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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51113a (뾰족한 수)―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2장 3절부터 하겠습니다.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갑자기 우리가 전쟁 중에 있다는 상황으로 몰아붙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전쟁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 기관총 앞세우고 말 달리고 활 쏘는 그런 전쟁만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 말이나 총이나 비행기나 그런 전쟁이 없으면 상당히 모든 것이 평화롭다고 그렇게 생각하죠.
이것은 모든 것이 오해인데요. 그 오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 신체적 전쟁, 자기 신체를 중심으로 해서, 이 신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겁니다. 가시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자기가 보존하려고 전쟁을 벌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는데 문제는 뭐하면 그리스도 예수가 안 보인다는 거예요. 보이지를 않아요. 귀신하고 전쟁하렵니까? 귀신하고 전쟁해요? 보이지 않는 분에 편성해서 군사가 된다면, 제가 먼저 질문할게요. 그 보이지 않는 분에게 전쟁하는 그 대상이 눈에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객관식 문제로 둘 중에 하나에요.
내가 보이지 않는 분의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된다면 그 그리스도와 전쟁하는 상대자, 대상자는 눈에 오일까요? 안 보일까요? 1번 보인다. 2번 안 보인다. 안 보여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 내가 보이잖아요. 내가 보이니까 나의 전쟁만 할 수 밖에 없어요.
오늘도 넥타이 매면서 출근하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한테 정신 차려! 반듯하게 살아! 이 세상은 자칫하면 코 베이는 거야! 정신 차리고 실수 없이 업무 잘 수행하고 오늘도 남한테 좋은 칭찬받고 자, 출근이다! 이렇게 해 놓고 저녁 되면 보람찬 역할을 했노라 하면서 집에 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루 종일 누구하고 전쟁합니까?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내가 눈에 보이는 내 신체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적이라는 것도 당연히 눈에 보이는 자들이 나의 적이 되는 겁니다.
돈 떼먹고 도망친 사기꾼, 그게 적이 되는 거죠. 나를 힘들게 하는 것,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이 와서 속도위반이라고 할 때 경찰이 나의 적이 되죠. 그런 전쟁을 우리가 평소에 한다는 것은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태어나 지금 까지 나의 전쟁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군사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누구의 전쟁을 했습니까? 분명히 그는 여호와를 위한 전쟁을 했죠. 그리고 여호와는 눈에 안 보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사도바울의 실수가 뭐냐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입장에서 서서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했는데 그 적들은 눈에 보였을까요? 안 보였을까요? 눈에 보였잖아요.
그 대표적인 자가 누구이냐, 로마제국이에요.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로마제국의 압제를 받았잖아요. 유대인 입장이라서 노골적으로 구체적으로 여호와를 믿는 집단을 핍박하는 쪽이 분명하게 드러났죠. 그러면 로마 제국만 망하게 하면 되겠죠. 그러면 구약의 약속대로 메시아는 누구를 경향해서 싸우면 되겠어요? 로마제국을 무찌르게 되면 자동적으로 메시야는 누구편이다? 우리 이스라엘 해방자, 이스라엘의 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왔을 때 예수님의 적이 누구였습니까? 로마였습니까? 그렇게 믿고 있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예수님께서 공생에서 마지막 예언한 대 대목이 뭐였습니까? 로마는 망한다! 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망한다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망한다죠. 차라리 그날에 안식이 안됐으면 좋겠구나! 돌 위에 돌이 남지 아니하고 모든 아니 된 자들은 저주가 있으리라 갑자기 적들이 쳐들어와 모든 것을 다 부셔 버린다. 예수님께서 이런 예언을 하셨잖아요. 그날에 깜깜하고 이스라엘이 멸망한 날이다 그 이야기나 구약 이스라엘 때에 그들이 바벨론에게 압제 당할 때 그들은 선지자를 요청했고 오신 선지자에게 예언된 예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잘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 잡혀야 마땅하다. 물론 이사야에 보게 되면 너희를 치는 몽둥이가 오히려 너희들이 매를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끝나고 난 뒤에야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분명히 그렇게 예언되어 있거든요.
제가 지금 구약 이사야 끝부분을 완전히 다 한 거예요. 핵심만 잡은 거예요. 하나님은 언약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실시하신다. 실시하시는데 그 실시하시는 방법이 뭐냐,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를 이방나라한테 포로 잡히게 하는 것이 언약의 방식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듣기 난처한 이야기이에요. 쉽게 말해서 “혹시 집안이 교회 가십니까?” “예, 교회 갑니다.” “교회 왜 가십니까?” “구원 받으려 갑니다.” “그래요? 제가 예언해 드릴게요. 집안 몽땅 망하고 난 뒤에 구원될 겁니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당신 집안이 완전히 거덜 나고 난 뒤에 하나님나라 천국 갈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아이고 오랜만에 귀인을 만나서 진짜 복음을 만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럴 사람 별로 없어요.
아니 구원이 뭔데? 왜 우리 멀쩡한 집안이 망하냐? 정답은 딱 하나에요. 구원을 누가 방해한다 말입니까? 누가 누구를 방해해요? 바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본인이 예수님의 구원을 훼방하고 있는 방해자라는 사실을 그동안 전혀 그런 생각이 없이 산거예요. 그냥 교회 열심히 다니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된다고 이렇게 생각했지 내가 내 구원을 훼방하는 자라는 인식이 도대체 어떤 시점에서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1번 만사가 안 될 때, 2번 만사가 참 잘될 때, 어느 쪽입니까?
둘 다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모든 일이 망한 쪽으로 갔을 때 그저 이방나라 바벨론 망하고 그저 로마제국 망해서 이 불쌍하고 불쌍한 하나님이 만드신 이 나라가 여호와의 명예와 여호와의 영광을 보란 듯이 세계만방에 떨치기 위해서 거봐! 이렇게 당당하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잖아! 그러한 자랑꺼리 그러한 멋있는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그러한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학수고대했습니까? 그들은 그 메시야가 올 수는 여권을 다 준비했어요.
성전에서 제사 드렸죠. 율법으로 온 민족을 율법화 시켰잖아요. 그리고 모든 민족을 신자와 시켰습니다. 이 정도하면 메시야가 와도 꿀릴 것 없다! 메시야가 참 잘했다, 그래 훌륭하다! 나온다고 잘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완벽에 완벽을 가하면서 율법 중심적으로 그들이 했는데 그게 악마가 한 짓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노선이 그런 노선이 아니에요.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하라 도끼 나무뿌리 이야기할 때 바리새인들 보고 너희들은 임박한 진노만 있으면 되지 나한테 오기는 왜 왔어? 너희들에게 임박한 진노만 임하는 거야! 일방적으로 보자마자 그런 소리를 해 데니 바리새인들이 영문도 모르고 저게 미쳤나?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네가 뭔데 우리보고 뿌리째 잘릴 존재라고 그렇게 무슨 근거로 욕설하듯이 하느냐?
