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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의 표준 영정 -단군 영정(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영정), 김종래씨가 그린 단군 영정 ,국민경모 단군소상
1978 -정부표준 단군 왕검 영정(문공부 심의번호 77-27 ,확인번호 78-21 :가로 115센티*세로170,)
홍숙호(석창) 그림
1968년-정부표준 단군왕검 지정 이전에 단군성전 낙성식 때 봉안한 단군왕검 영정
김종래 그림
1968년 - 단군성전 낙성식 때 단군성전에 봉안한 단군 소상 (1977년- 국민경모 단군상,문공부심의번호 77-16)
신상균 조각
역사를 빛낸 선현의 표준영정 - 정부 표준 단군 영정에 관한 기록들
현정회가 단기檀紀 4300년(1967년) 최초의 단군성전檀君聖殿을 창건할 때부터 조성하여 모셔온 단군소상檀君塑像(단군소상;흙 또는 석고로 빚은 인물이나 신불의 상)이 10년만인 단기 4310년(1977 년)11월 26일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 전체위원회의 신중한 심의(심의번호 77-16)를 거친 후 국민경모단군표준상國民敬慕檀君標準像으로 지정되었으며 곧 이어 이 표준단군상을 토대로 하여 영정(초상화)으로 제작할 것을 요청하여 왔으므로 현정회에서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홍석창洪石蒼화백에게 위촉하여 그리게 하고 문화재 전문위원회(영정분과)의 3차에 걸친 수정과 심의를 거쳐 영정을 완성, 이듬해 8월 28일 정부표준 단군영정으로 지정(심의번호 77-27, 확인번호 78-21호)받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통을 정립하는 구심점으로 부각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 불교조각의 일인자였던 신상균申尙均씨에 의해 조성된 소상은 불상에서 표현되는 자비로운 모습뿐만 아니라 국조로서의 위엄과 치우침이 없는 원만상을 고루 갖추고자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추상적인 개념을 형상화하기 위하여 일찍이 「한국인의 성격」을 저술한 바 있는 심리학자 윤태림尹泰林박사를 비롯하여 동양철학자 김범부金凡父선생, 사학자 김상기金庠基박사, 국문학자 이희승李熙昇박사, 단군연구가 박관수朴寬洙선생, 법철학자 이항녕李恒寧박사 등 각계의 원로학자들이 여러 각도에서 분석 고증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우선 소상의 기본틀을 잡기 위하여 대종교 봉안 영정을 비롯한 전국 10여 군데에 흩어져 있는 단군전의 동상과 영정을 두루 검증한 끝에 그 장단점을 취사선택取捨選擇하여 가장 전형적인 한국적 위인상으로 떠올리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상像의 이목구비, 즉 골상骨相면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표준치를 산출하고 장식服飾 또한 평화를 상징하는 바탕색(짙은 황색)을 깔아 안정감을 갖게 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종래 영정의 양 어깨에 덮여있는 나무 잎사귀를 뗀데 대해 다소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이는 당시의 문화가 초목채취草木採取 수준이 아니라는 반증도 할 겸 먼 후손들이 보다 자연스럽고 한 시대에 얽매이지 않는 영원토록 친근한 국조國祖의 모습으로 우러르게 하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제작된 정부표준 단군영정은 교육용으로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급 학교의 교과서는 물론 대외홍보용으로 각종 정부간행 출판물과 영상물에 수록되었으며 문화체육부 발행 표준영정도록1993년도 판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등에 등재되는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유익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단기 4327년(1994년) 10월 사단법인 현정회
<정부표준 단군영정은 1993년 12월, 문화체육부 발행「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36쪽에 실려 있으며, 당시 문화체육부 이민섭 장관의 책 머릿글을 옮겨 싣는다. >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비추어볼 때 우리조상은 세계에서도 으뜸가는 우수한 문화유산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각각 그 시대를 살면서 우리 역사를 빛낸 선현들의 인고忍苦 의 결과물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는 훌륭한 업적인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학문, 전략 등 각 분야에 걸쳐 우리 선현들은 독특하고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김으로써 우리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우리들도 또한 역사를 빛낸 선현들을 본받아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우리의 조상들이 한 것처럼 고귀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우리들의 큰 과제인 것입니다.
