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직을 선택한 이유
내가 대학을 다니던 90년대 중반은 지금처럼 취업열풍이 크지 않은 시기였다. 대학생활은 나에게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나를 가장 흥분시켰던 사건은 한국에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가 주민의 손으로 직접 구성되는 '지방자치'라는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지방의회의원으로 출마한 지인을 돕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기도 하고 정치개혁을 위한 학술대회를 쫓아다니면서 어렴풋이 지방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내가 행정고시라는 시험을 선택한 것은 시대적인 절박함 때문이었다고 할까? 졸업을 앞둔 즈음 IMF라는 한파가 한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취업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나로선 많이 당황스러운 일이었고, 많은 과 동기들과 더불어 공무원 시험을 그 대안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공무원으로서 행정현장에서 지방자치를 뿌리내리는데 일조를 하겠다는 대의를 품긴 하였지만......
또 하나 공직은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더 매력적인 직업이라는 것이다. 남녀에 대한 인식은 민간기업에서도 많은 부분 개선되고 있으나, 제도적 측면에서 여성을 많이 배려하고 있는 직업은 여전히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당찬 사회인으로 활동하고픈 여성이 있다면 난 주저 없이 이 길을 권유할 것이다.
* 신림동에서의 수험생활
졸업과 함께 시작된 나의 수험생활은 다른 고시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행인 것은 나의 수험생활이 그리 길지 않은 상황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같이 공부한 후배의 말에 의하면 내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상황변화에 좀 둔감했다고 한다. 이런 점이 공부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줄여 주었고 공부하는 동안 내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해준 거 같다. 합격 발표가 나기 전까지의 수험생활은 모든 고시생들에게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규칙적인 생활만 지킬 수 있다면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도 좋은 결과는 빨리 올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학습방법론은 다른 많은 합격생들이 제시하고 있고, 개인차가 큰 부분임으로 생략하고자 한다.
* 중앙공무원교육원 연수기
중앙공무원교육원의 연수는 4월부터 11월까지 행정고시 합격자와 기술고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정책기획연습 등 이론적 교육, 지방실무수습, 해외연수 등의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내 생각에 교육원 생활은 270여명의 합격자들이 팀웍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혼자만의 생활에 익숙했던 고시생의 생활을 마감하고, 같이 밤을 새며 정책토의도 하고 각종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하며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도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교육원 생활 중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과정을 나누어서 얘기하고자 한다.
1. 지방실무수습
지방행정 현실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는 기다렸던 교육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지방실무수습은 교육기수에 따라 그 기간이 다른데 47기는 6주 동안 진행되었다. 수습지역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데 나는 경기도와 광명시를 지원하였다. 그 이유는 우선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과 중앙정부만큼 큰 규모의 지자체이기 때문이다.
경기도청 관광과에서 수습을 3주 할 때는 지방의회 참관을 중심으로 하였다. 나는 국회-중앙정부 관계와 달리 지방의회-지방정부의 관계는 좀더 토론문화적이고 협력적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기대와 달리 지방의회-지방정부의 관계는 국회-중앙정부의 축소판이며 그 부정적인 측면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다. 국회의원·지방의회의원 모두 국민의 대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에 권위적일 필요도 없고, 모든 행동들이 용서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방공무원들에겐 지방의회의원들이 정책과정의 건전한 비판자라기보다 불필요한 작업을 요구하여 그 사업 추진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인식되는 듯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행정시스템에 대한 학습 부족과 행정정보의 공유 부족이 큰 이유인 것 같다.
광명시에 3주 근무할 때는 수해로 전국이 떠들석할 때였고 광명시 역시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광명시에 있을 때는 펌프장, 쓰레기 소각장, 정수장 등 시설견학을 중심으로 하였다. 몇 년 전 신자유주의 추세하에 단행된 공무원구조조정은 상대적으로 기술직 공무원의 축소를 가져왔고 중요한 시설들은 인력 부족으로 관리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 행정은 머리보다 손발의 기능이 더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중앙에서 큰 정책을 마련할 때 지방에서 실제로 나타날 정책효과를 항상 염두에 두면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지방실무수습은 각 지역별로 상이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다음에 연수를 받게 되는 후배들에게는 가능한 본인의 연고지가 아닌 곳에서 많이 보고 경험할 것을 권하고 싶다. 중앙에서 근무하게 될 행시·기시 합격자들에게는 지방 현장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2. 정책사례·정책기획 연습
정책사례연습은 기존에 실시된 정책을 중심으로 그 효과를 검토하는 작업이었고, 정책기획연습은 새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문제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설계해 보는 작업이었다. 이 교육과정은 교육원 마지막에 실시되는 것으로 그 동안 배웠던 실제적·이론적 지식들을 총 동원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공직생활 내내 반복적으로 수행해야되는 작업일 것이다. 어떤 하나의 정책도 단독 부서, 단일 이해관계자, 단일의 문제의식으로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작업이었고, 공동 작업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과정이었다. 이 작업을 통해 공무원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현상을 항상 주시하여야 하고, 학습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 행정자치부를 선택하면서
2003년 3월 현재 나는 아직 행정자치부 수습사무관으로 여러 과를 돌아다니면서 근무하고 있다. 각 부처 선택은 교육원을 마감하면서 각 직렬별로 성적순으로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여러 언론에서 적성을 무시한 배치라며 비판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행정고시와 기술고시는 사법시험과 달리 이미 다양한 직렬을 구분해서 모집하고 있다. 직렬을 선택하여 수험을 준비하는 과정에 이미 적성이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경험이 적기는 하지만 행정부 내 각 부처업무가 상호 연계되어 있고 배타적으로 전문화된 부서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성적순 배치를 제외하고는 정실인사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각설하고 난 처음 공부할 때 가졌던 생각처럼 행정자치부를 선택하였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단 현재의 행자부가 인사·조직 기능과 지방행정지원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향후 내 진로가 어떻게 결정될지는 알 수 없다. 몇 달간 각 과의 업무를 조금씩 접하면서 각 기능별로 많은 매력이 있음을 발견하며, 또한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공직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직업이면서 또한 잘못된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줄 수 있는 직업임을 느끼게 된다. 항상 맡은 일에 충실하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공무원으로 성장하고자 노력할 것임을 이 글 빌어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