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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예수님이 탄식하는 소리, 에바다! 열려라! (마가복음 7장 31-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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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예수님의 이동 경로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해안가 지방인 두로와 시돈을 지나서 요단강 동쪽 내륙지역인 데가볼리 땅을 통과하여 주 사역지인 갈릴리 호수가로 오셨습니다. 해안가와 내륙지방을 두루 다니셨다고 간단하게 언급하지만, 상당한 거리라서 도보로 이동하려면 보통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지나쳐온 ‘데가볼리’라는 지역은, 숫자 십(10)을 뜻하는 ‘데카’라는 말과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라는 말의 합성어로, 이 지역에 10개의 크고 작은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이 지역과 인종에 상관없이 광범위하게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배드리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다 거쳐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앞을 지나가시는 주님을 놓치지 마시고 꼭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갈릴리로 돌아와서 사역을 이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이렇게 청각과 언어 장애를 가진 사람을 농아(聾啞, a deaf and dumb person)라고 부릅니다. 한 가지 장애를 가진 것도 견디기 힘든 일인데, 중복되는 장애를 가졌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인생이었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곤고(困苦, 형편이나 처지가 매우 어렵고 고생스럽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장애인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장애인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와서 안수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장애를 고쳐달라는 간청을 한 것입니다.
요청을 받은 예수님은 평소 병자나 장애인을 고쳐주는 것과는 사뭇 다른 행동을 보이십니다. 농아 장애인을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이전에도 종종 중요한 병자를 고쳐 주시거나, 죽은 자를 살려 주실 때 혼자 방에 들어가셔서 따로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 가운데서 살려주실 때, 예수님은 무리들을 다 나가게 하시고,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하심으로 살려 주셨습니다.(막 5장)
또, 열여덟 해 동안(18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몸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 주실 때도, 조용히 불러 가까이 오시게 한 후에,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도다”하시고 안수하자 곧 바로 몸이 곧게 펴지는 기적도 있었습니다.(눅 13장) 예수님은 극히 형편이 어렵고 절망적인 병자나, 죽은 자를 고치시고 살리실 때는 아주 각별한 신경을 쓰셨습니다. 최대한 가까이 오게 하거나 은밀한 장소에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농아를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은 이런 이전의 예를 보면 이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만큼 농아의 처지를 매우 불쌍하게(긍휼하게)여기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농아를 따로 데리고 가서는, 농아의 귓속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손에 침을 뱉어서, 그 침 뱉은 손을 농아의 혀에 대셨습니다. 이런 행동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침을 뱉어서 치료하시는 것이 굉장히 불결해 보일 수 있으나 이것도 전례가 있는 행동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나면서부터 한 번도 세상을 보지 못한 맹인을 고쳐 주실 때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 후 실로암 물가로 가서 씻으라 하여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는, 벳세다라는 동네에서 맹인 한 사람을 고치실 때 눈에 침을 뱉으시며, 두 번에 걸쳐 안수하셔서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는, 여리고 성에서는 두 맹인이 예수님을 쫓아오면서 “다윗의 자손 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그들의 눈을 어루만지심으로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침을 사용하거나 손으로 몸을 직접 접촉해서 기적을 행하시는 일이 한 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침(saliva)을 사용한 치료가 보통으로 행해지는 일종의 의술행위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농아, 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에 앞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라고 합니다. 농아를 따로 데리고 가시고, 침을 사용하여 치료하시는 것도 흔치는 않은 일이었지만, 병자를 앞에 두고 치료를 하시다가 탄식하신 것은 이곳에서만 나오는 상황입니다. “탄식 했다”는 말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숨을 한 번 크게 쉬셨다”고(우리말 성경) 했습니다. ‘탄식한다’는 원어상의 의미는 “슬픔으로 신음하다”는 뜻이고, 로마서 8장 23절에서는 외적인 압박감 때문에 답답함에 갇혀 꼼짝 못하는 심리적인 상황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농아를 보시고는, 매우 슬퍼하셨고, 신음하셨고, 그가 마음에 지닌 답답함을 100% 이해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동병상련의 마음을 지니시고, 농아와 동일한 감정을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탄식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농아를 향해서 강력한 숨결을 내 뿜기 위해서 숨을 고르셨다는 것이 가장 적합한 해석입니다. 숨결이 밖으로 분출되는 것은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이 뜨겁게 전해지려는 순간입니다. 