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내내 비가 내린다.
높은 산엔 만년설처럼 하얀 고깔도 썼다. 오전 9시까지 비가 온다고 해 잠을 설쳤다.
5시에 눈을 뜨고 귀 쫑긋 세워 밖의 동향을 살핀다. 낙수의 소리, 아마도 비가 오는 듯하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차에 오른다.
모두가 투덜투덜한다.
“왜 이렇게 비가 와, 오늘 달리기 힘들겠는데”.
“그나마 10시엔 그친다고 하니 괜찮을 것 같아”.
다들 날씨 걱정이다.
연습도 부족한데 날씨까지 좋지 않으니, 부담이 배가 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뿌듯한 감동 참 좋다.
궂은 날씨에 굴하지 않고 밀양마라톤 축제의 분위기는 추위를 녹인다.
대형버스가 길옆에 줄줄이 늘어서고, 격려의 현수막은 운동장 앞 오르막 길을 에워싸고 있다.
다양한 참여자들이 씩씩하게 걷는다. 우산을 쓰기도 하지만, 짧은 팬츠에 민소매를 걸치는 이들도 많다.
나이 탓이라 치부해도 심할 정도의 옷을 입고 열광의 무리에 낀다.
큰 도로를 돌아 운동장으로 향하는 오르막은 무척 힘들다. 얼마나 힘들게 올라야 할까.
곧 있을 고통을 먼저 느껴본다.
아직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데 북적인다.
괜스레 덩달아 바빠진다.
비좁은 탈의실까지 침범한 반갑지 않은 빗물로 더욱 어수선하다.
그나마 가지고 온 타이즈와 바람막이가 있어 이겨낸다. 상당히 추운 날씨다.
계단 밑에 옹기종기 모여 추위와 맞서며 기다린다.
이 추위에 레깅스만 걸치고 오돌돌 떨고 있는 아가씨가 안쓰럽다. 꼭 저렇게 해야만 할까?
많은 인파에 무언가를 얻으려는 사람들도 분주하다.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서명운동, 밀양아리랑대축제와 선샤인밀양 행사 안내, 아직도 세월호를 외치는 사람.
그럭저럭 추위와 싸우다 보니 시간이 되었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몸 푸느라 여념이 없다. 마치 달리는 모습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다.
열광의 도가니가 후끈 달아올랐다.
오랜만에 듣는 배동성의 목소리는 아직도 짱짱하고, 올림픽 영웅 황영조의 격려는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린다.
하프코스 주자들이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니, 예전의 나를 보는 듯 함께 달리고 싶어진다.
마음은 풀코스를 달리고 싶으나, 어찌 나이를 잊으리오.
오늘 10km를 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임을 잊어선 안 된다.
사회자의 카운트에 맞춰 일제히 외친다.
오, 사, 삼, 이, 일, 출발~ 총성이 울린다.
힘차게 달리는 사람들 속에 끼어 페이스를 조절한다.
앞에서 출발해서인지 계속 추월해 간다. 20명이 앞서가면 한 명 정도 추월할 정도로 천천히 달린다.
연습하지 못했다. 체육공원 네 바퀴 돈 것이 전부다.
하지만 갈마산 산행으로 단련한 근육만 믿고 도전한다.
4km까지는 다리 근육의 상태를 체크하자. 만약 그때까지 괜찮으면 달리자.
추월해 가는 사람을 보면서 돌아오는 길에 역 추월할 의지를 다진다.
합천 벚꽃마라톤 홍보용 런닝셔츠가 앞서가도, 토끼 머리에 예쁜 아가씨가 앞서가도, 엉성한 폼으로 달리는 단체복이 앞서가도, 1시간 페이스 메이크가 그룹을 형성하며 앞서가도 모두 용서하고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무사히 반환점을 돌았다.
급수대의 물 마심도 아끼고 달리기에만 열중한다.
운동장이 가까워질수록 힘들지만, 흥겨운 음악을 들려주는 봉사자들에게 손들어 주고, 마을 앞 격려의 박수 아줌마에겐 미소 짓고, 고교축구 선수들이 내미는 손엔 하이 파이브로 답례를 해준다.
얼마나 고마운가, 그분들이 있기에 힘내어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엔 기록에 연연하며 달렸다.
좋은 기록엔 자랑을 실패한 기록엔 다짐을. 하지만 이젠 기록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1시간 페메는 출발 때부터 보냈다.
운동장에 들어서면 1초라도 줄이려고 전력 질주했는데, 이젠 편안하게 달렸다.
아~ 드디어 피니쉬다. 잘 완주했다. 아무 탈 없이 달려준 몸에 감사하다.
하늘은 아직도 미련이 남아 빗방울 흩날린다.
시원한 물을 꿀꺽꿀꺽 마시니 살 것 같다.
모두 힘들었나 보다.
잔디에 앉아 완주자들에서 제공한 사과와 바나나를 먹으면서 즐긴다.
추워진다.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두리번거리다 키 큰 권사장을 만나 오뎅국물을 먹는다. 예전보다 못함을 느낄 정도로 컨디션은 살아있다.
달리고 나서 마시는 막걸리가 최고다.
한 컵 꿀꺽꿀꺽 마시고 나니 속이 사~ 하다. 기분이 좋다. 이 맛에 달리나 보다.
점심으로 창녕에서 장어를 먹는데 너무 맛있게 먹었다.
10km 달렸을 뿐인데 뻑적지근한 다리 근육은 풀코스 달렸을 때와 같은 고통이다.
합천 벚꽃마라톤은 준비를 잘해서, 오늘과 같은 고생은 없어야겠다.
따뜻한 차에 오르니 취한 술에 잠이 오는지, 피곤해서 오는지 눈까풀이 스르르 감긴다.
행복한 달림이는 늘 이런 맛에 달린다.
힘들게 달리고 즐겁게 먹고 마신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오는 그 쾌감은 달리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다.
정치인이 가지는 그 특권보다 몇 배나 더 값어치 있는 행복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