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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뇩보리
若彌勒(약미륵)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댄
一切衆生(일체중생)도 皆亦應得(개역응득)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衆生(일체중생)이
卽菩提相(즉보리상)이니라 若彌勒(약미륵)이
得滅度者(득멸도자)인댄 一切衆生(일체중생)도
亦當滅度(역당멸도)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諸佛(제불)이 知一切衆生(지일체중생)이
畢竟寂滅(필경적멸)하야 卽涅槃相(즉열반상)이라
不復更滅(불부갱멸)이니 是故(시고)로 彌勒(미륵)이여
無以此法(무이차법)으로 誘諸天子(유제천자)니
實無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실무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며
亦無退者(역무퇴자)니라
彌勒(미륵)아 當令此諸天子(당영차제천자)로
捨於分別菩提之見(사어분별보리지견)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菩提者(보리자)는 不可以身得(불가이신득)이며
不可以心得(불가이심득)이라
寂滅(적멸)이 是菩提(시보리)니 滅諸相故(멸제상고)며
不觀(불관)이 是菩提(시보리)니 離諸緣故(이제연고)며
不行(불행)이 是菩提(시보리)니 無憶念故(무억념고)며
斷(단)이 是菩提(시보리)니 捨諸見故(사제견고)며
離(이)가 是菩提(시보리)니 離諸妄想故(이제망상고)며
障(장)이 是菩提(시보리)니 障諸願故(장제원고)며
不入(불입)이 是菩提(시보리)니 無貪着故(무탐착고)며
順(순)이 是菩提(시보리)니 順於如故(순어여고)며
住(주)가 是菩提(시보리)니 住法性故(주법성고)며
至(지)가 是菩提(시보리)니 至實際故(지실제고)며
不二(불이)가 是菩提(시보리)니 離意法故(이의법고)며
等(등)이 是菩提(시보리)니 等虛空故(등허공고)며
無爲(무위)가 是菩提(시보리)니 無生住滅故(무생주멸고)며
知(지)가 是菩提(시보리)니 了衆生心行故(요중생심행고)며
不會(불회)가 是菩提(시보리)니 諸入不會故(제입불회고)며
不合(불합)이 是菩提(시보리)니 離煩惱習故(이번뇌습고)며
無處(무처)가 是菩提(시보리)니 無形色故(무형색고)며
假名(가명)이 是菩提(시보리)니 名字空故(명자공고)며
如化(여화)가 是菩提(시보리)니 無取捨故(무취사고)며
無亂(무난)이 是菩提(시보리)니 常自靜故(상자정고)며
善寂(선적)이 是菩提(시보리)니 性淸淨故(성청정고)며
無取(무취)가 是菩提(시보리)니 離攀緣故(이반연고)며
無異(무이)가 是菩提(시보리)니 諸法等故(제법등고)며
無比(무비)가 是菩提(시보리)가 無可喩故(무가유고)며
微妙(미묘)가 是菩提(시보리)니 諸法(제법)을
難知故(난지고)니라
世尊(세존)이시여 維摩詰(유마힐)이 說是法時(설시법시)에
二百天子(이백천자)가 得無生法忍(득무생법인)일새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하나이다
若彌勒(약미륵)이, 만약 미륵이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진댄
一切衆生(일체중생)도 皆亦應得(개역응득)이리니,
수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역시 수기는 깨달음을 얻어야 다음에 부처가 된다.
라고 말할 수가 있고, 그 깨달음의 실상은 미륵보살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일체중생도 역시 다 얻는 일이다. 어쩌면 본래로 다 갖추고 있는 일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一切衆生도 皆亦應得. 틀림없이, 應 자는 빈틈없이, 추호의 의혹도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衆生(일체중생)이 卽菩提相(즉보리상)이니라.
이것 대단한 말 입니다. 일체중생 그대로가 곧 깨달음의 모습이다ㆍ
일체중생 그대로가 곧 도의 모습이다ㆍ일체중생 그대로가 지혜의 모습이다.
중생을 업 많은 존재ㆍ죄 많은 존재ㆍ무슨 하나님의 종으로써,
물질보다도 정말 더 싸구려, 이런 사람에 대한 격을 비하시키는 어떤 타 종교나
또는 방편불교에서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데 반해서 이 대승불교,
유마힐 거사의 최상승의 법문은 일체중생 그대로가 菩提相 이다
그랬어요. 깨달음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가 뭐라고 이름을 붙이든지 부처라고 하든지ㆍ보리라고 하든지ㆍ
중생이라고 하든지 변함은 없습니다. 늘 그 모습 그대로 입니다.
달리 달라진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말은 이런 말ㆍ저런 말
갖다 붙일 수가 있는데, 그러나 그 실상은 늘 그대로의 그 모습입니다 .