세례요한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을 했느냐 하면 오실분이 오면 전부 다 작살난다! 다시 말 해서 이스라엘아, 메시야가 오기는 오는데 너희들을 멸망시키는 메시야가 온다 이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한테 충성을 다하고 섬기고 싶어서 마음속에 충성과 열심히 많은 우리 자신들에게 너희들을 멸망하기 위해서 메시야가 온다고 하면 그 메시야는 우리가 추구하는 메시야와는 유사하겠습니까? 정 반대이겠습니까? 정반대죠.
오늘 디모데후서 2장 3절 하면서 이렇게 보시면 돼요. 하나님의 전쟁의 적은 적이 있어서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적을 일부로 만들어 내면서 전쟁한다는 사실입니다. 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전쟁이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의 모든 전쟁은 가시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신체적 전쟁입니다.
신체적 전쟁이라 하는 것은 내 몸 하나 편한 거예요. 내 몸 편 하려고 하면 일단 일 안하면 되고 일 안하고 살려면 돈 벌면 되고 결국은 쩐의 전쟁, 돈의 전쟁이 되겠죠. 나쁜 친구 있어도 돈으로 구워삶으면 되니까 돈만 있으면 좋은 친구 많이 있으니까 여유 있게 취미 생활 해 가면서 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겠죠. 이미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전쟁 중인데 이 전쟁이 누구의 전쟁이냐, 나의 전쟁이죠. 이 전쟁은 나를 지키기 위한 나의 전쟁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저도 난감해요. 나의 전쟁이라는 게 없거든요. 왜 없느냐 하면 이 나가 아침에 거울을 보면 나가 보여요? 안 보여요? 보이잖아요. 가시적 전쟁에 있어서 적은 가시적 일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아까 제가 예를 들었죠.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한 적은 누구다? 악마의 나라가 아니라 누구다? 로마제국이라고 했죠.
가시적 제국에서는 가시적 적밖에 보이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 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어떠한 루트나 통로가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의 적이 돼요. 왜? “나”가 보니까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했거든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전쟁에 가시적 전쟁에서 비가시적 전쟁을 하려면 눈에 보이는 것을 원래 보이지 않는 주인에게 돌려주는 과정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이사의 동전, 이게 누구의 얼굴이냐?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이사에게 돌려주어라! 그러면 가이사에게 돌려주는 방법은 간단하죠. 세금을 내면 되죠.
세금을 안 내면 어떻게 됩니까? 전쟁이 나고 세금을 내게 되면 일시적인 평화가 주어지는 겁니다. 전쟁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줘라 이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전쟁을 누가 해요? 보이는 그들이 나서서 전쟁을 하려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적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데 안 보이는 귀신하고 칼싸움 하기는 뭐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로마제국이 바로 하나님의 적이라고 그렇게 오해를 한 겁니다. 그 오해는 인간의 한계인데 인간이 자기가 눈에 보인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의 적은 아무리 분석을 해 봐도 결국은 보이는 구체적인 인물로 그게 최종 적으로 삼는 겁니다.
성경을 다시 생각 해 봅시다. 그리스도의 적을 신약에서 뭐라 하느냐, 앞에 글자 하나 붙여서 적그리스도죠. 그러면 그리스도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보이죠.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눈에 보이겠어요? 안 보이겠어요? 눈에 안 보이겠죠. 눈에 안 보이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반복이에요. 인간의 모든 시간은 지나가면 끝이에요. 세월도 두 번 다시 일어날 일 없고 5.18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구약 언약은 이게 반복이 돼요.
아브라함은 누구를 받쳤습니까? 아들을 바쳤죠. 아버지는 아들 잃은 경험 속에서 하나님 앞에 믿음을 확인했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됩니까? 야곱은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요셉에게 좋은 옷을 입혔지만 야곱의 안목에서 야곱이 보는 세계 안에서 요셉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팔리고 난 뒤에 요셉은 죽은 자죠. 그게 반복이에요.
아직 구약이기 때문에 요셉은 죽어도 누구는 살아있다? 야곱은 살아 있어요. 이삭은 잡아도 그것을 잡는 아브라함 본인은 살아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죠. 그러면 아들은 누구죠? 이스라엘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야 돼요? 잡아야 되겠죠. 없애야 되겠죠. 멸망 시켜야 되겠죠.
그 모든 것이 뭐냐? 이스라엘 본인이 보이지 않는 적을 배후에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에요. 모든 전쟁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아이고 망하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래 가지고는 우리가 소속 되어는 있는 하나님의 원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니까 우리는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지만 이 보이는 신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조정 받게 되어 있어요.
그 조정 받는 하나의 연결점이 유혹이라는 겁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인간이 무슨 수로 유혹을 이깁니까? 누가 무슨 재주로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까? 유혹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 속에 내가 읽을 수 없는 어떤 괴물이 모든 밖에 보이는 것을 유혹꺼리로 조장해 내고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가 내 괴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우리는 우리 밖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우리가 할 일은 뭡니까? 안 벗어나면 되죠. 안 벗어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안 벗어나면 우리가 이 전쟁을 승리할 수 있어요? 없어요? 우리가 누구한테 매여 있는데 승리가 돼요? 안 돼요? 사람이 전쟁을 할 때 너 자유고 내 자유고 한 판 붙어보자! 이래야 전쟁이 되는데 우리가 이미 영적 전쟁판에서 매여 있잖아요. 매여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전쟁을 나선다는 것 자체가 이게 독자적으로 나설 수가 없잖아요. 묶여있는 입장에서요.
그런데 우리가 묶는 것이 누구냐 하면 주님의 원수가 우리가 묶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전쟁은 하나마나에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우리가 하는 전쟁을 하면 돼요? 안 돼요? 안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약 성경의 복음이라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죽었나니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일을 시킨 게 아니에요. 날마다 반복해서 죽으라는 것만 시켰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지만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주어진 형편이 주님의 전쟁터에 와 있음을 날마다 확인하면 돼요. 내가 끌려간 곳이 예를 들어 터키면 터키, 그리스이면 그리스, 로마면 로마, 이 모든 것은 내 이전에 이미 준비된 겁니다.
