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땅만 파 먹고 사신 농부가 있었다. 삽자루를 들고 논으로 가면 바람을 가르는 재비들 사이에서 하루를 보냈고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면 간밤에 파 놓은 두더지 굴 바뚜 버리에 들쥐가족 뽕나무에 걸쳐진 새박이 그런 땅에 이랑을 치고 씨앗 뿌리고 해마다 숨이 칵칵 막히는 7-8월 땡볕에는 목줄을 타고 내리는 소금덩어리가 서너 말은 넘었다.
그렇게 순 땅만 파먹고 뼈가 녹도록 일하여 9남매를 다 키워 객지로 내 보내고 살만하니 덜컥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시고 홀로 고향에서 살다가 나이가 80을 넘기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더 이상 농사도 못 지을 정도로 노쇠해져 가도 9남매 중 아무도
"아버지요 이제 농사일 그만하세요.." 위로하는 자식 없다가 그놈의 정치 꾼들이 경북 도청을 이전한다며 20년 넘게 떠들었는데 그때마다 경북 도청이 구미로 간다니, 영천으로 간다니.. 하다가 영배미 골 넘어 양배미로 결정이 나고 난 이후 여기저기 "땅 매입 합니다" 라고 하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땅도 별로 좋지 아니하던 산 아래 천수답 김 노인 땅도 덩달아 올랐다.
부동산 업자는 김노인 산 아래 땅은 절대농지도 아니고 잡종지이고 도청이전 예정지로부터 불과 2 k 떨어지고 산 속이라서 "모텔이나 식당 하면 아주 좋은 자리!" 라며 돈을 더 쳐 줄 터이니 땅을 팔라고 몇 번이고 찾아왔지만 김 노인은 "문전옥답을 어째 파닛껴.. 안 파니다" 고개를 저었다.
평당 3만 원에도 팔리지 아니하던 땅이 읍내에 20개도 넘는 부동산 사무실이 들어서고 나서 십만 원이 훌쩍 넘어서자 영배미 마실에도 도시 자가용들이 들락거리고 객지 자식들도 갑자기 양철영감 뽕밭뚜버리에 땡벌집에 벌 들락거리듯이 자주 고향 부모님들을 찾았다. 한마디로 孝女孝子 家家在라 갑자기 영배미 마실에도 도시 효자들이 득실 거렸다.
자연 한두 집 늙은 농부들은 평생 땅만 파고 살던 고향집을 정리하고 며느리 성화? 에 못 이기는 척 대구로도 가고 인천으로도 떠나갔다.
김 노인도 그리 내키지 아니하지만 유독 맏 며느리가 땅을 정리하고 서울 올라오시면 남은 여생을 더운물이 콸콸 나 오는 아파트에서 편하게 지내시게 해 준다며 사정 사정 하여 결국 조상이 물려준 문전옥답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도 셋째 아들도.... "한 일억씩만 도와주시면 이참에 30평짜리 아파트를 팔고 40평으로 늘리겠니다" 하면서 늙은 아비에게 보챘다. 허긴 땅이 오르고 벌써 몇 집이 형제간에 싸움도 벌어지고 심지어 미국 이민 갔던 아들도 돌아와서는 자기 몫을 요구하는 집도 있었다.
김노인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러다간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식들이 땅 싸움에 휘말려 자신의 묘 앞에 술 따라야 할 제삿날에는 여느 집처럼 형제들이 따로따로 올 것 같은 걱정도 앞섰기 때문이다.
결국 땅을 정리하고 서울 맏아들 집으로 가기로 했다. 땅 판 돈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날... 서울서 제법 사는 둘째 며느리와 자신을 모시겠다는 맏며느리 사이에 결국 설전이 오가고... 부산서 아파트 앞에서 채소 장사하면서 어렵게 사는 딸은 눈물 찔끔거리면서 떠 났다.
폭삭 늙은 농부가 서울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 이미 반년 전에 땅을 팔고 일산에 사는 아들 집에 갔던 논실댁이 가 도로 시골로 내려왔는데... 돈은 자식들에게 다 빼앗 끼고 고향에서 기거할 방이 없어서 본동네는 살지 못하고 절뒤마를 빈집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마을 늙은 친구들 배웅을 받으면서 눈물을 비치며 고향을 떠 났던 김노인이 무슨 연유인지 3개 월 만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셨다. 달랑 옷 보따리 하나만 들고 읍내 버스 정류장에 내린 김노인은 밝은 대낮에는 고향 마실로 들어서기 너무 부끄러워 읍내 뒷 쪽 천방 뚝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고향 마을로 돌아와서, 석 달 전 버리고 간 고향 빈집으로 더듬더듬 다시 들어가셨는데 간간히 꺼이꺼이 낮은 헛기침 소리가 새벽이 다 되도록 들리셨다.
