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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차로 1시간 30분. 그곳에는 우리네의 시작 그리고 현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올림픽의 시작을 알리는 성화를 그리스 올림피아 헤라 신전에서 채화하는 것처럼, 전국체전이 열릴 때 강화도 마니산에 위치한 참성단에서 채화가 진행된다. 단기 2333년 어쩌면 그 보다 훨씬 오래 전의 기록이 남아 있는 곳으로의 여행. 2022년의 시작이 아주 활기찼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맞이했던 유난히 따스했던 그 순간이 어제처럼 느껴진다.
기원전 2333년 환인과 웅녀의 아들로 태어난 단군왕검은 고조선을 세우며 역사의 시작을 알린다. 삼국시대 당시 한강 유역의 점령은 바로 해당 국가의 전성기를 의미했으며 자연스레 강화도의 중요성도 함께 부각된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39년 동안의 수도 그리고 이어지는 근현대기의 각종 이벤트에 더불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대표적인 요소들을 모두 담고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유적지를 돌아 시간의 흔적들을 서서히 밟아가기 시작했다.
1. 고려궁지 그리고 외규장각
천년 왕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 이 땅의 주인으로 왕 씨가 자리한다. 통일신라 이후 차기 통일왕조로 자리 잡은 고려는 개경을 도읍으로 삼은 뒤 고구려를 계승할 것을 천명한다. 하지만 세상은 고려가 뜻 한 대로만 돌아가지 않았는데, 중원의 왕조 국가와 변방 이민족들과의 끝없는 마찰이 이어지던 와중에 중국 대륙을 장악한 몽골 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232년 고종 때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의 천도가 결정된다.
당시 강화도에 자리했던 지형지물의 명칭을 개경에서 따올 정도로 본래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지만 강화도 천도에 열이 받은 몽골군은 고려의 내륙지방을 휩쓸며 가뜩이나 무신정권에 의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이때 경주의 황룡사지 9층 목탑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불에 타 사라졌다. 무신정권이 사라지기 전까지 고려의 왕이 자의에 의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강화도에서 시간은 흘렀고 무신정권의 최 씨 일가가 진압되면서 당시 왕위 서열 다툼을 이어가던 '쿠빌라이'를 알현, 39년의 강화도 생활을 청산하며 개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강화도에 있을 당시 왕족들을 보내 관리토록 했지만 원종 일행이 마주한 건 황량한 폐허뿐이었다. 현재도 고려궁지를 중심으로 강화도 곳곳을 살펴보면 당시의 시대상과 역사적 맥락을 가늠할 수 있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들에 대한 경외감 대신 이곳에 틀어박힌 채 위정자로서의 책임감을 외면한 그 대가가 참혹하다 라는 사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1392년 조선시대로 들어선 뒤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이성계에 의해 강화도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졌고 초지진과 같은 각종 방어시설을 포함해 강화도 전반을 관리하기 위한 관청으로 사용되었으며, 왕이 행차했을 당시 활용할 수 있도록 행궁이 들어서게 된다. 현재는 그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몇 가지 인형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행궁 관련 복원 계획도 들을 수 있었지만 고려시대 왕궁으로 추정되던 곳이기에 지금은 그저 텅 빈 공간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 시기에 들며 강화도는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된다. 오늘날 창덕궁 후원에 자리해 있는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즉 역대 임금의 어필과 어제를 포함해 왕실 관련 서적들을 보관하고자 외규장각을 1782년에 강화도 고려궁지에 설립케 한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전각이 얼핏 보면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그 내부는 뛰어난 가치를 지닌 물품들로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진귀한 자료들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 복원된 전각 내부는 당시의 상황들을 설명해 주는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왕실 기록 보관소였던 외규장각이 강화 행궁과 함께 폐허로 변한 건 1866년 병인양요가 벌어지면서부터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총 네 차례에 걸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 사실을 당시 중국 톈진에 주둔 중이던 '피에로 로즈' 제독에게 알리게 된다. 이 사실을 접한 로즈 제독은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을 강행하였으나 여의치 않던 전투 결과로 인해 퇴각을 하던 와중에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강화 행궁이 불에 타 사라졌으며 외규장각에 있던 200여 종 340 책을 제외한 나머지 왕실 자료들은 전부 불태워버렸다 전해진다.
이후, 베일에 쌓여있던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는 재불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며 '외규장각 의궤'를 찾겠다는 그녀의 목표는 1967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 사서가 된 뒤 동료의 증언에 의해 수장고에서 '외규장각 어람용 의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이후 1992년 당시 외무부 차관에 의해 공식 반환 요청 서한을 발송했지만 '자국의 공공재산'이라는 이유로 반환을 거부당한다.
