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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회 안에서 선교하자!>의 줄거리:
우리는 보통 교회로부터 선교사를 교회 밖으로 파송합니다. 그리고 전도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안 다니는 사람에게 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의 상태를 보면 밖으로의 선교와 전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고 또 위험하기까지 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은 교회 안에서 선교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해 보여주시는 선민들의 구약교회가 태동하는 모습을 대하면서 더욱 교회 안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선교하자!
(창46:1~34)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6.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7.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오늘 46장 전체 말씀 중심으로 <교회 안에서 선교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선교하자!’
언뜻 보기에 오늘 본문 내용과 연관성이 없는 제목 같아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교회 안에서의 선교가 상당히 시급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인도에서 사역하신 영국 침례교 선교사님이 계시는데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 - 1834)라고 하는 분이십니다. 이 분을 우리가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영국 노스햄프톤에서 출생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16세에 구두수선 기술을 배워서 일하다가 19세 때 기도 모임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 당시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23세가 되던 1783년에 침례교 목사가 되어서 인도로 선교를 떠나게 되는데 상징적인 사건이 연관되어서 우리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노스햄프톤에 이 분이 다니던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가 현재 이슬람의 모스크가 되어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님께서 “기독교 정체성 상실한 유럽의 이슬람화 현황”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독교 신문에 올리신 것을 봤습니다.
‘기독교 정체성’이란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해주는 본질적인 내용을 상실한 유럽이 이슬람화 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슬람교도가 1930년대 2억 300만 명이었는데 지금 현재는 15억 명이라고 합니다. 21%가 이슬람교라는데, 영국의 경우에는 1980년대에 매주 2개의 모스크가 세워졌고, 1980년대에 300개의 교회가 모스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통계적으로 1,800개의 모스크가 있고 3,000~5,000개의 이슬람센터와 꾸란 학교가 운영 중에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영국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5,000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고, 지금도 매주 4개씩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고 합니다.
2,000년 4월 16일 영국 일간지인 더 인디펜던트지에서는 영국 교회가 40년 이내에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런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영국 내의 기독교연구소의 실무자인 피터 브라이어리(Peter Brierley) 박사님은 주일에 출석하는 교인 수가 2,030년이면 419,000명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겁니다. 한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의 숫자가 지금도 230만 명밖에는 안 된대요. 카톨릭하고 다 합쳐도 400만 명이 안 된다고 하면서 2,030년에는 419,000명, 2040년에는 217,000명, 2050년에는 8,800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게 영국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불교가 가장 크게 늘어나고 천주교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슬람도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계속 줄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기사의 제목대로 기독교가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기독교답게 해주는 내용과 핵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교계의 지도자들이 모르고, 목사님들이 모르고, 장로님 권사님들이 모릅니다.
오늘 본문이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서두에 꺼냈을까요?
이제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을 알고 야곱이 70명의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27절까지 12아들의 집안을 따라서 명단을 제시하고, 그 뒤에는 야곱과 요셉이 만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있는 곳으로 가서 70명이 출애굽이 일어나기까지 430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그 사이에 70명의 한 부족으로 내려갔던 사람들이 200만에서 250만 명으로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430년이면 이조 500년에서 70년을 뺀 기간이므로 무척 긴 기간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놓고 우리가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창15: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라고 예언적으로 약속을 주십니다.
내려가는 과정을 보면 2년 기근을 겪었고 앞으로 5년 더 기근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살 수가 없어서 내려가긴 내려가는데 할 수 없어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이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기쁨으로 내려가는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현재 기근이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진행 될 상황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잘 되었다 싶으면서도, 과연 요셉을 따라 애굽으로 야곱의 가족 전체가 내려간 것이 이스라엘에게 참된 구원인가? 아니면 함정인가? 라는 것입니다.
