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합창단의 연습실 장면
폭염이 계속되면서 아파트 정전소식도 줄을 잇고 있다. 전기를 일시에 많이 사용하여 변압기가 열을 받아 터져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복구하는데 몇 시간씩 걸려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불편과 고통은 짜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전사고가 아니더라도 푹푹 찌는 날씨 탓에 자칫 마음 상할 일도 많이 생긴다. 이럴 때는 시원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아이스케이크를 빨아먹는 것도 좋겠고, 책의 바다에 빠져 설국을 여행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 개성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듯이 이거다 하고 내세울 수는 없지만 소리로 풀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늘은 월요일, 그러니까 팔달문시장 입구 상인연합회3층 문화센터에서 금빛합창단의 연습이 있는 날이다. 오전11시부터 12시30분까지 열리는 합창교실은 금빛이라는 이름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은빛보다 더 빛나는 금빛목소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동안 집안 생활에 얽매여 나를 잊고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도 금빛 햇살이 찾아든 것이다.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금빛 목소리의 황홀한 화음은 가히 환상이 아닐 수 없다.
팔달문시장 상인연합회3층 입구
인원은 평균 60여명이 참석하며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4부 합창으로 운영된다. 언제나 그렇듯 한창석 단장은 단원들 앞에 신바람을 불러오는 '박수 3번 칩시다!'를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항상 오늘을 위해 즐겁게 살자는 인사말과 함께 '세계 최고, 대한민국의 최고, 이훈 지휘자님을 여러분 앞에 소개합니다!'하고 박수를 유도하며 수업이 시작된다.
그러면 좌우 옆 사람과 어깨 주물어 주기와 발성연습으로 몸을 풀고, 요즘 배우는 곡은 '빨간 구두 아가씨'와 '아빠의 청춘'이다. 나이든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전에는 라디오에서 이 노래들이 하루에도 수 없이 흘러나오기도 했었다.
두 곡의 멜로디가 서로 비슷하여 연결해서 부르며 배우고 있다. 지금 다시 불러도 경쾌하고 흥겨운 가운데 젊음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솔 솔 솔 오솔길에 빨간구두 아가씨 똑 똑 똑 구두소리 어딜 가시나...'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쉽게 그림이 그려져 온다. 이훈 지휘자는 그냥 평이하게 물 흐르듯 부르지 말고 군가를 부르듯이 힘차고, 절도 있게 끊어서 가슴으로 부르라는 것이다. 빨간 뾰쪽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어느 오솔길 눈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산들산들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설렌 기분으로 경쾌하게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화음을 맞추다 보면 더위는 사라지고 없다. 노래라면 음치 수준이지만 합창의 화음에 흠뻑 빠져 배우다보니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그냥 애국가처럼 여럿이 제창을 한다면 조금은 알고 있는 노래여서 쉬울 수도 있지만 합창은 그것이 아니다. 테너 소프라노 쪽은 죽어라 소리 높여 부르는데 알토 베이스는 반대로 낮춰 불러야 한다. 그런가 하면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소리~'하며 받아 치고 들어간다. 그리고 되돌이표가 있는 곳에서는 다시 돌아가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그래서 혼자 부르라고 하면 제대로 부를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옆 사람의 소리를 잘 들어가며 박자에 맞춰 따라서 부르는 것도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다. 각 파트별로 부를 때 특히 소프라노의 맑고 깨끗한 화음은 가슴이 설렌다. 회원들의 면면을 보면 과거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남성 팀은 주로 음치 탈출을 목적으로 온 분들이 많지만 여성 팀은 다르다. 학창시절부터 또는 처녀 때부터 노래에 소질이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동네 콩쿨대회에 나가 송아지, 염소, 냄비, 양동이, 양은솥 등을 상품으로 받았다는 분들도 많이 있다. 그런 실력자들이 탄탄하게 받치고 있으니 금빛합창단은 프로 못지않게 돋보일 수밖에 없다.
지휘자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각 파트별로 음정을 잡아주며 풍부한 자신의 성량을 자유자재로 뽑아내며 자랑한다. 목소리도 유전인 것 같다며, 아버지께서 노래를 잘했는데 어머니가 그 목소리에 반해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답게 그는 금빛합창단원들의 마음을 홀딱 빼앗고 있다. 뮤지컬배우로서 그의 음악예술세계의 깊이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틀려도 좋으니 자신있게 부르라며 자신의 소리를 내라고 한다.
오늘도 '빨간 구두 아가씨'와 '아빠의 청춘' 그리고 신곡으로 '경복궁타령'을 맛보기 하며, 기본 곡으로 '청산에 살리라'와 '향수'를 복습하다보면 시간은 벌써 끝난다. '경복궁타령'에는 '에~헤~남문을 열고 파루(쇠북)를 치니 계명산천이 밝아온다. 을축~사월 갑자 일에 경복궁 이룩 일세!...'하며 흥겨움에 빠져 든다. 경복궁이 새롭게 펼쳐지며 그날을 역사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청산에 살리라' 또한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리라...'로 시작된다. 그냥 나는 이 아니라 신음하듯 '응~나는' 으로 끌어 들이며, 청산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맑고 청아하게 학처럼 불러야 제 맛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더위는 언제 느낄 수도 없다. 이렇게 배에 힘을 주어 호흡을 살려가며 노래 부르기란 여간한 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훈 지휘자는 "안 될 것 같지만 하면 된다, 이렇게 멋있는 합창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박수를 치고 활짝 웃어보인다. 저마다의 높고 낮은 목소리를 내며 맞추다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거대 합창단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협화음으로 깨지고 부서지며 만들어 내는 소리의 예술, 그러면서 공연이라는 오르가즘 적 목적을 향해 꿈꾸며 나가는 것 아닐까. 어느덧 배가 고파오지만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은 말할 것 없고,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인생 2모작의 기쁨도 맛보게 된다. 요즘과 같은 무더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피서의 한 방법으로 팔달문 시장 입구 '금빛합창단'을 찾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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