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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부정적인 면 (잠 27:14-16)
14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15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16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이 시간에 “율법의 부정적인 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율법이란 보통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모세 5경을 가리키는데 때로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율법을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는데 모두 613개조로 되어 있고, '지키라'는 강제 조목이 248개, '하지 말라'는 금계(禁戒)가 365개로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당시 사회의 규범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국가에 헌법 형법 등이 있듯이 율법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귀한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여러 제사나 절기나 여러 역사나 예언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설명해 준다는 점이 가장 큰 긍정적인 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율법의 어떤 면이 부정적일까요?
1. 율법은 선하지만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아무리 좋은 소리도 시나 때나 주제나 상황도 알지 못하고 큰 소리로 축복하거나 과장된 친절한 자세는 상대에게 기쁨보다는 불쾌함을 준다는 말입니다. 옛날 수도승들이 바랑 짊어지고 민가로 동냥하러 나오는데 이른 새벽에 남의 집 앞에서 목탁 치고 염불하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복을 빌었는지 모르지만 상대방은 기분 나쁘게 생각했습니다.
바로 율법이 그러합니다. 온갖 아름다운 약속과 축복이 가득합니다. 신 28장을 보면 그 약속이 얼마나 화려합니까? 시19:7-8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그러면서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11절) 했습니다.
그런데 지켜보니까 잘 지켜지지도 않고 율법이 축복이 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율법은 아름답지만 지켜야 할 인간이 너무 약하고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7:10에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실수해도 넌 죄인, 하면서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삿 11장을 보면 입다라는 사사가 있습니다. 입다가 전쟁이 대단히 치열할 것이 예상되는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삿11:30-31)
그런데 불행하게도 입다가 승리하여 돌아올 때 자기를 가장 먼저 소고 들고 춤추며 영접한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입다의 마음에는 엄청난 슬픔과 고통과 절망이 밀려오지만 왜 그 일을 물리지 못합니까? 서원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법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의 취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좋지만 지키지 못한 그 결과는 죽이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그치지 않고 복음까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의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모르고 율법만 알면 대단히 위험합니다.
성경과 이슬람 꾸란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구약에도 범법자나 이방신을 섬기는 자를 사형하라는 비슷한 율법이 있지만 우리가 이슬람과 다른 것은 이슬람은 우리처럼 신약이 없어요. 복음이 없어요. 성경보다 더 심각한 내용을 그들은 그냥 여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도 꾸란이 그들의 폭동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내신 진정한 의도를 파악합니다. 즉 당시에는 신정국가로서 운영상 그렇게 했을지라도 신약시대에는 글자 그대로 여자적이 아니라 마음에 악을 죽이라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돌비가 아니라 마음의 심비라 했고, 할례도 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아무리 강하게 적용해도 출교 수준의 징계를 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이 없이 율법으로만 산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율법의 부정적인 면은 그 정죄와 간섭은 불행의 원인이란 것입니다.
