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사천왕문 주련에 걸린 문구이다.
靈山會上言雖普, 영산회상언수보
少室峰前句未親; 소실봉전구미친
瑞草蒙茸含月色, 서초몽용함월색
寒松蓊鬱出雲宵. 한송옹울출운소
주련 문구가 선문염송에 나오는 원문과 다르게 판각되었다는 고증이 있다. 親과 宵의 운자가 맞지 않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원문보다 주련 문구가 잘 됐다고 느낀다. 번역을 해보면 알 수 있다.
영산회산에서 부처님은 대중을 위해 비록 널리 설하였지만
소림굴에 면벽한 달마는 한 구절도 친하지 않았네
길상스런 풀은 삐죽삐죽 솟아 달빛을 머금고
독야청청 찬 솔은 구름 자욱한 하늘을 벗어났네
대중을 위해 널리 설한 것과 한 글자도 설하지 않은 것이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 불교를 한다면서 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가르치는가? 이런 질문은 진리를 접근하는 방식에 두 가지 차원이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차원이란? 말로 할 수 없는 차원(절대불변)과 말로 할 수 있는 차원(상대유한)이다. 절대불변의 차원에서 설해진 진리를 진실제, 승의제, 제일의제라고 하며, 상대유한의 차원에서 설해진 진리를 세속제라고 한다. 진실제 즉 말로 전달 할 수 없는 것은 언어와 문자를 거부한다. 실제는 戱論희론(이렇다 저렇다는 견해가 부풀려지는 것)이 적멸하여 言語道斷언어도단(언어의 길이 끊어졌다)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진실제에 상응하려면 無心으로 통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묵히 壁觀벽관하였다. 그후로 敎外別傳교외별전(경전을 학습하는 것 외에 口傳으로 전수하는 법)하여 不立文字불립문자(문자를 의거하지 않고 직접 체득하다)하여 깨달은 涅槃妙心열반묘심(삼독이 소멸한 고요하고 밝은 마음)을
以心傳心이심전심(스승과 제자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함)하고 師資相承사자상승(스승에서 제자로 대를 이어가다)해왔다. 한편 말로 할 수 있는 차원에서는 처음 입문한 사람을 이끌어서 이해를 점점 높여 실천할 수 있게 차례와 단계(次第)를 설정하여 수준에 맞게 설법해야 한다(對機說法). 이런 까닭으로 언어와 문자에 대한 입장도 서로 다르다. 진실제의 입장에서는 언어와 문자는 분별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므로 언어와 문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 한다. 그러나 세속제의 입장에서는 언어와 문자가 비록 진리 자체는 아니더라도 진리로 인도하는 표지판이나 달을 잡으려는 손바닥 역할을 하기에 잠정적인 유용성을 인정한다. 더구나 선지식이 설법할 때 경우와 처지, 상황과 근기에 꼭 맞는 말을 할 것이 요청된다. 그래서 아예 침묵을 지키든지 아니면 말을 하려면 경우에 맞게 해야 한다. 즉 설법에
달통(說通)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보편적으로 설법하는 장면을 시적으로 표현하기를
‘길상스런 풀은 삐죽삐죽 솟아 달빛을 머금고’
달빛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보편적으로 비쳐주듯 부처님의 설법도 그러하다. 키 큰 풀은 키 큰 대로, 키 작은 풀은 작은 대로 자기 분수에 맞게 빛을 받는다. 법을 듣는 사람도 그러하여 자기 이해수준만큼 알아듣는다.
달마대사가 한마디로 설하지 않고 묵묵히 벽을 바라보고 앉은 장면을
‘독야청청 찬 솔은 구름 자욱한 하늘을 벗어났네’라 했다. 구름이 자욱한 하늘이란 번뇌망상과 언어유희로 물들은 중생의 마음이다. 달마대사의 면벽은 찬 솔이 독야청청한 것 같아 일체 세간법을 벗어난다.
문득 벼락이 내려 꽂히니 소나무는 쓰러지고 달도 사라졌다.
펫! 마음이 허하여 공연히 혼자서 지껄였군. 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