전쟁터는 내가 기획하고 내가 창안한 전쟁터가 아니에요. 나도 몰라요. 왜 이런 전쟁터가 있는지 나도 몰라요. 사도바울이 지중해, 로마 건너가면서 이쯤에서 폭풍이 일어나야 되는데 하면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기획했습니까? 미리 자기 정보를 입력했습니까? 아닙니다. 난데없이 폭풍이 일었어요. 폭풍이 일어날 때 사도바울이 알게 된 것이 무엇이냐? 폭풍 일어놓고 하는 말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는 로마에 능히 가야하리라! 사도행전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제가 뭐라 했어요? 제가 로마 가는 것을 불평했습니까? 불평 안했죠. 안 했는데 주님께서 폭풍을 일어놓고 겁나고 두려울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 네가 로마에 가리라! 이것은 뭡니까? 이것은 옛날 구약에 모세가 나타난 것과 똑같은 거예요. 네가 전쟁을 하기 전부터 사도바울아! 네 적이 누구인지 아느냐? 네가 나서서 설치는 것? 그러면 그것은 가시적 적이고 바로가 있잖아요. 로마 바로가 적입니까? 아니에요. 폭풍이 적이 될 수 있어요. 지중해에 부는 폭풍이 적이 될 수 있고 더 궁극적 적은 뭐냐 하면 야, 복음 전하는데 폭풍이 불어 난 못하겠네! 난 안해야지! 죽게 됐는데 내가 무슨 복음을 전해? 라고 죄 지은 즉 겁을 집어 먹는데 그 겁을 집어 먹는 이유가 뭐냐? 나는 살아야 되겠어! 이렇게 죽음 당하기 싫어! 자꾸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자기가 가기를 보존 하려는 의식, 그것이 처리 되지 아니하면 주님의 영적 전쟁터에 나서서 해보나 마나 패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낼 때 모세를 그냥 보내면 되는데 모세에게 떨기나무에 찾아왔잖아요. 그때 모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애굽이 무섭습니까? 가만히 있는 떨기나무가 불붙는 것이 무서워요? 어느 쪽이 무서워요? 애굽보다 이게 더 무섭죠. 왜? 애굽은 기존에 가시적이고, 가시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그러면 비가시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없었을 때도 있는 그 무엇, 우리의 전쟁은 뭐다? 가시적이 아니고 내가 없어지더라도 있는 그 무엇, 따라서 내가 없는 상태에서 그 무엇과 나는 없는 입장에서 전쟁을 해야 될 위치가 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전쟁에서 누가 군사로 나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전쟁에서 뭐가 중요하느냐 하면 전쟁터가 중요한 거예요. 사실은 선교라든지 전도 이야기를 하면 항상 목사들이 무슨 훈련을 합니까? 전도 훈련시키잖아요. 그 전도 훈련이 전쟁터 훈련입니까? 전도하는 대상자를 훈련하는 겁니까? 사람 훈련입니까? 터 훈련입니까? 사람 훈련이죠.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 복음학교, 여러 가지 선교단체가 많아요. 젊은 사람 모아놓고 너희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입각해야 돼!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 되어 있느냐?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우리들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영적 싸움의 무기들이 있죠. 복음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를 하고 진리의 말씀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어디다 걸칩니까? 그 무거운 중무장을 어디다가 걸쳐요? 너희들 몸에다 걸쳐라 하죠.
그러면 몸이 감당을 못하면 백날 걸쳐야 어떻게 됩니까? 전쟁터에서 무거워서 몇 발짝 못가서 주저앉겠죠. 제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무슨 뜻서 이해를 못하시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노아의 방주를 노아가 운행합니까? 하나님이 운행합니까? 홍수 났을 때 키를 하나님이 쥐고 있습니까? 노아가 쥐고 있습니까? 배의 운행 일지를 노아가 결정한 겁니까? 하나님이 결정 한 겁니까? 그러면 노아는 있으나 마나죠.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전도하면 안돼요. 우리가 전도하면 전도가 안돼요. 우리는 힘을 빼야 돼요. 우리는 전도하지 말아야 돼요.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 그 순간이 전도하는 순간이에요. 전에 주일에 그 이야기를 하는데 예상 밖의 웃음이 나왔어요. 가락교회 김종훈 집사님이 하는 이야기에요. 세 명 데려와야 집사를 시켜 준다고 하니까 김종훈 집사님 하는 말이 다단계네! 하잖아요. 난 안 웃을 줄 알았는데 우리교인들이 막 웃었어요.
왜 사람이 전도합니까? 눈에 보이니까 하는 거예요. 세 명 데려오면 숫자 세 명 늘어나잖아요. 그래프 세 명 올라가잖아요. 이것은 회사죠. 회사에 그래프 있잖아요. 막 올라가는데 것, 가시적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전쟁한다는 것은 본인이 본인의 가치, 자존심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상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만만한 모양이죠. 열심히 기도하면 어떤 대상이 거꾸러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북한의 김정은을 누가 전도합니까? 무턱대고 월북해 가 있는 사람이 김정은을 전도하겠습니까? 누가 전도합니까? 지금 주님이 하고 있어요. 주님이 하고 있는데 괜히 가시적인 전도자가 하니까 주께서 빼 내버려요. 전도는 제가 아까 반복이라 했잖아요. 전도는 한번 하면 끝나는 겁니까? 계속해야 됩니까? 전도는 반복이니까 계속하죠. 주님께서 우리를 창세전부터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계속 전도해요.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전도하고 있어요.
우리는 주님의 하청업자가 아닙니다. 이 전쟁은 눈에 보이는 전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자신이 눈에 보인다는 그 사실 때문에 주님의 전쟁을 우리가 방해하고 훼방하고 있다는 것을 제가 이것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전쟁했던 예화가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의 예를 들었잖아요. 그리고 실제로 언약에 속한 아브라함이나 야곱에 보게 되면 요셉이 “우리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바쳤기 때문에 나도 아들을 바쳐야지”야곱이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안 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쳐서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았잖아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해서 인정받았다면 나도 어떻게 해야 되냐?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를 바쳤잖아요. 그러면 야곱에게 제일 사랑하는 독자가 누구입니까? 요셉이잖아요. 요셉아! 모리아산에 가자! 그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반복 아니에요? 그런데 그 반복은 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해야 되는 반복을 본인이 중간에 끼어 들 수도 없는 입장인데 자기가 끼어들어서 그것을 반복 해 버리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반복을 시키되 하나님 방식으로 반복을 시킵니다.
뭐냐,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구덩이 파묻혀서 짐승의 옷으로 그 특별히 맞춘 옷, 그 입은 베옷에 다가 짐승의 피를 발라서 결국 아버지 눈앞에 온 것은 요셉이 아니고 요셉이 입은 옷만 날라 왔을 때 그 열한 형제가 아무리 들어서 위로를 해도 아버지는 위로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없는데 내가 무슨 수로 살꼬? 아무리 위로를 해도 위로를 거부했어요. 그것이 야곱의 인생에 한 대목으로 포함이 되어 있죠. 그러면 야곱의 인생의 인생은 뭡니까? 주님이 이끌어 가는 인생, 어떻게? 인간이 눈에 보이는 예상되는 생각하는 그런 인생에 난데없는 돌발 상태, 아들이 난데없이 짐승에 물려 죽는 돌발 상태를 집어넣어서 야곱으로 하여금 예상 못한 모든 가시적인 것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그런 조취를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반복지점, 우리 인생에 예상 못할 반복 지점, 이게 뭐냐 하면 영적 상흔, 또는 영적 상처를 우리가 집어 넣어버려요. 영적 상처가 뭐냐 십자가의 현장이라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흔적에서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그러한 접선 지점이 돼요. 그러면 목사님, 제 상처는 뭡니까? 제 상처 좀 봐주세요. 점쟁이처럼 자, 손바닥 한번 봅시다. 이러면서 보는 게 아니에요.