15절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다투는 여자를 비오는 날 물방울에 비유했습니다. 여기 떨어지는 물방울이란 ‘물을 퍼붓는 것과 같은 쏟아지는 폭우’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비는 대개 겨울에 오니까 차디찬 물입니다. 바케스로 찬물을 끼얹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팔레스틴의 가옥은 옥상처럼 편편한데 방수성이 없기 때문에 비가 오면 지붕이 물을 머금고 있다가 더 오면 여기서 저기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때는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 되지만 더 심해지면 퍼붓는 것처럼 쏟아져 사람들이 뛰쳐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고 합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여러 번 나오는데 당시 사회에도 이런 여성들이 많았나 봅니다. 여성들이 들으면 껄끄럽겠지만 남편들이 제일 괴로운 것은 아내의 지나친 간섭입니다. 아내가 지나치게 간섭해서 말 한마디, 그 내용, 일거수 일투족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면 사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제발 좀 그만했으면 싶은데 오늘 잠언을 보면 그 습관 세상 끝날까지 고쳐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원인은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서, 혹은 여성이 예민한 면이 많아서, 아니면 사랑스럽게도 하고 가소롭기도 해서 그대로 두다가 완전히 잡히는 격? 그럴수도 있지만 목적 없이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라보이는 것은 눈앞에 움직이는 남편밖에 없어요. 잠 31장의 현숙한 여인처럼 날마다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기도하고 골몰하고 노력한다면 그럴 수 없어요. 기도가 없다는 말입니다. 잠 31장의 현숙한 여인은 목적이 뚜렸해요. 항상 바빠요. 요리 공부 하나만 해도 쉽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기도하지 않고 자기 발전 없고 한심한 사람이 남편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분 안 계신 줄 믿겠지만 솔로몬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다투는 여자는 비오는 날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아서 남편이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다. 여자분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결혼하려고 사귀다가도 여자가 너무 귀찮게 하면 아무리 예뻐도 돌아서버릴 수밖에 없어요. 대장부를 자기 손 안에 쥐려 말고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율법이 그렇단 말입니다. 율법의 정죄와 간섭이 지나쳐 불행의 원인이란 말입니다. 보이는 행동에서 마음의 죄까지 해당하니까 보통 일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부족한 것도 죄입니다. 율법의 짐 지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거기다가 장로들의 유전 즉 미쉬나(Misgna)라 해서 백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하게 규제하는 무려 6,000개의 온갖 부칙조항을 만들었습니다.
가령 안식일에는 아파도 병 고쳐도 안 된다. 안식일에는 몇 백 미터 이상은 가지 말라. 안식일에는 물도 주지 마라. 혹시 꽃을 가져 왔어도 꽃병에 물을 담는 것은 안식일 지나서 해야 합니다. 안식일에는 추수해서도 안 되는데 지나가다가 밀을 손으로 훑어도 추수라는 겁니다. 또 안식일에는 멜라바인(희게 하기)라 해서 샤워도 할 수 없습니다. 편지지에 선을 긋는 것도 노동이라 해서 금지 됩니다. 중간기 시대 역사를 보면 얼마나 답답한 사람들이든지 전쟁이 일어나 거의 전멸을 당하면서도 싸우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는 손을 씻어라. 위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율법을 범하는 거랍니다. 숨이 콱콱 막힙니다.
이렇게 사사건건 율법 조항이 사람을 잡고 늘어지니 종교의 짐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이 짐에 비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안식을 위해 하나님께 왔다가 열 배 백 배 짐을 집니다. 율법과 미쉬나의 조항들이 얼마나 갈구어대든지 경건한 유대인일수록 얼굴에 웃음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오늘날도 율법에 매이면 웃음이 없어요. 죄 지은 것만 생각나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죄인지도 모르겠고, 또 그걸 어떻게 완벽하게 처리할 방법도 생각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없습니다. 처음 나온 사람은 웃음이라도 있지만 오래 믿을수록 웃음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웃으며 신나게 살지만 교인들은 기쁨도 행복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이면 분쟁하는 교회가 왜 그렇게 많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율법만 알고 복음을 몰라서,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이고 지금도 넘어지고 잘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나를 용서하셨다는 복음이 더 앞서야 하는데 율법이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면서도 속죄의 복음을 뒤집어 쓰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함과 같이 남에게도 관용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율법의 조항이 아닌 율법의 중심인 사랑의 핵심을 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율법의 부정적인 면은 율법은 온전케 하기에 역부족하다는 것입니다.
