돝섬 유람
부두에서 불과 1.5km 떨어져 여객선으로 10분이면 도달할 수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가까운 공원처럼 드나들 수 있는 돝섬이다. 섬에 얽힌 설화가 돈복까지 지니고 있으니 로토복권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섬을 찾아가지 않고는 좀이 쑤실는지도 모른다. 그 옛날 가락왕의 총애를 받던 미희가 나들이를 나와 환궁치 않고 이 섬에 피해 있다가 금빛 도야지로 변해 정착하였다는 설화가 그럴듯하다. 그런 설화를 뒷받침이라도 하려는 듯 섬에 발을 디디자 초대형 황금 도야지 상이 가장 먼저 얼굴을 내민다.
마산은 젊은 날의 추억이 깃든 도시이기도하다. 내가 이곳에 머물렀던 1960년대 후반 그때가 마산의 전성기였다는 사실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았다. 마산에 앞서 서울과 대전 부산 등지를 거치면서 대도시에 익숙했던 눈은 마산의 당시 역동성을 제대로 인지하질 못했던 것. 반년 남짓 머물면서 가포해수욕장은 찾아갔지만 바로 코앞인 돝섬의 존재는 몰랐다. 어쩌면 섬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이었으니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배편도 없었고 낚시꾼들 정도나 나룻배로 섬을 드나들지 않았을까 싶다.
황혼에 닿은 내 인생처럼 가을도 이미 깊었고 대관령에선 첫눈 소식도 들렸다. 나무들도 이제 겨울채비에 들어가야 할 터인데 '가고파' 앞바다에 떠있는 섬 단풍은 울긋불긋한 빛깔을 그대로 간직한 채 탐방객을 맞았다. 돝섬을 처음 만난 것은 어느새 쉰에 이른 자식들이 초등생이었을 때로 빛바랜 사진들에 그 추억이 묻어있다. 당시의 섬엔 아이들 키 높이 정도로 설치된 음수대가 고작이었는데 이제 섬은 상전벽해로 변했다. 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이 어쩌면 섬의 가치를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해안을 따라 섬을 일주하는 탐방로는 평활하여 산책하기에 그저 그만이다. 탐방로 중간에서 섬 정상을 오르는 길도 여러 군데 나있다. 하지만 섬은 아쉽게도 탁 트인 전망으로 수평선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북쪽은 높고 넓게 무학산이 막아섰고 산 밑 기존 도시는 초고층 아파트 숲으로 변한지 오래다. 옹기종기 정겹게 남아있는 시가지 주택들도 날이 갈수록 재개발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꿀 것이다. 섬의 동서로는 산업단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수출입용 화물을 싣고 내리는 크레인과 초대형 화물선들도 보인다.
해맑은 하늘이 열렸더라면 섬 단풍도 고운 자태를 뽐냈을 터이다. 우중충한 날씨에다 옅은 해무와 안개처럼 미세먼지까지 합세하여 카메라맨의 기를 꺾는다. 마산만 바닷물이 거무죽죽하고 칙칙한 것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산책로 난간 밑은 바닷물이 빠져 바닥이 드러났고 초록빛 파래로 뒤덮인 그곳에 노파들이 붙어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다. 망태기엔 따놓은 바지락과 굴이 그득했지만 왕복 배삯을 빼고나면 그걸로 생계에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다.
탐방로엔 최치원이 활을 쏘아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는 요괴의 빛을 갈라놓았다는 기록과 그의 학문세계를 흠모하여 마산 월영대를 노래한 고려 조선시대 대학자 10인의 시를 전시하여 눈길을 끌었다. 김포에서 왔다는 노인네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비에 가까이 붙어 서서 마치 경연을 펼치듯 서로 시조를 읊조리는 게 놀라웠다. 퇴계 이황은 ‘늙은 나무 기이한 바위 푸른 바닷가에 있건만/ 고운이 놀던 자취 내처럼 사라졌네/ 오직 높은 대에 밝은 달이 길이 남아/ 그 정신 담아다가 내게 전해주네’라 노래했다.
2012 창원조각비엔날레를 돝섬에서 연 것은 지자체가 돝섬을 가꾸고 홍보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으리라. ‘꿈꾸는 섬’이란 몽환적인 주제를 내걸고 펼친 국내외 작품들이 10년 세월을 지나서도 탐방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돝섬을 포스팅하는 사람에게도 조각품은 힘이 되었다. 사시사철 염분을 머금은 해풍이 불어오는 섬에서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돌이나 시멘트 철재 구리 스테인리스로 작품을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