왜 약속의 땅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70명이 200만이 넘는 민족으로 성장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가나안 땅에서 성장하도록 하시지 않으시고 기근을 일으키셔서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에 들어왔는데, 갈 때에는 기쁨 마음으로 갔지만 야곱이 죽고 요셉이 죽은 뒤로부터 400년 동안을 이스라엘 민족인 야곱의 자손들은 노예생활을 해야 되고, 모세가 등장해서 출애굽을 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지금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는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가나안 땅에서 250만 명으로 늘어나면 되는데, 기근 때문에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가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게 하신 다음에 모세를 통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끌고 들어가시는 이런 불필요한 과정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노예생활 400년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더군다나 노예생활이라는 것은 지독하게 힘든 것 아닙니까?
바로의 노예, 애굽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가면서 온갖 힘든 일과 궂은일은 다하고 인간 대접 못 받고 사는 노예 생활을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선민이라고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근으로부터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이 주목적이 아닙니다. 그 연수를 비교해 볼 때에 이것은 미끼 같은 것입니다. 그 뒤에 400년 동안을 노예로 살게 하시기 위한 미끼로 기근을 일으키셔서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그 애굽으로 가게 하시기 위해서 요셉을 미리 보내시고 총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기서 교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 야곱의 12아들에서부터 나온 70명이 바로 선민의 초창기 멤버이고 구약 교회의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중에 200만 명이 넘고 250만까지라고 추정할 수 있는 막대한 숫자로 늘어나는 것이 구약교회의 형성인데, 구약교회가 제 모양을 갖추는 시기였고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 속에서 노예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선민을 선택하신 장본인인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이야기했지만 선택받지 않은 에서의 자손들은 에돔 땅에 머물면서 왕정체제의 국가를 이루고 번성하며 살고 있을 때, 선민들은 이조 500년에 버금갈 정도의 긴 기간을 노예생활을 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교회인 내가 누구고 무엇이냐에 대한 힌트를 얻어야 하고,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에 대해서 알아야만 합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딱 한 가지 이유예요. 노예생활로 400년간을 얽매이게 하신 것은 죄악 된 인간의 증후군을 막으시려고 하신 것인데, 타락 증후군을 억제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타락 증후군은 바로 주체성을 이 세상의 삶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인생의 가지면 좋을 것, 행하면 좋을 것, 되면 좋을 것을 판단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쫓아가는 이 주체성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의도적으로 노예로 끌어들이신 것입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그 주체성이 발휘될 수가 없어요.
억제될 수밖에 없고 바로의 주체성이 표현될 수밖에는 없고, 결국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바로의 노예생활을 하게 하면서 주체성이 발휘되어서 사는 삶이 안 좋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유다의 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사실은 요셉을 통해서 역사는 진행되고 있지만, 속 내용은 유다의 삶을 통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힘을 합쳐서 주체성을 발휘하는 모습이 세겜의 학살로 나타나고, 동생을 인신매매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자기가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새 삶을 살려고 나갔으나 자기의 삶이 더 심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덮인 깊음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경험한 뒤에, 유다의 마음속에는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삶을 끌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베냐민이 은잔을 훔친 용의자로 문제가 되어서 노예가 될 상황이 되었을 때에 자기가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노예 친화적인 상태인 자기의 주체성을 제로 상태에 놓고 살아야 되는 그 삶의 자리가 유다에게는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유다의 마음 상태가 모든 선민의 마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 위해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게 하신 것이고, 내 주체성을 발휘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고, 광야로 끌어내셔서 바로의 노예였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노예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십니다. 이런 의도가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교회라는 곳이 뭐하는 곳이냐?
세상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던 소원을 갖고 들어오고, 세상 문제에 대해서 형통하기를 바라고, 세상에서 부흥하기를 바라고, 내가 하는 일이 번성하기를 바라며 들어오면, 이 주체성을 발휘하고 꽃 피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주체성을 억압하는 자리로 끌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노예의 상태가 되어서 자기 주체성이 전혀 발휘될 수 없고, 주체성이 발휘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르침 하나를 위해서 선민을 무려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게 하신 것인데 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 요셉과 야곱이 만나는데 여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렇게 축복을 원해서 달려갔고 축복 주도권을 쥐고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을 꾸려간 자가 야곱인데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죽은 줄로 알았다는 것은 요셉이 야곱의 관심과 사랑의 영역 밖으로 밀려났고 관심의 사각지대로 밀려났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요셉과 하나님 둘이서 이루어 가시는 계획의 실행 현장으로부터 야곱을 소외시켜 버린 것인데, 결과적으로 야곱의 주체성을 소외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야곱이 계속 요셉을 끼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주체성과 부딪힙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주체성과 야곱의 주체성이 부딪힌다면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야곱의 주체성을 소외시키고 따돌려 버리십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은 줄로 알도록 하십니다.