이에 우리부에서는 자료로 남아있거나 빛바랜 모습으로 전해 내려왔던 역사를 빛낸 선현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사업을 1973년부터 추진해 오면서 각 분야의 사계 전문가로 구성된 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53위의 선현영정을 표준영정으로 지정하였으며, 이를 선현들의 주요이력과 함께 복제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각 분야에서 헌신하신 선현들을 우리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아 정진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이 도록을 발간하였으며, 이 도록이 본래의 발간취지에 따라 사회 각 분야에서 유익한 자료로 널리 활용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93. 12 문화체육부 장관 이 민 섭
한중석韓重錫 (전 문공부 문화담당사무관) 글-정부표준 단군영정의 의의
현정지(1997년10월3일 발행)에 실린글입니다.
영정影幀이란 사람의 얼굴과 똑같게 그린 족자簇子 영상影像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영정의 실태를 살펴보면 그 유래는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자연발생적으로 표출된 특정인에 대한 숭앙정신의 발양물發楊物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고대 인류사회에 문화가 형성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영정들이 영당影堂이나 묘각廟閣 또는 종교시설내의 신앙대상물 등으로 봉안되어있는 것을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이는 바로 전통문화의 유물로 전래되어서 보존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조선왕조 태종실록을 들추어보면 태종15년(1415)에 조선왕조 창업의 개국공신과 정종 즉위시의 정사공신定社功臣 그리고 태종등극 공훈의 좌명공신佐明功臣 등 3공신에 대하여 논공행상을 하면서 하륜 영의정 등 43명의 영정을 조가朝家에서 제작하여 공신들에게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가하면 또 조선중기의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된 이순신 장군 등 18명에게도 선조가 영정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가私家에서도 자화상을 그리는 예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추사 김정희 영정 등이 있다.
그리고 화가로 하여금 제작한 영정들을 개인 또는 관련단체가 무수히 각각 소장하고 있는 까닭으로 해서 동일인물의 영정이 여러개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진위여부의 혼란마저 초래하고 있는 것이 그 실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로 특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에 대하여 알아보면 아산 현충사와 순천 충무사. 그리고 한산도 충무영당에 각각 다른 모양의 영정이 봉안되어있을 뿐 아니라 동상을 보아도 진해(해군기지)와 충무(세병관) 그리고 부산(용두산), 또 서울(세종로)에 각각 다른 모양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바, 영정은 영정대로 동상은 동상대로 각각 그 용모가 달라 이의 통일을 기하여야 할 필요성이 자연 대두되면서 표준영정 제도의 도입이 태동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우리나라 제3공화국시대가 개막되면서 사회개혁을 통한 국토방위에 치중하는 한편 절대빈곤으로부터 해방을 시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룩되면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한 토대 위에 문화부분의 정부 첫 정책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 정부표준영정제도라고 할 수가 있겠다.
당시 문화공보부에서는 1973년 5월 8일자로 선현영정심의위원회(국무총리훈령 제6호)를 구성하여 각종 영정과 동상의 모양을 통일시키도록 한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정부표준영정을 지정하는 제도가 된 것이다.