제 인생에서 접촉점은 어떤 겁니까? 하고 저한테 묻게 되면 어떤 경우라도 우리 자신에 의해서 지워지거나 삭제될 수 없는 상처 같은 것, 이게 뭐냐, 이제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지울 수 없는 것, 자, 우리에게서 인간이 지울 수 없는 것을 찾아봅시다. 내가 나자 남자로 태어났다. 이게 여자로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안 바뀌죠. 키가 작다, 크다! 쌍꺼풀 있다 없다 쌍꺼풀은 하면 돼요. 인간의 행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 되돌릴 수 없는 것, 인간의 영적 상처에 뭐가 있느냐, 바로 마귀가 자리를 잡는 겁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하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도 착하게 바르게 살아도 죄인인 것을 취소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날마다 보여 주는 그 영적 자리,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상처로서 오는 겁니다. 십자가 상처를 할 때 우리는 좋게 생각하지 마세요. 십자가 상처에서 비로소 우리가 몰랐던 비가시적인 악마의 모습을 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무조건 예수가 싫은 거잖아요. 예수를 믿으면서 무조건 예수가 싫은 거예요.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한테 관심 두고 싶지 않은 것, 관심 안 두는 게 아니고 관심 두기가 싫은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예수 없이 살고 싶은 생각, 하나님 믿는 것, 예수 믿는 것 다 취소시키고 이제는 하나님 없이 예수 없이 살고 싶은 그러한 욕구와 욕망이 나오는 것, 이것은 신자에게만 나와요.
불신자는 예수를 믿어요. 왜? 믿어도 자기 품은 희망에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상처가 아니고 추가 된 정보이기 때문에 아무 상처가 없어요. 예를 들어 어떤 소설가가 십자가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글을 썼어요. 그 사람이 그것을 쓰면서 기독교 신자가 됐습니까? 아니에요. 기독교마저 정복했잖아요. 이렇게 정복, 기독교에서 또는 이슬람교에서 연구하여 내가 정복한 대상, 내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그런 입장, 교회에서 와서 교회를 좀 다니면서 성경이 무엇인지 예수가 누구인지를 연구하고 탐구하고 그 정보가 차곡차곡 쌓이는 것, 어떻습니까? 자기의 교양만 늘어날 뿐 이지 애통하는 것 없죠? 없잖아요.
그리고 기존 교회 나오면서 아, 이렇게 살기 어려운데 하나님! 도와주세요! 만날 기도하고 집에 가고 말씀도 관심도 없고 그냥 도와주세요! 내가 목사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거기에 십자가 상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사람 없죠. 왜?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요. 지금 평소에 하는데다가 플러스 추가해서 교회 가는 것 하나가 보태어진 것뿐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임해버리면 이것은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것이 다 쓸데없는 일이 되는 거예요. 내 운명이 달라지는 것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 믿는다 해도 천국 못가고 예수 안 믿는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 안 믿어도 천국 가고 예수 믿어도 지옥 가는 그런 입장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은 왜냐? 훌륭해서가 아니라 이미 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더 하리요! 어떤 몸부림 어떤 행함과 몸부림을 쳐도 내 운명은 내 행함으로 바뀔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내가 다룰 수 없는 어떤 심지 같은 것, 볼펜 심지처럼 내가 집어넣지 않았는데 누가 와서 콱 집어넣어서 후차적으로 내가 그것을 어떻게 조정을 해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빠지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속에 넣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반드시 적그리스도가 내 안에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안에 적그리스도, 예수를 못 박아 죽인 마귀가 내 안에 함께 있는 겁니다. 그 마귀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그 안에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뜻이고 나는 졸지에 전쟁터가 되고 만 거예요. 이것은 나의 전쟁에서 손을 떼어야 돼요. 내 전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전쟁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사도바울입니다.
“디모데야! 나처럼 전쟁하라!”이게 디모데전후서에요. 디모데야 나처럼 전쟁하자! 예수님처럼 전쟁하려면 누구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야 됩니까? 내가 내 가시적 운명과 팔자에 신경을 안 쓰면 자연적으로 누구도 신경을 안 씁니까? 나같이 똑같이 생긴 타인들의 어떤 시선이나 평가와 판단과 분석에 대해서도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꼭두각시인데요 뭐 허수아비에요. 제가 지금 까지 강의를 하면서 중요한 것은 딱 한 개에요.
뭐냐 하면 이 형편을 우리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한테 비가시적인 그런 흔적이 왔다고 해서 내가 가시적 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같이 있는 거예요. 함께 있는 거예요. 이유는 단 하나에요. 구약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의 나라가 모세가 애굽에서 건져낼 때 이스라엘 전체는 가시적 나라였죠. 그 이후로부터 이스라엘이 BC 586년 망할 때 까지 망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에요. 망할 때 까지 계속해서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반 토막 나잖아요. 반 토막 나면서 그냥 반 토막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 계속해서 투입됩니다. 계속해서 호세야, 아모스, 요엘 계속해서 이 나라가 망해도 너희를 망하게 하는 몽둥이가 있더라도 겁내지 마라! 내가 망하게 할 테니까 언제가는 행복하리라! 언제가는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하면서 실제로는 망해요.
어떤 분이 전화로 이런 질문을 했는데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목사님, 에스라 느헤미야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히 에스라 시대 때 그들이 십일조 하기를 적극 권하고 이방 여인과 혼인한 사람을 강제로 이혼 시키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렇게 질문했어요. 에스라 느헤미야가 뭐냐 하면 이미 이스라엘이 망한 이후입니다. 임시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아주 조잡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형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성전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두 증인 있잖아요. 두 증인이 누구냐 이 말입니다.
두 증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이 두 증인을 물어버리면 우리는 이렇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중간에 있는 성경책에 있는 두 증인을 하나님이여! 이 두 증인이 누구입니까? 이렇게 묻는 식이 되잖아요. 그러면 내 자리가 모호해 져요. 네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지? 이게 모호해 집니다. 이게 물을 수 있는 자리인지가 모호해 집니다. 두 증인이 안 순간 누가 사라지느냐, 질문한 내가 질문을 해서는 안 될 자리에서 질문을 한 것이 들통이 나야 돼요. 왜냐하면 질문을 안 해도 구원 받아요. 그런데 그 질문을 했다는 것은 그것을 알게 되면 내가 내 구원 받는데 그 정보가 도움이 된다고 내가 생각 내가 죄 지은즉 생각한 거예요.
그게 뭐냐 두 증인이 공격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질문한 사람이 두 증인의 원수가 돼요. 그러면 두 증인이 뭐냐, 미리 전제를 깔아 놓고 합시다. 한번 당할 준비를 하세요. 이 두 증인이 스가랴 3장과 4장에 나와요. 두 증인이 누구냐 하면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에요. 누구에 의해서 스가랴에 의해서 스가랴는 뭐냐 하면 임시땜빵 성전 짓는 때입니다. 그런데 임시땜빵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아요. 미래로 미뤄집니다.
