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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함부로 순교를 논하지 말라 >
Ⅰ. 들어가는 말
요즈음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떠들석한 세론으로 구원파가 등장하고, 사이비 종교인 유병언이 회자되고 있는데, 여기에다 "순교"운운하는 세태를 보면서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기독교 교인들의 처절한 순교의 의미를 되새겨 바른 가치를 정립할 필요를 느낀다.
사전에는 순교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 넓은 뜻으로는 주의나 사상을 위하여 죽는 경우에도 쓴다".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기독교사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순교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지 "이단"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되지 않는 사이비 종교에서, 기독교인(성도)과같은 동일어로 순교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여 구원파의 순교라는 언어는 교회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낱말임을 분명히 밝힌다.
Ⅱ. 전개되는 말
그렇다면 교회사에서 어떠한 순교와 박해가 행하여 졌는지 살펴보고, 우리는 역사에서 바른 교훈을 정확하게 얻자.
1. 디시우스(Decius) 통치 하의 일곱번째 박해 (A.D.249)
1) 이 일곱번째 박해는 디시우스가 자신의 전임자였던 필립(그는 그리스도교인으로 추정된다)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에서 기인된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놀랄만한 증가를 보이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당시 이방 종교 사원은 버림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리스도인 교회의 숫자는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디시우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멸절시키기 위한 박해를 시작하도록 자극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 이교도들은 제국의 법령을 시행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살인 행위를 자신들의 출세를 위한 첩경으로 여겼다. 이 시기에 희생된 순교자는 그 수를 헤아리기가 불가능할 정도이지만 여기에서는 몇 가지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박해기간에 혹독한 고통을 당했던 명망있는 사람들 가운데 첫번째 사람은 로마의 감독이었던 파비안(Fabian)이다. 고인이 된 황제 필립(Philip)은 매우 고결한 사람으로서 파비안을 돌보아 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후임자 디시우스(Decius)는 그 훌륭한 성직자 위에 자신의 증오심을 퍼부었다. 파비안은 곧이어 체포되었고 A.D.250년 1월 20일 참수당하였다.
준수한 용모와 고결한 마음을 가졌으며 매우 온순하였던 젊은 그리스도인 피터(Peter)는 비너스 여신에게 경배할 것을 거절하여 참수당하였다. 이 젊은이는 경배를 강요당하자, “나는 당신들이 아무 가치도 없는 한 여인에게 경배해야 한다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당신의 역사 기록에도 있듯이 방탕한 여인이 아닙니까? 그녀의 일생은 지금 당신들의 법으로 말한다면 당연히 처형 당해야 할 행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아시아 총독은 그 즉시 이 청년을 바위 위에 매달아 굴려 모든 뼈를 부러뜨리게 하였다. 그 후 그를 참수형에 처하였다.
2) 총독 앞에 불려나온 니코마쿠스(Nicomachus)에게도 이방 우상들에게 경배해야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니코마쿠스는 이에 대해 “나는 사탄에게 존경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그 경외함은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만 합당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이 고백이 지방 총독을 극도로 자극하였고 그는 바위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계속된 고통으로 그가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고 하나 그의 박약함을 증명해 주는 증거는 없고, 오히려 그는 가장 혹독한 고문에 처해졌으며 땅에 내동댕이쳐서 즉사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광경을 본 데니사(Denisa)라는 열여섯 살의 소녀는 “오 불쌍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어찌하여 무시무시한 영원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단지 현재의 안일함을 사려하고 있는가!”라고 말한 후 자신도 그리스도인임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참수형을 당했다.
루시안(Lucian)과 마르시안(Marcian)은 처음에는 마술을 행하는 사악한 이방 우상 숭배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자신들이 범했던 죄들을 회개하였고 은둔자의 삶을 살며 빵과 물만으로 연명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은 그런 삶을 마치고 열정적인 복음전도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러나 이때에도 박해의 불길은 계속되었고 결국 그들은 체포되어 비두니아(Bithynia)의 통치자인 사비누스(Sabinus)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무슨 권세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투신하였는지에 대하여 대답을 요구받았을 때 루시안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법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웃을 개심시키도록 만듭니다.
또 그 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웃을 사탄의 올가미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마르시안도 함께 “교회를 광적으로 박해했던 바울을 개심시키고 그를 복음의 전파자가 되게 한 그 동일한 은혜로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개심하였습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 두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총독은 그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버렸다.
3) 시실리(Sicily) 출신의 젊은 여인 아가타(Agatha)는 경건함으로 이름 높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 때문에서 시실리의 통치자 퀸티안(Quintian)을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이 순결한 아가타를 음탕하고 방탕한 여인인 아프로디카(Aphrodica)의 손에 넘겼고 이 사악한 여자는 그녀가 음행하도록 모든 방법들을 동원했으나 그것은 헛된 노력일 뿐이었다. 그녀의 순결함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이는 아가타가 이미 고결한 도덕성만이 진실한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퀸티안은 자신의 욕정을 원한으로 바꾸었고, 아가타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자 관철시키지 못했던 자신의 추악한 욕망대신 복수심을 일으켜 아가타를 채찍으로 때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쇠 덩어리에 태웠으며 날카로운 쇠고리로 온 몸을 찢었다. 그녀는 이런 고통을 꿋꿋하게 견디었으며 결국에는 유리조각이 섞여있는 불붙은 석탄 위에 벗긴 채로 뉘여 감옥으로 보내져서 A.D.251년 2월 5일 마침내 순교당하였다.