이후, 한-불 정상회담에 의해 외규장각 의궤와 관련된 이야기가 오가게 됐고, '영구 대여'의 형태로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됐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고향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고 올해 초 다녀왔을 때 강화도에서의 순간과 관련된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며 특별한 감정을 건네줬다. 전 세계에 걸쳐 반출된 문화재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한다. 단아함 사이에 정제된 화려함을 머금은 유산들이 본래의 땅에서 그 가치를 발할 수 있는 시기가 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2. 조양방직
주요 여행지들과도 많이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오직 이 카페를 위해 찾아올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조양 방직'은 지역 명소로 자리매김해 있었다. 평일에 이곳을 찾았기 때문에 편하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고 널찍하게 조성된 카페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조명들이 연출한 분위기가 마치 반 고흐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화려함 속 정돈된 물체들이 이곳을 테마파크처럼 만들어 줬고 간혹 카메라를 든 채 촬영을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설립 당시 125,000원(현 시가 약 60억 원)으로 1937년 문을 연 조양 방직은 일제강점기 말기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방직공장으로 오사카 등에서 기계 50대를 수입하며 그 크기를 불린다. 1940년 미쓰이 기업에서 일하던 사람에게 공장을 인도한다. 강화도 경제 부흥기의 상징과도 같았다. 강화도에서 중국으로 수출을 할 정도로 활기를 띠던 조양 방직은 일련의 사태에 의해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되고 자연스레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이후 1958년에 방직공장의 문을 닫게 된다. 오랜 기간 텅 빈 공간으로 덩그러니 남아있던 조양 방직은 2010년 중반에 들어 고미술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앤틱 샵을 운영했던 분에 의해 인수되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카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시대를 초월해 세대공감을 자아내는 물품들도 많을뿐더러 관리도 말끔하게 이뤄지고 있어 쾌적한 환경을 자랑한다. 처음 조양 방직을 마주 했을 때 폐허와 다름이 없었지만 천장의 '트러스트 구조'를 보고 아름답게 꾸며야겠다는 일념으로 매진하기를 수년, 오늘날 지역명소로 손꼽히며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건물의 형태와 더불어 곳곳에 마련된 소품들도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평일 오후 이른 시간에 이곳을 찾았음에도 간간히 보이던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내뿜는 정겨운 분위기가 이곳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 줬고 주변을 돌아볼수록 사장님의 사려 깊음이 돋보였다. 간단하게 통로 쪽 자리에 앉아 티 타임을 즐긴 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사람들이 왜 이곳을 많이 찾는지를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조양 방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를 더해가고 있다. 쇠퇴한 구 도심을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예시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고양시의 경우 이곳에서 회의를 주재했을 정도로 이미 그 가치는 세상이 알아주고 있었고, 1930년대 말 강화도의 경제를 나타내는 대명사로 통했다면 오늘날에는 잊힌 공간을 밝혀주는 청사초롱으로 그 고풍스러움을 더해가고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에 활기를 더할 예정이라는 기사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아냈지만 코로나로 인해 현실 속 모든 것들이 멈춰버려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피렌체 등 유럽을 여행했을 당시 그들은 '온고지신'의 예시를 고스란히 현실에 녹여내고 있었다.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항상 우리나라 곳곳을 바라보며 예스러움과 현대미 사이에서 고심하던 내게 훌륭한 도시 재생 사례의 예시를 던져주는 듯했던 조양 방직에서의 시간은 사이다와 같았다. 시대의 흐름 속 추구해야 할 그 선을 제시해 주고 있음에 다시 한번 그 가치가 높고 깊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3. 강화성당
여태껏 이렇게 대놓고 한옥과 십자가의 만남을 직접 확인한 적은 여태껏 없었다. 묘한 이질감 속 당시 우리네의 생활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고자 했던 성공회 사제들의 노력이 느껴진다. 한옥 내 성당의 양식은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을 다르고 있었으며 여태껏 불교와 유교를 제외하고 처음 만나 본 그 십자가의 모습은 의외로 거부감 대신 시대를 초월해 그들의 따스함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 외로움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자연광의 따스함이 종교의 자애로움을 연출해주는 듯했다.
1889년 코프가 영국에서 한국 초대 주교로 받은 뒤 우리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당연히 성공회를 믿는 신자는 전혀 없었고,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지 7년 뒤인 1896년 강화도에서였다. 이러한 인연을 기반으로 강화도에 성당을 가장 먼저 짓게 됐고, 대한성공회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게 됐으며 동시에 현존하는 한옥 교회 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자리하게 된다.
