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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정리: 2001.7.6
04:50광점동-05:20얼음터-07:20쑥밭재-08:05국골4거리-08:35무덤-09:00하봉-09:10헬기장-09:35중봉-10:00천왕봉-10:20출발-10:45이정표(천왕봉1km,추성8.7km)-11:05마폭포-12:30대륙폭포-14:30선녀탕-15:00두지터-15:30추성리-16:00광점동
지금 책상에 앉아 산행을 정리하자니 온갖 상념이 교차한다. 모든 일이 그러하건만 산행에서는 더욱 그렇다. 방심이 허를 부르고, 욕심이 화를 자초한다고. 하마터면 조난 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에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칠선골 하산 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갑자기 내린 폭우로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형수처럼 초조했으며, 정신을 찾기가 어려워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다.
휴가원을 내고 시간을 만들었다. 광주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하여 지리산을 향한다. 작년 초겨울 이후 이른 새벽에 지리산행을 하는 것은 2번째이다. 지리산 휴게소에 도착하니 4시 15분.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며 졸음을 쫓는다. 지금은 어둠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지만 잠시 후면 날이 밝아져 올 게다. 인월에 들어서니 어둠에서 깨어나는 지리산의 실루엣을 볼 수가 있다. 실상사를 지나 의탄교를 건너 지난달에 주차하였던 광점동 입구 다리를 건너 널따란 공간에 차를 주차하고 배낭을 들쳐 메었다. 지금의 시각이 4시 50분. 나의 산행 시작과 함께 지리산의 아침이 열린다. 이곳에서 광점동 마을까지는 불과 5분 거리이지만 마을 끝까지는 포장길로 경사가 무척이나 가파르다. 낯선 침입자를 바라보고 개가 사정없이 짖는다.
어름터에 도착하여 아름다운 계곡경치에 감탄한다. 사람들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름터 계곡. 임소혁 선생님의 사진에 아름답게 보였던 어름터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계곡을 바라보며 걷는다. 시원한 물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 날은 밝아오고 이른 아침 날씨도 시원하여 산행하기엔 더없이 좋다. 광점동을 출발한 지 30분 만에 어름터에 도착했다. 지난 한 달 전 산행 때는 비구니 스님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른 시간이라 아직도 주무시는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이 조그맣고 허름한 집에서 길이 갈라지는데, 직진 길을 택하면 쑥밭재-대원사 또는 쑥밭재-천왕봉의 산행이 가능하다. 계류를 건너면 두류 능선을 따라 하봉에 이른다. 지난번은 바로 계류 건너 산행을 시작하였고 비가 내리고 안개가 차올라 두류 능선에서 하봉과 초암능선을 바라보며 날씨가 좋지 않아 하산하였다.
오늘은 직진 길을 택하여 쑥밭재와 하봉을 거쳐 천왕봉을 오르고 다시 하봉 아래 국골 사거리에서 두류봉을 거쳐 지난번 오르지 못한 길로 다시 어름터로 산행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천왕봉에 올라 욕심이 생겼고 그 욕심이 화를 자초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지리산행 최대의 악전고투가 열리는데 이것은 잠시 후의 일이다. 인간사 어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있으랴. 순간의 선택이 파란을 가져온다.
어름터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씻어온 쌀에 계곡물을 떠서 밥을 지었으나, 밥맛이 없어 열 수저를 다 뜨지 못하고 정리한다. 남은 밥은 오후에 라면을 끓여 먹으면 되니, 그대로 코펠 속에 넣어 배낭을 꾸리고 시간만 낭비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출발 시각은 아침 6시 15분. 어름터로 향하는 계류 소리를 들으며 비교적 수월한 산행을 한다. 길은 양호하며 정면을 바라보니 쑥밭재에서 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가깝게 보이기 시작한다. 홀로 산행 때는 쉬지 않고 서서히 오르는 편이라 주위를 잘 살피고 풍광을 즐기며 여유 있는 걸음으로 정말 신선놀음이다. 20여분 걸으니 된비알이 이어진다. 항상 힘이 들 때쯤이면 산마루나 정상이 가까워졌다는 얘기다. 쉬엄쉬엄 걸어 오르며 빗방울을 맞는다. 아직은 안개가 피지 않았고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 산행은 쉽게 이어진다.
7시 20분이 되어 쑥밭재에 도착하였다. 광점동에서 출발한 시간에서 아침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시간 반이 걸린 셈이다. 좌측길은 왕등재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하봉 방향이다. 직진한다. 조금 더 오르니 아까와 같은 2개의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좌측 길은 새재 마을을 지나 대원사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역시 하봉 방향 길이다. 이젠 이 능선길. 하봉 능선 길을 따라 천왕봉을 오르면 된다.