참고적으로 당시 선현영정심의위원회는 차관(이규현)을 위원장으로 하고 곽상훈, 손원일, 이병도, 이선근, 이은상, 최영희, 최순우 등 문화계 거물급 인사와 당연직으로 내무부 지방국장, 문교부 장학실장, 문화공보보 문화국장 등 11인의 위원으로 구성이 되어 선현의 영정 또는 동상제작의 심의를 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동 위원회에서는 첫 사업으로 역사의 인물 가운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크게 공헌한 국조 단군을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한 106인의 선현을 영정심의 대상인물로 선정하였고, 이를 현창顯彰함으로서 애국심을 고양하는 방책으로 시행한 제도의 사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선정된 선현의 정확한 고증서를 작성하고 이를 기준으로 무엇보다 엄격한 고증을 통한 제작심의로 존엄성을 확보 유지하는 정부표준영정 또는 동상을 제작 보급하는 것이 사회적, 교육적,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정부표준 단군영정의 지정에는 처음부터 적지않은 파란이 예상되었다. 우리나라와 같은 다종교사회에서 국조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대종교의 제단 봉안용 동상을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교과서 등 각종 출판물에 등재하도록 허용을 한다면 타종교와의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선현영정심의위원회는 1977년 사직공원 안 단군전에 봉안하고있는 국조 단군 조상彫像을 기본바탕으로 한 정부표준영정을 제작할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978년도에 사단법인 현정회顯正會(이사장 이희승)에서 자체예산을 확보하여 작가 홍석창(홍익대 교수)으로 하여금 기존 단군조상을 모사본으로 하여 영정을 해 옴으로서 이를 동 소위원회의 현장 제작지도와 엄격한 고증 등의 심의절차를 거쳐 유일무이한 정부표준영정으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사직공원 안 단군전에 봉안하고 있는 국조 단군영정만이 정부표준영정이기 때문에 그 이전이건 이후이건 개인이나 단체에서 단군영정을 제작하였거나 제작하려면 동 영정의 모사만이 허용되어야 할 것이고 또 모사할 때에도 반드시 동 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아 제작하는 것이 원칙이라 할 것이다.
더욱이 다른 모양의 영정제작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종교단체인 재단법인 대종교에서는 사직공원 단군전 봉안 단군영정을 정부표준으로 지정한데 대하여 이의를 제기해오기도 하였으나 당시 문화공보부 담당사무관으로 근무하던 나는 그때마다 종교적인 신앙과 국조로서의 숭모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 특유의 사회풍토를 몸으로 느끼면서 당사자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 이후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유서깊은 단군영정을 모시고있는 사단법인 현정회顯正會가 또 창립 30돌을 맞는다고 한다. 5천년 민족사를 가늠하는 단군 할아버지의 크나큰 음덕陰德이 무궁토록 이 땅, 이 누리에 깃들기를 기원해 본다.
홍석창洪石蒼(홍익대 교수) 글-땀에 전 노방자락-집집마다 단군영정 모시자
현정지(1997년10월3일 발행)에 실린글입니다.
현정회가 창립된지 어언 30년이 되었다니 세월의 무상과 함께 새삼스레 밀려드는 감회를 주체할 길이 없다. 그로부터 10년만에 내손으로 직접 그린 단군영정은 단군성전의 주인공을 모시는 일로 뭐니뭐니해도 현정회 발족이래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될만하다.
멀리는 신라의 솔거작 영정이 있었다고하나 문헌상 기록일뿐이고 민간에 전래되는 여러 본本을 한데 아우러 온국민이 하나로 숭모할 수 있는 국가공인표준영정의 필요성이 이때 대두되기에 이른 것이다.
정부주도로 단군영정의 표준화작업이 시작된 것은 4300년(1967년) 초여름, 당시 현정회의 사직기념관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묵화강습을 하고있던 나는 우연찮게도 이희승李熙昇 이사장님으로부터 단군표준영정제작을 의뢰받게 되었다. 처음엔 이 제의가 선듯 믿기지 않았을 뿐더러 두려운 생각이 앞섰다.
사실 단군왕검께서 최초로 이땅에 나라를 세운 겨레의 원조로 받들어 개천절 어천절을 통해 국가적 또는 민간차원의 숭모행사를 하고있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당시까지만해도 신화적 또는 실제적 인물 등의 논의가 있는터여서 확실한 성상을 과연 어떻게 표현하여야 할지 막연하기만 하였다. 다행이도 기왕에 조성되어있던 단군 소상塑像을 본으로 삼아 그렸기 때문에 윤곽잡기는 비교적 용이했지만 그림으로서의 한계, 곧 입체감을 얼마나 살리느냐 하는 과제는 여전히 나를 압박하는 당면문제였다.