마을에 늙은 할머니들이 그런 김노인에게 먹을 음식을 갖다 주었지만 당체 입에 넣지 아니하시고 도로 밀어 내시 었고 그런 중에도 9홉 명의 자식들은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고향 빈집에서 며칠 밤을 보낸 다음 날 풍산 장날이 서던 날이다. 김 노인은 새벽에 일어나 마당 우물물을 가마솥에 부어서 펄펄 끓인 후 자신이 오래 세월 소를 키웠던 마굿 칸에서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목욕하는 사이 낯익은 쥐가 물 끄러니 김 노인을 쳐다보고 앞마당에 첫아들 낳던 해에 심었던 반수감나무에서 평소처럼 까치도 울었다.
목욕을 마친 김노인은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 만들어 주신 깨끗한 한복을 갈아입으시고..... 다시 고향 집을 나섰다. 마침 느티나무 아래서 당파 씨를 고르던 이웃집 시울실 할머니와 구담댁 할머니가 뽀얀 한복을 입고 나서는 김 노인을 보시고는 "저 어르신 아침부터 옷을 말끔하게 갈아입고 어디가 시노?...." "서울서 돌아와가 내도록 식음 전폐하시고 누워계시더니 오늘은 풍산 장에게 가실 모양이 씨 더.." "서울 잘 사는 아들 한데 호강하러 가신분이 저렇게 돌아와서 당체 말도 아니 하니시 맴이 아프리 더"
"어제 아침에 죽을 끓여서 갖다 드렸는데 한 숟가락도 안 먹었띠 더.. 당뇨도 더 심하고... 이제 허리 병도 도져서 걸음도 잘 못 걸을 실 것 같다 하더니 읍내 약 사러 가는 모양 있시더!" "빈집에 전기도 없어 우짜닛껴!"
"전기는 어제 동장 말로는 다음 주에 불 켜도록 한전에서 다시 전기 넣어 준다 카디더 만... 남의 못타리씨더" 당파 씨에 묻은 흙먼지를 털털 털면서 구담댁 할머니가 "그 많은 문전옥답 다 팔아 자식들 한데 다 떼이버리고..... 늘그막에 남의 일 같지 않니다"
"지가 그 맛있씨 더... 늘그막에 도시 며느리 꼬임에 빠져가 땅 팔아서 서울 간 영감재이들이 며느리 한데 밥도 제대로 못 얻어걸리고 날만 새면 종로 무슨 공원인가 거기 간다카디더!"
"종로 공원?.. 거긴 뭐 하는 곳인데.." "거가면 낮에 밥을 공짜로 주는데.. 마카 줄 서서 기다린다 카디너! 영감재이들이!" "우야노?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그캐도 거기 가는 영감들은 다행히 라카디너.. 다리가 성하지 못해 가 잘 걷지도 못하는 영감재이들은 집에 종일 있기는 며느리 눈치 보이니 마카 골목에 나와서 편하게 안을 헌 의자도 없이 내도록 땅바닥에서 퍼질러 않아서 논다카디더!" "저런!" 다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휴.... 하고 긴 한숨을 솥아 내시 었다.
시울실 할머니와 구담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듯이 가만가만 힘겹게 걸어가시는 김 노인 쪽을 바라보았다. 김 노인은 읍내 길로 아니 가시고 참 진달래꽃이 붉게 피어 있는 마을 앞 산 정살미 쪽으로 오르셨는데.. 힘없이 가만가만 발걸음을 가시던 김 노인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서 고향 집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시는 김 노인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할머니들이 걱정스럽게 다시 "저 어르신 어디 가는데.. 읍내로 안 가시고 앞산으로 올라가시니?" "할머니 묘에 가시나... 정살미 산에 할머니 묘가 있잖니껴!"
"이제 와서 할머니 묘에 간들 무슨 소용있닛껴?...." "오죽 가슴이 답답하면 할머니 묘이 가실닛껴?... 다녀오시면 속도 풀리실 거고 밥 숟가락도 드실 끼씨 더 걱정 마세요" "그카마 이 따게 노인정에서 배차 전 굽는다카던데 한 접시 갖다 주시더!" "그래시더.."
시울실 할머니가 당파 뿌리를 땅에 탈탈 털면서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 해가 어둑어둑해져도 앞산으로 오르신 할아버지는 마을로 내려오시지 않았다. 구담댁 할머니가 노인정에서 배차 전 한 접시하고 막걸리 반 병을 들고 저녁 무렵 김노인 집을 갔지만 김노인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걱정했지만 누군가 "서울 아들집으로 다시 간 모양이 씨 더!" 하는 바람에 다소 안심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 동네 할머니들이 김 노인 빈집 처마에 반쯤 비워있는 농약병을 들고는 "우얏꼬 우었꼬" 탄식을 하며 눈물을 훔치셨고 읍내 형사들이 전경들을 앞세우고 앞 산 김 노인 할머니 산소 쪽으로 급하게 뛰어 올라가고 마을 어귀에는 읍내 앰뷸런스 한대가 다급하게 왱왱거리면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