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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진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아이 앰 댓 (I AM THAT) 하권
문: 제 질문은 진리의 증거가 무어냐 하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혹은 철학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종교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것만이 진리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라 확신하면서 자신들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진리의 증거로 여깁니다. "내가 확신하니까 이건 진리야"라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리 완전하다 하더라도 어떤 철학이나 종교, 어떤 강령이나 이데올로기는 내부적인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그 자신의 진리여부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들은 마치 사람들이 입는 옷과 같아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며 유행하는 조류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실하여 사람의 확신에 의존하지 않는 그런 종교나 철학이 있을 수 있습니까? 경전에 의존하는 것도 경전 자체가 어떤 사람의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주관적이지 않은 진리가 있습니까?
M: 과학의 경우는 어떤가?
문: 과학은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기 때문에 순환론일 뿐입니다. 경험은 주관적인데 과학은 경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언어로 표현되더라도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M: 자넨 틀림없이 마음 너머의 진리를 구하는 것 같군.
문: 선생님, 저는 이미 많은 신비체험을 겪었습니다. 마약은 값싸고 빨리 환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호흡이나 정신적인 훈련에 의해 생겨나는 전통적인 삼매라는 것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산소삼매가 있고 이산화탄소 삼매도 있고, 공식이나 일련의 생각에 의해서 생겨나는 자기 원인적인 삼매도 있습니다. 단조로움이라는 것은 최면효과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저는 삼매를 진리의 근거로 받아들일수가 없습니다.
M: 삼매는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것일세. 그것은 성질이 없는 상태야.
문: 경험이 없는 것은 부주의 때문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면 경험이 포착됩니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빛이 부정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부정적인 상태로 치부 하는 것이 우리들을 멀리 데려다 주지는 못합니다. 부정하는 것 자체가 긍정을 담고 있으니 말입니다.
M: 어떤 면에서 보면 자네가 맞네. 그러나 자넨 지금 스스로가 생각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도 않고 진리의 증거를 요구하고 있으니 어떤 증거가 자네를 만족시킬 수 있겠나? 만약 자네가 증거를 믿는다면 증명을 할 수가 있지만 증거가 타당한 것이라는 것은 무엇이 입증해 준단 말인가? 자네가 아는 것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그리고 뭔가에 대해서 자네가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바로 자네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토록 할 수가 있지만, 나는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과 실재한다는 것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네.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지만 진리라고 하는 것은 변화가 없고 어디에나 있는 거라네.
문: 선생님 저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 증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저를 저 자신에게로 되돌려 보내지 마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 진리를 아는 분은 선생님이지 제가 아닙니다.
M: 자네는 증언을 진리의 증거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어. 타인들의 경험은 자네에겐 아무 소용도 없고 무한한 독립적인 관찰자들의 공통된 진술로부터 유추되는 사실을 모두 거절하고 있으니 자네를 만족시킬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지는 자네가 내게 말해줘야 해. 타당한 증거를 어떻게 하면 테스트할 수 있겠나?
문: 솔직히 말해서 저는 무엇이 증거가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M: 자네 자신의 경험도 증거가 안 된단 말인가?
문: 저의 경험도 심지어는 저의 존재도 증거가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저의 의식있음에 의존하고 있으니까요.
M: 자네의 의식은 무엇에 의존하고 있나?
문: 모릅니다. 그 전이라면 육신에 의존한다고 말을 했겠지만 지금은 육신이 부차적인 것이지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육신이 존재의 증거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M: "내가 육신"이라는 생각을 포기한 걸 보니 기분이 좋군. 그것이야말로 오류와 고통의 주요한 원인이 되는 말일세.
문: 저는 지적으로는 그걸 포기했지만 특별한 개인이라는 존재감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저는 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무엇인지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존재함을 알고 있지만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어떤 식으로 그걸 표현하더라도 알려지지 않음과 직면하게 됩니다.
M: 바로 자네 자신의 존재가 실재하는 것이야.
문: 확실히 우리는 지금 같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고 제한되어 있고 한계를 아는 한 개인입니다. 저는 하나의 사실이긴 하지만 가장 내용이 빈곤한 사실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일시적인 존재 위에는 아무것도 쌓아 올릴 수가 없습니다.
M: 자네 말이 자네보다 현명하군. 개인으로서의 자네의 존재는 일시적인 것이야. 그러나 자네가 단지 한 개인인가? 도대체 자네가 사람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문: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의 존재감은 단지 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입니다. 저와 무관한 것은 조금도 증명해 주지 못합니다. 저는 상대적이며 그 상대성의 피조물이며 동시에 창조자입니다. 절대적 진리의 절대적 증거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있음이라는 느낌 정도가 진리의 증거일 수가 있나요?