농아를 향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의 마음이 ‘탄식’이라는 한 단어에 녹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농아에 대해 가지셨던 탄식하셨던 감정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단면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2005년에 개봉되었던 ‘말아톤’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초원이는 20살의 청년이지만 5살의 지능을 가진 자폐아입니다. 초원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초코파이 먹는 것과 동물의 왕국 시청하는 것이고, 그가 제일 잘하는 것은 초원을 마음껏 달리는 얼룩말처럼 달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몸매는?” “끝내줘요?”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라는 대사들이 영화를 통해 유명해졌습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우 받고, 사회의 차별과 냉대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초원이지만, 사회는 약자를 무시하고, 극복할 수 없는 편견 속에서 절망감만 더해 갑니다. 초원이도 힘들지만, 초원이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엄마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장애를 가진 당사자와 부모들이 겪어야 할 좌절과 낙심의 마음을, 장애를 겪어보지 못한 정상인들은 1%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초원이가 살아가야 했던 그 시대의 냉정함 보다, 예수님 당시에 농아가 겪어야 했던 천대와 멸시는 비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냥 두면 농아는 며칠 안으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방치된 삶을 살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의지로 예수님 앞에 나아오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나왔겠습니까? 그동안 받아왔던 수모는 그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 놓았을 것이고, 이제는 어떠한 삶의 낙도 없이 죽지 못해 사는 비참한 신세였습니다. 몸이라도 성하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들리지도 않죠. 말도 못하죠. 자포자기하고 거리에 내버려져 있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마치 버려진 물건 주워 오듯이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나마 숨은 쉬고 살아있지만, 반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이 몸과 마음과 영혼이 회복불가능의 상황인 몰골로 예수님 앞에 나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따로 데리고 가신 이유도 그 농아의 처참한 몰골을 보시고, 너~무나도 가슴 아프셨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해도 울컥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농아의 장애를 치료해 주려고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셨지만,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냄새, 사랑의 온기를 전해 주려고 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의 치료의 손길은 육체적인 장애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상처들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성령으로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십니다.
그리고 깨어지고, 부서지고, 온통 뒤틀려 버려서 큰 상처를 받은 우리의 영혼을 온전케 해 주셔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강건하게 세워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처참한 몰골로 앉아 있는 농아가, 다시는 멸시, 천대, 무시와 차별을 받지 않도록 새 힘과 능력을 주시려고, 강력한 성령의 기운을 그에게 쏟아내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에 찬송과 영광이 저절로 나오는 광경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탄식하셨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할렐루야” “아멘”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우리 육신이 지닌 장애만이 장애가 아닙니다. 마음의 장애, 영혼의 장애, 신앙의 장애가 더욱 우리를 곤고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곤고함에 빠져 있는 불쌍한 영혼을 따로 데려 가셔서 완벽한 회복이 가능한 주님의 숨결,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기운으로 우리의 모든 마음과 영혼의 장애를 치유하고, 온전케 회복시켜 주시려고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장애가 있습니까? “나에게는 이런 저런 장애가 있습니다” 라고 꼭 집어서 이야기 할 정도가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내가 무슨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장애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어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고, 장애가 있어도 감추고 살려고 하는 것이고, 장애가 너무 많아서 다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마음의 장애들을 낱낱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장애들을 주님 앞에 다 꺼내 놓고 치유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장애를 영적장애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영적 장애라고 정리해 놓은 10가지를 소개 합니다. 들어 보십시오.
1. 기도하기는 싫어하면서, 복 받는 것은 되~게 좋아하는 사람.
2. 섬기기는 싫어하면서, 섬김을 받지 못하면 인상부터 구기는 사람.
3.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더 추구하는 사람.
4. 자신이 하는 것은 다 옳고, 남이 하는 일은 다 딴지거는 사람.
5. 헌금 많이 한 것이 면죄부인양 다른 일은 하나도 안 하는 사람.
6. 말씀과 기도와 찬양보다는 실시간 검색어에 눈을 번쩍 뜨는 사람.
7. 자신은 안 하면서 다른 사람 찬송을 잘 하네 못 하네 심사하는 사람.
8. 성경을 하루에 한 장도 안 읽으면서, 설교를 평가하는 사람.
9. 헌신, 열정, 희생, 사랑, 순종...이런 단어가 너무 낯선 사람.
10. 싸이즈가 큰 교회 다닌다고 작은 교회를 무시하고 깔보는 사람.