경복궁 중건에 참여했던 도편수가 참여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건물을 짓는다는 그 마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와 같았다. 목재는 수령 백 년 이상의 백두산 정송을 뗏목에 운반해 왔고 석재와 기와는 강화도 내에서 구했다고 한다. 성당 건물을 짓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완공시켰고 변치 않는 모습을 오늘날까지 유지한 채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신발을 벗은 뒤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 스테인드 글라스와 밝고 성스러운 분위기 대신 당시 어두웠던 시대상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명과 암의 경계가 분명했다.
내부 양식은 바실리카 양식을 따르고 있었지만 한옥 건물에 매달려 있는 성공회 성인의 모습과 은은한 조명 위로 십자가에 걸려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색다르게 느껴졌다. 오래전 한국인을 대상으로 투어를 계획했을 때 한국에 녹아있는 서양 문화 찾기를 모티브로 일정을 진행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 곳곳에 퍼져있던 공간들을 돌며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분위기와 마주할 수 있었는데 이곳을 왜 지금 발견했는지 후회가 될 정도로 한 동안 예수님을 마주한 채 오래 서 있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매력을 머금고 있던 강화성당도 자칫 화마에 휩싸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뻔했던 순간이 있었다. 2009년에 벌어졌던 일로 100년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사적지가 순식간에 사라질 뻔했지만 감시원에 의해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숭례문을 포함해 오래전 창경궁 전각도 그렇게 사라질 뻔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연신 하게 된다. 앞으로 이와 같은 순간이 없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
여전히 또렷하게 남겨진 글씨는 세월의 흐름에도 굴하지 안혹 위풍당당한 모습들을 여행객들에게 선보이고 있었으며 122번째 겨울을 보내는 중이다. 코로나로 인해 돌아볼 수 없었던 건너편 사제관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고 여행을 마무리 한 뒤 궁금했던 점 들은 여정을 함께했던 지인의 추천을 통해 건네받은 '알쓸신잡'을 통해 말끔히 해소할 수 있었다. 은은한 조명 속에 아련하게 자리해 계시던 예수님의 그 자태는 고통스러웠던 시대의 순간을 묘하게 적나라하게 담아내는 듯했다. 쉬이 잊힐 것 같지 않다.
4. 기대되는 다음 일정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던 하루였다. 영원했으면 좋겠다 싶은 그 순간에도 끝은 있기 마련이었으며, 여정을 함께했던 지인과 저녁식사와 차 한 잔의 여유로 일정을 마무리 한 뒤 다음을 기약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전투가 있었던 강화도 남쪽 지역과 온수리 성당 등등 가봐야 할 곳들이 아직도 차고 넘치는 강화도. 날이 서서히 풀려 가고 있는 요즘 벌써부터 다음 여행 일정을 어떻게 짜볼까를 고민하게 된다.
고인돌 유적지를 포함해 내가 알던 강화도와 전혀 다른 모습들이 펼쳐지며 일정을 마무리 한 뒤 해는 세상 저편으로 떠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머릿속에 남은 이미지와 잔상들에 의해 강화도에 의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고 경주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이라는 표현에 부족함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조양 방직을 포함해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이 섬에 어떤 모습이 스며들고 문화를 자아낼까? 생각만 해도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중이었다.
경주와는 다른 의미로 한반도 전반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었다. 시대의 변곡점에 절묘하게 강화도가 포함돼 있었고 가장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 후기에도 열강의 침략은 항상 강화도에서부터 시작됐다. 시대의 특성을 짚어가며 지역을 대입했던 여행의 순간들은 참으로 바람직했고 돌아오는 길에서도 내가 모르는 어떤 이야기가 더 있을까를 궁금하게 만들어 줬다. 오늘 하루는 마무리됐지만 앞으로의 여행은 끝나지 않고 이제 시작이라고 넌지시 메시지를 건네주는 듯했다.
'일상을 여행처럼' 하늘길이 쉽게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요즘 주변을 여행하는 것처럼 여유시간을 활용해 훌쩍 떠나보는 건 어떨까? 조심스레 여행기를 통해 제안해 본다. 그중 강화도는 지근거리에 자리해 있으며 여행지들도 밀집되어 있기에 당일 여행지로도 훌륭하게 자리매김해 있다. 오늘따라 저 높은 곳에서 나와 눈을 마주하던 십자가와 함께 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날씨가 풀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 생명이 돋아날 때 녹음 짙은 강화도의 모습을 그리며 만족스러웠던 순간의 기록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