이 난제를 풀기위해 우선 단군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국학계 원로학자들의 자상하고 열성적인 자문을 받아 국조 단군의 치세사상인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내나름의 방법을 모색하고 개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조언을 아끼지 않은 학자와 사회인사는 李丙燾이병도, 申奭鎬신석호, 李熙昇이희승, 朴寬洙박관수, 尹泰林윤태림, 李恒寧이항녕, 孟柱天맹주천, 黃元九황원구, 崔淳雨최순우, 李喜秀이희수 등 제씨이다.
이렇게 여러 학자들의 자문과 고증을 거쳐서 만든 초고(밑그림)를 고치고 또 고치기를 몇번이나 되풀이하였다.
본래 초상화는 비단에 그리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되도록 오래되고 좋은 비단(노방)을 구하는데만도 적잖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또 그림을 그리는데도 채색의 활착을 돕기위해 밑바탕을 몇번이고 아교풀과 백반물로 칠하여 말리곤 하였다.
공교롭게도 마침 그때가 개인전을 준비하는 시기와 맞물려 시간적으로 너무 바쁘기도 하였거니와 철마저 한여름이라 붓을 잡으면 땀이 비오듯 쏟아져 무척 힘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국조단군의 영정을 그린다는 것은 화가로서 생애에 한번 얻기 힘든 기회요 영광이었기에 이런 고통쯤 대수롭지않게 감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리는 영정이 온겨레가 우러러 받드는 성스러운 표상이라는데 생각이 미칠 때 한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몇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정성을 다하여 그려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붓을 들기 전에는 반드시 소상 앞에서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간절이 발원發願하였다.
오래도록 채색의 변질을 막고 본래의 색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석채와 분채의 천연안료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만해도 국내에서는 이런 자료를 구할 수가 없어 외국에서 어렵게 구해다 이를 곱게 다져 수십번을 반복하여 그림으로서 그림의 깊이와 무게가 우러나오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기법을 동원한 공정 8개월만에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였는데 시대적으로 보아 단군성조의 의상이 풀잎이나 나뭇잎으로 만들어야 격에 맞지 않겠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처음부터 자문위원회의에서 5천년전 단군시대에서도 직조기술 등 상당한 수준의 문화가 발달했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결정한 것이었고 의상의 색채 또한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황색으로 채색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완성을 보게된 영정(가로 115Cm, 세로 170Cm)은 당시 문화공보부에 의해 정부표준단군영정으로 확정되어 현재 현정회의 단군성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개천절과 어천절에는 이 영정을 모시고 제례를 받들 뿐 아니라 각급학교 교과서에도 게재하여 국민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이 단군성상이 우리민족의 구심점이 되어 민족정기를 한데 모아 나라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상징적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사상적 종교적 차원을 넘어 온 겨레의 어버이로서의 숭고한 정신적 대상으로 높이 받들어 국가기관마다 가정마다 표준 단군영정를 모시기를 제언한다.
단군성전 - 진설도
초창기 이숙봉 여사께서 마련하신 특수 스텐 제기 제작 < 진설 모습 >
이동애(이숙봉 여사 장녀) ,임윤희 여사가 마련하여 교체 한 방자유기 제기 < 진설 모습 >
왼쪽 첫번째 줄 : 오곡 ( 순서대로 콩,팥,녹두,수수,기장 등 다섯가지 이상 ) .견과류 ( 순서대로 호두,은행,대추,밤 등 두가지 이상 ). 과일 (순서대로 감,사과,배,귤,도마도,포도,수박 등 계절과일을 다섯가지 이상 )
왼쪽 두번째 줄 : 떡 ( 순서대로 약식,흰팥 떡 ,절편 두가지 이상 ) . 순서대로 산적. 닭 찜. 조기 찜 .생선전.두부전.빈대떡.약과 .산자.옥춘 등
왼쪽 세번째 줄 : 4인분 ( 갱물 ,탕국 ,메밥 , 수저,저분 ) . 찬류 두그릇 씩( 삼색나물 ,물김치 , 김,간장,)
진설이란 시대와 신위에 따라 달라지므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우리 민족의 제수상차림을 해오시던 이숙봉 여사의 진설을 검증 보완하고 우리민족 고유한 전통적인 진설을 찾기위해 역사학자를 중심으로 실록의 진설도 등을 충분히 참조하고 연구한 후,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에 근거한 대한민국 단군성전 진설방법을 만든 것 입니다.말하자면 실록에도 중국의 영향을 받은 종묘대제나 사직대제 그리고 석전대제의 진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떄문입니다.