장차 오실분이 성전을 짓게 됩니다. 장차 오실분이 성전을 짓게 되는데 거기 성전에 가담하는 사람이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주동자가 되어서 짓습니다. 지으면서 여호수아한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회의를 하는데 마귀가 있거든요. 마귀가 여호수아의 옷이 더러우니까 하나님께서 사단이 보는데서 여호수아의 옷을 벗겨라! 그리고 깨끗하게 갈아 입혀라! 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성전이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두 증인 중에 한 사람이, 여호수아가 옷을 깨끗하게 입었다면 두 증인할게 뭐가 있습니까? 본인이 할 게 있어요? 없어요? 아무 것도 없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두 증인이에요. 그러면 아무 것도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아니에요. 그 두 증인을 이 시대에 심어 놔 버리면 마귀 앞에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옷을 갈아 입혔다면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하실 일은 이미 두 증인이 나타났잖아요. 나타났으면 이제는 마귀의 정체가 들어날 순서, 절차가 남아 있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마귀가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잖아요. 그것이 스가랴에서 환상이거든요. 미래에 일어날 것을 그 당시에 구체화된 언어로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신약에서는 비가시적이 돼요. 비가시적이 되면서 여호수아 같은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원망했을 때뿐인데 구원을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도죠. 성도를 내 세우면서 성도한테 개입된 모든 절차는 가시적입니까? 비가시적입니까? 비가시적이죠. 그러면 성도의 주변에 뭐가 생기겠습니까? 비가시적인 악마의 정체가 노출되죠. 그러면 악마의 정체가 노출되면서 악마가 노리는 것이 뭔가 하면 기존의 가시적 성전가지고 악마가 나타나겠죠. 왜? 비가시적 성전을 배척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스가랴의 임시땜빵의 새로 성전을 만들죠. 스가랴 학개 맙니다. 만듭니다. 그러면 그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지은 성전이 아니라고 했죠.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나오죠. 그게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주께서 사흘 만에 짓는 성전이잖아요. 성전의 취지에 의해서 두 증인, 용서받는 그냥 용서받는 두 증인이 등장합니다. 그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누구를 대표하느냐 하면 그 당시에 범죄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거예요.
범죄한 이스라엘을 데려다가 주님께서 졸지에 뭐로 바꾸십니까? 하나님의 새 사람으로 천국 사람으로 바꾸었죠. 그 바꾸는 그 작업이 새 성전이 나타나는 취지에 맞추어서 그런 효과가 나타나는 거예요. 새 성전을 완성했다는 것이 십자가잖아요. 맞죠? 아까 했죠.
46년 지은 성전 말고 내가 사흘 만에 짓는다는 성전이 무슨 성전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성전이죠. 그 십자가 성전에서 생겨난 성전의 기능이 뭡니까? 여호수아 스룹바벨 같이 죄 있는 자기 백성을 의롭다는 것이 나타나죠. 그 두 증인을 발생시키게 되면 그 주변에 뭐가 등장하겠습니까? 아무리 인간들이 노력해도 알 수 없었던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겠죠. 그러면 목사님, 마귀의 정체가 코가 두 개고 뿔 달렸습니까? 어떻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그것은 가시적이잖아요.
마귀의 정체는 뭐냐 하면 성도가 구원받는 그 방식에 토를 다는 사람들, 거기에 대해서 거부하는 분위기, 기운 그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스가랴 3장, 4장에 보면 하나님이 하는 일관성 있는 일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는 사단의 역사가 되는 거예요. 그게 영적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자, 묻습니다. 두 증인이 하는 일이 뭡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미 자기가 구원된 것을 확인만 하면 돼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요. 그런데 뭔가 하겠다는 말은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했던 것, 다시 합시다.
적그리스도가 성전을 땜빵으로 지을 때 유대인들이 무슨 중심으로 로마제국을 물리치기를 원했습니까? 사두개인들이 무슨 중심으로 돌아갔습니까? 사두개인들이 하는 전문 일이 뭡니까? 성전 섬기고 제사 드리는 거죠. 그러면 성전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헤롯 성전이 눈에 보이죠. 제사 지내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눈에 보이죠. 예배 눈에 보이죠. 예배하면 예배 절차 보이죠. 오늘 날 교회가 눈에 보이죠.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영적 전쟁에 나선다면 그게 누가 벌리는 전쟁이에요?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마귀가 하는 전쟁이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전쟁에서 유지를 하려면 누가 설쳐야 됩니까? 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교인들이 신체들이 설쳐 돼야 되겠죠. 목사 장로집사들이 설쳐야 되겠죠.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라니까요. 눈에 보이는 우리가 행위에 나서게 되면 행위를 잘 했다 못 했다 평가를 받겠죠. 그래야 된다! 안 된다 그런 말들이 있겠죠. 장로 뽑을 때 3분의 2를 해야 맞다! 아니야 과반수이어야 해! 하는 이런 법들이 나오겠죠.
목사가 세금 내야 되냐 말아야 되냐 하는 그런 일들이 나오겠죠. 그런 세칙들이 있겠죠. 그 세칙들을 모아서 뭘 하겠어요? 그것 가지고 무슨 전쟁을 한다? 하나님 전쟁을 하겠다! 이야기하겠죠. 그것을 누가 했느냐 하면 바로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이미 사울이름 일 때 이미 그것을 충분히 한 거예요. 그 했던 사울이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됐습니까? 줄지에 바울이 되었죠.
사울이 바울 될 때에 자기가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나귀타고 왔다 하면 그러면 우리가 나귀타고 가면 구원받습니까? 뭐 다메섹으로 내려갔다 하면 그러면 내려가면 구원받습니까? 뭐 했습니까? 분명히 뭔가 꿈적거렸을 거예요. 다메섹에 내려가 나귀를 탔을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하는 거예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를 다른 말로 하면 막 하세요. 같은 말이에요. 그냥 사세요. 그냥 10분 쉬겠습니다.
서울 의존교회151113b (뾰족한 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의 내용을 간단히 하면 전쟁판이 중요하냐? 거기 종사하고 거기 끼어든 인간이 중요하냐? 청년들 모아 놓고 전도 훈련시키는데 그것은 인간 훈련이죠. 인간 훈련 봐야 전부 다 가시적이고 나름대로의 자기 성과를 내세워서 나 이렇게 예수 잘 믿어요.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역사하시고 사용하십니다. 그런 것을 자랑하려는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죠. 그것은 정말 적그리스도적인 발상입니다.
