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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料에 나타난 창녕成씨 평가]
1>창녕성씨(昌寧成氏)는 조선시대 ‘광창이성(廣昌李成: 廣州李氏와 昌寧成氏)’으로 불리던 명문가로 영의정을 지낸 독곡 성석린(獨谷 成石璘), 인재 성희안(仁濟 成希顏) 등 당대 저명한 정치가 뿐만 아니라 용재 성현(慵齋 成俔)과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우계 성흔(牛溪 成渾) 부자, 동주 성제원(東洲 成悌元) 등 당대의 문학과 학문으로 저명한 명현들을 다수 배출한 가문이다.
또한,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성사제(成思齊), 단종 복위를 도모한 사육신(死六臣) 매죽헌 성상문(梅竹軒 成三問), 생육신(生六臣) 문두 성담수(文斗 成聃壽) 등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을 배출하여 조선시대 충절과 효행을 대표하는 가문으로도 이름이 높다.
이러한 창녕성씨는 성삼문의 단종 복위 사건 이후 성상문의 6촌 성담년(成聃年)의 후손들이 대전시 둔곡동과 세종시 달전리에 세거하기 시작하였으며, 문중의 재실이자 자제를 교육하는 공간인 백운루(白雲樓,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4호), 중종반정 공신 성몽정 신도비(成夢井 神道碑), 성삼문을 제향하는 문절사 등 많은 문화유산을 남기며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처럼 ‘창녕 성씨 문중’은 조선시대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대전과도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어 대전시립박물관은‘창녕성씨(昌寧成氏) 특별전- 문행지문(文行之文), 사교(四敎 : 文ㆍ行ㆍ忠ㆍ信)를 세우다’를 개최하게 됐다.
(출처: 2019 한국의 명가Ⅴ 창녕성씨 특별전 개최/ [세종nTV=성태규 기자] 2019.12.18.)/ 대전시립박물관, [대전=뉴스충청인]
2>成氏는 인구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李朝의 가장 쟁쟁한 名閥의 하나이다. 본관은 창녕成씨 단본으로 역사상 벼슬 閱歷도 뛰어나지만 특히 사육신 성삼문과 생육신 의 한 사람인 성담수 그리고 문묘에 배향된 名儒 成渾 등을 낳아 더욱 빛난다.
(출처: 한국姓氏대관, 1971발행, 저자 최덕교. 이승우, 발행처 창조사)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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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成門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인가?!
글쓴이 : 陽坡 성기웅(成耆雄, 26世,桑谷公派)
禮文化人性敎育硏究會 會長, (前)大眞大學校 外來敎授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우리나라의 옛적부터 대대로 문벌(門閥)이 높은 집안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 제일(第一)의 씨족(氏族)이란 말이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삼한(三韓)은 상고시대(上古時代)에 우리나라 남쪽에 있던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말한다.
이 말은 우리 겨레, 우리나라 전체(全體)라는 뜻이다. 또한 갑족(甲族)에서 갑(甲)이란 천간(天干: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첫 글자로 ‘으뜸․제일․첫 번째’의 뜻으로 쓰여 지기도 하므로, 갑족(甲族)이란 ‘최고・으뜸․제일의 씨족’이란 말이다. 따라서 삼한갑족은 스스로 ‘우리는 삼한갑족이다’라고 해서는 자랑스러울 수 없고 남이 ‘너희는 삼한갑족이다’라고 해야 진정한 삼한갑족이라 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삼한갑족의 기준(基準)
은 어떠한 것인가. 전통관습으로 보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관례(慣例)이다. 우리 성문(成門)은 이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을까?
첫째로, 학문과 덕행(德行)이 훌륭해서 겨레의 스승(東國十八賢)으로 추앙되는 문묘(文廟:孔子를 모신 祠堂)에 배향(配享)된 현인이 나오신 씨족인가.
동국십팔현은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현인(賢人) 18분을 말한다. 현인을 높이는 말로 ‘십상이불여일현(十相而不如一賢)’이란 말이 있다. 이는 열사람의 재상이 한 사람의 현인(賢人 즉 문묘에 배향된 동국십팔현)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 성문은 어떤가.