( 현정회 이건봉 사무총장 씀 )
현정회 진설도에 관한 기록:
1997년10월3일발행 현정지중에서 좌담
24쪽과 25쪽 참조로 작성하였습니다.
"단군제사 진설도 실록에 나와"
현정회 윤여덕 이사 : 그러면 다음은 의식관계인데요 제수진설하는 문제라던지 제복이라던지... 등을 초기에 어떻게 고증을 거치셨는지 궁금합니다.
현정회 이희수 상무이사 : 진설은 실록에 나와 있는걸 보고 여기서는 더 늘렸어요.충의열사들
까지도 해야하고 역대 제왕까지도 해야한다고해서
거기 진설도를 보면 약쑥하고 마늘이 있어요. 처음엔 그대로 하다가 제사는 약간 변했지요.
현정회 허경일 이사 :맨처음에는 김상기 선생님 등 역사가 들이 모여 고증을 하여 그대로 하다 가 역대창업주 등 신위가 바뀌고 나서 바뀐거 같아요.
현정회 이항녕 이사장 : 개축전의 성전에서는 진설 상을 따로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좁아서 지금은 형편에 맞추어 한상으로 진설을 하게된거지요.
단군성전 - 위패
(사직 ,단군왕검 내외분 ,역대 제왕 ,역대 고대 국가 창업주 , 역대 호국 충의 열사 등)
단군성전 (백악전) 봉안 위패
제기사진
1970년 초- 이숙봉여사께서 특수 제작한 스테인레스 제기 및 청동 향로 및 촛대 일부
대사직께 헌작 장면
(왼쪽) 대사직께 헌작 제기 진열
단군왕검께 헌작 장면
(가운데) 단군 왕검께 헌작 제기 진열
단군성전 제례행사 복식고증 및 제작
안 애영安愛英
약력
1972. 2.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 졸.
1974. 2. 선미한복학원 수료.
1987. 2.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가정과 교육전공.
2001. 6. 단국대학교 사회교육원 전통복식과정 수료.
1999 ~ 2003. 선미한복학원 강사.
2002 ~ 2003. 단국대학교 평생교육원 전통복식과정 강사
2010. 8.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이학박사 졸.
2004년 11월 사단법인 현정회에서는 단군성전의 성역화 사업의 하나로 헌관복 제정을 위해 당시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박성실교수의 자문을 구하여 제작하였다. 당시 박성실교수는 복식학회이사로서 문화재위원이며 문화재감정위원, 동상영정심의위원, 문화제청 궁중의례재현행사자문위원, 출토복식연구회회장직 등의 직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박성실교수는 자문 내용에서
“『朝鮮王朝實錄』에는 단군제에 대한 많은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복식에 대한 기록과 함께 단군과 기자의 성전의 제사내용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국초부터 말기까지 계속되고 있었으며 中祀로 분류하여 조상대대로 계승된 사실이 확인됩니다.
또, 세조 5년1)에는 단군전, 기자전에 제사를 드릴 때 時服을 착용하여 예에 어긋나므로 祭服을 착용토록 하였고, 정조 13년에는 떨어지고 헤어진 제복은 수리해서 착용토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여 헌관들의 복장을 제복으로 권하였다.
