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먹고 취하여서 둥두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술잔 속에 사라진다
아해야 잔을 부어라 시름 전송 하리라
(감 상)
세상 시름을 술에 취해서 떠나 보낸다는 생각에 미소를 금할 수 없다.
우리 고시조에 술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러 편이다. 그런데, 이 시조
들의 공통점은 종장(終章)의 첫 단어가 '아해야' 로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 시조도 역시 마찬가지다. 아마도 어른들 술자리에 심부름하는 어린
하인들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조를 지은 '정태화(鄭太和)' 선생은 가문이 엄청난 집안이다.
선생의 5대 조이신 '정광필 (鄭光弼) 선생께서 중종(中宗) 때 영의정을
역임한 것을 필두로, 그 손주이신 정유길(鄭惟吉) 선생이 좌의정을, 그
아드님 정창연(鄭昌衍) 선생이 역시 좌의정을, 그리고 그 아드님이자
정태화 선생의 부친께서는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주인공이신 정태화 선생은 字를 유춘(囿春), 號를
양파(陽坡), 시호를 처음에 익헌(翼憲)으로 받았고 후에 충익(忠翼)으로
고쳤다고 한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선생은 1628년 27세에 처음 벼슬 길에 나와서 72세로 별세할 때까지,
인조와 효종 그리고 현종의 3대 치세를 거치면서,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육조(六曹) 참판과 판서를 모두 거쳤으며,
의정부(議政府)의 세 정승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역시 모두 거치며,
1인 지하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을 무려 다섯 차례나 지냈던
어른이다.
공께서 벼슬 길에 머물던 40여 년의 시대는 정묘 호란,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비롯하여, 소현세자 부인인 강빈(姜嬪)의 옥사와 심기원과 김자점
역모사건, 효종의 북벌 추진, 현종 조의 여러차례에 걸친 예송(禮訟) 논쟁
등의 큰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져서, 그야말로 나라와 백성들에게 좌절과
격동과 불안과 고통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난세 (亂世)에서 신중하면서도 원만한 처신과 함께 국사 처리 실적,
문과 무를 겸비한 재능, 눈부신 가문의 후광(後光) 등으로, 이 나라 역사에
가히 전무후무한 화려한 관직 퍼레이드를 남긴 어른이다.
이후에도, 그 자손들이 꾸준히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조에 '정원용'이라는 걸출한 후손이 다시 등장하니, 정태화 선생과 그
가문에 대해서는 별도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선생의 위의 시조 한수가 전해지면서 이 땅의 주당(酒黨)들의 음주
명분이 더욱 뚜렷(?)해 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 명분이란 다름 아닌 '시름
전송' 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