M: 물론 안 되지. 내가 존재한다든가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연관되어 있으며 조건 지어진 것이야. 그것들은 이름과 형태를 투사하는 마음의 경향 때문이야.
문: 이름과 형태와 관념과 확신들은 그러하지만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아니라면 아마도 저는 모든 것이, 진리도 포함해서, 상대적이라고 하는 말을 믿었을 겁니다. 그래서 가정에 의해서 사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선생님을 만나서 절대적인 것이 제가 도달할 수도 있고 아주 바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선생님께 듣고 있습니다. 평화라든가 축복이라든가 영원이라든가 불멸같은 낱말들이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해 주는 것처럼 저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즐거움을 구하고 호기심이 있는 저의 타고난 본성이 일깨워져서 저는 선생님께서 열어 놓으신 영역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당연하게 저는 질문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얻을 수 있는 건가요?
M: 자넨 마치 설탕이 달다는 것을 증명해 주면 그걸 먹어보겠다고 말하는 아이와 같군. 맛이 달다는 것의 근거는 입 속에 있는 것이지 설탕 속에 있는 것이 아닐세. 설탕이 달다는 것을 알려면 맛을 봐야지 다른 방법은 없어. 물론 이게 설탕인가? 맛은 단가? 질문으로 시작을 하고 자신이 맛을 보게 되면 나의 확신을 받아들이게 되지. 그리하게 되면 모든 의문이 해소되고 자네의 지식은 직접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 된다네. 나는 자네가 나를 믿으라고 요구하지는 않아. 단지 내말을 믿고 시작만이라도 해 보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모두 증거를 주고 말고 할 걸세. 자네는 진리에서 행하는 진리의 증거를 원하는 것 같구만. 그러면 증거의 증거는 뭐가 되겠나?
그리되면 후퇴를 거듭할 뿐이야. 후퇴를 중지하려면 증거를 요구하지 말고 잠깐이라도 뭔가를 진리로 받아 들여야 해. 그게 뭔가는 중요하지 않아. 하나님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고 자네의 자아일 수도 있어. 어떤 경우라도 어떤 사람이나 알려지지 않은 뭔가를 진실한 것으로 받아 들여 봐. 일단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근거하여 행동을 해 보면 그 다음 단계가 드러나는 것이야. 이건 마치 어둠 속에서 나무를 오르는 것과 같다네. 하나의 나뭇가지를 잡고 올라가야만 그 다음 가지가 보일게 아닌가? 과학에서는 이런 것을 실험적인 접근 방법이라고 하지. 하나의 이론을 증명 하려면 지시에 따라서 실험을 해 봐야 해. 그 전에 실험을 해봤던 사람들이 남긴 방법적인 지시에 따라서 말일세. 영적인 탐구에서는 이처럼 우리가 행해야 할 일련의 실험들을 일컬어 요가라고 부르는 거야.
문: 요가도 굉장히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합니까?
M: 물론 모든 깨달은 이들은 자기가 성취한 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길을 추천하지.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아주 자유롭기 때문에 그들의 조언은 구도자들의 필요에 맞추어 나가지. 모든 길이 마음을 정화해 주게 되어 있어. 순수하지 못한 마음은 진리를 발견할 수가 없고, 순수한 마음의 그 투명함을 통해서 진리가 쉽고 깨끗하게 보일 수 있어.
문: 죄송하지만 저는 저의 어려움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진리의 증거에 관해서 질문을 하고 있는데 진리를 획득하는 방법을 제시받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그 방법들을 따라서 몇 가지 놀랍고 바람직한 상태를 얻는다 하더라도 저의 상태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모든 종교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몇 가지 황홀경을 약속합니다. 그 황홀경은 진리에 의해 나타난 것입니까? 믿음의 산물입니까? 만약에 그것이 하나의 조작된 상태라면 저는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가 너희의 구세주인 그를 믿고 죄에서 구원 받으라고 말하는 기독교의 예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죄를 지은 크리스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데 왜 죄에서 구원 받지 못했느냐고 질문을 하면 내 믿음이 완전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대답을 합니다. 결국 완전한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하면 완전한 믿음이 생겨나지 못하니 다시 구원 받지 못한다는 식의 악순환에 빠져 듭니다. 충족 시킬 수 없는 조건을 지시 받고서 그걸 이루지 못한다고 우리는 비난 받고 있는 것입니다.
M: 자넨 자네의 지금 잠깬 상태가 일종의 무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군. 진리의 증거를 묻는 것은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야. 자네는 "내가 있음"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여러 상태와 접하고 있지만 진리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접촉할 수도 체험되지도 않는 거야. 자네는 이원성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어서 그걸 알아채지조차 못하고 있지만 내게는 다양성이라는 것이 분리를 일으키지 않는다네.