우리 성문에는 문묘배향된 분으로, 호는 우계(牛溪),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휘(諱)는 성혼(成渾, 12世, 官右參贊: 議政府의 正二品) 할아버지가 계시다. 참고로 동국십팔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의 두 분, 빙월당 설총(冰月堂 薛聰),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고려(高麗)의 두 분, 회헌 안유(晦軒 安裕),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조선시대에 14분으로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組),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율곡 이이(栗谷 李珥), 우계 성혼(牛溪 成渾),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중봉 조헌(重峰 趙憲),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 선생님이시다.
둘째로, 문형(文衡)을 배출한 씨족인가.
문형이란 대제학의 별칭인데, 문형은 국가의 최고의 문병(文柄)을 잡고 사명(辭命) 과시(科試)등을 통할하며 학문과 관계되는 일을 모두 관장하였다. 문형의 칭호를 얻으려면 홍문관(弘文館) 대제학과 예문관(藝文館) 대제학, 그리고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 또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직해야만 했다.
문형은 이들 삼관(三館)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職)이므로 더할 수 없는 명예로 여겼고 품계는 비록 판서급인 정이품(正二品)이었지만 명예로는 삼공(三公: 領議政․左議政․右議政)이나 육경(六卿: 六曹判書)보다 윗길로 쳤다. 문형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은 문과(文科)를 거친 문신(文臣)이라도 반드시 호당(湖當)출신이라야만 문형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대제학후보선정은 전임(前任) 대제학이 후보자를 천거하면 이를 삼정승, 좌우찬성 좌우참찬, 육조판서, 한성판윤 등이 모여 다수결로 정한다. 대제학은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직(終身職)이다. 대제학을 높이는 말로 삼정승이불여일대제학(三政丞而不如一大提學)’이란 말이 있다.
대제학은 정이품의 관계(官階)이지만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문에도 하자가 없는 석학(碩學)․석유(碩儒)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인데, 학자와 인격자로서의 최고지위라고 할 수 있어 본인은 물론 일문(一門)의 큰 명예(名譽)로 여기었다.
역사상 여러 벼슬에서 최년소기록을 세운 이는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인데, 그는 20세에 문과에 올라 23세에 호당에 들었고 31세에 문형이 되었으며, 38세에 벌써 우의정이 되어 42세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홍문관은 내부(內府)의 경적(經籍: 유교의 경서)및 문한(文翰: 문필에 관한 일)과 왕의 자문을 맡은 관아(官衙)이다. 관원이 모두 경연관(經筵官: 御前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관원)을 겸한다. 예문관은 사명(詞命: ①임금의 말 ②사신이 명을 받들어 외교무대에서 하는 말)을 짓는 일을 맡은 관아이다.
우리 성문(成門)에 문형으로는 성현(成俔: 9世, 號虛白堂·慵齋, 諡文戴, 樂學軌範을 편찬하여 音樂을 集大成)과 그 아드님 되시는 성세창(成世昌: 10世, 號遯齊 諡文莊) 할아버지가 계시다.(총 133명중)
셋째로, 상신‧정승(相臣․政丞)을 배출한 씨족인가.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과 나라에 공헌한 정승을 배출한 씨족인가. 상신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총칭으로 상국(相國)이라고도 한다. 우리 성문의 상신으로는 조선조에만 5분이 계시는 데 독곡 성석린(獨谷 成石璘, 6世, 太宗朝 領相), 성준(成俊, 9世, 燕山朝 領相), 충정공 성희안(忠定公 成希顔, 11世, 中宗朝 領相)과 성세창(成世昌, 10世, 仁宗朝 左相)와 성봉조(成奉祖, 8世, 成宗朝 右相) 할아버지가 계시다.
