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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을 향한 나의 몹쓸 시도의 마지막>의 줄거리:
몹쓸 시도란 악하고 고약하여 백해무익한 시도입니다. 평생 몹쓸 시도만 하며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몹쓸 시도가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여 바라며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이 다 백해무익한 몹쓸 시도입니다. 본문의 베드로 사도는 자기 생애에서 세상을 향한 마지막 몹쓸 시도를 합니다. 우리도 마지막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나의 몹쓸 시도의 마지막
(요한복음 21: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을 향한 나의 몹쓸 시도의 마지막>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을 향한 나의 몹쓸 시도의 마지막”
본문 14절을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면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에 왜 제자들과 줄곧 같이 지내시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지속하여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대신에 추종자들과의 단발적인 만남을 드문드문 반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세상을 떠나실 분이셨기에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은 굉장히 소중하였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소중하다고 느껴질 때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제자들과 머무시지 않고 간헐적으로 나타나셔서 만남을 이루시고는 헤어지십니다. 이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의문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사십일 동안 예수님은 대체 어디서 머무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숙식을 어떻게 해결하셨던 것인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20장 17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혼자 계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수종 들던 여인들의 대표였던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수종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 무척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기쁨도 잠시일 뿐 제자들이나 추종하는 여인들과는 오히려 많이 서먹해진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자꾸만 어디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14절에 기록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는 말씀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자들과 한 번 만난 뒤에 계속 같이 계시지 않았기에, 공생애 때의 밀접하고도 친밀했던 분위기가 전혀 살아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낯선 분위기는 12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감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만큼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 대하기를 어려워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제자들과 추종하던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너무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마치 제자들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20장 21절을 보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말씀으로는 평강을 말씀하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또 22절에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선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의 기원과 약속과 선언이 제자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줄곧 같이 지내던 제자들은 가까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모습으로부터 무척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지금 서로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 만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어떤 구간에서는 상행선과 하행선이 지나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지나칩니다. 옛날에 기차가 같은 지점에서 서면 창문을 열고 반대편 차량의 사람과 악수나 인사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속하신 곳은 세상 밖에서 건국하신 부활의 나라였습니다. 한편 제자들이 속한 곳은 여전히 세상 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치 상행선과 하행선이 마주칠 때 인사하고 손을 잡을 수는 있어도 소속이 완전히 다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요한복음을 마치고 로마서로 들어갈 것입니다. 로마서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체류하시는 동안 부활의 나라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 되신 사건은 세상의 출구이면서 동시에 부활의 나라 입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17장 16절의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는 의미의 말씀을 누누이 반복하셨습니다. 18장 36절에서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의 나라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저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씀이 너무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시기에 세상에 속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부활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예수님과 함께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 계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예수님을 간헐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제자들은 머잖아 일어나게 될 오순절 역사를 기점으로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요? 평생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 머물면서 예수님을 간헐적으로 만나거나 이름을 불렀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절대로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말씀이 가르쳐주는 메시지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렇게 간헐적으로 만나신 것은 제자들을 오순절까지 끌고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전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유월절부터 오순절까지는 오십일의 간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를 하다가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기간을 생각해보면 오순절 7일 전에 승천을 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기도에 힘쓴 기간도 일주일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까지 제자들을 끌고 가시기 위해서 부활의 나라에 계시면서 세상 나라에 속한 제자들과 간헐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속한 곳이 다르기에 지속적인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의 제자들처럼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가 끝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고 십자가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은 예수님의 길이 하늘로 향해 있음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서야 십자가가 끝인 줄로만 알았는데 십자가 너머에 부활이 있고 부활을 넘어서 하늘로 이어지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로부터 제자들의 의식과 마음이 드디어 하늘을 향하는 방향성과 길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방향성과 길을 보게 된 이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며 십자가 사건과 무덤 사건을 자신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드디어 부활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본문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의 인생에 있어서 몹쓸 시도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제목에서 “세상을 향한 나의 몹쓸 시도의 마지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의 75억 명은 오늘도 하루 종일 이 몹쓸 시도를 실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몹쓸 시도는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죄악 속에 빠져있는 동안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몹쓸 시도는 이 세상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바라는 일을 생각해내고 계획하여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3절 하반부를 보면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서 겉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변화는 몹쓸 시도의 완전한 근절입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가지도 스스로 결정해서 시도하는 일이 없습니다. 스스로 실행하는 어떤 일에서도 결실을 볼 수 없음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은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외관상의 특징입니다. 절대 단 하나의 행동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서 행하도록 허락되지 않음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됩니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고기잡이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게 몸에 붙은 기술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였습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기쁘기는 했지만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간다고 한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자 한 곳은 디베랴 호수라고 했습니다.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바다의 다른 이름입니다. 디베랴 즉 티베리아스(Τιβεριάς, Tiberias)는 갈릴리 바다 서쪽에 있는 도시 이름입니다. 이곳은 헤롯 안디바가 티베리아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서 도시를 건설하고 이름을 지은 곳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갈릴리 바다는 디베랴 호수라고도 불렸습니다. 이곳에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베드로 생애의 마지막 시도가 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지막 몹쓸 시도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 자기 자신을 위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면서 원하는 일을 시도하는 것은 몹쓸 시도입니다. “몹쓸”이라는 말은 의미대로 악하고 고약한 백해무익한 일입니다. 이 마지막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베드로 사도의 이 마지막 시도가 너무나 부럽습니다. 이것이 부러운 이유는 우리에게도 몹쓸 시도의 마지막이 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바라고 생각하는 바대로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시도하는 몹쓸 시도에는 마지막이 와야만 합니다. 더 이상은 몹쓸 시도가 일어나지 않는 계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정말 복되게도 바로 이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베드로에게 고기잡이는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익숙한 일이었고 먹고 살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땅에서 행한 마지막 몹쓸 시도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마지막 몹쓸 시도의 시점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5장 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예수님께 우리가 붙어있을 수 있는 길은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세상에 머물러 계시던 차원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 접붙여지게 됩니다.