고르티나(Gortyna)의 감독이었던 싸이릴(Cyril)은 그 곳의 통치자였던 루시우스(Lucius)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루시우스는 싸이릴에게 황제의 칙령을 준수하고, 우상에게 경배하여 다른 형제들의 목숨을 구하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싸이릴은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오랜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혼을 구하라고 가르쳐 왔으며 자신이 지금 유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라고 대답하였다. 고결한 이 형제는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을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유쾌하게 집행장소로 걸어가 놀라운 꿋꿋함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4) A.D.237년 제비누스(Zebinus)의 뒤를 이어 안티옥의 감독이된 바빌라스(Babylas)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열심으로 교회를 섬겼으며 가장 극심한 박해의 폭풍우가 몰아닥친 그 시기에 매우 사려깊게 교회를 다스렸다. 그가 집무하던 시기에 안티옥에 발생한 첫번째 불황은 페르시아 왕 사퍼(Saper)가 그 곳을 포위하려 공격했던 일이었다. 사퍼는 시리아 온 지경을 침략하여 도시들을 차지하고 강탈하였으며 그리스도인 거주민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심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곧 고르디안(Gordian)에게 완전히 패배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고르디안이 죽고 디시우스가 집권하였을 때 그는 안티옥에 있는 그리스도인 모임에 자신이 방문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바빌라스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그가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거절하였다. 그 때 그 황제는 크게 진노하였고 그 감독을 송환하여 그의 오만함을 비난하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신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거절한 그는 사슬에 감겨 감옥으로 보내졌고 매우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한 뒤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Alexander)도 이 때쯤에 투옥되었다가 심한 고문으로 순교하였다. 연로한 줄리아누스(Julianus)와 크로니온(Cronion)은 낙타 등에 매여 혹독하게 채찍질을 당하였고 불에 태워졌다. 안티옥에서는 40여명의 처녀들이 투옥되었다가 채찍에 맞은 후 화형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5) 안티옥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 테오도라(Theodora)는 로마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아 사창굴에 던져지는 선고를 받아 그녀의 순결함이 그 곳에서 정욕에 찬 짐승들에게 희생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디디무스(Didymus)는 로마 군인 복장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테오도라가 있는 곳에 가서 자신이 입고 있던 로마군인 복장을 입혀 탈출시켰다. 그녀 대신 디디무스는 총독 앞에 끌려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실을 들은 테오도라는 재판정에 스스로 출정하여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무죄한 사람의 통곡에 귀멀고 정의로운 요구에 무감각한 총독은 두 사람 모두에게 사형을 내려 차례대로 목을 자르고 불태우게 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고소된 세쿤디아누스(Secundianus)가 로마 병사들에 의해 송환될 때 베리아누스(Verianus)와 마르셀리누스(Marcellinus)가 그 병사들에게 “이 결백한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라고 물었다가 함께 결박되어 후에 심한 고문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동안에 디시우스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갈루스(Gallus)가 왕위를 잇는다. 그는 고트족(Goths)과의 전쟁에 열을 올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모처럼의 ‘박해가 없는 상태’를 맞게 되었다. 갈루스 황제가 전쟁을 마쳤을 때 로마제국에 역병이 발생하였다.
이 황제는 로마신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온 나라에 선포하였고 이 명령으로 인하여 또 다시 박해의 바람이 불어 로마제국의 중심부에서부터 멀리 있는 변방까지 광범위하게 순교의 행렬이 이어지게 되었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코넬리우스(Cornelius)와 그의 후계자 루시우스(Lucius)가 이 기간에 순교하였다. 이 때가 A.D.253년 경이다.
이 때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해악이 몰래 들어와 자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등에 의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항하는 인간의 이성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리겐이 비록 이 기간 중에 죽임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의한 이단 교리는 교회 안에서 그 순수성을 해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그와 같은 오류는 자격있는 목자들에 의해 그릇됨이 판명되었으며 육신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견해들은 태양 앞의 별처럼 무력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2. 프랑스에서의 왈덴파 박해
1) 가증한 로마 카톨릭이 전대 미문의 여러 가지 교리를 교회 안으로 들여 오고 기독교계에 암흑과 미신들을 퍼뜨리자 이 거짓되고 파멸적인 경향을 미리 간파한 몇몇 사람들은 순수한 복음의 빛을 비추기로 결심하였고 교활한 사제들이 사람들을 눈멀게 하고 복음의 참 빛을 흐리게 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이 모든 구름들을 일소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A.D. 1000년경에 살았던 베렝가리우스(Berengarius)로서 그는 그들의 초기 순수함을 따라 매우 용감하게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였다. 당시에 신앙의 신념에서부터 그의 교리에 찬성했던 많은 사람들은 베렝가리우스 파(Berengarians)라고 불렸다.
