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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가 삶을 짐 지지 않을 의무>의 줄거리:
평생 세상을 사는 동안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의무는 내가 내 삶을 짐 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 문제라고 여겨지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것에 대한 나의 의무는 내가 짐 지지 않는 거라는 뜻이지요. 만약에 그 문제를 내가 짐 지면 나는 내 생애 최대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고 가장 원초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겁니다.
내가 삶을 짐 지지 않을 의무
(누가복음 11:45~54)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가 삶을 짐 지지 않을 의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가 삶을 짐 지지 않을 의무’
의무(義務)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의무를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 배우자에 대한 의무, 자녀에 대한 의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의무가 있지만 삶에서 정말로 지켜야 될 단 하나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삶을 짐 지지 않을 의무”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의무입니다.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나는 짐 지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짐 지고 부담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인 책임인 짐 지지 않아야 할 의무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짐 지는 것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짐 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책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거꾸로 살아왔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스스로 짐 지고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책임감 있게 문제를 짐 질 것이다.”라는 마음가짐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이야말로 문제에 대한 책임회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내가 삶을 짐 지지 않을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세 번의 저주를 하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사건을 지켜보던 한 율법교사가 모독을 느끼고 명예훼손을 이유로 예수님께 강하게 항의합니다. 율법교사가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에 모독을 느꼈던 이유는 당시에 대부분의 율법교사가 바리새인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분리되었다는 것은 거룩하고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러움을 핵심으로 하여 이들을 지적하셨습니다. 더러움에서 발생한 공로 사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지게 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하나님과 관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음을 비난하십니다. 율법교사의 입장에서는 출신을 욕하는 셈이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신들의 더러움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공로 사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의를 저버리며 선생이자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끊어지게 만드는 자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서 삼라만상의 창조주시요 이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의 가치들을 사랑하였고 세상에서 복을 받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율법교사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영생하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공로 쌓기의 연장선상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성경에 명시된 모세의 율법 외에도 공로 쌓기와 실천을 위하여 무려 613가지의 조항을 덧붙여서 가르쳤습니다. 행위를 통하여 주권자 하나님께 원하는 것들을 받아내고자 하는 공로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가능한 많은 행위의 지침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행위의 항목을 많이 만들어서 그것을 지키고,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많이 주시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로 사상의 핵심 뼈대입니다. 46절에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라고 하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이 다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무척 오해가 많은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해석하자면 율법교사들이 자신들은 지키지도 못하는 율법과 613가지의 조항을 백성들에게만 강요하였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해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던 바리새인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바리새인은 박하와 운향과 채소와 땔감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드리던 자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곡식이나 가축이나 기름과 같은 생필품에만 십일조를 드렸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구체적인 행위로 율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구체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여겼기에 행위에 있어서는 결코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5장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의란 구원받을 수 있는 근본적인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맞추어진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이 말씀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도 율법의 기준에 일치하지 못한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행위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켰음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본문 또한 결코 이들의 가르침과 행동이 모순됨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석들을 보면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하여 율법사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다른 말씀에 비추어보아도 맞지 않으며 논리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오래전에 연예인 출신의 권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다이어트에 관한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이어트가 참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권사님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이어트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몸으로 먹고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연예인들이 엄청나게 절제된 식단을 따르며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소속사에서 식사까지 억제하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뛰어난 몸매가 좋아하는 돈을 버는 수단이 되기에 다이어트에 성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도 몸으로 돈을 벌 수 있으면 얼마든지 다이어트가 가능할 것이라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율법주의가 이와 같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잘 보여서 세상의 가치를 많이 받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연예인들이 돈 벌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듯이 바리새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율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돈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었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율법교사의 역할을 알아야만 합니다.
본래 율법교사는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율법을 연구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삶의 짐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짐을 더 짊어지우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삶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그 짐을 벗겨내는 일을 해야 될 사람들이 오히려 삶을 위해 더 무거운 짊을 질 것을 요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앞서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분리되었다는 것은 거룩하고 깨끗함을 의미하는데 주님께서 이들에게 문제 삼으신 것은 바로 더러움이었습니다. 39절에서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율법교사들에게 짐 지는 문제를 언급하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율법교사들의 본래 역할이란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가중시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표현해보자면 “너희는 율법에 더해 613가지의 조항을 하나님의 뜻으로써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런데 너희로 인해 백성들은 짐을 짊어지고 무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율법이란 삶의 짐을 벗기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너희는 율법교사라고 하면서도 백성들의 짐을 벗기고자 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은 삶의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을 벗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들은 이러한 율법의 근본 취지를 망각한 채 오히려 세상을 탐함으로써 짐을 더욱 짊어지게 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삶에 대한 짐을 벗고 가볍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했지만 율법교사들은 오히려 세상에 대한 짐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짐을 벗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선민은 타락한 사람들 중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택하셨다는 것은 이들을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리고자 하심입니다.