그 외 집사관이나 배향관 등은 단령차림을 권하였으나 단군성전에서 거행하는 의식과 예산 등의 상황을 고려하여 조정되었다.
복장제작에 있어서는 문헌을 중심으로 하고 출토유물과 전래유물을 근거로 고증하여 전통을 따르되 착용하는데 불편함이 적게 하며 최소한의 예산으로 집행되었다.
세조 5년(1459) 3월 11일(계사) 3번째기사
禮曹據平安道觀察使關啓: “平壤府常行檀君、高句麗始祖、箕子殿、九津溺水、平壤江祭及文宣王釋奠
時, 皆用時服, 有違盛服承祀之意。 且永崇殿祭服亦不足, 請令奉常寺製祭服以送。” 從之。
정조 13년(1789) 6월 6일(경신) 3번째기사
.... 祭服之權着團領, 事近擅便, 飭令該道新備, 敝又改爲。”
고증된 복식제작은 출토복식과 전래유물을 근거로 하여 단국대 대학원 졸업생과 재학생, 궁중의례 재현행사 복식제작업체가 담당했으며, 후수, 대대, 패옥, 대, 홀, 제관 등 헌관복식의 부속제작은 그 분야의 명장과 전승공예대전에서 수상한 장인에게 의뢰하여 제작하였다.
그 외의 부속은 전문 업체에게 주문 제작케 하였다.
이 후 어천절 개천절 등 단군성전 행사에서 헌관 복식 등 의식복의 착장과 관리는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졸업생들이 도와주고 있다.
단군성전에서 거행하는 의식 내용에 따라 조정된 복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 | 내용 | ||
헌관(남) | 제복 | 복식 | 초의, 중단, 상, 폐슬, 방심곡령, 바지, 저고리, 행전 |
부속 | 후수, 대대, 패옥, 대, 홀, 제관, 혜 | ||
헌관(여) | 원삼 | 복식 | 원삼, 치마, 저고리, 속치마, 바지, 버선 |
부속 | 어여머리, 대대, 혜 | ||
진행 | 단령 | 복식 | 단령, 바지, 저고리, 행전 |
부속 | 사모, 대, 목화 | ||
집례 | 도포 | 복식 | 도포, 바지, 저고리, 행전 |
부속 | 망건, 갓, 대(술띠), 혜 | ||
고축 | 학창의 | 복식 | 학창의, 바지, 저고리, 행전 |
부속 | 유건, 대(술띠), 혜 | ||
여집사 | 당의 | 복식 | 당의, 치마, 저고리, 속치마, 바지, 버선 |
부속 | 족두리, 혜(고무신) |
* 첨부 : 각 예복 사진
2011年 3月 15日 제복 현황
명 칭 | 내 역 | 갯 수 등 |
제 복 (남) | 제복(상) 중단, 호수, 패슬, 패옥, 홀, 대대, 제화(혜) 제관 - 일습, 방심곡령 | 8세트 색상- 자(3) 아청(2) 청(2) 흑(1) |
원 삼 (여) | 원삼(대) 치마, 저고리, 속치마, 속바지, 떠구지, 운혜 | 3세트 색상- 녹(1) 옥(1) 홍(1) |
사 회 복 | 도포, 갓, 태사혜, 대 | 1세트 |
개 회 사 복 (개 식 사) | 단령, 사모, 목화, 대대 | 1세트 |
고 축 복 | 학창의, 유건, 태사혜, 대 | 1세트 |
집 사 복 | 당의, 치마, 저고리, 속치마, 속바지, 고무신, 족두리 | 6세트 |
신 발 | 여자 (혜 5켤레 + 고무신 6켤레) 남자 (제화 11켤레 + 태사혜 2켤레 + 목화 1켤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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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험 복 | 금관 2개 + 제관 4개 + 목화 6켤레 체험조복 2벌 일습 + 체험제복 4벌 일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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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 바지, 저고리 - 10벌 행전 - 10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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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의 국조단군 단군성현을 우리가 그 정신 선양에 힘차게 진력해 나가야지요.
최선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오늘을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