비가 내린다. 아까보다는 빗방울이 조금 굵어진 것 같다. 신록이 우거진 나무숲을 헤치고 나가니 국골 사거리에 이른다. 오름 길에서 보면 직진하면 국골 방향이고 우측길은 두류봉을 향하여 다시 어름터로 내려가고 좌측 길은 하봉으로 이어진다. 제법 큰 바위에 빨간색 페인트로 '국골'이라 표기를 해놓았다. 지난번 산O님이 질문한 곳이다. 능선길을 엷은 비를 맞으며 올라가니 이름 모를 전망 좋은 바위가 나타나 하봉을 향해 카메라를 내밀었으나 심술을 부리며 이내 안개 속으로 함께 사라져 버린다. 계속 기다렸으나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십여 분 걸어 올라가니 지난번 조개골 산행 때 만난 무덤 1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잘 살펴야 무덤인지 파악할 수 있다. 계속 비가 내려 배낭 커버를 뒤집어 씌우고 재킷을 걸쳤다. 바람도 아까보다는 강해진 것 같다. 하봉 직전 봉우리에 섰는데 이 봉우리 좌측길이 조개 골로 향하는 길이다. 우측은 초암릉으로 길로 내려가는 길이고. 하봉 능선 위에는 오르면서 보니까 여러 곳에 조개골 하산 길이 열려있다.
하봉을 지나 헬기장에 도착하였다. 헬기장을 바로 지나 이정표가 있는데, 천왕봉 1.7km, 치밭목 1.8km. 조개골에서 오르면 하봉 헬기장까지는 3시간이면 충분하다. 중봉에 올랐다. 중봉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은 정말 멋진데, 안개가 자욱해 오리무중이다. 이 중봉에서 하산하면 써리봉을 거쳐 치밭목에 이르거나 황금능선을 경유할 수도 있다. 지리산의 중봉. 2인자이면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중봉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리산을 오르는 많은 산님도 중봉을 잘 알지 못한다.
이제 비는 내리지 않는다. 천왕봉에 올랐다. 나 홀로 천왕봉. 천왕봉을 독점하여 주인이 되기는 지리산행 역사상 처음이다.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지금의 시각이 불과 오전 10시. 광점동에서 천왕봉까지는 빠른 걸음이 아니었는데, 불과 4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천왕봉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작년 9월. 지리산O이님과 천왕봉을 올랐을 때, 태풍 사오마이가 지나던 때라 강한 바람이 불었었다. 바람의 강도는 그때와 비슷하다. 초여름이지만 온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강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하산 준비를 한다.
그런데 하산을 하다 문득 욕심이 생겼다. 칠선골을 다녀온 지 몇 해가 흘렀다. 그래, 이번 기회에 칠선골로 하산하지 않으면 휴식년제에 걸린 지금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으랴. 오늘은 평일이라 산님도 없는데 관리공단 직원에게 적발되면 적당히 핑계를 대지 뭐. 철계단을 향해 내려 걷는다. 지난 98년 지리산에 폭우가 내려 30여 명의 야영객이 대원사계곡, 한신계곡, 칠선계곡에서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그 뉴스를 나는 가리왕산에서 듣고 가슴 아파하였었다. 그 당시에 내린 비로 칠선골 상류는 굴착기로 파놓은 것보다 잔인하게 파헤쳐져 있었고, 산행하기엔 무리가 될 정도로 험악한 꼴을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미끄러워 걸을 때마다 식은땀이 흐른다. 우렁찬 물소리와 만난 곳이 마폭포. 칠선계곡 상류에 있으며 마지막 폭포라 마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놀라와라. 그곳에 에코로바 2인용 텐트가 있으며 두 사람이 텐트 속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소설가 이외수 선생 같은 두 사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덥수룩 기르고 세수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부산에서 어젯밤에 올라와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한다. 갑자기 예상하지 못 한 곳에서 그것도 깊고 깊은 산중에서 사람을 만나면 반가움보다 경계심이 앞선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몇 마디 나눈다. 커피 한잔을 타주며 위험한 곳으로 하산을 하신다면서 지리산을 자주 찾으시는 분 같다며 고마운 대접을 받았다.
지금의 시각이 11시 5분. 천왕봉을 10시 20분에 떠났으니 40여 분 걸린 것 같다. 마폭포를 카메라에 담았다. 오늘 하루 잘 보내라며 인사를 건네고 하산을 재촉하는데 빗방울이 갑자기 굵어진다. 곳곳에서 많은 물이 넘쳐 흐르고 요란한 계류 소리가 들리며 추성리 아래로 흘러내려 간다. 그런데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진다. 낭패감이 쏟아진다. 오랜만에 찾은 칠선골에서 고생깨나 하겠다고 생각하며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큰일이다. 선녀탕까지는 계류를 여러 차례 건너야 하니 하류로 내려갈수록 불어난 물에 계곡을 건너 산행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대륙폭포까지는 그런대로 잘 내려왔으나 여기서 길을 잃고 말았다.