베렝가리우스의 뒤를 이어 피터 브루이스(Peter Bruis)가 나왔으며, 그는 힐데폰수스(Hildephonsus) 백작의 보호 아래 톨루스(Toulose)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 그는 개혁주의자들의 신념과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한 이유들을 기록하여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1140년 경의 개혁주의자들의 수는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더욱 증가할 공산이 커지자 당시의 교황들은 크게 불안하여서 이들을 로마 교회로부터 추방하기 위하여 학식 높은 사람들을 고용하였다.
1147년에는 당시 가장 뛰어난 복음 전파자라고 여겨지는 툴루스의 헨리(Henry)로 인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헤네비시안즈 (Henevicians)로 불렸다. 그들은 신앙과 관련한 어떤 증명에도 동의하지 않았고 단지 성경 스스로 추론하는 것들을 믿었으므로 로마 카톨릭 측에서는 그들을 사도 계승자들이라고 불렀다. 결국 리용(Lyons) 출신이며, 신앙심과 배움에 있어서 탁월했던 피터 왈도(Peter Waldo)는 강력한 로마 카톨릭의 반대자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 당시의 개혁주의자들은 왈덴파(Waldenses) 또는 왈도이스(Waldoys)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리용의 주교로부터 이런 분리 운동에 대해 정보를 얻은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추방시켰고 가능하면 지구상에서 그들을 없애버릴 것을 주교에게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왈덴파들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왈도와 개혁주의자들에 대한 종교재판이 심문관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심문관을 임명하여 그들을 심문하고 세상의 법정에 그들을 넘겨 주었다. 마치 그 고소 사건이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 재판 진행은 신속히 진행되었고 그들에게는 공정한 심리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잔인한 방법이 의도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교황은 학식있는 수도사를 왈덴파 사람들에게 보내서 설교하게 함으로써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게 하였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도미니크(Dominic)라는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로마 카톨릭이 추구하는 목적에 극도의 열심을 내는 사람으로서 그는 수도사들로 구성된 심문관 기관을 창설하였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강력한 것으로서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나이가 얼마든, 여자이든 남자이든, 계급이 높든 낮든 간에 재판에 회부하였다. 피고인은 힘이 약하였으므로 그 고발은 합법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심지어는 무명으로 투
서된 정보도 유효한 증거로 채택되곤 하였다.
2) 부자가 되는 것도 이단 종파와 같은 범죄로 취급되었으므로 돈이 많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단자로 고소되거나 이단 교리의 신봉자로 몰렸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대한 댓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다. 또 투옥자들을 뒷바라지 하는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들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투옥된 사람에게 약간의 밀짚이나 한 잔의 물을 건네 주어도 그들은 이단 교리를 선호하는 사람들로 몰렸고 곧이어 박해를 받았다. 자신의 혈육을 위하여 감히 변호할 수 있는 변호사도 없었으며 로마 교회의 적의는 무덤 너머에까지 확대되어 죽어 매장된 사람의 뼈를 파내어 태우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 말로를 지켜 보게 하였다.
죽은 사람도 왈도의 추종자로 고소되면 그의 모든 재산들이 몰수되었고, 재산 상속자를 속여 그들 중 몇 명을 ‘성지’(Holy Land)로 보내어 그 집과 재산을 도미니칸 수도사들이 취하였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그들을 모르는 체 하곤 하였다. 이러한 박해들이 수 세기 동안 여러 교황들과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서 자행되어 왔다.
3) 알비겐파(Albigenses)에 대한 박해
알비겐파 사람들은 알비(Albi)라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개혁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라테란 공의회(Council of Lateran)에서 교황 알렉산더 3세의 명령에 의해 종교적인 이유로 정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상한 속도로 증가하여 많은 도시들이 그들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었으며 몇몇 유명한 귀족들도 그들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레이몬드, 톨루소의 백작, 포익스의 백작, 베지에르의 백작 등이 여기에 속한 사람들이다.
피터라는 수도사는 톨루소의 백작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계속적인 살인을 자행하였고 교황은 그 귀족과 그가 다스리는 지역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 그 살인자를 이용하였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교황은 전 유럽 지역에 사람들 보내어 알비겐 파 사람들을 압제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키도록 종용하였고 그들이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고 부른 이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락한 생활을 약속하며 40일 동안 군대를 소집하였다. 이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런 관대함이 십자군 성지 탈환 목적을 수행케 하였다.
톨루소의 백작을 공개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자 프랑스 왕과 왕비의 어머니, 그리고 세 명의 대주교는 또 다른 강력한 군대를 일으켜 그 백작을 교묘히 설득하여 회의에 참석하게 한 뒤 그를 체포하여 투옥하였고 그의 적들 앞에 맨발과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나타나게 하여 강제로 굴욕적인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게 하였다. 그 후 알비겐 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뒤따르게 되었고 이 때 평신도는 성경책을 읽는 것을 허락치 않는 명령이 공표되었다.
1620년의 알비겐 파에 대한 박해는 극히 심한 것이었다. 1648년에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거쳐 무시무시한 박해가 맹위를 떨쳤다. 코삭스(Cossacka)의 야만성은 정도를 지나쳐 타르타스(Tartas)에서조차도 그들의 야만성을 부끄러워했다.