이스라엘에 똑똑한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망하는 쪽으로 밀어 넣는 그것이 하나님의 전도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구약에서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그런 집단적인 멸망이 구약이라면 신약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툭툭 굵어지듯이 하나 둘 씩 하나님의 군사들이 호출 당하죠. 그 호출 중간 지점에 에스라 느헤미야가 나옵니다. 어떤 분이 질문한 것이 있는데 왜 이방인 여인과 강제로 이혼해야 되고 십일조 다 해야 되고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그 당시 에스라 느헤미야 때 임시 땜방 성전을 만들었어요. 조잡한 성전이죠. 스가랴는 영적 성전을 이야기했고 성전을 만들었으니까 가시적이잖아요. 이 성전과 격이 맞는 율법 지킴이 보정 하듯이 여기에 끼어들어요. 다시 말 해서 인간이 과연 회개한다고 해서 자기 힘으로 구원이 될 수 있느냐? 그 측정과 테스트에 돌입한 겁니다.
주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해서 자기들 돈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이방나라의 후원을 받아 지었습니다. 그것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를 표상한다 해서 예수님 오셔서 성전 짓는 것을 미리 표상화 할 수 있는데 어쨌든 눈에 보이는 성전을 조잡하게 지으니까 옛날 성전을 알았던 노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울지요. 아! 초라하다! 옛날 것을 아는 사람은 초라한 거예요.
젊어서 선 볼 때 좋은 자리 많이 들어왔다가 나이 40넘어서 선이 들어오게 되면 아,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꼭 살아야 되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후지게 되었는가! 좌절감을 맛보게 되죠. 그래서 성전 짓고 좋아해야 되는데 너무나 후지니까 울었어요. 그러나 에스라 느헤미야는 성전이 이렇게 후진 이유가 있다. 우리가 평소에 율법을 안 지켰었다. 우리 조상이 율법을 안 지켰다. 우리라도 지켜야 된다. 해서 율법 지키기 대회를 합니다. 대회를 벌이는데 특징이 있어요.
전에는 모세의 율법, 십계명을 지켰는데 실패하니까 다윗을 통해서 대신해서 이스라엘 나라의 총 책임자로 세워서 다윗이 제대로 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다윗과 그 후손들이 제대로 못하면 나라가 통째로 망하는 그런 방법을 썼습니다. 그리고 물론 다윗때 성전 준비했고 솔로몬 때 성전을 지었죠. 그러면 솔로몬성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나라가 율법을 제대로 지켰나 안 지켰나를 측정하는 측정 기구입니다. 제대로 안 지키면 삑삑삑 소리 나죠. 보일러 고장 나면 소리 나듯이 문제 있잖아요.
성전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은 나라 전체가 율법대로 안 산다는 그런 증거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왕 자리가, 다윗의 왕 자리가 지도자가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다음 가능성 있는 지도자를 내세워야 되겠죠. 세워봤자 삑삑삑 또 세워봤자 삑삑삑 이런 겁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한결 같아요.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자손이 혈통 계통이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메시야냐? 아니면 혈통 계통을 이탈한 메시야가 메시야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이 문제가 어렵기 때문에 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했죠. 멸망하는 이스라엘 속에다가 비가시적인 메시야를 심는 방법을 사용한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합니까? 상처라고 합니다. 이 상처의 특징은 인간의 힘으로 절대로 이 흔적을 지울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이 지울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반복을 의미하는 겁니다. 왜 반복을 의미하느냐 하면 한번 예수 믿는다고 해서 이제는 예수 믿었으니까 새 사람 되었으니까 천국은 그냥 가면 된다! 이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보낸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가지고 선지자라고 해요 그런데 그 선지자들은 무엇에 근거해서 파견 되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파견 되었거든요. 그러면 선지자 마다 공통점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노아, 모세, 다윗,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예레미야, 이사야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냥 죽음이 아니고 특수한 죽음이 너희를 용서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지울 수 없는 이스라엘의 상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제사가 눈에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제사장, 눈에 보는 고상한 복장, 눈에 보는 성전, 눈에 보이는 양과 염소, 이런 것을 동원하는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이스라엘은 아까 오해 한 것처럼 이런 제사를 못하게 하는 것이 적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적이라고요 오해를 한 겁니다. 오해는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가 스스로 자기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가 행해야 될 행함을 훼방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적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아까 질문을 다시 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적이 누구입니까? 로마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이스라엘이죠. 바로 그 사고방식이 메시야를 죽이게 한 악마입니다. 바리새인 보고 너희 애비는 뭐라 했습니까? 너희 애비는 악마다! 마귀다! 유대인들이 이해를 못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왜 악마인지를 이해를 못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왜 하나님께서 극한 발언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로마 제국이 망한다고? 너희 나라가 망한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내가 구름타고 다시 오겠다! 이게 예수님이 설교 끝부분에 나오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늘이 깜깜해 지고, 별이 떨어지고 인자가 구름타고 온다 이 말이죠. 온 지구상에 있는 사람이 다 통곡 할 것이다! 이게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연관되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느냐 하는 거예요.
엘리야하고 아합왕하고 만날 때의 대화가 희한한 대화죠. 아합왕이 엘리야를 만나고 제일 첫 마디가 뭐였습니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 너지?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너지? 이렇게 하니까 받아서 엘리야가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한 거예요. 아합왕은 자기를 중심으로서 다윗 언약이 다윗을 중심으로서 이스라엘이 구성된다고 본거예요.
그런데 엘리야는 뭐냐, 이스라엘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상처가 있는 거예요. 상처, 상흔, 하나님의 상처, 하나님이 자기가 스스로 죽는 그 상처가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빈자리입니다. 인간이 접근하려야 할 수가 없어요. 마을이 있는데 마을 안에 중간에 느티나무가 있고 그 안에 우물이 있다.
만약에 우물이 빈자리라면 마을 한 복판에 있는 우물은 누가 와도 빈자리이니까 집을 지으면 안돼요. 물이 나와야하니까 덮으면 안돼요. 분명히 빈자리 인데 접근이 가능해요? 안 해요? 물동이 이고 접근 가능하죠.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이 될 경우에 접근 가능합니까? 안합니까? 그 여인을 아무리 봐도 우물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여인의 마음을 통째로 장악했어요. 왜? 사마리아 여인은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은 알고 있는 마귀와의 전쟁이 전쟁터가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거든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수자원공사 회장 됐습니까? 왜? 끊임없이 물이 나온다는데 그 물이 가시적 물입니까? 보이지 않는 물입니까? 보이지 않는 물이죠. 왜 오늘 날 한국교회는 보이는 축복을 이야기합니까? 기도하면 부자 되고 기도하면 잘되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죠? 잘못 됐죠. 잘못된 거 맞죠? 무슨 전쟁을 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기도가 나옵니까? 누구의 전쟁?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본인의 전쟁, 자기 자신의 전쟁, 자존심의 전쟁, 자기 명예와 전쟁, 자기 혈연관계와 가문의 전쟁,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이런 전쟁,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자기 자랑질 하는 전쟁, 예수님 믿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되면 하나님이 욕을 먹으니까 하나님이 욕을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나를 잘되게 해 달라는 그 전쟁, 말도 못하는 꼬마가 유튜브에 보면 주여, 주여 하면서 통성기도 하는 것이 나오죠.