타락 이전의 상태란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로서 좋고 나쁨의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금지규정이었기에 이것을 부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것은 삶을 위한 최선의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이 지켜질 때 사람들은 스스로 짐 질 수 없습니다. 모든 짐 지기는 판단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으니 짐이 되지 않습니다. 타락 전의 아담의 삶에서 선악과가 금지되었다는 것은 곧 삶에 대한 짐 지기가 금지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타락하기 전 사람의 책임과 의무는 삶을 짐 지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즉 내가 책임지고 해야 될 일이란 삶을 책임지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인간의 의무였습니다.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진 에덴에서의 삶이란 곧 내 삶을 책임지지 않아도 될 의무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타락하였고 내 삶의 문제를 짐 지지 않아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의무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삶에서 천 가지, 만 가지의 문제를 짐 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받은 삶입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한 일이란 저주를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받은 인류 중에 일부를 택하셔서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택받은 사람들이 바로 선민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율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따라서 율법교사들에게는 당연히 삶의 짐을 덜어주는 역할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본대로 이와는 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천 가지 만 가지 삶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짐으로 둔갑시켜 더 보태고 얹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책임지고 지켜야 될 의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어도 율법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이러한 오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율법주의가 나쁜 것이지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공백을 가진 사람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마음 공백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이란 가질 때에 마음이 채워져서 기쁨과 만족이 되리라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이렇게 믿는 대상으로서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대상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만이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실 수 있음을 고집하고 지키며 의무로 삼을 때에 우리는 인격적 주체성으로서 하나님만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구할 때 이 세상 어떤 것도 책임질 의무는 없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는 첫 번째 계명을 지켰을 때 저절로 지켜지는 계명들입니다. 짐 지지 않고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게 될 계명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의무로 삼아야 할 것은 첫 번째 계명뿐입니다. 나머지 아홉 계명 중에 부모에 대한 관계, 배우자에 대한 관계에서 간음의 문제, 이웃에 대한 관계에서 살인문제와 탐욕에 대한 문제 등이 나옵니다. 이처럼 삶에서 내 문제라고 느끼게 되는 모든 명령에서 짐 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본래 취지임에도 율법을 연구한다는 율법교사들이 이러한 취지를 없애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율법교사들에게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율법교사들이 공로 사상에 찌들어서 율법을 행위로 이해하고 짐 지우게 한다 한들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백성들 또한 세상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율법을 지킨다고 이해하였습니다. 본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무 또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좋아하고 소원할 때에 이 세상 짐은 아무것도 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비롯한 올바른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러한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짐을 지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는데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스스로 짐을 지고자 하는 것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까부는 것과 촐랑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담았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마음에 담고 짐을 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유지하고 고집하는 것은 악독한 일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선포하는 선지자나 사도들을 박해하였고 죽이기까지 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가장 좋으신 분으로 믿어 마음에 모시려 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하게 될 때 삶의 짐을 짊어지게 됩니다. 돈을 좋아하였다면 돈이 삶의 짐이 됩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재테크, 주식투자 같은 돈 버는 방법이 율법이 되고, 이러한 율법 조항을 가르치고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짐이 되는데 돈을 버는 방법으로써 율법 조항을 열 가지 백 가지를 짐으로 얹어주는데도 좋아하고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을 따릅니다. 오히려 돈을 벌지 말고 하나님을 벌면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돈도 허락하실 것이라고 가르친 선지자들은 때려죽였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 것을 짐 져서는 안 됩니다. 세상 짐을 졌다는 것은 세상을 좋아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대상을 짐 질 수는 없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할 수 없이 일을 나가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어야 되기에 윗사람들 눈치를 보고 그 무거운 짐으로써의 회사 일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 좋아하면 돈 문제도 회사 일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져 나가리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것도 짐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구약성경 히브리어로 루아크(רוח) 즉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또 신약성경에서 영은 프뉴마(πνευμα)로써 마찬가지로 호흡, 바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람과 같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하고 소원하는 강도가 강해질수록 마음과 삶은 가벼워집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미군부대에서 복무할 때에 파티를 위해서 커다란 애드벌룬을 띄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수소가 가득 찬 애드벌룬을 잡고 있으면 몸이 가벼워져서 걸을 때마다 붕붕 뜹니다. 하나님을 갖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갖는 것은 결코 짐이 되지 않습니다.
돈을 좋아해도 짐이고, 건강을 좋아해도 짐이고, 자녀를 좋아해도 짐이고, 승진을 좋아해도 짐이고, 이 세상 것을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짐이 됩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짐이 되는데 그것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율법들을 지켜야 한다는 짐을 짊어져야만 합니다. 자녀의 형통을 바라는 부모는 지켜야 될 율법 조항이 열 가지 스무 가지가 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가벼워집니다. 마음의 공백에 바람처럼 가벼운 영이신 하나님이 들어오시니 내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이미 하게 된 세상의 일들을 멈추라는 것이 율법의 내용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본래 하나님의 주권이 임해야 될 하나님의 짐이고 책임이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일을 새 일로 여겨 가벼워지라는 것입니다. 돈, 건강, 형통, 배우자, 자녀, 부모를 좋아하는 대신에 하나님만을 좋아하면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짐 지시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율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집약되어 나타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짐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에서 날마다 전파되는 내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에서 좋아하여 끌어안고 짐 지고 짐마다 해당되는 율법들을 지키는 삶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삶을 짐 져서 무거워지지 말고, 가지면 가질수록 가벼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탈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그랬듯이 이러한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짐을 벗겨낸다고 하면 좋아해야 할 것 같은데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짐 지고 있는 상태에 더 많은 율법의 짐을 지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봉사하고 충성하면 복 받는다, 구제하면 복 받는다, 기도하면 복 받는다, 헌금하면 복 받는다, 성수주일하면 복 받는다는 율법 조항들을 지키기를 바라지만 그것들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좋아하는 것을 의무로 삼을 때에 마음은 가벼워질 뿐만 아니라 나의 삶을 하나님이 짐 지시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이러한 말씀을 싫어하여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자유가 중시되니 제가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미친 소리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의무는 삶을 짐 지지 않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의 생애 동안 지켜야 될 단 하나의 책임과 의무는 삶을 짐 지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짐을 벗으라 요청하는 선지자들을 죽였던 죄악 된 체질을 죽이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쉬지 않고 바라봄으로써 삶을 짐 지지 않아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의무를 충실히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