대륙폭포부터는 엄청나게 흘러내려 가는 물을 보며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도 표지기는 보이지 않는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데 도저히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지형에 다다른다. 건너편 쪽에 길이 있는 듯 표지기가 희미하게 나풀거렸지만 계곡은 도저히 건널 수가 없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흙탕물이 된 계류는, 이미 아름답게 흘러내려 가는 지리산 칠선골의 명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게 이성을 상실한 악마였으며 커다란 재해였다. 내림 길에 벼랑 아래 커다란 이름 모를 소(沼)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힘겹게 산비탈을 다시 차고 오른다. 벼랑을 피해 더 오르기도 하고 바위를 수차례 우회하느라 힘도 빠졌다. 지치고 배고픔에 빵을 꺼내 쏟아지는 폭우와 함께 마시며 허기를 달랜다. 마음을 진정하고자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젖은 라이터가 불이 켜지지 않는다. 오늘따라 고어 재킷과 버너 라이터와 장갑을 챙기지 못했다. 요즘 들어 장마 기간이었지만 한동안 비가 없었고, 날씨도 무더워 놓고 온 것이다.
아래를 바라보니 허연 이빨을 내밀며 천지를 집어삼킬 듯 사납게 흐르는 범람한 계곡물에 소름이 끼친다. 공포가 엄습해온다. 91년 시인 고정희는 장마 때 뱀사골 등반을 하다 간장소 부근에서 실족하여 생명을 잃었는데. 혹시 나도 그 상황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체력은 급격히 저하하고 다리도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비탈 사면을 따라 걷다가 미끄러지고 구르기를 여러 번. 이러다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 악다물고 오로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여 힘겹게 하산할 뿐이다. 이미 정강이는 바위에 채여 피가 흐르고 있었고, 비탈에서 미끄러져 구르다가 나무를 잡느라 양손이 베이고 까지고 터졌다. 아아. 지리산신이여 부디 나를 도와주소서. 칠선골. 당신의 신성한 성역을 감히 무단 침입한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제발 노여움을 푸소서.
고생하며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곳이 선녀탕. 한숨을 내쉰다. 이젠 살았구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선녀탕. 하지만 그런 감성에 빠지기는 나의 마음은 이미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나도 모르게 주르륵 쏟아져 내린다. 굵은 빗방울, 땀방울과 함께 쏟아지는 눈물은 사지에서 살아난 그 환희의 눈물이었을까. 선녀탕부터 추성리까지는 그리 걱정할 것은 없지만, 놀란 마음에 아직도 진정이 안된다. 다행히 위험스러운 계류를 건너는 일이 없고, 지계곡에서 내려오는 물만 잘 건너면 된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3시간이 넘는 사투를 정리하며 터벅터벅 내려간다. 나의 몰골은 호되게 전투를 치른 파르티잔처럼 만신창이가 되었다.
오후 3시가 되어 두지터를 지난다. 비옷을 입은 마을 아저씨를 만나 오늘 비가 얼마나 내렸던가요? 12시가 넘으면서 집중적으로 폭우가 내렸다는 것이다. 지친 몸으로 추성마을 가게에 도착하여 우유가 없어 캔 음료를 마시며 겨우 원기를 회복한다. 긴장이 풀림에 온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매점에서 “아저씨 어디서 하산하십니까?” 나는 천왕봉에서 하산했다고 말은 못 하고, 하봉에서 합수골로 하산하여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칠선골을 빠져나왔다고 둘러대었다. “아저씨, 정말 큰일 날뻔했습니다. 잘못하면 죽어요.” 엄청난 고생을 하셨다고 도리질을 한다.
그동안 지리산행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고생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비를 만났어도 조난 또는 생명을 위협하는 산행은 아니었다. 산에서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초보자가 아니다. 이십 년 동안 틈틈이 지리산을 다녔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름의 임기응변과 자신감도 있었지마는 기상이 급변한 지리산 앞에선 나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비를 맞으며 추성리에서 광점동까지 걸어 올라가, 애마를 몰고 실상사로 나가는데 임천강은 범람하여 바다가 되어 있었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도로는 넘쳐 흘렀으며, 와이퍼를 작동해도 겨우 차창 앞이 보일 정도였다. 집에 와 뉴스를 들으니 남원, 함양지역에 많은 비가 내렸고, 특히 지리산에 집중 폭우가 쏟아져 입산이 전면 통제가 되었다고 들었다. 오늘 산행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영원히 잊지 못할 산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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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리산을 사랑하시는 애즈산님이 존경스럽습니다~~!!!
고생고생하셨네요~
지금은 편안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