이 중에 몇 가지나 해당되시나요? 이것 뿐 이겠습니까? 인격 장애, 언어장애, 생활 장애 등등, 우리 자신들의 삶 자체가 장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치료가 필요 합니다. “저 좀 따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세요” 라고 요구해야할 정도로 심각한 장애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버티고, 미루고, 몸을 뒤틀면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소리칩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믿음의 부자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 합니다” 교만한 사람이 어찌 자신의 단점인 장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자신 만만하게 소리쳤던 사람들이 초대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하고 장애를 알지 못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내가 너희의 행위들을 다 알고 있는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니 내가 너희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계 3:16)고 하시면서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신앙, 대충대충 하는 신앙을 계속 하는 것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기를, “너는 스스로 풍족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실상 너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계 3:17)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내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람의 눈으로 달아보면 믿음의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처럼 보여 칭찬 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감찰해 보면, 우리의 교만과 장애들이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밝은 빛 앞에 서서 벌거벗은 것과 같이 우리의 영적 장애, 영적 교만을 다 들추어내야 합니다. 감추어진 비밀스런 장애를 스스로 드러내는 이 작업 안하면 온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은 숨을 크게 들이신 후에 농아를 향해서, “에바다!” “열려라!”라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이 외침 한 마디로, 성령의 기운이 한 번에 농아의 장애와 마음의 상처를 일시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막혀있던 귀가 열렸고, 입이 제대로 움직였습니다. 마음속이 “뻥뻥” 뚫리는 시~원함을 맛보았을 겁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이렇게 됩니다. 다 뚫립니다. 다 해결 됩니다. 다 채워집니다. 한 번이면 됩니다.
성령의 기운이 우리 마음에 운행하기만 하면, 산도 무너지고, 바위도 깨지고, 쓰레기도 치워지고, 썩은 냄새도 사라집니다. 교만과 거짓의 영이 물러가고, 성결의 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에바다” 이 소리를 들었을 때 농아의 기분은 상상하지 못하는 기쁨이 충만했을 겁니다. 속이 시원한 말을 들었을 때, “사이다 발언”이라고 하는데, “에바다!” “열려라!”라는 외침이 우리의 육적, 영적장애를 확 치워 버리는, 뻥 뚫어버리는 영원한 사이다 발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즉각 효과가 나타나서, 35절에서 농아 장애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다”고 합니다. 치유함을 얻은 농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기록하지 않고 남겨둔 부분에 내 자신을 대신 대입해 보며 읽는 재미가 배가 됩니다. 내가 예수님 면전에서, “에바다”라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상상해 보시고, 나음을 받은 내가 어떻게 행동했을 지를 감동으로 느껴 보십시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럴까봐서 예수님은 이를 자제 시키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이르시기를,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경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기 전보다, 기적을 일으킨 후의 상황을 항상 염려 하십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해서, 절박한 상황일 때는 간과 쓸개를 다 내줄 것 같이 약속도 하고, 맹세도 하지만, 막상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어 시간이 흐르면, 과거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도가 돌변합니다. 예수님은, 장애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다시는 장애의 모습, 과거의 불쌍한 몰골로 돌아가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믿음의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문제를 해결 받을수록, 장애가 치유되고 온전케 될수록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점점 자라나야 합니다. 단 기간에 무엇이 되어 지고, 안 되느냐에 따라서 일희일비, 부화뇌동 하지 말고, 경건과 거룩함을 스스로 지켜 나가는데 힘써야 합니다.
아마, 농아 장애인 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기대에 부응해서, 자신이 치유 받은 것을 자랑하러 다니지 않고, 조용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복음의 진리를 깊이 깨달아 알아가는 제자의 길을 걸어갔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장애인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복의 통로로 일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이 ‘경고’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드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보이는 장애보다 보이지 않는 장애가 더 무섭습니다. 장애는 인격적인 장애, 영적인 장애, 어떤 장애든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해결 받고,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온 힘을 다하십시오. 감추지 마시고 장애를 인정하시고,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장애를 들추어내시고, 망설이지 마시고 장애를 가지고 주님 앞에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 은밀한 곳으로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십시오. 일대일의 만남 속에서, “에바다” “열려라” 외치는 성령의 숨결을 받으십시오.
주님이 내 뿜으신 성령의 숨결을 충만하게 받아서 치유되고, 온전케 되었다면, 다시는 장애의 모습, 추한 몰골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도록 주님 곁을 떠나지 마십시오. 주님과 동행하면 다시는 장애인이 되지 않습니다. 00교회 모든 분들이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건강한 육신, 맑은 영혼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되며, 성장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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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피폐해지는 것을 가장 슬퍼하시고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장애를 가진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의 숨결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에바다” “열려라” 성령의 숨결, 치유의 은혜를 내려 주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