박해의 고통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드리안 칼린스키 목사(Rev. Adrian Chalinski)가 있다. 그는 산 채로 약한 불에 오랜 동안 태워졌으며 그의 고통과 죽임당한 방법은 당시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던 사람들이 우리의 구속자이신 주님의 적들로부터 참아내야 했던 그 두려움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4)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개혁하기 위한 계획들이 매우 초기에 프랑스에서 세워졌다. 3세기에 학식 높았던 알메리쿠스(Almericus)와 여섯 명의 그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기 위하여 박해 받을 것을 명령하였다. 즉 하나님은 성찬식 때 떼는 빵에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은 거짓이며, 재단을 쌓는 것은 우상 숭배이고, 성도를 신성시하는 것과 그들에게 분향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이었다. 알메리쿠스와 그의 제자들은 순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도의 정당성이 인정되어 많은 오류들이 성행하는 것을 막았고 그들의 개혁 신앙의 순수성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이 때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복음의 불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524년 프랑스의 멜든(Melden)에서는 존 클라크(John Clark)라는 사람이 교회의 문에 방을 붙여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즉시 체포되어 채찍으로 맞고 이마에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 후 로레라인(Lorraine)의 멘츠(Mentz)로 간 그는 조각상들을 파괴하였다는 이유로 오른 손과 코가 절단당하고 짐승에게 조각조각 찢기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는 이러한 야만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인내력으로 견디었으며 시편 115편을 노래하였다. 그 후 그는 불 속에 던져져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이 당시에 찢기고 맞고 채찍질당하고 태워져 죽은 많은 개혁 신앙의 소유자들이 있었으며 특히 프랑스의 여러 지역과 특히 파리, 말다(Malda), 그리고 리모신(Limosin) 등지에 많이 있었다.
A.D.1546년 피터 차포트(Peter Chapot)가 프랑스에 다량의 성경책을 들여와 공개적으로 팔았다. 이로 인해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형을 선고 받았으며, 며칠 후에 형을 집행받았다. 얼마 후 막스(Meaux)의 한 장애자로서 페라(Pera)의 학교 선생님인 스테판 폴리오트(Stephen Poliot)와 존 잉글리쉬(John English)가 그들의 신앙을 지키다 불에 산화되었다.
4. 아프리카에서 심한 폭력에 의한 박해들
아프리카에서도 심한 폭력을 동반한 박해가 위세를 떨쳤으며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다음은 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사람들의 행적이다.
1) 카르타고(Carthage)의 감독이었던 씨프리안(Cyprian)은 교회의 광채를 더해주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의 언행은 우아하고 겸손하였으며, 그는 참으로 경건하고 예절바른 설교자였다. 젊어서 그는 이교도의 교리로 교육받았으며, 막대한 재산가였고 모든 화려함의 극치 가운데서 생활하였다. A.D.246년에 카르타고의 목자였던 코에실리우스(Coecilius)에 의해 개심한 그는 침례받기 전에 성경을 매우 주의 깊게 공부하였으며, 성경이 담고 있는 진리에 크게 충격을 받고 기록되어 있는 명령을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침례에 뒤이어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였으며, 자신은 매우 소박한 차림새에 궁핍의 생활을 하였다. 그의 미덕과 선행은 광범위하게 칭송되었고 A.D.248년 도나투스(Donatus)가 죽자 그는 거의 만장일치로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씨프리안의 영향력은 카르타고 뿐만아니라 누미디아(Numidia)와 머리타니아(Mauritania)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만장일치만이 교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모든 사역에 있어서 형제들의 조언을 구했다. “감독은 교회 속에, 교회는 감독 안에”라는 그의 말은 격언이 되었고, 그러한 일치됨은 목자와 양들간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만이 유지될 수 있었다.
A.D.250년에 씨프리안은 데시우스(Decius) 황제에 의해서 그리스도인 감독 코네실리우스 씨프리안이란 이름으로 추방당하였다. 그 이교 로마는 “씨프리안을 사자들에게, 씨프리안을 맹수들에게 던지라”고 부르짖었고 씨프리안은 주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한 후 그는 그의 양들에게 30회에 걸쳐 경건하고 향기로운 서신을 보내 그들을 돌보았다. 박해의 위세가 조금씩 가라앉자 그는 칼타고로 돌아와 교회 내의 위험스러운 견해들을 없애는데 그의 모든 힘을 기울였다.
2) 칼타고에 무시무시한 역병이 돌기 시작하자 늘 그렇듯이 그 책임이 교회로 돌아갔으며, 그 역병에 대한 교회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씨프리안의 편지에 행정관료들은 다시 교회를 차례로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A.D.257년에 씨프리안은 다시 칼타고로 돌아왔으나 정부 관료에 의해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A.D.258년 10월 14일에 목잘려 순교당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순교한 씨프리안의 제자들은 루시우스(Lucius), 플라비안(Flavian), 빅토리쿠스(Victoricus), 레무스(Remus), 몬타누스 (Montanus), 쥴리안(Julian), 프리메루스(Primelus)와 도나티안(Donatian) 등이 있다.