자네는 진실이라는 것이 이름과 형태의 저 편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상상하지만 내게는 이름과 형태들이 진리의 계속 변하는 형태들일 뿐이지. 진리는 그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네. 자네는 진리의 증거를 요구하지만 내게는 모든 존재 자체가 증거일세. 자네는 존재를 있음과 없음으로 구분하고 진리와 존재를 구분하지만 내게는 그 모두가 하나야. 자네가 아무리 깨어 있는 자신의 상태를 확신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고 변화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못해. 내가 나의 상태에 관해서 주장하듯이 말일세. 하지만 나는, 자네는 상상만 하고 난 그렇지 않지만, 우리들 사이에서 차이를 느끼진 않아.
문: 선생님은 처음에는 제가 진리를 물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나서는 제가 상상만 한다고 비난을 하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상상이겠지만 제게는 현실입니다.
M: 그거야 탐구를 할 때까지는 그렇다는 거야. 난 아무것도 비난하고 있지를 않아. 단지 질문을 똑 바로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진리의 증거를 찾는 대신에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증거들을 탐구해 봐야 해. 그리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중에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그냥 주워들은 말을 믿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진리를 알고 싶으면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지나가봐야 해.
문: 이유가 무언지 모르겠지만 저는 상태라든지 다른 몇 가지 영적 체험들을 끔찍히도 무서워합니다. 술을 마신다거나 담배를 피운다거나 열광한다거나 마약, 호흡, 노래, 기도, 섹스, 단식, 만트라, 기타의 몇 가지 현기증나는 추상들은 익숙하기 때문에 독특한 몇 가지 체험을 주고 나의 일상적인 상태로부터 저를 분리시킬 수가 있지만, 원인이 없어지고 나면 결과는 저절로 사라지고 단지 일시적인 기억만이 흐릿하게 손짓하며 사라집니다. 결국 결과는 수단에 묶여 있는 것이니 모든 수단과 결과를 포기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질문을 새로 하겠습니다. 과연 진리는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까?
M: 자네가 찾아갈 수 있는 어디에 진리가 있겠는가? 또 진리를 발견했더라도 그게 진리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그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서 무슨 시금석을 가져 가겠나?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갔을 뿐이야. 진리의 증거는 무엇인가? 자꾸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데 질문 자체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이야. 진리의 증거가 무엇인지 왜 질문을 하냐는 거야. 자네가 진리를 직접 알지 못하고 혹시 속았을까봐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자네는 진리가 진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어떤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만약에 그것이 진짜라면 그 진리를 가지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속을까봐 두려운 거야. 진리를 돈 주고 사려고 하는데 파는 사람을 못 믿고 있다 이거야. 가짜나 모사품을 살까봐 무서워서 말이야.
문: 저는 속을 것이 무서운 게 아닙니다. 저 자신을 속일까봐 무서운 것이지요.
M: 사실은 자신의 참된 동기를 모르다 보니까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일세. 자네는 진리를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래오래 지속될 안락을 구하고 있을 뿐이야. 어떠한 마음의 상태도 영원히 지속될 순 없어.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시간과 공간 자체가 한계가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영원히"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 진리의 증거라는 말도 마찬가지야. 왜냐하면 이중성이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 그 자체가 증거이고 의미이고 목적이라서 완전하기 때문이지. 모든 것이 하나인 곳에서는 증거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거야. 자네가 영속성이 진리의 근거이고 더 오래가는 것이 좀더 진리라고 생각을 하니까 시간이 진리의 척도가 된 거야. 그리고 시간은 마음속에 있으니 시간이 마음의 기준이 되어서 진리의 근거를 찾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야. 이처럼 불가능하고 가망 없는 일이 어디 있겠나?
문: 만약 선생님께서 참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말에 동의를 하겠습니다만 진리가 실재다, 완전한 지식이 있다고 주장을 하시니 저는 "그것이 뭡니까? 어떻게 그걸 아세요?"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맞아, 마하라지가 옳았어."라고 말하게 해줄 것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M: 자네는 증거라든가 권위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자꾸 고집하고 있어. 진리라는 것이 무언가를 특정하게 가리키면서 "여봐 이게 진리야."라고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그렇지 않아. 진리는 노력의 결과도 아니고 길의 끝도 아니야. 그것은 지금 바로 여기에 진리를 갈망하고 찾는 그 속에 존재하는 것이야. 그것은 마음과 몸보다도 더 가까이에 있고 "내가 있음"이라는 느낌보다도 더 가깝다네.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면의 존재를 찾으니 볼 수가 없지. 진리를 대상화해 놓고서 자기 생각에 맞는 증거와 테스트를 자꾸 주장하지만 증거라는 건 사물과 생각에 적용될 뿐일세.