그 꼬마가 하는 기도 내용이 뭡니까? 집을 사 달라고 하죠. 왜 집을 사달라고 하죠? 꼬마가 집이 왜 필요하죠? 어른이 그렇게 기도를 했죠. 왜 집사달라고 기도를 해야 됩니까? 지금 영적 전쟁에 집을 사달라는 게 있어요? 집을 사 주면 전쟁이 잘됩니까? 어떻게 50평 아파트에 살면 전쟁이 더 잘되나요? 왜 예배당 터를 넓히리라고 왜 그렇게 기도 합니까? 터를 넓히면 전쟁이 유리합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한 악마가 속에서 시키는 하나님을 훼방하는 예수님을 훼방하는 전쟁 중입니다.
인간의 상처가 자기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상처라면 그것은 상처가 아니에요. 주님이 싫어! 난 예수 안 믿을 거야! 이럴 것 같으면 나는 교회 안 다닐 거야라는 상처! 그런 상처가 있을 때 우리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한 바리새인과 합세가 되어서 나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사도행전 2장에 당신이 십자가에 메시야를 죽였다고 하니까 바리새인이 하는 말이 어찌할꼬! 주 예수를 믿어라! 이게 반복돼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돼야 되는 겁니다. 주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되게 하셔서 전쟁을 쉬지 않고 반복시키시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따로 없다. 네가 바리새인이다. 사두개인, 네가 사두개인이야 이것을 반복시키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만을 증거하고 자랑케 하는 그 전쟁을 나서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그 이야기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에스라 느헤미야에 그렇게 율법을 완벽히 한다고 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율법을 완벽히 해서 십일조 거두고 강제로 이혼하니까 어떻게 나라가 됐습니까?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이스라엘이 이제 메시야 없이도 자기 힘으로 율법 지켜서 성전 보존했습니까? 그 성전이 어떻게 됐습니까? 에스라 느헤미야 성전 어떻게 됐습니까? 그것도 로마한테 멸망당했죠. 그게 헤롯 성전 되었거든요. 그게 지금의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의 예배당 장소가 되었죠. 모스크가 됐죠.
그 에스라 느헤미야 이후에 왔던 그 마지막 선지자가 말라기라는 선지자입니다. 그 말라기 선지자가 노선을 에스라 느헤미야 노선을 가지고 오되 노선이 유대인 바리새인이 이해하는 노선이 아니고 그것을 적대시하는 다른 노선으로 가버렸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세례요한 이었습니다. 말라기에 예언대로 온 세례요한으로 옴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 보고 하는 말이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네가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고 왔느냐 아니면 나를 긍정하려고 내가 누구인지 그것을 테스트 하려고 왔느냐 너희는 너의 뿌리에 도끼 놓여있다. 내 뒤에 오실 분은 타작마당으로 오셔서 확 불을 싸질러 버린다. 그렇게 한 거예요.
이 전쟁은 우리가 해야 될 전쟁이 아닙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에서 나오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승리의 검을 쥐고 이렇게 완전무장으로 나오는 것은 우리라는 것을 놓고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이 감당할 인간으로 새롭게 주께서 만들어 내는 거예요. 만들어 내게 되면 그것이 그리스도와 능력으로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능력으로 함께 있으면 우리는 거기서 사라져야 되고 없어 져야 되죠.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그냥 일상생활을 그냥 하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그냥 일상생활을 그냥 하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이 모든 것이 구원의 금이고 복음의 투구가 되는 이유는 그 복음의 능력이 남한테 가기 이전에 먼저 누구한테 공격하기 때문에? 바로 나의 옛 사람, 나의 육을 날마다 치는 힘이기 때문에 그 힘으로 말미암아 전도가 되고 전파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부족합니다. 내가 너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몸이 건강할 때는 자기가 당연한 줄 알지만 병원에 가보세요. 평소에 숨을 잘 쉬는 것도 이것도 주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숨을 못 쉬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불교신자도 욕을 하죠. 기독교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안 믿는 사람들 교회를 욕하다가 비가 안 오니까 뭐 충청도에서 기우제 한다고 난리에요. 너 하나님 안 믿으니까 혼자서 잘 해보지 왜? 혼자 잘 해 봐서 4대강 해보지 왜? 4대강이고 5대 강이고 비 안 오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지금 비를 주시잖아요.
비 오는 한 방울 한 방울 뿐만이 아니고 우리가 숨 쉬는 이것도 막대한 주님의 은혜가 투입된 겁니다. 왜? 뭐하라고? 너는 없는 존재라고 그것을 통보하는 거예요. 내가 친히 만든 나가 있을 뿐이지 네가 기대하는 너는 없는 거예요. 우리는 살다가 안개처럼 사라지면 그만입니다. 그러한 주님과의 그 전쟁이 외부로 파급되면 있는 장소가 세상 끝이 되고 바로 성령이 임하는 장소가 되고 예수의 증인으로 선포되는 자리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쉬지 않고 전쟁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진도 나갑시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다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비가시적인 군사입니다. 비가시적 군사이기 때문에 여기 디모데가, 디모데가 눈에 보이고 사도바울이 눈에 보이는데요! 라고 하지 마세요. 디모데나 사도 바울이나 본인이 본인을 의지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과실이라 할 수 없습니다. 본인이 본인을 의지 하지 않아요. 주여!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며칠 기도 하면 승리하겠습니까? 이런 것이 없어요. 주께서 기도 하게 하면 하실 거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을 거고 내용도 주께서 채워 주실 거고 이끄실겁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의 전쟁 무기가 무엇입니까? 기드온의 전쟁무기는 한 자입니다. “꿈”이었습니다. 꿈은 두 자로하면 허망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허무”에요 허무가 전쟁 무기였습니다. 그 허무를 가시화 시킨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팔과 항아리와 불꽃입니다. 허무의 실증적 증거들이에요. 강의 하는 제가 허무라는 증거를 대라고 하면 제가 마이크를 쥐고 있고 혓바닥과 혀를 놀립니다. 이게 증거입니다. 이게 전부 다 허구입니다.
설교하는 자가 허구이고 강의 하는 자가 허구에요. 지금 이 자리에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제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실제를 가리는 허구라는 것으로 반대로 바꾸는 전쟁이 이미 내 안에서부터 캐치가 되어야 됩니다. 아내가 뭐라 한마디 할 때는 아내가 한다고 하지 마시고 주께서 여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세요. 왜? 아내는 허구니까요. 여자가 화를 내면 네가 화를 내고 싶어 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화를 내라고 해서 화를 내는 거예요! 그것도 말로하면 되고요. 말로 못하면 입을 다물면 되고요.
한마디만 하세요. 당신은 화를 내니까 더 예쁘다고 이렇게 한 마디만 하면 돼요. 그냥 가만히 있으니까 안 예쁜데 화내니까 더 예뻐! 계속 화내! 들어면서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될지 찜찜하지만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허구인지 모르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몰입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거든요.