16절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이 말씀은 앞 절의 다투는 부녀를 다루는 일은 마치 바람을 제어하는 것과 같이 혹은 미끄러운 기름을 움키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태풍이 부는데 바람을 어떻게 막습니까? 오늘날 같이 우수한 현대식 이중창도 바람이 들어오는데 옛날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안은 썰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름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움켜도 손가락 틈으로 빠지는데 한 손으로 움키려 하면 움켜지겠습니까? 이리 빠져 나가고 저리 빠져 나갑니다. 이처럼 여성들이 불리하면 빠져나갈 틈이 많습니다. 가령 여자의 푸념을 남자의 넓은 가슴으로 받아줄 수는 없냐? 그러면 남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면 약자 행세를 합니다. 눈물을 무기 삼아 울면 남자들 또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면 신세타령을 합니다. 내가 가난한 당신 따라 살면서 얼마나 고생한 줄 잊었냐? 이 말 앞에는 남편들은 꼼짝 못합니다. 아니면 내가 늙어서까지 할 말도 못하고 살아야 겠느냐? 위협하면 약한 남편은 버릴까 봐 겁이 나서 두 손 들고 맙니다. 그러다가 기회만 생기면 또 공격합니다. 얼마나 솔로몬이 당했으면 기름에 비유했겠습니까? 특히 오른 손은 권능 권세, 즉 힘으로도 권세로도 안 된다. 다투는 부녀를 고칠 방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잠18:22에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여기 아내는 그냥 아내가 아니라 지혜로운 아내입니다. 지혜로운 아내를 얻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결혼한 경우는 새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말은 반으로 줄이고 현숙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신령한 교훈을 줍니다. 신앙만은 '복음으로 새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말 많고 탈도 많은 율법의 지배에서 갈라서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롬 7장에서 남편과 아내의 비유로 말씀합니다.
롬7:1-2에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고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를 죽이는 율법 남편이 아니라 좋은 예수 남편에게 시집 왔으니 우선 마음부터 평안히 가지라는 말입니다.
어떤 여성이 잘난 남편과 30년을 살았는데 그 잘난 남편은 출근하기 전마다 남들이 하는 사랑의 키스는 고사하고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집안에서 할 일을 빼꼭히 적은 쪽지를 주며 출근합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만약 적힌 사항을 하나라도 빼 먹으면 난리가 나기 때문에 하나라도 빠질까봐 완수한 것은 빗금을 쳐가며 두려움 속에서 일하다 보면 남편이 돌아오는 시간에는 녹초가 되고 맙니다. 그 후에도 배려나 칭찬이란 일절 없고 자기 물건이라도 되는지 꼼짝도 못하게 곁에 있게 해놓고 시중이나 시키고 얼마나 자유를 제한하는지 이렇게 살다 보니 사는 것이 지옥과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원수 같은 남편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 지난 후 그녀는 자기를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는 한 남자와 재혼했는데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어서 자기가 도리어 그 집에 여왕 마님이 되었습니다. 이젠 일을 안 한다고 뭐라고 할까? 늦게 일어났다고 뭐라 할까? 좋은 옷 사서 입고 맛난 음식 골라 사서 먹고 안방에 두 다리 펴고 잠을 자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했겠습니까? 사랑에 감복하여 남편을 위해서 더 열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파를 청소하던 중 쿠션 사이에서 구겨진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조목 조목 빼꼭히 적힌 옛날 남편의 쪽지였습니다. 여인은 그 쪽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넣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적힌 것보다 그 이상의 일을 하고 있어. 이런 쪽지에 적힌 목록이 없이도 더 열심히 잘하고 있단 말야.” 여기서 사랑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사랑이 없는 율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말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강요만 하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도 일거에 용납하시고 우리 마음에 자원함으로 하도록 자유를 주시면서 대신 늘 말씀과 품격으로 감화하시고 때를 따라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주면서 자기를 따라오게 하십니다. 복음의 위대한 점은 용서와 아울러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율법이 요구한 것 그 이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은 우리 힘으로는 의로울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예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방법이지 그 자체가 구원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 잘난 율법 남편 때문에 얼마나 수고 많았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 더 이상 율법의 조항에 얽매이지 말고 율법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그 핵심을 파악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마음 문 활짝 열고 성령의 은혜 속에서 완전한 자유와 행복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