그 대로의 그 모습에서 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 가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잘 뜯어보면 너무너무 아주 고귀한 존재이고ㆍ
더 이상 더 필요한 것이 없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임제스님 같은
이들은 언필칭 欠少什麽(흠소심마)오?
지금 보고ㆍ듣고ㆍ느끼고ㆍ화낼 줄 알고ㆍ웃을 줄 알고ㆍ울 줄 알고ㆍ
모든 것을 잘도 느끼고 있는 그 능력 그 사실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欠少什麽오? 도대체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뭐가 부족하기에 그렇게 밖을 향해서 찾아 돌아다니느냐?
이렇게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래서 이 유마경은
그 안목이 아주고준하 기 때문에 선불교, 선사 스님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선사 스님들의 법문에 많이 인용 하고 있지요. 一切衆生이 卽菩提相이다.
이 이상 더 상승의 법문이 어디 있 겠습니까?
若彌勒(약미륵)이 得滅度者(득멸도자)인댄 一切衆生(일체중생)도 亦當滅度(역당멸도)니,
만약 보살이 멸도를, 제도를 얻었을 진댄 일체중생도 또한 제도를 다 얻어.
미륵이 깨달았다면 중생도 깨달았고ㆍ우리가 근본적으로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이라.
궁극적 차원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다. 미륵이 아니라 부처님ㆍ
누구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그 어떤 높은 성인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궁극적 차원에 있어서는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미륵이 제도를 얻었다면 일체중생도 역시 제도를 얻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왜냐? 諸佛(제불)이 知一切衆生(지일체중생)이,
제불이 알고 있는 사실은 일체중생이
畢竟寂滅(필경적멸)해서 卽涅槃相(즉열반상)이라. 그대로 열반의 모습이고
不復更滅(불부갱멸)이니, 더 이상 다시 열반할 까닭이 없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부처님 의 안목으로 보면 일체중생이
畢竟에 寂滅 한 모습 입니다. 그대로 열반의 모습 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다시 열반할 필요가 없는 존재다 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보는 사람 의 안목 여하에 따라서 그것이 달리 보이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것이 제대로 된 성인은 어떤 눈을 갖춰야 하는가?
인간을 보는 안목이 첫째 정확해야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일체생명ㆍ일체존재를 꿰뚫어 보는 그 안목이 정확해야 되는 것이다.
사람을, 그리고 일체생명을, 그리고 모든 존재를 잘못된 안목으로ㆍ
삐뚤어진 안목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정말 제대로 된 성인이 아니다.
라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십시오. 諸佛 들은 뭐라고요?
一切衆生이 畢竟에 다 寂滅 입니다. 그대로 열반의 모습 입니다.
더 이상 열반을 얻을 까닭이 없는 그런 존재 입니다.
欠少什麽오? 부족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禪語錄句(선어록구)하고 말이 조금 달라서 그렇 지, 뭐 거의 이런 것은 표현도
禪語錄 수준 그대로 입니다.
是故(시고)로 彌勒(미륵)이여 無以此法(무이차법)으로,
이것은 此法 하는 것은, 일생에 보리를 얻는. 그래서
不退轉地(불퇴전지)에 이르는 이런 이치, 그런 것 가지고서
誘諸天子(유제천자)니, 여러 천자들을 유혹하지 말라.
兜率天王(도솔천왕)과 그 眷屬(권속)들이라고 앞에 나와 있지요?
여러 도솔천왕과 그 권속들을 유혹하지 말라. 말을 하자니 편의상
미륵보살이 일생에 보리를 얻어서 더 이상 퇴전하지 아니하고
다음에 부처가 된다. 라고 하는 이런 설계를 하고는 있지만,
그런 어떤 假說(가설)가지고, 가설 입니다. 유마경의 안목에서 보면
그런 것이 다 가설이거든요.
그런 假說가지고 더 이상 천자나 그 권속들을 유혹하지 말라.
實無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실무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며,
실로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본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을 다시 더 발할 까닭이 있느냐?
기존의 불성인간.
이미 우리는 다 갖추고 있는 그 존재. 그래서 亦無退者(역무퇴자)라.
또한 더 이상 물러설 자리도 없는데 무슨 不退轉地 니 뭐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 지위에 미륵보살이 올랐다 느니 하는 그런 소리,
다 엉터리 소리다 이 겁니다.
彌勒(미륵)아 當令此諸天子(당영차제천자)로,마땅히 이 천자 들로 하여금
捨於分別菩提之見(사어분별보리지견)이니,보리를 분별하는 그런 소견들을 버리게 할지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보리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 보리의 실상ㆍ깨달음의 실상ㆍ지혜의 실상을 쭉~ 이야기를 합니다.
