결혼하려고 했다면 막지는 않았겠지만, 그렇게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행히 거기서 만나서 결혼해 주니 좋습니다.
대만 사람인 아내도 나 때문에 한국에 나와 사니 불만도 있고,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요. 여기는 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혼자 두고 대만에 갈 수도 없으니 지금은 내외가 한국에 있는 겁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도 한국에 직장을 구해서 돌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대학 다닐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막내 동생이 어려서 어머니가 한국을 떠날 생각을 못하셨습니다. 한국에 계시기로 한 어머니의 결정에 따라 나는 장남으로서 가족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다른 동생들은 대만에 남고 저만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이후로 다른 동생들은 모두 대만에 자리를 잡고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저만 이렇게 남았습니다. 돌아가야지요. 아내도 고향이 그곳이고 내 가족들이 모두 거기에 있으니 남은 시간은 거기서 보내고 싶습니다.
여기가 그립진 않겠느냐고요? 물론 한 번씩 생각나면 들어와서 한 바퀴 휘 돌고 가야겠지요. 그럴 겁니다. 내가 살아온 곳이니까요. 생각날 겁니다.
저는 왕○침이고 화교 3세대입니다. 지금 부산화교고등학교
여기서는 한국 대학교에 가는 반과 대만 대학교에 가는 반이 나뉘어져 있어요. 전체적인 교과 과정은 같은데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학생들은 한국의 역사라든지 한국 학교에 갔을 때 필요한 과정을 좀 더 배워요. 하지만 한국 대학교에 가려면 입시에서 면접만 보기 때문에 입시 스트레스는 적어요. 대만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특혜가 있지만 일단 시험을 봐야 하고 시험에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방과 후 수업이 1시간 더 있어요. 친구들을 소개할게요.
기숙사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 진○민이는 대구
그리고 한○연은 부산이 집이에요. 연이 부모님도 하단에서 중화요리점을 운영하고 계세요. 연이 엄마는 중국인이시고 아빠가 화교세요. 또 연이는 중국 청도 시에서 4살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살다가 왔어요. 매년 방학 때마다 한국에 들어왔었는데도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요. 어릴 때부터 계속 중국에서 살다 보니 한국어를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대요. 학교에서는 중국어로 수업을 하니까 상관없고 우리가 다 중국어를 잘 하니까 학교에서는 별 문제 없어요.
저도 중국에서 몇 년간 살았어요. 중국에 누가 있어서 간 건 아니에요. 제가 어릴 때 중국인이면서 중국어를 못한다고 중국어를 배우게 하려고 보내셨어요. 어학 교육을 받으려고 중국에 간 거죠. 그때는 제가 어려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같이 가셔서 집을 빌려서 생활했어요. 중국어를 배우러 중국에 갔을 때 한국 학생들도 굉장히 많았어요. 중국으로 조기 유학을 많이 오고들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한국어와 중국어 둘 다 어느 정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중국어나 한국어 어느 한 쪽이 더 편한 쪽은 없어요. 비슷해요. 저는 한국어를 먼저 습득한 경우니까요. 가족들이 중국어를 잘하니까 그런 영향도 있었죠.
학교생활은 그냥 그래요. 수업하고 기숙사에서 지내다 가끔은 친구들하고 시내로 외출하고 또 부모님 보러 광주 가고…… 특별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학교가 차이나타운 중심에 있잖아요. 게다가 외국인 거리[텍사스 거리]와 붙어 있으니까 거리에 술집투성이죠. 말이 좋아서 외국인 거리지 9시만 되면 술집에서 여자들이 나와요. 10시에는 외국인 거리 통행이 제한되어 있는데, 특별히 관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장사도 오히려 외국인 거리가 더 잘되는 것 같아요. 그냥 부르기 좋게 외국인 거리지 그냥 텍사스촌이에요. 이름만 다르게 해서 부른다고 이 거리가 좋은 이미지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차이나타운까지 술집이나 외국인 대상 상점들이 들어와 있어요. 차이나타운 거리 안에도 화교들 상점들로만 구성된 건 아니에요.
화교들이 장사를 하는 곳은 간판에 ‘화상(華商)’이라는 문구가 조그맣게 쓰여 있어요. 주로 구화교들이에요. 오래전부터 장사를 계속 해 오신 분들이죠. 학교 앞에 있는 신발원
우리 친척들은 한국에도 있지만 대만에 주로 살고 있어요. 다 화교이거든요. 그런데 친척 분들이 점점 대만으로 나가고 있어요. 아마 나중엔 제 가족만 남을 것 같아요. 저는 대만으로 대학을 가려고 해요. 그래서 대만에서 주민등록증을 취득하고 싶어요. 대만에서는 그게 가능하거든요. 어차피 성인이 되었을 때 국적을 선택해야 하는데 저는 대만 국적을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대만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대만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많은 부분에서 한국 사람들에 비해 불평등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을 아니까요. 제가 한국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것과는 별개로 어딘가에 정당하게 귀속되고 싶어요.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한 나라의 완벽한 국민으로 살고 싶어요. 주민등록증이 중요하냐고요?