우티카(Utica)에서는 가장 잔인한 비극이 발생되었는데, 3백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불타고 있는 가마에 둘러 세워져서 쥬피터를 경배하지 않으면 불타는 가마 속으로 던져지는 무서운 명령이 지방 총독에 의해 내려진 것이 그것이다. 그곳의 모든 형제들은 쥬피터에게 경배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 가마에 뛰어들었다.
3) 스페인 타라곤(Tarragon)의 감독 프루투오수스(Frutuosus)와 그의 두 집사 어거리우스(Augurius)와 율로지우스(Eulogous)도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불태워졌다.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알렉산더(Alexander), 말쿠스(Malcus)와 프리스쿠스(Priscus)는 한 여인과 함께 자진하여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힘으로써 호랑이에게 던져지는 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선고는 곧이어 집행되었다.
투버가(Tuburga)의 세 처녀인 막시마(Maxima)와 도나틸라(Donatilla), 세쿤다(Secunda)에게는 쓸개와 식초를 마시게 한 후 채찍으로 때리고 교수대에서 고통을 주고 맹수들로 위협하다 결국 참수하였다. 그러나 A.D.260년 발레리안 황제의 뒤를 이은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통치하는 동안은 몇 명의 순교자들을 제외하고 교회는 수 년 동안 평안한 기간을 구가하였다.
5. 아우렐리안(Aurelian) 통치하에서의 아홉번째 박해 (A.D.274년)
1) 이 때의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로마의 감독이었던 펠릭스(Felix)를 거명할 수 있다. 그는 A.D.274년에 로마 감독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참수당하였다. 젊은 그리스도인이었던 아가페투스(Agapetus)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매우 신실한 형제였으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명으로 붙잡혀 많은 고문을 받은 후 로마로부터 하룻길 떨어진 곳인 프레네스테(Praeneste)에서 참수당하였다. 이들이 이 기간에 순교당한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기록에 남은 사람들이다.
아우렐리안의 뒤를 이어 타시투스(Tacitus)가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프로부스(Probus)가 그리고 그 후에 카루스가 뒤를 이었다. 이 황제가 벼락을 맞아 죽자 그의 두 아들인 카르니우스(Carnious)와 누머리안(Numerian)이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들이 집권한 동안 교회는 평화스런 기간을 갖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이 A.D.284년에 황제 자리에 올랐던 초기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286년 그가 막시미안(Maximian)과 연합하면서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기 전 죽음에 처해졌다. 이들 중에 펠리시안(Felician)과 마르셀리아누스(Marcellianus) 형제가 있다.
마르쿠스와 마르셀리아누스는 쌍둥이였으며 로마인으로서 귀족의 자식이었다. 그들의 부모들은 이교도인이었으나 그들을 교육한 가정교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끈 주 안의 형제였다. 그들이 이교 로마인이 되기를 열렬히 기원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견고한 신앙에 누그러졌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비난하던 부모와 다른 모든 가족들이 개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교 로마는 이들을 기둥에 묶고 못들을 밟게하는 등 많은 고문을 가하였고 이들은 그 고통으로 순교하였다.
감옥 간수의 아내였던 조에(Zoe)도 그들에 의해 개심하였다. 그들은 그녀의 발밑에 짚으로 불을 지피고 나무에 매달았으며 그녀의 몸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강에 떨어지게 하였다.
2) A.D.286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 발생하였다. 테비아스(Thebias)에서 일어난 군대라고 하여 테반군단이라고 불렀던 군단에는 6660명의 군인이 있었는데 이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막시미안 황제로부터 버간디(Burgundy)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골(Gaul)로 행진할 것을 명령받아 마우리티우스(Mauritius)와 캔디두스(Candidus), 엑수페르니스(Exupernis)의 지휘 아래 진군하고 있었다.
이때 막시미안은 그들에게 이방신에게 숭배할 것과 골에 있는 기독교를 박멸하는데 참여해야 할 것을 명령하며 이 일에 충성을 선서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에 대해 경각심을 가진 테반 군단의 각 개인들은 이 두 가지 명령을 완전히 거절하였고 이에 격분한 막시미안은 열 명 가운데 한 명씩 죽이는 명령을 내려 그들을 칼로 처형하였다. 이 피의 명령은 곧 집행되었으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두번째 이 명령이 내려졌을 때 또다시 열번째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두번째 명령은 첫번째 보다 그들에게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불굴의 정신과 자신들의 신조를 지켰으나 그들 상관의 조언에 따라 황제에게 충성스런 진정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이것이 황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의 확고부동함과 일치함에 격분한 왕은 전체 군인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고 이 명령은 점차적으로 다른 군대에까지 퍼져나가 집행되었다. 그들 모두는 A.D.286년 10월 22일 온 몸이 칼로 난자당하였다.
3) 영국에서는 헤르트폴트쉬어(Hertfordshire)의 성 알반(Alban)에서 그 이름을 딴 알반이 첫번째 순교자였다. 영국은 최초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던 루시우스(Lucius)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루시우스는 원래 이방인이었으나 암필바루스(Amphibalus)라는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개심하게 되었다.