菩提者(보리자)는, 보리라고 하는 것은
不可以身得(불가이신득)이며, 가히 몸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不可以心得(불가이심득)이라. 또한 마음으로 얻는 것도 아니다.
寂滅(적멸)이 是菩提(시보리)니, 적멸이 곧 보리다.
滅諸相故(멸제상고)다. 적멸이라고 하는 것을 왜 보리라고 하느냐?
모든 현상을 다 뛰어넘은, 모든 현상을 초월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諸相 을 멸하는 까닭이다.
不觀(불관)이 是菩提(시보리)여.
보지 않는 것이,관찰하지 않는 것이 보리다.보통 우리가 연기를 관하고,
일체 觀하는 것이, 觀法이 많찮 아요. 여기는
離諸緣故(이제연고)며, 모든 인연을 다 초월한 것이다.
모든 인연을 다 떠나 있는 것이 보리다. 그랬어요.
不觀이 是菩提다.不行(불행)이 是菩提(시보리)여. 행하지 않는 것이 보리다.
無憶念故(무억념고)며, 憶念 함이 없는 까닭이다.
무엇을 듣고ㆍ
기억하고ㆍ
그것을 다시 사유하고ㆍ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ㆍ
보리라고 하는,
정말 보리라고 하는 깨달음의 그 자리에는
그런 것이 붙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不行이 是菩提다.斷(단)이 是菩提(시보리)니, 끊는다. 고 하는 것이 보리니
捨諸見故(사제견고)며, 모든 見 을 버리는 까닭이다. 보리라고 하는 그 자리에는 일체 견해를 다 버린다.
離(이)가 是菩提(시보리)니, 떠나는 것 보리니
離諸妄想故(이제망상고).모든 망상을 떠나는 故 다.
障(장)이 是菩提(시보리)니, 障 이 보리니 보리에는
障諸願故(장제원고)다.모든 원을 장애하는 연고다. 願 이라는 것도 필요가 없는 자리다.
不入(불입)이 是菩提(시보리)니 無貪着故(무탐착고)다.
無貪 이 없는 까닭이다.
順(순)이 是菩提(시보리)니, 순할 順자가 이 보리이니
順於故(순어여고)다.如 를 순하는 까닭이다.
여여한 그 자리를 순하기 때문에 順 하는 것도 보리 입니다.
장애 도 보리 다. 해석하기에 달렸 다. 해석을 이런 식으로 할 줄 알면,
이 세상에 천지만물 그 어느 것 하나 보리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까지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住(주)가 是菩提(시보리)니, 머무는 것이 보리니
住法性故(주법성고)며,법성에 머무는 까닭이다. 이것을 반대로,
머물지 않는 것이 이 보리니 번뇌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설명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至(지)가 是菩提(시보리)니, 이르는 것이 이 보리이니
至實際故(지실제고)며, 實際 에 이르는 까닭이다.
不二(불이)가 是菩提(시보리)니 離意法故(이의법고)며,
意와 法 을 떠난 까닭이다. 意와 法. 그러니까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하면,
의의 상대는 법이지요? 이 모든 것을 떠나 있는 것이 보리기 때문에
그래서 意와 法 이 둘이 아니다. 또 평등할 等자.
等(등)이 是菩提(시보리)니 等虛空故(등허공고)며, 허공과 평등하기 때문이다.
無爲(무위)가 是菩提(시보리)니 無生住滅故(무생주멸고)며,
生ㆍ住ㆍ滅 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 無爲 지요.
知(지)가 是菩提(시보리)니, 안다고 하는 것이 보리니
了衆生心行故(요중생심행고)며, 衆生의 心行 을 요달 해서 환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不會(불회)가 是菩提(시보리)니, 모르는 것이 보리다.
諸入은 不會故(제입불회고)라.
육입은 아무 것도 몰라. 그것만으론 몰라.
그래서 不會가 이 보리다. 그랬어요. 육입은 앎이 없는 까닭이다.
不合(불합)이 是菩提(시보리)니 離煩惱習故(이번뇌습고)며,
번뇌와 습기. ←이 것을 떠나있다.
번뇌 습기와 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不合 이 보리라고 할 수가 있다.
無處(무처)가 是菩提(시보리)니 無形色故(무형색고)며,
형색이 없는 까닭이다.
假名(가명)이 是菩提(시보리)니 名字空故(명자공고)며,
명자가 공한 까닭이다.
如化(여화)가, 환화와 같은 것이 是菩提(시보리)니 無取捨故(무취사고)며,
取捨 가 없는 까닭이다. 환영인데 취하고 버릴 것이 없지요.
환상이고ㆍ만든 것이고ㆍ조작배기인 데 그것 뭐 취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取捨 가 없다 이 말 입니다.