그리고 상신은 아니지만 판서(正二品)를 하신 할아버지가 23분, 그리고 경연관(經筵官)에 2분이 계시는데 성혼(成渾, 宣祖朝), 성근묵(成近黙, 哲宗朝)이시다. 봉군(封君)을 하신 분은 24名이나 되시며, 공신(功臣)에 5분,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祀)를 받으시는 분이 36명이나 된다. 봉군은 임금의 적자(嫡子)를 대군(大君)으로, 후궁 왕자(後宮 王子)․국구(國舅) 또는 이품이상 종친․훈신(勳臣)을 군(君)으로 봉(奉)했다.
넷째로, 청백리(淸白吏)를 배출한 씨족인가.
청백리는 그의 인품, 경력, 치적 등이 능히 모든 관리(官吏)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어야만 청백리로 녹선(錄選: 선정하여 기록에 올림)된다. 청백리는 의정부․육조(六曹) ․경조(京兆: 서울) 등의 정이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 등의 수장(首長)들이 천거하여 선정(選定)된다.
청백리로 뽑히면 품계가 오르고 만민의 추앙을 받았으며 그 자손들에게도 음보(蔭補: 조상의 德으로 벼슬을 얻음)의 혜택이 있었다. 따라서 본인은 물론 일문(一門)의 큰 영예로 여겼다.
사헌부(司憲府)는 관리의 비행을 조사책임을 규탄하고 풍기․풍습을 바로잡던 관아이고, 사간원(司諫院)은 임금에게 간(諫)하는 일을 주로 맡아 하던 관아였다.
우리 성문(成門)의 청백리로는 다섯 분이 계시는데, 성현(成俔, 成宗朝 參贊), 문장공 성세장(文莊公 成世章, 明宗朝 禮曹判書), 성영(成泳, 宣祖朝 吏曹判書), 성하종(成夏宗, 14世, 仁祖朝 兵使), 성이성(成以性, 16世, 肅宗朝 府使)이시다.
다섯째로, 호당‧독서당(湖當․讀書堂)을 배출한 씨족인가
호당이란 독서당의 별칭(別稱)으로서 세종 8년(1426)에 시작된 제도로서, 문관 중에서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우대하여 사가(賜暇: 휴가를 줌)하여 오로지 학문을 닦게 하던 서재(書齋: 九齋의 하나로, 書經을 공부하던 성균관의 한 分科)이다. 또, 여기에 뽑히어 공부를 하던 사람을 말한다.
이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 하여 문신(文臣)의 명예로 여겼으며 출세 길도 빨랐다. 문형의 추천으로 왕명에 의해 들어갔으며, 여기에 들어가면 녹봉(祿俸)은 받되 집무는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다.
참고로 구재(九齋)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있는 성균관의 경학(經學)을 공부하던 아홉 학제(學制) 즉, 五經 四書齋로 易齋․書齋․詩齋․春秋齋․禮齋의 五經齋와 論語齋․中庸齋․孟子齋․大學齋의 四書齋의 아홉 分科가 있었다.
성종은 용산두모포(龍山豆毛浦)에 ‘독서당(讀書堂)’을 신설하여 년소문사(年少文士)의 총민(聰敏)한 자에게 장가(長暇)를 주어 독서제술(讀書製述)에 전심케 하였으며 … 독서당은 연산군 때에 폐하였다가 중종 때에 복설(復設)하여 ‘호당(湖當)’이라 하였다.(한국사 근세전기편(104쪽)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호당을 거치면 문관(文官)으로서의 장래가 보장되었으며 또 대제학이 되려면 반드시 호당을 거쳐야만 했다.
호당도 우리 성문에 다섯 분이나 계셨는데, 승지 성삼문(承旨 成三問, 9世, 大提學 權踶(제) 選), 수찬 성간(修撰 成侃, 9世, 虛白堂 成俔의 仲兄, 大提學 鄭燐趾 選), 예조판서 성현(禮曹判書 成俔, 9世, 大提學 崔恒 選), 좌의정 성세창(左議政 成世昌, 10世, 大提學 申用槪 選), 홍문박사 성중엄(弘文博士 成重淹, 13世, 大提學 洪貴達 選)이시다.