유다가 노예 친화적인 마음을 갖게 되고, 요셉은 노예로 살다가 총리가 되어서 가족들을 다 애굽으로 데리고 왔는데 결국은 노예의 삶으로 끌어들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립니다.
야곱의 요셉에 대한 관심과 주체성이 발휘되지 못하도록 야곱을 따돌려버려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행동을 하셨습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깨달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주체성이에요. 타락의 증후군이라는 것입니다.
선악과가 있었던 것과 그 선악과를 자발적으로 따먹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노예가 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선악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서 살아야 되는 것이니 그게 노예지 무엇이겠습니까?
그 노예로 살 때에 에덴이라는 낙원의 삶이 유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 살아 보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면서 기쁨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내 주체성에 의해서 생긴 소원을 이루어주는 곳이 아니고, 형통에 대한 약속을 주는 곳이 아니고, 번성과 번영과 부흥에 대한 약속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타락 증후군인 이 세상 삶에 대한 우리 모두의 주체성을 죽이는 곳이고, 노예 상태의 억압을 가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께 사업 잘 되게 기도해 달라고 한다면, 노예가 무슨 자기 사업이 있느냐고 이야기를 해주는 곳이 교회이고 목사인데, 지금 지역교회의 현실을 보면 이런 교회가 없고 이런 목사가 없습니다.
선민의 400년간 노예생활을 위해서 아주 절묘하게 의도적으로 역사의 흐름을 주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고 있는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부터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 내에서 선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타락 증후군을 북돋아 주는 지역교회의 현실 속에서는 선교가 되면 안 되고, 전도가 되면 안 됩니다. 사람을 구원의 가능성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데 교회가 줄어드는 것이 은혜입니다. 지금 지역교회의 이런 왜곡된 영적인 상태에서는 전도가 안 되는 것이 은혜고, 선교가 안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완전히 못 박아서 망하는 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23:15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라고 하십니다.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노예로의 귀환입니다. 주체적으로 갖고 있는 소원과 바람을 이루어주는 곳이 아니고, 그런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로 끌고 가십니다.
광야는 이 땅에 대해서 선악을 판단하면서 무엇이 있으면 만족하겠다고 소원을 발동하는 주체성이 죽어버리고,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곳이고, 바로의 노예였던 자들이 하나님의 노예로 살기로 결정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출애굽 이후의 광야생활을 합친 의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땅을 향하고 있는 내 주체성이 죽고, 이 땅에 대한 축복 주도권이 죽고,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체성이 죽는다는 것이고,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소원하는 그 소원을 죽이는 것입니다.
소원을 이루지 못해 답답해하고 원망하고 불만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소원하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원의 해결 방법은 ‘소원하는 나의 주체성을 죽여라’입니다.
노예로 끌어들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염두에 둘 때에, 이것이 바로 교회의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오늘의 번제 말씀을 듣고서 연락을 많이 하십니다.
“교회 현실이 이런데 도대체 못 들어주겠습니다. 교회를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시는데 떠나지 마세요. 거기가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선교지라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아니면 우리도 영국의 이슬람化 현황처럼 불교에 빼앗기고 천주교에 빼앗기고 다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그 지역교회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하늘과 세상의 접점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고 마음이 하늘로 들어간다는 것이고, 이 몸은 하나님의 노예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몸이 모인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참 교회가 아닙니다.