존경할만한 형제 베데(Bede)는 알반이 순교할 때 그 집행자였다. 그때 그는 돌연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이 알반을 대신하여 죽거나 또는 함께 순교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은 알반과 베데의 목을 잘라 참수시켰다. 이 일은 A.D.287년 6월 22일 베룰람(Verulam)에서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콘스탄틴 왕 당시의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대한 교회가 세워져 있다. 현재의 이 교회는 섹슨 전쟁(Szxon wars) 때 파괴된 것은 메르시아(Mercia)와 오파(Offa)에 의해 재 건축된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프랑스 엑큐타인(Acquitain)의 그리스도인 자매인 페이드(Faith)는 A.D.287년 기름가마에 던져진 후 참수당하였다. 큐틴(Quintin)은 로마 사람으로서 루시안(Lucian)과 함께 가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아미엔스(Amiens)에서 설교했으며 이후에 루시안은 뷰마리스(Beaumaris)에 갔다가 순교하였다. 큔틴은 피카르디(Picardy)에 남아 매우 열정적으로 사역하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그의 정강이가 끊어질 때까지 잡아당겨지고 채찍으로 때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했으며 벗긴 몸에 끓는 기름을 끼얹는 등의 고문을 행하였다. 큔틴은 이런 모든 고통을 당한 후에 A.D.287년 9월 31일 순교했으며 그의 몸은 소메(Somere)강에 던져졌다.
6. 가브리아에서의 박해
1) 14세기에 프라그라와 아우피니의 많은 사람들이 가르라로 이주해서 그곳의 귀족들의 허가를 받아 몇몇 황무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경작을 해서 황야와 불모지를 신록이 우거진 비옥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다. 가브리안의 영주들은 이 새 백성들과 소작인들에 대해 대단히 만족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직하고 조용하며 근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곳 사제들은 이들에 대해 몇몇 부정적인 불평을 했고, 그들 자신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은 것을 들어 비난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이,
* 로마카톨릭이 아니라는 것,
* 그들의 아들 중 아무도 사제가 되게 하지 않았다는 것,
* 그들의 딸들 중 아무도 수녀가 되게 하지 않았다는 것,
* 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며,
* 그들의 사제들에게 헌물로써 밀랍초를 주지 않으며,
* 순례지를 여행하지 않으며,
* 우상들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가브리안 영주들은 이 사람들이 지극히 무해하며 로마 카톨릭을 해치지도 않으며 사제들에게 기꺼이 십일조를 내며, 그들이 이 나라에 옴으로 해서 그들의 수익이 상당히 증가했으며 결론적으로 그들에게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함으로써 사제들을 잠잠케 했다.
이후로 몇년동안 상황이 관용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왈도파들은 두 개의 합병된 도시를 세우고 몇몇 마을들을 그들의 사법권 안으로 병합시켰다.
마침내 그들은 두 명의 성직자를 부르려고 제네바로 사람을 보냈다. 한 명씩 각 도시에서 설교를 하게 하고, 그들이 가진 그들의 믿음을 공식적으로 고백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실이 교황에게 알려지자 피오 4세(Pius the Fourth)는 가라브리아에서 그들을 박멸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목적으로 그는 다른 두명의 수도승과 함께 알렉산드리노 추기경을 가라브리아로 보냈는데, 그는 매우 폭력적인 기질의 잔인하고 편협한 사람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종교 심문관으로 활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권한을 위임받은 이 사람들은 왈도파들이 세운 도시 중의 하나인 세인트 식스트로 가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교황이 임명한 설교자들을 받아들이면 그들에게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재산과 생명을 모두 잃을 것이라며 미사에 참석하기를 강요했다.
2) 세인트 식스트 사람들은 미사에 참석하는 대신 가족들과 함께 숲으로 도망하였다. 그러자 추기경은 왈도파의 또 다른 도시인 라 가드로 가서 먼저 문들을 잠그고 모든 거리에 경비를 세우고서는 세인트 식스트에서 했던 것과 똑 같은 제안과 거기에 세인트 식스트 거주민들은 즉각적으로 그 제안을 받아 들였으며 교황이 그들에게 설교자를 임명해 주는 것을 동의했다는 교활한 거짓말을 했다.
이런 거짓 계획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라 가드 사람들은 추기경이 그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인트 식스트의 그들 형제들의 본을 따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쪽 도시의 사람들을 미혹시킴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추기경은 다른 쪽 도시의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해 숲으로 군대를 보내어 들짐승들처럼 세인트 식스트 거민들을 사냥했으며,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죽이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의 계획을 알기도 전에 왈도파들은 그들의 포악함에 희생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가능하면 자신들의 형벌을 더 귀하게 쓰기로 결심하고 몇몇 전투를 개시하여 반무장한 채 놀랄만한 용기를 보여주었으며, 그 결과 양편에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추기경은 나폴리 영주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 영주는 즉각적으로 모든 범법자들과 탈주자들과 다른 규정된 사람들이 세인트 식스트 거민들을 대적하는 캠페인을 하고 이 사람들이 모두 박멸될 때까지 계속 군복무를 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죄를 확실히 용서해 줄 것이라는 포고문을 나폴리 전역에 알렸다. 그리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모아졌으며 그 영주도 정규군의 사령관으로 추기경과 합류해서 숲에 있는 가련한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했다. 어떤 사람들은 잡아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그 나뭇가지들을 잘라 불에 태웠으며 사람들을 발가벗겨서 들짐승들과 새들의 먹이가 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오락용 게임으로 사냥되었다. 극소수만이 동굴 등에 자신을 숨겼지만 기아에 희생되었다. 그리하여 이 가련한 사람들은 모두 여러 다양한 방법들로 죽임을 당하여 자비심 없는 박해자들의 편협한 악의를 채우는 데 희생되었다.