여섯째로, 대과급제(大科及第)를 배출한 씨족인가
대과급제는 문과급제를 장하게 부르는 말이다. 대천(大闡)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선대조(先代祖)는 무수히 많아 134명이나 된다.
이 중에서 중시(重試) 합격자로는 세종 29년에 성삼문(成三問, 乙科 一), 세조 3년에 성임(成任, 丙科), 성종 7년에 성현(成俔, 三等), 정조 10년에 성종인(成種仁, 乙科)의 4명이 있다. 중시란 세종 9年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문과급제자로 당하관(堂下官)을 위하여 둔 과거(科擧)로 10년에 한번 실시(每丙年)하여서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당상정삼품(堂上正三品)으로 품계(品階)를 올려주었다.
위에서 국혼(國婚: 왕․왕세자․왕자․공주․옹주․왕손 등 왕실의 혼인)을 했으면 한 등급이 떨어졌다. 그것은 국혼을 했으면 상신(相臣)이 나올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한 등급 떨어지는 것이다.
대과(大科) 또는 문과(文科)에는 사마시(司馬試) 혹은 생진과(生進科)라고 하는 소과(小科)와 문과(文科)라 부르는 대과(大科)가 있는데, 소과는 초시‧복시(初試․覆試)의 2단계(二段階), 대과(大科)는 다시 초시‧복시‧전시(初試․覆試․殿試)의 3단계(三段階)가 있어, 원칙적으로는 이 5단계를 차례로 합격해야만 문과급제(文科及第)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삼한갑족의 뜻과 기준 및 그에 상응한 우리 성문(成門)의 선대조 명현(先代祖 名賢)들을 충분히 알아보았다. 그 외에도 고려 말의 두문동(杜門洞 )72현에 정절공 성사제(貞節公 成思齊, 6世)와 총랑공 성부(摠郞公 成溥, 8世)가 계시다. 이분들의 충절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더불어 고려말의 으뜸가는 충신이 아니겠는가!
또한 조선조에는 만고충신이신 사육신(死六臣)에 성삼문(成三問, 號 梅竹軒, 諡號 忠文), 생육신(生六臣)에 성담수(成聃壽, 號 文斗, 諡號 靖肅, 死六臣 成三問과 六寸間) 할아버지가 계시다. 또한 묘정배향(廟庭配享)에 한분이 계시니 바로 영의정 성희안(領議政 成希顔, 中宗廟庭配享) 할아버지이시다.
여기에 불천지전(不遷之典)을 받으신 8분이 계시니, 성여완(成汝完, 5世), 성석린(成石璘, 6世), 성희안(成希顔, 11世), 성몽정(成夢井, 10世), 성희옹(成希雍, 11世), 성율(成瑮, 12世), 성혼(成渾, 12世), 성대훈(成大勳, 14世) 할아버지이시다.
이처럼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명문거족(名門巨族)에서도 볼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선현(先賢)들이 배출되었으니, 우리 후손들은 어찌 자랑스럽고 자긍심(自矜心)을 갖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 후손들은 성문(成門)의 선현들의 위대하신 뜻을 이어받아 위선사업(爲先事業)은 물론 각자가 모두 분발(奮發)하여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우리성문의 발전과 화합(和合)에 합심(合心)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창녕성씨부산화수회 成兌永 회장’의 요청으로 2001년 7월 1일「昌寧成氏釜山花樹會報」에, 揭載된 글을 약간의 修正․補完한 글임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 •보충교재(예절지도교육연구(120시간))과정, 韓國典禮硏究院(金得中)
•昌寧成氏八百年史, 成百一, 美和出版社, 1981
•昌寧成氏大同普 上下, 增補影印版, 1974
•韓國史, 震檀學會, 乙酉文化史, 1974
•韓國科擧史, 片泓基, 明義會, 1987
•族譜回想四十年史, 印刷出版回想社, 1993
•典故大方全, 朴聖澤, 中央出版社, 1982
<출처:창녕성씨 대종회보 제61호 , 2019.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