몸이 모인 지역교회는 등록카드를 내고 조직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참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 땅의 축복을 향해 가던 마음이 축복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을 알고 땅에 대해서 죽고, 마음이 십자가 너머로 간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를 이룹니다.
오늘의 번제 방송을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스페인, 독일, 몽고, 중국, 홍콩, 호주, 뉴질랜드에서도 듣고 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김 권사님이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을 십자가 너머에 두었고, 스페인에서 박씨 아저씨가 말씀을 들으며 마음을 십자가 너머에 두었다면 그 김 권사님과 박씨 아저씨가 몸이 각자의 나라에 있는 동안에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 모였다면 그 상태가 교회입니다. 등록카드를 내서 한 건물에서 모이는 그 조직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각자의 나라에 있어도 그 자체로서 교회이고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 모인 사람들의 교회는 날마다 내 주체성을 죽이면서 육체의 삶은 하나님의 노예로 살기로 작정하는 자들입니다.
오늘의 번제 말씀을 듣고 있지 않더라도 브라질에서 포르투칼어로 말씀을 서로 나누면서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고, 마음을 십자가 너머로 보내는 호세나 호날두나 로드리게스가 있다고 한다면 그가 바로 나와 함께 하는 교인이고 형제자매이고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지금 내 옆의 지역교회에 있는 박 권사님이 온통 세상을 향한 주체성으로 불꽃이 튀도록 발휘하면서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성공하겠다며 뛰어다닌다면 아직 그 분은 선민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 로드리게스가 내 형제이고 선민일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번제 말씀을 듣는 자들은 지구의 어디에 있든지 거기 있으면서 등록카드를 낼 필요도 없고, 함께 모여야 될 필요도 없지만 이미 그곳이 바로 교회이고, 그 참 교회에 속한 사람들로서 지역 교회에서 선교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 상태는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다 안다고 합니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저희 집사람을 많은 권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알고 친척들이 알고 친구들이 알고 있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저희 집 사람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르고,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알고 계신 것이 다르고, 친척들이 알고 있는 것이 다르고, 친구들이 알고 있는 것이 다 다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가장 깊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도 그런 거예요.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십자가를 제쳐놓는다면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끝없는 길의 여정인데, 십자가를 아는 그 길에 놓여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생활화예요.
십자가를 생활화하면 점점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고전1:18절 이하에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의 집약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능력의 집약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그냥 내가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에서 십자가가 내 죄를 사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아멘’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 나가서 역사적으로 한 번 일어났던 그 사건을 신앙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서 현재의 사건으로 내가 계속 십자가에서 죽는 생활화가 일어나야 십자가를 점점 더 깊이 알아가게 된다는 것이고, 그러한 이들이 어디에 흩어져있든지 간에 교회라는 것입니다.
등록카드를 내서 몸이 함께 모일 필요가 없고 몸이 모인다고 교회가 아니고,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기 위해서 모이는 자들이 교회이고, 몸은 이 땅에서 각자 흩어져서 하나님의 노예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선교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선택 받은 선민들이 타락 증후군으로서의 이 주체성의 문제를 하나님은 이렇게 고심하면서 처리하시려고 하시는데, 이 주체성을 제어해야 한다고 하는 깨달음 자체가 교회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인이라면 내 주체성이 죽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24시간을 지배해야 합니다.
소원한다면 소원을 이룰 것이 아니라 소원하는 내가 죽어야 하고, 사업 잘 되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목사님한테 가서 이렇게 부탁하셔야 합니다.
“목사님,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는 이 소원이 질기게도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 소원을 하는 나의 주체성이 죽게 해주세요.”
참 교인이라면 이 기도를 부탁드려야 하는데, 이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교회가 아닌 것이죠.
그렇다고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그 지역교회에서 선교하시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시면서 교회 안에서 선교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기독교의 앞으로의 미래가 한없이 공허하게만 느껴집니다.
이것을 결실로 채우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선교하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 갖고 계시고 선민을 향해 갖고 계시는 그 고심하시는 마음을 이해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입니다.
하나님의 의견에 죽도록 충성하는 선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