3) 세인트 식스트 거민들이 박멸되자마자 추기경과 영주는 관심을 라 가드의 사람들에게로 돌렸다. 만약 그들이 로마 카톨릭의 주장을 포용하면 그들과 가족들은 해를 입지 않고 집과 재산을 다시 회복하며 아무도 그들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나, 반대로 이러한 자비를 거절한다면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 그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대가로 가장 잔인한 죽임을 당하리라는 제안이 제기되었다.
한편의 약속과 다른 면에서의 악의에도 불구하고 이 존경할 만한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거나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추기경과 영주는 너무나 격노해서 그들 중 30명을 즉각 고문대로 옮겨 나머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자 했다.
고문대로 옮겨진 사람들은 너무나 잔혹하게 다루어져서 몇 명이 고문 중에 죽었다. 특히 챨린이라는 사람은 너무나 잔혹하게 다루어져서 그의 배가 파열되어 내장들이 밖으로 나왔으며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야만성은 그들이 의도한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고문 이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과 고문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같이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며 대담하게 육체의 고문이나 마음의 두려움으로는 그들의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할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 뒤 추기경의 명령으로 몇 명이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철채찍으로 채찍질을 당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큰 칼로 조각조각 잘려졌으며 어떤 이들은 큰 탑 꼭대기에서 던져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역청을 뒤집어 쓴 채 산 채로 회형당하였다.
추기경을 방문한 수도승들 중의 하나는 천성적으로 야만적이고 잔인한 기질의 사람이었는데 추기경에게 요청하여 이 가련한 사람들의 피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흘리게 해달라고 했다. 그의 요구가 허락되자 그는 큰 칼을 꺼내어 80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의 목을 잘랐는데 그와 같은 수의 양들을 도살할 때 도축업자가 갖는 것만큼의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았다. 모든 시체들이 네 조각으로 잘려져서 기둥에 매달린 채 30마일 내의 마을에 세워졌다.
라 가드의 4명의 지도자가 목메 달렸으며 성직자는 교회 탑 꼭대기에서 던져졌다. 그는 심하게 난도질 당했으며 단순히 떨어져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주가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아직도 그 개가 살아있나? 그를 데려다가 돼지들에게 주라”고 했다. 잔인하게도 그대로 시행되었다.
4) 60명의 여인들이 너무나 폭력적으로 고문을 받았다. 가는 줄이 그들의 팔과 다리를 죄어 들어가 뼈까지 이르렀으며 감옥으로 옮겨졌을 때 그들의 상처 난 부분이 국부적으로 죽어감으로써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에 처해졌다. 만약 어떤 로마 카톨릭 교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동정적이어서 개신교도들 사이에 끼어들면 그는 즉각 체포되어 이단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으로 인해 그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영주와 추기경은 각각의 이유들로 인해 다시 나폴리와 로마로 오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라브리아에는 개혁종교를 가진 사람 중 살아 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무해하고 악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유와 재산을 빼앗기고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나서 마침내 다양한 방식으로 살해되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다른 이들의 미신에 희생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이 증오하는 우상숭배적인 교리들을 허용치 않고 그들이 믿을 수 없는 교사들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7. 순교의 서곡
1) 특정 종교의 과오를 들춰내거나 비난한다는 인상을 주기가 쉽지만, 성경의 바른 가르침과 진리를 조명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고 특정 종교를 비난할 목적이 아닌 것을 알아 주시기 바라며, 출판된 "팍스의 순교사"는 교회사를 공부하시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고, 성도로서 한번쯤은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또한 로마 카톨릭에서는 금서로 지정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사도들의 역사 이래로 순수한 믿음을 지켰던 성도들의 피흘린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진 믿음이 정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인가, 정말 순수한 믿음인가 아닌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생각한다.
마태복음에서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시몬 베드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들으신다. 다른 누구보다도 베드로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으며 그 분의 아버지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구원의 손길을 감지했다. 주님께서 그를 베드로라 이름지었으며, 반석이신 자신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그 교회는 강력한 것이어서 음부의 문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둘째, 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모든 음부의 최고 능력과 권세로부터도 강력한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 그 교회는 마귀와 그의 원한으로 인한 극악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유유히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이 예언이 적중되었음을 알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교회가 거쳐온 모든 발자취는 이 예언된 말씀을 확증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두 말할 나위 없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둘째, 이 세상의 귀족들과 왕들, 군주들, 통치자들, 지도자들은 공개적이든 음성적이든 자신의 모든 권력과 교활함을 동원하여 교회를 박해하는데 자신을 헌신하다시피 하였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교회는 그것을 견뎌내고 있으며, 지탱해 오고 있다.