無亂(무난). 어지러움 없는 것이 是菩提(시보리)니,
이 보리이니常自靜故(상자정고)라. 항상 스스로 고요한 까닭이다
善寂(선적). 아주ㆍ아주 고요한 것. 잘 고요한 것 是菩提(시보리)니,
그것이 보리이니 性淸淨故(성청정고)라. 성품이 본래 청정한 까닭이다.
無取(무취). 취할 것이 없는 것이
是菩提(시보리)니,보리이니
離攀緣故(이반연고)며, 반연을 떠난 연고다.
無異(무이)가 是菩提(시보리)니, 이 보리이니
諸法等故(제법등고)며, 제법이 평등한 까닭이다.
다름이 없는 것. 그것이 보리다. 그것은 모든 법이 평등한 까닭이다.
無比(무비)가 是菩提(시보리), 이 보리이니 無可喩故(무가유고)며,
무엇에도 비유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微妙(미묘)가 是菩提(시보리)니 諸法(제법)이 難知故(난지고)니라.
알기 어려운 까닭이다.
아주 심심 미묘해서 알기 어려운 경지가 보리이기도 하다 하는 것 입니다.
보리를 아주 다 각도로 설명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보리를 “무엇이 보리다.” 라고 하기보다
“보리는 이런 것이기도 하고ㆍ
이런 것이기도 하고
ㆍ이런 것이기도 하고,”
바꾸어서 해석하면 그 해석이 더 정확해지지요.
예를 들어서 거꾸로
보리는 미묘한 것이다ㆍ
보리는 무비한 것이다ㆍ
보리는 무의한 것이다ㆍ
보리는 무취한 것이다ㆍ
보리는 선적이요ㆍ
보리는 무난이요ㆍ
여화요ㆍ가명이요ㆍ
무처요ㆍ불합이요ㆍ
불회요ㆍ지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뜻이 더욱 뜻이 선명해지리라고 봅니다.
世尊(세존)이시여 維摩詰(유마힐)이 說是法時(설시법시)에,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 법을 설할 때에
二百天子(이백천자)가 得無生法忍(득무생법인)일새.
200천자가 무생 법인을 얻었을 세.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하나이다.
그러므로 저도 그분에게 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미륵보살이 이렇게
자기의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법문이 정말 너무 화려하다가 못해서
아주 현란하다고 저는 그렇 게 표현 합니다. 이 것을 한 호흡에 척~~ 읽어보십시오.
중간에 설명하지 말고요. 그러면 정말 어지러울 정도로 설법이 아주 뛰어나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광엄동자와 도량 그랬어요.
이 것이 도량이란 뭐냐? 도량을 이야기 하면서 불교인의 수행덕목을 여기서
낱낱이 말 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도량은 물론 우리가 지금 이 자리도 도량입니다.
그 도량의 근원은 뭡니까?
부다가야에서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성도한 그 자리를 도량이라고 그렇 게 합니다.
그래서 보리도량ㆍ깨달음의 도량, 이렇게 말하지요. 그래서 그 후 불교적인 어떤 일로
만들어진 어떤 장소는 무조건 전부 도량입니다.
토굴도 도량 이요ㆍ
중간절 도 도량 이요ㆍ
작은 절 도 도량 이요ㆍ
큰 절 도 도량 이요.
심지어 야단법석을 펴도 그것 역시 도량입니다. 왜냐?
불교는 목탁 이든ㆍ죽비든ㆍ뭐가 됐든지 불교적인 이름하에 만들어진
모든 사물ㆍ
모든 행사ㆍ
모든 일들은,
심지어 옷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불교라고 하는 이름하에 만들어진 것은
전부 깨달음으로 귀속되기 때문에 그렇 습니다.
전부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 사실에서 나온 것 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도량에서 깨달음을 이루었으므로 해서
목탁도 있고ㆍ 죽비 도 있고ㆍ요령도 있고ㆍ비구도 있고ㆍ
비구니도 있고ㆍ청신사ㆍ청신녀 다 있는 것이지요.
불교 미술도 있고ㆍ불교 음악도 있고ㆍ일체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 사실에서 큰 강물을 이루고 드디어 큰 바다를 이루듯이
그렇 게 펼쳐지게 된 것 입니다. 지금 불교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굽어보면 大海와 같은 것이지요. 큰 바다와 같은 것 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그 무엇 하나 도량 아닌 것이 없다. 왜냐? 깨달음으로 향하고 있고ㆍ
깨달음을 위한 것이니까요. 목탁이고ㆍ 죽비고 그 무엇 하나도,
아무리 미미한 염주하나라도, 결국은 깨달음에서 나왔고, 또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음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요.그래서 깨달음의 도량 아닌 것이 없다.
사찰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는 무조건 “禪佛場(선불장)” 이러지 않 습니까?
禪佛場. 그리고 道場(도량). 광엄동자 를 통해서 도량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또 현란한 유마거사의 명 법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