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공파 → 대장군공(휘 昌富)파 항렬자
박사공파 →진원군공(휘 昌貴)파 항렬자
*24, 25, 26, 27세 상단은 주로 통정공파에서 하단은 통계공파에서 항렬자로 사용하고 있음. |
왕십리강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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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는 대파 중파 소파등이 있으며 세수는 중시조로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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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遼童)을 정복하는 자, 만주(滿洲)를 지배하고 만주를 지배하는 자는 동북아시아를 얻는다.” 수(隋)나라 문제(文帝)의 침략군 30만을 5만 정병으로 격퇴하고, 요동을 사수했던 일세의 명장 강이식(姜以式) 장군은 영남(嶺南)의 고도 진주(晉州)를 본(本)으로 하는 강(姜)씨들의 시조다. 진주(晉州)ㆍ진양(晉陽)지방에서의 강(姜)ㆍ하(河)ㆍ정(鄭)씨 3성은 대성(大姓)으로 일러올 뿐만 아니라, 진주강씨(晉州姜氏)와 하(河)씨는 다 같이 이 지방의 토성(土姓)이다. 강(姜)씨는 우리나라 2백47개 성 가운데 여섯째 가는 대성으로 총인구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문헌상의 본관은 진주(晉州)ㆍ금천(衿川)ㆍ안동(安東)ㆍ백천(白川) 등 9본이 있으나 (성씨대관(姓氏大觀)) 모두가 대종인 진주(晉州)의 지파(支派)로서 오늘날 모든 강씨(姜氏)들은 진주(晉州)가 유일본인ㅁ을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8년(서기 597), 5호(胡)16국(國)ㆍ남북조(南北朝)의 난세를 평정하고 한족(漢族)의 통일국가를 형성한 수(隋)는 북방(北方)의 강국(强國) 고구려(高句麗)에 국서를 보내왔다. ‘상국(上國)인 수(隋)나라에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방자한 내용이었다. 왕은 군신들을 모아 이에 대한 회답을 논의했다. 이때였다.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답해야 합니다.” 어전을 감싸는 침묵을 깨고 강(姜)장군은 수(隋)나라에 무력 대결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왕은 강(姜)장군의 주장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장군은 정병(精兵) 5만을 인솔, 수(隋)나라 군사 30만을 요동(遼童)땅 임투관에서 격퇴하고 개선한 것이다. 그 후 장군은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淸川江))대첩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문제(文帝)의 아들 양제(煬帝)가 이끄는 1백만 대군을 무찔러 다시 한번 기개와 용맹을 떨쳤다. 이처럼 문중 시조의 혼(魂)과 백(魄)이 무자으이 길에 흐르고 있다. 우국충절의 기개와 무장 특유의 강한 자존심은 후대에서도 숱한 장군을 배출했으니 해동(海東)의 명장이라 일컫는 귀주(龜州)대첩의 강감찬(姜邯贊)장군과 자주(慈州)대첩의 강민첨(姜民瞻)장군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 두 명장파(派)와 고려 원종(元宗) 15년(1274) 통신사서장관(通信使書狀官)으로 일본을 다녀온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과 사도소감(司徒少監) 강위용(姜渭庸), 문하시중(門下侍中) 강원용(姜遠庸) 등 3파(派)가 진주강씨(晉州姜氏)의 3대 산맥으로 그 후손이 번성, 1백만 명을 헤아린다. 조선조에만 상신(相臣)(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 5명, 대제학 1명, 원수 및 장군 25명, 명신ㆍ공신 51명을 배출했다. 강희안(姜希顔)과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조선(朝鮮)초기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배출한 대문장이다. 강희안(姜希顔)은 세종(世宗) 23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으로 정인지(鄭麟趾)ㆍ성삼문(成三問)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 그 후 단종(端宗) 복위 계획에 관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重用)하라’는 성삼문(成三問)의 변호로 화를 면했다. 그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의 칭을 들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했고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의 저서와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등의 그림,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 등의 글씨가 전해져 조선조 문화의 귀중한 보배가 되고 있다. 그이 아우 강희맹(姜希孟) 또한 당대의 문장가요 서화가(書畵家)이다. 세종(世宗)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예종(睿宗) 즉위년에는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신숙주(申叔舟) 등과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했으며 병조(兵曹)ㆍ이조(吏曹)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다대 으뜸가는 문장으로 꼽혀 그의 사후에 성종(成宗)은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유고(遺稿)를 편찬케 했다. ‘사숙재집(私淑齋集)’, ‘금양잡록(衿陽雜錄)’ 등이 전한다. 세조조(世祖朝)에 우ㆍ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던 강맹경(姜孟卿)은 근후성실(謹厚成實)한 인품으로 젊어서부터 명재상 황희(黃喜)정승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한다. 연산군(燕山君) 때 우의정을 지낸 강귀손(姜龜孫)은 강희맹(姜希孟)의 아들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적의 향도가 돼야 했던 불운한 무장(武將) 강홍립(姜弘立)도 진주강씨(晉州姜氏)의 한 사람이다. 1618년 명(明)나라가 후금(後金)을 토벌할 때 명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원병을 보내게 되자.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 그러나 후금(後金)과의 접전에서 짐짓 패전, 항복했다. 남의 전쟁에 우리가 피 흘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 박사공파 → 대장군공(휘 昌富)파 항렬자