(1) 스테판(Stephen)
스테판은 첫번째로 순교당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배반자들과 살인자들에게 신실하게 복음을 전했으며, 이것이 그의 죽음을 야기시켰다. 죄의 찔림으로 흥분한 유대인들의 광란적 반응은 그를 성읍 밖으로 내몰아 돌로 쳐 죽이기에 이르렀다. 스테판이 박해 받았던 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이듬해의 봄인 오순절 시기였다고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즉시,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또는 선지자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박해가 가해졌다. 이 사실은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가해졌으니,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지더라』(행 8:1)고 기록한 것을 보면 즉시 알 수 있다.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던 니카놀을 포함한 약 2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스테판에 의해 일어난 박해” 기간 중 순교 당하였다.
(2) 야고보(James)
그 다음 우리가 만날 순교자는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이다. 그는 요한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친척이기도 하다(그의 어머니와 마리아는 종자매이다). 야고보의 순교는 스테판이 죽은 후 약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이는 헤롯 아그립파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자마자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얻을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매서운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3) 빌립(Philip)
그는 갈릴리 벳세다에서 태어났으며 최초로 “제자”로 불리운 사람이다. 그는 북아시아(Upper Asia)에서 신실하게 주를 섬겼으며 프리기아의 헤리오폴리스에서 순교당하였다. 그는 채찍에 맞았으며, 감옥에 갇힌 후 A.D.54년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4) 마태(Matthew)
마태는 세리였으며, 나사렛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티아와 에디오피아에서 사역을 하였고, 에디오피아에서 박해받았으며 A.D.60년 나다바에서 미늘창으로 살해당하였다.
(5) 작은 야고보(James)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이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94세 때 그는 유대인들에게 구타당하고, 돌로 맞아 결국 뇌에 손상을 입고 순교했다.
(6) 맛디아(Matthias)
맛디아는 다른 대부분의 제자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다 이스카리옷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임명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돌매질을 당하였으며 후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했다.
(7) 안드레(Andrew)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이며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에데사에에서 붙들려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는데, 땅에서 십자가의 두 끝을 수직으로 못박혀 죽었다.
(8) 마가(Mark)
마가는 레위 족속의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의 우상인 세라피스를 기리는 웅장한 종교의식을 할 때 순교당하였다. 그는 무자비한 처형 방법으로 몸이 찢기며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9) 베드로(Peter)
다른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 축복받은 제자인 베드로는 죽음을 선고받아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제롬은 베드로의 죽음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머리가 땅으로, 다리가 위를 향하는 자세로, 즉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는 이렇게 주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만큼 자신이 고귀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10) 바울(Paul)
처음에는 사울이라 불렀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숭고한 희생과 말할 수 없는 수고를 치룬 후, 역시 네로의 박해 아래서 순교하였다. 압디아스(Abdias)는 진술하기를, 네로가 바울에게 처형을 선고하기 위하여 그의 병사 네레가(Nerega)와 파테미우스(PArthemius)를 보냈다고 한다. 그 두 병사는 바울에게 오면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바울이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소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곧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의 무덤가에서 침례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에 그 병사들은 바울을 마을 밖 사형 집행장으로 끌고 갔으며 그곳에서 바울은 기도를 마치고 칼에 목이 베여 순교당했다.
(11) 유다(Jude)
야고보의 형제이며 다대오(Thaddeus)로 불렸다. 그는 A.D.72년 에데사(Edessa)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다.
(12) 바돌로매(Batholomew)
바돌로매는 여러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잔인하게 폭행당하였으며 포악한 우상 숭배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13) 도마(Thomas)
도마는 디두모(Didymus)라고 불리우며 파티아와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이곳에서 이교도 제사장들을 격노케 하였다. 그래서 그는 창으로 몸이 관통되어 죽었다.
(14) 누가(Luke)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이며 복음 전파자이다. 그는 바울과 함께 많은 나라에서 선교하였으며 그리스의 우상 숭배 제사장들에 의하여 올리브 나무에 목이 매달려 순교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5) 시몬(Simon)
시몬의 다른 이름은 젤로(Zelotes)이다. 그는 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영국에서도 선교하였다. A.D.74년에 그는 영국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16) 요한(John)
이 “사랑스러운 제자”는 큰 야고보(James the Great)의 형제이다. 에베소로부터 로마로 강제 송환 명령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기름이 끓는 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피해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그 후 도미타안(Domitian)은 그를 팟모섬으로 추방하였고, 요한은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도미타안이 후계자인 네르바가 요한을 재송환하였다. 그는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참혹한 죽음을 피한 사람인 셈이다.
(17) 바나바(Barnabas)
바나바는 사이프러스 출신이며 유대인 자손이다. 그는 약 A.D.73년 경에 순교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계속되는 모든 박해와 끔찍한 처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매일 성장하였고 사도들과 사도직분을 수행했던 형제들의 가르침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그 위에 성도들의 피가 풍성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출처] <이단, 함부로 순교를 논하지 말라 >|작성자 셋째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