이렇게 부활 안으로 들어가면 이 세상을 향해서는 오직 지시만을 따르게 됩니다. 6절을 보면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11절을 보면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묘사가 나오는데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활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부활의 나라를 사는 사람은 나의 생각을 지시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나에게 지시하는 모든 시도는 다 몹쓸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몹쓸 시도는 반드시 언제가 마지막이 있고 끝이 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머무시며 만드신 공간과 차원은 천사들이 내려왔다는 말씀이 뜻하는 대로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천국이 확장된 자리였습니다. 천상의 모든 존재는 예수님과 성령님까지도 오직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서만 움직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들이십니다. 성령님은 심지어 아버지 하나님의 주체성의 복사판 영이십니다. 부활의 나라는 천국의 앞마당이면서 세상을 접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오는 지시 이외는 다른 지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세상을 향해 움직일 수 있는 어떤 동기나 이유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일은 세상을 향하여 나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은 사람들은 담배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다고 합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제일 싫고 지긋지긋한 일은 세상에 대해서 내가 생각한 것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몹쓸 시도를 하는 것을 제일 지긋지긋해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십자가를 놓치고 부활의 나라에서 떨어져 나오면 몹쓸 시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 몹쓸 시도는 이제 끝이 나야 하고 마지막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이 지났다면 너무 좋습니다. 지난번에 행한 몹쓸 시도가 이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본문 6절을 보면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배 오른편이라는 말이 참 특이합니다. 작은 배라고 하였으니 3~4M 정도였을 것이고 넓게 잡아도 5~6M 정도였을 것입니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는 배의 방향이 수시로 바뀔 수 있는데 이러한 작은 배라면 방금 오른편이었던 곳도 금세 왼편으로 돌아갑니다. 또한 그물을 멀리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던지니 바로 배 옆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른편 왼편은 의미가 없습니다. 배가 바람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왼편 오른편이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 큰 고기떼가 몰려왔다면 어느 편으로 던져도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부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굳이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신 말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물결을 따라 움직이며 오른편과 왼편이 수시로 바뀌는 작은 배에 타고 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하자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잡힙니다.
부활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나 과제를 만났을 때 오직 지시대로만 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받은 지시가 옳음입니다. 지시를 따르지 않고 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대로 하였다면 무조건 틀림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세상의 상식에 맞고 타당할지라도 지시가 아니라면 무조건 틀린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고기잡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지식과 경험과 익숙함을 따르는 것은 세상에서는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나라 기준에서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지 않았기에 틀린 일입니다. 밥을 해서 먹을 때에도 주님의 지시대로 하지 않았다면 틀린 일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일할 때도 주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면 틀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시를 따르는 것이 무엇이고 지시가 오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부활의 나라로 들어갔느냐가 기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을 통하여 세상에 대해 죽었느냐가 명확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지시를 명확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습관이나 정해진 규칙을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시를 따른 제자들을 위해 백쉰세 마리의 고기라는 결과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고 이 세상을 향한 모든 일에서 오직 지시만을 따를 때는 반드시 주님께서 결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학자들은 백쉰세 마리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고민합니다. 그러나 굳이 숫자 자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해석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백쉰세 마리라는 구체적인 숫자는 이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며 주님의 의도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주님에 의해서 준비된 상황이었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마릿수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는 주님이 준비하신 결과가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지시에 대해서는 모든 일에 대해 결과를 준비해 놓으십니다.
한편 7절을 보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바로 본문의 저자인 사도 요한을 가리킵니다. 요한이 해변가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알고 외치자 베드로는 그대로 배에서 뛰어내려 100m 거리를 헤엄쳐갑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모습은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의 지시만을 따르고 준비하신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만 그때 주어진 결과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오직 주님을 따라갈 뿐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면 결국은 하늘로 올라가는 길 이외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지시한 일에 따라서 풍성한 결과를 맺더라도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관심은 오직 주님에게만 향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러한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을 챙기십니다. 9절을 보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대체 주님은 어디에서 생선과 떡을 구해 준비하셨던 것일까요? 베드로가 고기잡이를 하러 간 이유는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미 먹고살 것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갔다면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몹쓸 시도가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먹고살고 있는지를 모를 정도로 주님이 알아서 챙기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어디에서 생선과 떡을 마련하셨는지 알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관심은 먹고 사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세상을 향해서는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지시를 따랐을 때 나타나는 업적과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본문을 오해하는 많은 목사님들과 주석들이 백쉰세 마리를 복된 숫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시를 따르면 이 세상에서 백쉰세 마리가 상징하는 복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베드로는 그 결과물을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주님이시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 결과물을 버리고 주님께로 뛰어갑니다. 이것이 부활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부활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의 관심은 지시를 따라 나타난 결과물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추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베드로와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기적을 보이시며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베드로의 고기잡이는 마지막 몹쓸 시도였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세상을 향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몹쓸 시도는 마지막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생각을 받은 지시가 아닌 내가 나에게 하던 지시로 이루어지던 시도와 그로부터 나타난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결과는 우리 인생에서 완전히 근절하고 추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을 통과해서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활의 나라에 들어감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서 일상적인 삶의 모든 순간에 주님의 지시를 따르게 하여 주시고 몹쓸 시도는 근절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모든 지시에 준비된 결과물을 맞이하되 관심은 결과물이 아닌 오직 주님과 하늘을 향하여 유지하는 부활의 나라 시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