네,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한국 사람들은 나이가 되면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거라서 잘 모르시겠지만 그 카드 한 장이 없는 우리는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불편을 겪으면서 사는데요. 불과 몇 년 전에는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도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그게 없으면 평생 떠다니는 피난민이나 다를 게 뭐예요. 내 나라가 없는 거잖아요. 대만 국적은 가지고 있지만 국적만 있지 주민등록증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대만에 가서 살아야만 주민등록증을 줘요. 저는 누가 ‘너는 어디 사람이냐’고 하면 화교라고 해요. 그리고 ‘국적이 뭐냐’고 하면 대만이라고 하고요. 연이는 중국 사람이라고 한대요. 그리고 민이는 자기는 그냥 화교래요. 화교만이 자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서요. 우리는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달라요.
저는 화교 역사를 배우거나 한 적은 없어요. 누가 가르쳐 준적도 없어요. 그냥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또 자라면서 주어진 상황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지금 저희는 사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어른들 말씀은 예전보다 정책적으로 규제가 많이 완화되기는 했다는데 잘 모르겠어요.
귀화를 하는 것도 한 부모가 한국인일 때와 모두 다 화교일 때의 조건이 다르다고 해요. 아직 저희들은 어려서 모르는 것이 많지만 점점 자라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경우를 목격하게 되거든요. 그럴 때면 정말 화가 나요. 저는 한국말을 할 때와 중국말을 할 때 한국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껴요. 아니 다르게 대우해요. 말도 더 함부로 하고 이를테면 무시하는 거죠. 저는 광주에서 살 때는 잘 몰랐어요. 거기는 화교도 그렇고 외국인도 많이 없어서요. 그런데 부산으로 와서는 그런 것을 많이 느끼게 되더라고요. 부산에서는 취업 비자로 들어오는 외국인도 많고 또 요즘은 중국 본토 사람들도 쇼핑하러 많이 오잖아요. 예전보다 거리를 다닐 때 마음 상할 때가 많이 있어요.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는데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를 거예요.
그냥 외국인이라 신기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요? 외국인이라 신기한 것은 저희도 이해해요. 하지만 그것은 ‘조롱’과 ‘경멸’이에요. 쇼핑을 하러 오는 돈 많은 중국 본토인들에게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앞에서 웃으면서 바가지를 씌우고요. 일하러 온 중국 사람들은 멸시를 해요. 연이도 부모님이 중화요리점을 해서 가게에서 일을 도와드릴 때가 있는데 사람들이 연이가 말하면 웃고 따라하면서 놀린대요. 그런 건 늘 있는 일이에요. 10대나 20대는 특히 심해요. 길에서 걷고 있는 저희들 뒤에서 “짱깨 새끼들, 집에 가서 짜장면이나 팔아”라고 해요. 한국 사람들에게 화교는 중국집이나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는 거죠.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라고 하지만 정말 중국집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던 부모님 세대의 현실과 상처들을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른들이 우리에게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당부나 부탁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직접 겪은 세월은 아니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라고요?
아뇨. 저희는 그런 말을 항상 듣고 있어요. 그래서 아예 국적을 바꾸고 한국 사람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아닐까요? 차별을 당하기 싫으니까 그냥 한국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거죠. 지방에 따라 좀 다르긴 한데요. 서울은 화교 인구가 가장 많으면서도 오히려 중화요리 집을 하는 화교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요. 전문직도 많고 중국어보다 한국어가 더 편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민가 학교를 선택할 때 서울을 제외한 것은, 서울화교학교는 학생 수는 많은데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다고 해요. 여기 부산화교학교는 그중에서 적당한 학생 수와 보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에요. 부산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화교들이 보수적인 건 사실이죠.
그런데 이제 여기 학교 학생들도 순수 화교가 많이 줄어들고 있고 신화교가 늘어가고 있어요. 다문화 가정의 중국인 엄마의 아이들은 아빠가 한국 사람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당연히 국적을 한국으로 선택해요. 또 조선족 아이들도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국적이 중국이니까요. 그 아이들의 성향도 화교와 같진 않아요. 학생 수도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해요. 점점 한국 학교로 보내는 젊은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사실 우리는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에서는 우리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은 분명 아니지만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한국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죠. 언제까지 화교는 ‘중국집’으로 대변되어야 하나요?
사실 어른들은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에 한국으로 오신 분들이세요. 그래서 지금 중국 사람들과 저희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대만 사람들과도 같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대만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저 화교는 화교끼리 만나야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일이든 강요는 하지 않으시죠. 단지 어른들의 생각을 먼저 저희들에게 알려주세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사람이든 중국 사람이든 또 외국인이든 상관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앞으로 대만에서 살려면 대만 사람이나 화교가 좋겠죠. 민나 연이도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될 때 화교나 대만 사람과 하려고 해요. 한국 사람과 결혼을 할 확률은 0%라네요. 둘은 저보다 훨씬 더 확고해요. 아마도 연이는 부산에서 살면서 한국어가 서툰 것 때문에 놀림을 당한 게 큰 것 같고, 민는 역사의식이 강한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화교 청소년의 표본은 아니에요. 우리는 대만 대학으로 진학해서 거기에 삶의 터전을 갖고자 하는 부류이고요. 다른 친구들 중에는 자신을 한국인으로 생각하는 부류와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는 부류도 많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어도 중국어도 완벽하지 못하니 문제입니다.
5월말에 차이나타운 축제를 해요. 우리 학교에서는 남학생들이 탈춤을 준비하고 있어요. 전통 무용을 배우려고 대만에서 무용 선생님도 초빙했어요. 용탈과 사자탈을 쓰고 춤을 춰요. 지금도 매일 방과 후에 연습 중이죠. 저희 여자애들은 부채춤을 춰요. 한국과는 조금 다른 모습인데요. 나중에 오셔서 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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