문: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진리는 저를 넘어서 있고 그러니 저는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M: 자넨 자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네 자체가 진리일세. 단지 헛된 것을 참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을 뿐이야.
문: 선생님은 마치 진리에 증거를 요구하지 마라. 오직 진리가 아닌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라 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M: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을 분간하는 데 있는 거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알 수가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직접 되어볼 수밖에 없는 거라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알려져 있는 것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그것은 무지와 마찬가지야. 하지만 무지가 없는 곳에서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 자체로는 무지도 진리도 존재를 지니지 못해. 이들은 단지 마음의 상태일 뿐이고 그 본질상 바꿀 수가 없는 의식 속의 운동의 한 형태일 뿐이라네.
문: 진리는 마음의 영역 안에 있습니까? 그 밖에 있습니까?
M: 둘 다가 아니고 둘 다이기도 해. 그건 말로 옮길 수가 없지.
문: 표현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은 귀가 따갑게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조금도 현명해지지는 않습니다.
M: 그런 말이 무지를 덮어주기도 해. 마음은 자신이 만들어 낸 용어를 가지고만 작동할 수 있어. 그러니 마음은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가 없지. 감각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면서 그것이 없으면 감각도 정신도 있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은 마음속에 담길 수가 없어. 마음이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마음을 넘어서려면 침묵에 동의해야 한다네.
문: 행동이 진리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까?
M: 행동도 아니요. 행동이 아님도 아니야. 그것은 그 둘 모두를 넘어서 있어.
문: "그래, 그것이 진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나요? 달리 말하면 진리는 순전한 부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긍정할 수 있는 때가옵니까?
M: 진리는 묘사될 수는 없고 체험될 수는 있지.
문: 체험은 주관적이어서 공유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체험은 저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M: 진리는 체험될 수가 있지만 단순한 체험만은 아니야. 나는 그것을 알고 전해줄 수가 있지만 그건 오직 자네가 마음을 열 때만 가능해.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문: 저는 욕망과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제가 진리를 알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까?
M: 진리라는 것이 선행의 보상도 아니고 시험을 통과한다고 해서 받는 상도 아닐세. 그것은 낳을 수가 없는 것이야. 그것은 원본적인 것으로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인 셈이야. 자네 자신이 존재하니 당연히 자격이 있어. 진리를 높게 쳐 줄 필요가 없어. 그건 바로 자네 거야. 괜히 쫒아 다니느라고 거기서 멀리 달려 나가지만 말게나. 그냥 조용히 이 자리에 머무르게.
문: 만약 선생님께서 육신이 고요하고 마음이 평온하기를 바라신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자각 속에서 저는 몸과 마음이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여러 원인들 때문에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유전과 환경이 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창조자인 강력한 "내가 있음"이라는 것은 마약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지워질 수 있고 한 방울의 독약으로 영원히 없어질 수 있습니다.
M: 자넨 다시 자신을 육신으로 여기고 있군.
문: 제가 이 뼈와 살과 피로 된 이 육신을 내가 아니라고 버리려 해도 마음과 느낌과 상상으로 이루어진 미묘한 육신은 남아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니니 버리라고 해도 일종의 몸인 의식은 여전히 남게 됩니다.
M: 자네가 옳아. 그러나 거기서 멈출 필요가 없어. 계속 더 나아가게. 의식도 의식의 중심에 있는 "내가 있음"도 자네가 아닐세. 자네의 본성은 전적으로 자의식이 없고 거칠고 미묘하고 초월적인 모든 자기동일시로부터 자유로운 것일세.
문: 저는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거가 없습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M: 사실은 그 반대야. 존재하려면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지. 자신을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죽음이고 지옥이야.
문: 그 전에 책에서 보니까 고대 이집트에서 마약이나 마술을 이용해서 몸으로부터 빠져 나와 몸 바깥에 실제로 서서는 시체 같은 자신의 형태를 바라보는 신비현상을 체험시켰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죽고 나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확신을 줄 수가 있고 그들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국가와 사원에 대해서 아주 이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지니고 있는 개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여전히 남습니다.
M: 육신은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음은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보게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비자기동일시가 바로 해탈이야. 자네는 자신이 무엇인지 알 필요는 없고 무엇이 아닌지만 알면 돼. 모든 발견이 정복할 새로운 차원들을 제시해 주니, 자신이 무엇인지를 결코 알지 못해. 미지의 것이야말로 한계가 없지.
문: 그러면 영원히 모른다는 말씀인가요?
M: 무지라는 것이 원래 없었다는 뜻이 되는 거야. 진리라는 것은 발견 속에 있는 것이지 발견된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야. 그리고 발견에는 시작도 끝도 없어. 한계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그것을 넘어가게나. 겉으로 보기에는 불가능한 과업들을 자신에게 부과하게나 그것이 바로 길일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