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한수(金漢洙) - 개척자의 고난과 영광
6. 1960년 하계 전도의 회고
1 1960년 7월 20일 전국 40일 하계 전도가 시작될 때, 나는 아직도 완전한 건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역사적인 출발의 순간에 첫발을 함께 딛고 싶은 소망과 함께 나의 몸이 무엇 때문에 상처를 입었느냐는 생각에 미쳤기 때문이다.
2 나는 유효원 협회장님께 죽어도 임지에서 죽을 각오이니 나의 임지를 정해 달라는 말씀을 드렸다. 협회장님의 허락이 있어 전남 화순으로 임지를 배정받게 되었다.
3 내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화순을 그리면서 7월 20일 오후 4시경 임지에 도착했다. 우선 활동을 위해 방 한 칸을 구한 곳이 전도관 집사 댁이었다. 그러나 강의 장소를 적은 ‘통일교회 원리 선포’ 포스터를 온 화순읍에 붙였으나 집주인의 반발이 심하여 방을 옮겨야 했다.
4 할 수 없이 화순읍 뒤편 향교 마루에 무조건 짐을 옮겨놓고 다시 벽보에 장소를 바꾸어 썼으며 이곳에 놀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숨이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도 낮에는 1백~1백 50호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말씀을 전하였다.
5 낮 12시부터 2시까지는 각처 그늘 밑에 쉬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통일교회 원리 선포라는 플래카드를 세워 놓고 듣건 말건 있는 힘을 다하여 힘차게 외쳤다. 화순에서 2km쯤 가면 만연폭포가 있는데 이곳엔 하절기 휴양차 또는 폭포에 물놀이 온 사람이 많다. 주로 도시에서 몰려온 사람들이다. 오후 3시부터는 여기에서 또한 원리 강의를 했다.
5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발이 부르트고 피로가 온몸을 휘감았다. 식생활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것이 보통이었다. 미식은커녕 꽁보리밥조차 먹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또 어려운 일은 밤을 지새우는 것이었다.
6 저녁 강의시간은 향교에 놀러 오는 사람들도 있어 많은 사람 앞에 강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의가 끝나고 다 돌아간 후 큰 향교 건물 마룻바닥에 혼자 있노라면 허전하고 한없이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모기는 기습 공격으로 목 얼굴 손발을 교대해 가며 습격해 왔다.
7 또한 석양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 노방 강의를 했다. 특히 장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장터 높은 곳에 올라가 소리쳐서 원리 말씀을 전했다. 우선 ‘동산의 노래’를 소리쳐 부르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나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8 모두가 굿(약장사 놀이)을 구경하는 표정으로 나의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성가가 끝나면 나는 간략하게 나의 소개를 끝내고 창조 원리에서 시작하여 재림론까지 숨 돌릴 틈도 없이 강의했다. 특히 그들은 선택받은 한국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끼운 한 정감록 비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9 세 번째 장날이라고 생각된다. 그날도 성가를 3곡쯤 신나게 부르자 사람들이 우- 하고 모여들었다. 그때 주위를 살펴보니 비료포대가 높이 쌓여 있어 그곳으로 올라가 원리 강의에 열을 올렸다.
10 그런데 내가 어찌나 기운차게 발을 굴렀던지 비료포대가 터지고 말았다. 주인이 변상하라고 했지만 변상할 돈이 없는 처지라 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사정 얘기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강의를 듣던 사람들 중에 어떤 분이 비료포대를 사겠다고 하여 무사히 해결됐던 것이다.
11 40일 전도 상반기에 접어들었을 때 선생님께서 순회를 오셨다. 나는 선생님께 ‘마이크나 메가폰이 있었으면 합니다’ 하고 보고드렸더니 목이 터져서 더 이상 못할 때까지 하라는 말씀이셨다. 다시 힘을 얻고 은혜를 받아 외치고 또 외쳤다. 멋지게 맞고 멋지게 밟히고 멋지게 쓰러지면서 죽지만 말고 남아지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했다.
12 어느 날 하오 3시 40분경 당시 전라 지구장이시던 황환채 씨가 순회 오시었다. 그 무더운 여름철, 지금처럼 아스팔트도 아니요, 평탄한 도로도 아닌데 자전거로 전라남북도 대원들이 배치된 곳을 순회하시는 중 화순에 당도하신 것이다.
13 주무실 방이 없어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화순 복귀의 기점인 향교로 모시고 갔다. 마침, 며칠간 강의를 듣고 감명받은 분이 자기 집에서 모시고 가서 식사를 대접해드렸다.
14 이날 밤 수많은 모기와 싸우시게 할 것도 고민이려니와 40일 기간 중 유일한 자가용 3천리호 자전거를 둘 곳이 없었다. 생각 끝에 자전거 바퀴에다 허리띠를 맨 뒤 한 쪽을 내 옷자락에 매고 잠을 잤다. 잠든 사이에 혹시라도 누가 자전거를 가져가면 자연 내 몸에 신호가 올 것을 예상하고 한 일이었다.
15 다행히 무사하게 밤이 지나갔다. 지구장님도 웃으시고 나도 웃었다. 많은 격려의 말씀을 하시고 떠나가실 때 이 세상에 그렇게도 사람이 그립고 아쉬울 수가 없었다.
16 어느덧 40일 하계 전도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결실이 나타나지 않았다. 뿌리기만 했지 가꾸지는 않았으니 잡초인지 곡식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때 협회에서 가능한 곳은 교회를 세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17 나는 화순에서 8km쯤 떨어진 능주로 옮겨갔다. 그곳은 50년의 역사를 가진 기성교회(장로교)가 있었다. 마침 인도자가 공석 중이어서 구주남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18 그는 47년의 신앙 경력에 장로직 23년, 읍장 12년, 도의원 2대란 화려한 경력을 가진 유지급 인물이었다. 그분의 고민은 딸이 전도관으로 개종한 데 있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알고 그분과 접촉하면서 신앙 토론을 가졌다. 좋은 반응을 얻어 교회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 장로님을 대신 전라지구 수련회에 참석시켰다.
19 수련회를 다녀온 장로님의 신앙은 완전한 식구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변해 왔었다. 장로님과 의논하여 부흥회를 가졌는데 강사로 황인태, 이동연, 김진경 씨가 왔다. 성과가 좋았다. 모두가 은혜를 받아 좋아했다. 부흥회가 끝나고 기념촬영을 할 때 구주남 장로님이 지금까지 사정을 말하고 장로교회 간판을 내리고 통일교회 간판을 붙였다.
20 처음에는 모두 당황하고 있었으나 구주남 장로의 보충 설명으로 모두가 이해하게 되었고 비로소 통일교회가 된 것이다. 2백여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교회 건물과 교인 80여 명이 한꺼번에 통일교인이 된 것이다. 그때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1960년 여름 하계 전도에 계속된 성과로서, 나는 수고의 보람도 느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단락을 읽을 때는 자동적으로 "우와~~~"라는 소리가 나오네요. 정말 준비된 의인을 만나고 전도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