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5막
제 1막 : 끝나지 않은 장면들
우리는 같은 라인에서 일했습니다.
대략 열두 명에서 열여섯 명,
한 팀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라인이 돌아가기 전
사람들은 인사를 했고
우리도 그랬습니다.
헤어진 뒤에도
우리는 같은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같은 기계 앞에,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달라진 건 하나였습니다.
아침에 그 사람이 인사를 할 때
내 차례에서 눈이 살짝 비껴갔습니다.
처음에는 기다렸습니다.
내일은 다를 거라고.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간단한 인사 후
눈은 내 옆을 지나쳤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하고는 웃었습니다.
떠들었습니다.
목소리가 컸습니다.
그 사람의 웃음소리가
라인 전체에 퍼졌습니다.
나는 같은 라인에 종일 서 있었지만
그 웃음 안에는 없었습니다.
사람이 그림자가 되는 건
아주 초라한 일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건도 없습니다.
그냥 어느 날부터
그 사람의 하루 안에서
내가 없어집니다.
있는데, 없어집니다.
그게 가장 오래 남은 장면입니다.
끝나지 않은 장면들 중에서
가장 아팠던 장면.
그런데 사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 옆을 지나쳤던 건
어쩌면 내가 먼저 가르쳐준
방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귈 때,
나는 우리의 관계를 공장에서 숨겼습니다.
비밀이라고, 조심하자고.
그래서 나는
그 사람 앞을 지날때 모르는 척했습니다.
같이 웃지 않았습니다.
같이 걷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먼저 그림자였습니다.
내가 만든 그림자.
그러니까
헤어진 뒤 그 사람이
내 옆을 지나친 건
그냥 배운 대로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르쳐준 대로.
제 2막 : 너는 몰랐을 나의 하루
그 사람은 몰랐습니다.
나는 라인에 서서 가끔 옆을 봤다는 걸.
그 사람이 누구랑 웃는지,
오늘은 목소리가 어떤지,
아무것도 아닌 걸 확인했다는 걸.
확인하면 아팠습니다.
안 보려고 했는데
같은 라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몰랐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힘들지는 않은지
걱정했다는 걸.
나를 그림자 취급하는 사람을
그래도 걱정했다는 걸.
이상한 일입니다.
미워해야 편한데
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몰랐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잘 지냈으면 했다는 걸.
같은 라인에서, 같은 시간 동안,
서로 다른 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하루가
괜찮기를 바랐다는 걸.
붙잡으면 망가질 것 같아서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그림자로 있기로 했습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바로 몇 발자국 옆에 있다는 걸
아마 몰랐을 겁니다.
제 3막 : 그리고, 기적
그런데 당신이 돌아왔습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만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당신께 하는데
라인에서 눈이 비껴가던 아침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림자로 서 있던 그 시간들이.
그래도 손을 잡았습니다.
당신을 다시 차안에서 안았습니다.
따뜻했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나는 그때 알았습니다.
당신도 어색했다는 걸.
나를 지우려던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라는 걸.
그게 당신이 감당하는 방식이었다는 걸.
아팠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침들도 우리 이야기라는 걸 압니다.
같은 라인에 서서
혼자 써온 이 마음을
이제 당신한테 늦었지만 꺼내어 놓습니다.
우리는 끝났었지만
어떤 장면도 실제로는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렇게 마주 보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준 당신.
사랑합니다.
제 4막 : 이제부터의 하루
오늘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과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넣어둔 거였습니다.
나만 먹으라고.
몰래.
깍두기 형태로 자른 사각수박
당도가 높았던 멜론.
한개는 직접,
한개는 냉장고에.
나는 잠시 냉장고 앞에 서 있었습니다.
같은 라인에서
눈을 비껴가던 사람이
이제는 내 냉장고에 과일을 넣어두고 갑니다.
몰래.
우리 둘의 컴바인벨트가 다시
공장에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서로 챙겨주는 컴바인벨트.
서로의 입에 모이를 넣어주는 컴바인벨트.
사랑의 전원이 다시 켜졌습니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른 라인에서 일합니다.
공장은 다르지만 각자의 집에 도착할쯤
아쉬움의 손을 멀리서 흔들어줍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걸로 전부입니다.
많이 미안했고,
그 미안함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합니다.
제 5막 : 소중한 것들
거창한 다짐은 못 하겠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압니다.
한번 잃어봤습니다.
같은 라인에 서 있어도
당신이 내 하루에 없으면
그 하루가 얼마나 비어 있는지.
비어 있는 게 가벼운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냥 허전한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압니다.
아침에 같은 방향으로 출근하는 것,
퇴근할 때 멀리서 손 흔드는 것,
냉장고에 과일이 있는 것.
이 작은 것들이
사실은 전부라는 걸.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 작은 것들 앞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겠습니다.
냉장고 앞에서
한참 서 있던 것처럼.
월요일 오전 브레이크 15분,
금요일 30분 어쩌면 또 15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당신한테 인사를 할 겁니다.
눈을 비껴가지 않고.
ps1
겨울비가 자주 내리던
2025년 12월에도
2026년 1월에도
나는 매일 같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얇은 와이어 포지션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당신 손가락만큼은 아프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당신은 늘 가장 얇은 와이어 앞에 있었습니다.
그게 그때 내가 당신한테 할 수 있는
기도의 전부였습니다.
ps2
당신 먹여주려고 한국에서 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어가며 꾸역 꾸역 챙겨온 우유네요 ㅎㅎㅎ
4개 마셨으니 성공입니다^^
별거 아니지만 난 당신 입속에 뭐든 넣어줄때가
가장 보람차고, 행복하네요^^
때론 과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