박사공파 →진원군공(휘 昌貴)파 항렬자
강세황(姜世晃)은 정조(正祖) 때 시서화(詩書畵)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글씨는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ㆍ미불 등의 서체를 본떴는데 어느 서체(書體)에도 신묘(神妙)의 경지에 들었다. 그림은 산수(山水)와 사군자(四君子)에 뛰어났으며 시(詩)는 육유(陸游)의 시풍(詩風)을 본받아 독자적인 경지를 보였다. 저서로 ‘표암집(豹庵集)’이 있고 그림으로 ‘난죽도(蘭竹圖)’,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한다. 강석기(姜碩期)(인조조(仁祖朝) 우의정(右議政))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禮學)에 정통했다. 그의 딸은 인조(仁祖)의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병자(丙子)호란 때 봉림(鳳林)대군(뒤의 효종(孝宗))과 함께 청(淸)나라 심양(瀋陽)에 인질로 붙잡혀 갔다가 서양문물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귀국했으나 왕위에 올라보지 못한 채 귀국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만양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강(姜)씨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월당집(月塘集)’이 전한다. 강항(姜沆)은 선조(宣祖) 때 문과에 급제, 공조(工曹)ㆍ형조좌랑(刑曹佐郞) 등을 지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고향 영광(靈光)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진영으로 가던 중 왜군에 포로가 되어 일본(日本) 오사카(대판(大阪))으로 잡혀갔다. 일본에서 그 곳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을 가르쳐 일본 성리학의 원조(元祖)로 꼽히게 된다. 뒤에 교토(경도(京都)) 옮겨졌다가 선조(宣祖) 32년에 석방되어 귀국했다. 조정에서 교수(敎授)에 임명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거절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 ‘수은집(睡隱集)’, ‘간양록(看羊錄)’, ‘문차록(門車錄)’ 등 저서를 남겼다. 한말(韓末) 김택영(金澤榮)ㆍ황현(黃玹) 등과 함께 ‘삼대시인(三大詩人)’으로 꼽혔던 강위(姜瑋) 또한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배출한 인물이다.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배우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에게서 시서ㆍ금석학 등 다방면의 조예를 쌓았다. 관계에 나아가 훗날 강화도(江華島)조약에 조선측 대표로 참석했고 청(淸)ㆍ일본(日本)을 왕래하며 기우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고 애쓴 외교가이기도 했다. 저서로는 ‘동문자모분해(東文字母分解)’, ‘용학해(庸學解)’, ‘고환당집’, 손무자주평(孫武子註評)‘ 등이 있다. 강박(姜璞)은 숙종조(肅宗朝)에 홍문관정자로 있으면서 척신 민진원(閔鎭遠)ㆍ어유구(魚有龜) 등을 탄핵하다가 안주(安州)로 유배되는 등 직선적인 강경발언으로 두 차례나 귀양살이를 했다.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少論)의 영수 이광좌(李光佐)(영의정)가 집권하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으나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당대의 문장가로 ‘국포집(菊圃集)’, ‘국포쇄록’ 등이 전한다. 강필신(姜必愼)은 영조(英祖) 3년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탕평책을 반대했던 강경파이다. 그는 이 때문에 관운이 순탄치 못했다. 영조(英祖) 27년에는 호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주장하는 균역론(均役論)의 폐단을 극론했다. 또 평안도(平安道)관찰사 남계량(南季良)이 정우량(鄭羽良) 형제의 추천으로 재상에 승진하자 그 그릇됨을 상소했다가 이들 일파에 몰려 파직되기도 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모헌집(慕軒集)’이 전한다. 무(武)를 숭상하고 문(文)을 사랑하는 문무겸비의 가문으로 조상들의 충절과 민족자존의 정신은 일제(日帝) 식민지 암흑기에 이르러 성좌와 같은 독립투사와 항일운동가를 낳게 된다. 1919년 9월2일 서울역에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토(齋藤實)에게 수류탄을 던져 암살하려 했던 강우규(姜宇奎)의사가 대표적 인물로, 그는 당시 60의 노인으로 사토의 살해는 실패했으나 수행원 등 37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후 장익규(張翊奎)ㆍ임승화(林昇華)의 집 등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밀정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강인택(姜仁澤)은 3ㆍ운동 때 영남(嶺南)학생 대표로 활약하다 상해(上海)로 망명,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해 항일투쟁을 했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군자금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민주당(民主黨) 경남도당(慶南道黨) 고문 등을 역임했다. 강진해(姜鎭海)는 1931년 한국독립군 별동(別動)대장으로 지청천(池靑天) 등과 합세, 동경성(東京城)ㆍ대전자(大甸子)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남아로 1933년 동녕현(東寧縣)전투에서 전사했다. 1922년 독립신문사에 입사, 1924년 임시정부의 회계검사관, 의정원의원 등을 지내면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탄핵안을 제출했던 강창제(姜昌濟)도 근대의 인물이다. 그는 1926년 나창헌(羅昌憲)ㆍ고준택(高俊澤) 등과 함께 병인(丙寅)의병대를 조직, 대장으로 활약했었다. 1938년 홍진(洪震)ㆍ유동열(柳東說)ㆍ이연호(李然皓) 등과 신한(新韓)민주당을 조직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그 후 중국(中國)군사위원회 주서안한국내(駐西安韓國內)연락처장으로 일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 수원(水原)에서 죽었다. 항렬표(行列表) 은열공파(殷烈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관서공파(關西公派)
인헌공파(仁憲公派)
소감공파(少監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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