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달빛으로 피는 박꽃
이영백
시골 초가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은 네 번째(1956년)로 이사한 곳이다. 초교 입학 전에 서당 다니면서 나의 유년기는 그 곳에서 살았다. 들판 속 외딴 집에 달빛 훤히 밝은 날 사랑채 지붕 위에 박꽃이 핀다. 박이 긴 줄기 키워 지붕까지 올라 자랐다. 그것이 뒤덮으면 나 보란 듯 박꽃을 피워내었다.
박 심을 곳은 봄이 오면 서쪽 울타리 밑에다 미리 거름 넣어 두었다. 그 곳에 호박구덩이처럼 만들어 호미로 세 곳 파서 박 씨 두 알씩 집어넣어 심었다. 박이 떡잎 나고, 속잎 나서 밤낮으로 무럭무럭 줄기 벋으면서 잘 자란다.
박은 달빛 받으면서 긴 줄기마다 새로 아프게 사이가지 치면서 새하얀 작은 꽃, 박꽃을 피운다. 그것도 박꽃은 달빛 받아 밤에 피고, 아침에 진다. 밤새 달빛 머금어 내가 잠자는 동안에 피어낸다. 그 새하얀 박꽃이 나에게 좋은 심성을 키우듯 소담한 사랑채 지붕 위에서 달밤에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하게 핀다.
짙은 청색 줄기에 짧은 털이 보송보송 나 있으며, 덩굴손으로 다른 물건을 감으면서 잘 자라 벋어 올라간다. 잎은 어긋나고 콩팥모양으로 잎가장자리가 밋밋하게 생겼다. 그렇게 숨어 피듯 달빛을 받아야만 박꽃이 잘 핀다.
꽃은 흰색 꽃으로 7~9월 사이에 잎겨드랑이에서 한 송이씩 핀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피는데, 수꽃에는 긴 꽃자루가 있으나 암꽃의 것은 짧다. 꽃은 통꽃이지만 꽃부리가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어린 날 내 눈에는 박꽃이 아주 청초하다.
낮에 열심히 놀다 집에 돌아와 피곤하면 저녁 먹은 채로 곧 잠이 든다. 그러나 낮에 활동 많이 하고 물 자주 마셨으니 소피를 봄직도 하다. 자다가 집지킴이 “라시”가 바람 부는 소리에도 하릴 없이 컹컹 짖어댄다. 그 소리에 나도 잠이 깨서 바깥 화장실에 나간다. 휘영청 밝은 달은 박꽃 피우느라 힘들었는데도 환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며 초가지붕을 바라보라고 자꾸 넌지시 알린다.
지붕 위 박꽃으로 훤하다. 박의 짙은 청색 줄기 잎겨드랑이에 하얀 박꽃 통꽃이 활짝 잘 피었다고 나를 내려다본다. 잠시 소피보는 것도 잊으며 달빛에 피운 박꽃에 빠졌다. 박꽃이 피고 나서 아침에 지면서 열매 맺은 것이 박 이다.
박 타고, 속 긁어내어 아버지 좋아하는 박나물을 만든다. 속 긁어낸 껍데기는 말리면 박 바가지가 된다. 박 바가지를 여러 개 만들어 개수 늘려 걸어두면 보는 이마다 장관이라 감탄한다. 금년 박꽃 잘 피워냈기에 그런 풍경 연출한다.
새하얀 박꽃이 피어서 나의 마음 설레던 그 날들이 지금도 그립다. 아버지 박나물 맛본다.
구천에 계시는 아버지 금년에도 박꽃이 잘 피었냐고 묻는다. “예! 아버지.”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