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그 아름다운 그릇
윤경화
안방 문고리 옆 뙤창으로 넘어오는 결 고운 황토색 여백은 고향집 늦가을 마당의 매력이었다. 여름 내내 풀풀 날리는 먼지와 푸름, 활기찬 사람들의 땀 냄새로 버무려지던 마당에 가을걷이가 끝나면 비로소 여유가 찾아든다. 첫추위가 올 무렵 따끈한 온돌방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밖을 내다보면 흡사 마당은 우리 가족을 담고 있는 참한 질그릇 같았다.
그 시절의 가옥 구조는 대개 집채와 마당이 한 공간이었다. 농사를 짓던 고향집에도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었다. 앞마당은 농사를 위한 작업장이기도 하지만 대소사는 물론 때로는 제의장이나 성소가 될 때도 있었다. 작은 텃밭과 노천 아궁이가 있는 뒷마당은 드러나지 않으니 가족이야기를 담고 있는 내밀한 곳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한 해를 시작하는 준비 중에 마당 고르기가 으뜸이었다. 늦은 봄 쾌청한 날에 그 일을 한다. 먼저 지난해 많이 사용해 헌 살강이 된 마당을 말끔히 쓸어 낸다. 차진 기운이 도는 황토를 체로 곱게 쳐서 떡시루에 쌀가루를 안치듯이 흙을 골고루 펴고, 곰방메로 며칠을 두고 두드려 다진다. 잘 다져져야 빗물에도 마당의 흙이 쓸려 나가지 않고, 맨바닥에서 곡식을 털어도 이물질의 덜 들어간다. 물 빠짐이 좋도록 마당 가운데가 도도록하게 하고, 구석진 곳은 발로 일일이 밟아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고 나면 그야말로 분통같다.
마당 고르기가 잘 되면 부모님보다 우리 남매들이 더 신이 났다. 아침저녁으로 수수비로 곱게 쓸어 놓고는 맨발로 뛰어놀았다. 운동 신경이 무딘 나지만 발에 와 닿는 촉감에 반해서 고무줄뛰기나 굵은 새끼로 줄넘기를 했었다. 나는 아직 그때 경험한 흙에 대한 질감을 잊을 수 없다.
여름밤에 밀거적을 깔아 놓고 마당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기운으로 더위를 식혔다. 할머니의 무릎베개에 4남매는 머리를 부채처럼 맞대고 누워 모깃불의 매운 연기에 섞인 풀냄새를 맡으며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부모님은 빨래를 마주 잡고 다림질을 했는데, 선홍색 숯불을 담은 뚜껑 없는 다리미는 불이 그네를 타는 듯 신비로웠다. 가족들 사이에 돈독함이 넘치던 마당이었다.
때로는 제단이기도 했더 마당에서 제를 올릴 때 할머니는 제주이셨다. 송아지가 태어나도 상을 차려 제를 올렸고 아이들이 경기를 해도 제를 올렸다. 동생이 태어나면 금줄을 친 뒤, 마당 가운데에 테를 묻고 며칠에 걸쳐 태우는 의식을 치렀던 성소였다. 의식에 임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겸손하나 제주의 위엄이 넘쳤다.
신교육을 받은 아버지는 할머니의 이런 기원 방식에 마음이 불편하셨던지 언짢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천지간에 할배가 모두 거들어줘야 아도 잘 크고 송아지도 잘 크제. 할배보다 힘 신거는 없데이."라고 하셨는데., 자연 숭배 사상이 얼마나 투철하셨는지 짐작이 간다.
할머니께서 주로 앞마당에서 일을 보셨다면 어머니는 뒷마당에서 일이 더 많았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무쇠 솥이 걸린 노천 아궁이 앞에 엎드려 늘 일을 하셨던 분이다. 농사일과 집안일을 쉴 틈 없이 하다가도 끼니때를 놓치지 않고 챙기셨다. 바쁘고 생활이 어려워도 음식을 대충 장만하는 일은 없었다.
수제비 한 가지를 끓여도 호박이나 감자라도 썰어 넣었고, 때로는 불린 콩과 보리쌀을 갈아 넣었다. 봄이면 산나물과 쑥을 대쳐서 널었고, 옥수수, 감자, 고구마, 콩, 밀가루 등의 먹을거리를 준비하느라 허리를 펼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의 지론은 사람이 제일 큰 재산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건강하게 키우는 것은 어머니의 당연한 의무라고 여겼을 터다.
이처럼 앞마당과 뒷마당에서 고부는 곤궁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지혜와 온 힘을 다해 '큰 재산'을 잘 보살피는 삶을 꾸렸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가정과 아이들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도시에 드나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한 달쯤 지나 우리 집에 큰 변화가 있었다. 가족이 모두 대처로 나와 살게 된 것이다. 도시는 생활공간이 비좁았다. 마당은 작은 데다 게으름뱅이였다. 하루 종일 멀뚱하게 놀면서 세숫대야만 안고 있었다. 여름이 되어도 밀거적 한 장 펼 장소는 물론 그늘도 없었다.
불편한 도시 생활에 익숙할 즘 할머니는 큰아버지 댁으로 들어가셔서 몇 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넓은 마당에서 친지와 마을 어른들은 꽃상여를 준비했다. 할머니께서 우리 4남매에게 베풀어주신 공덕을 기리자면 각자 만장을 만들어 앞세우고 장지로 갔어야 했을 것이다. 당신의 막내아들인 내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가슴이 아팠던 생이 마지막 몇 년을 우리는 얼이 없어 위로해 드리지 못했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이사를 몇 번이나 더 했고 급기야 마당이 없는 집,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누구도 마당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형제들의 집을 찾을 땐 잘난 인물에 마사지까지 받은 듯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화초들이 사철 비슷한 모습으로 베란다에 있었다. 내가 사는 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몇 십 년 사이 마당의 역할은 흩어지고, 농산물은 농기구의 발달로 마당을 건너뛰어 바로 밥상으로 올라왔다. 마당은 서성일 사람들도 없으니 퇴화를 하는 것일까. 아파트의 베란다에 오드마니 쪼그리고 자리를 잡았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최근 들어 베란다 없는 집이 늘어만 간다. 요즘 사람들에게 마당이나 베란다는 어떤 의미일까? 생활의 변화로 쓸모없는 공간이라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말초를 자극하는 물질에 밀려 존재조차 잊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든을 훌쩍 넘은 어머니는 당신의 최고의 가치인 사람을 키워내는 그릇으로 여기신다.
고향을 떠나와 더 얻은 두 아들까지 건강하게 성장한 것을 두고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신다. 당신의 '재산'이 무탈한 것을 두고 알부자라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남매들의 현실적 가치는 어머니의 셈법에 한참 못 미친다. 극히 주관적 포만감이겠지만 어머니께서 큰 재산으로 여겨 주시니 감사하고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큰 부자로 생각한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 질그릇 하나를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담에 호박 넝쿨이 올라가고, 삽짝에는 어여쁜 봉선화 꽃이 피었다. 저만치 머릿수건을 둘러쓴 두 여인이 고추를 말리고 있다. 듬성듬성 양대 콩이 박힌 밀떡을 가득 담은 소쿠리가 처마 밑에 걸려 있고 아이들은 고무줄놀이에 신이 난다.'
내가 온몸으로 기억하는 마당에서 본 정경들이다.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도 전혀 빛바래지 않는 그림이다. 소박한 무늬의 이 질그릇은 우리 가족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삶을 담고 있는 마당이다.
윤경화|2009년 선수필 등단
작품집|《달궁둥이에 반하다》《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