그러니까 이 전쟁에서 무기가 뭐냐? 그 앞에 나서는 내가 허수아비라는 것을 내가 자인하면 돼요. 그것을 인정하면 돼요.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이 아니고 칼과 애굽의 무기가 아니에요. 활이나 말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하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주의 이름으로 전쟁하는 방법을 몰랐어요. 그때 선지자를 보냅니다. 선지자가 보낼 때 마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뭡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마라! 나팔 불어라! 찬송하라! 무려 백만 명이 이깁니다. 그냥 찬송만 하니까 백만 명이 승리했어요. 이 부리가 찬송의 골짜기, 예루살렘 근처에 지역의 이름이 있어요. 그게 아사왕땐지 그럴 건데 이 전쟁이 이상해요. 분명히 눈에 보여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그게 사실은 아무 능력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뿐이에요.
나는 사도 바울을 믿습니다. 믿지 마세요. 나는 목사님을 믿습니다. 목사님 믿지 마세요. 믿지 말라고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3절에 나와요. 예수의 좋은 군사와 나와 함께 그 다음에 뭘 받으라고 했습니까? 고난을 받으라. 이 고난이 전쟁터의 고상한 고생이 아니고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유발 시켰던 그 고난이 이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두 증인을 학대하는 것처럼 똑같이 예수님을 공격하던 그 공격이 그대로 온 거예요.
그 고난을 가시적으로 번역하면 풍족한 것, 하는 족족 잘돼요. 만사가 형통해요. 이거 고난입니다. 우연히 바람에 날려서 복권이 두 바퀴 돌려서 버리기 뭐해서 놔뒀는데 200억 뭐 이런 것 고난입니다. 주여,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다니 어쩌라고? 돈 좋아서 예수 믿겠습니까?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게 고난이에요. 왜냐하면 갑자기 부자가 되고 잘 되게 되면 비가시적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까 안양 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는데 돈을 꾸러 온 자에게 거저 주라는 대목을 어떻게 지키는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 돈을 꾸러 오거든 거저 주지 마시고 돈 한 푼도 주지마시고 복음을 전하세요. 복음을 어떻게 전하느냐 하면 주께서 당신을 굶어 죽이기 위해서 돈을 달달 날렸는데 당신은 이 세상이 뭐가 좋다고 나한테 돈을 빌리러 봅니까? 있어도 안줍니다. 그것을 가지고 놀부 심보라고 하는데 그렇게 놀부 심보로 매몰차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렇게 하게 될 때 주님 앞에 양쪽 다 죄인이 되는 겁니다. 한 쪽은 뭐냐, 돈을 빌려서 이 땅을 떠날 생각 안하고 더 오래 살려고 했던 것이 죄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실제로 돈이 좋으면서도 복음 핑계로 돈을 안 꾸어줄 궁리를 생각했던 내 죄, 하여튼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을 통해서 만날 때는 양쪽 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전쟁을 유발시키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10만원 달라하는데 거저 주라는 말씀으로 20만원 줘 버리면 그 사람은 정말 힘들게 됩니다. 앞으로 그 사람이 돈 공짜로 가져간 사람이 사기치고 250명 데려 오는 것도 문제지만 250명 데려와서 그 사람 공짜 준다고 다가져 가면 그것도 문제지만 그것 보다 더 힘든 것은 내 행함이 영적 전쟁에 승리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본인이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착함이 주께 영광이 되는데 그게 가미 됐다는 것을 스스로 이것을 끌어낼 수가 없어요.
이것은 무슨 수로 끌어냅니까? 끌어낼 수가 없어요. 차라리 그 때는 주여, 이런 못된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되어야 해요. 내가 10만원 달라 했는데 20만원을 주다니! 5리를 가라 했는데 10리를 가주고 오른 뺨 때린 사람에게 왼뺨을 내주는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이렇게 돼야 해요.
왜냐하면 주의 말씀은 영적 전쟁용이지 자기 잘남을 나타내는 자기의 의 용도로 주신 게 아니거든요.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다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착한 일을 안 해 봐서 그런 아픔을 몰라요. 해 보세요. 고아원 방문하고 많이 도와줘 보세요. 사람이 미쳐 버립니다. 남들은 착하다고 하지 본인은 일곱 귀신이 와서 커졌지 지난번에 10만원 빌려줬는데 갚아 주더니 20만원은 안 가져오죠. 아이 참 그때 못되게 굴걸! 괜히 줘가지고! 본인이 견디기 힘듭니다. 특히 새 교인 왔을 때 교회에서 교인들이 잘 해 줘 보세요. 그 잘해 준 것이 화근이 됩니다. 냉랭한 소리 듣거든 칭찬인줄 아시고 교회에 사랑이 많다고 하거든 이 교회 망했다고 생각하세요.
냉랭하다 못해 겨울 왕국처럼 교회가 차가워야 돼요. 화끈하게 뭐 도와줄까! 이렇게 되게 되면 그 인간을 다 버리게 돼요. 왜?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단계 됩니다. 지금 이것은 내가 했다. 이것은 내가 해서 이 만큼 성과를 얻었다는 것을 도대체 무슨 수로 마귀 괴물을 어떤 수로 칼 가지고 하던지 누가 와서 목을 치던지 해야 됩니다. 어떤 수로 끄집어냅니까? 끄집어 낼 방법이 없다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불가능해요. 내 속에 있는 암조직 같은 존재, 잘나고 잘난 이 큰 것을 무슨 수로 끄집어냅니까? 레이저로 할까요? 방사선으로 할까요? 어떻게 합니까?
고난 받으세요. 바로 우리 그 고난은 내 힘으로 내가 안 되는 그 경험들이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 되기 위해서는 함께 고난을 받아야 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없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우리자신의 사생활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함부로 이야기합니까?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이런 말로 들으시면 돼요.
왜냐하면 이 성경에 나오는 이 기조는 우리가 자기 죄를 알 때 발현되는 거예요. 효과로 발현되면서 이 말씀이 주님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될 겁니다. 거기에 우리의 행함을 접어 넣으면 안돼요. 이유를 설명 할게요. 말씀에 의해서 우리 행함이 말씀에 들어가서 직접적으로 집어넣으면 안 되는 이유가 우리가 행할 때는 순간적으로 행한다고 보지만 그 행함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통합적으로 과거가 과거에서 나온 가치 체계가 다 들어가요. 과거의 경험이 그냥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나는 이런 인간이야! 라고 체계가 잡히게 돼요. 내가 이 정도로 괜찮은 인간으로 체계가 잡혀 있으면 내가 어떤 말씀에 대해서 행동할 때는 괜찮은 내가 다시 한 번 괜찮은 존재로 확인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말씀을 보게 돼요.
그것은 누구의 전쟁입니까?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십자가 전쟁이 아니고 비가시적 전쟁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내가 우수함을 증명키 위한 나의 전쟁이 되어버립니다. 아까 하나 빠졌는데 구약에서 신약 넘어올 때 에스라 느헤미야 율법으로 완전케 하자 하는 것은 개인이 완전하다는 겁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완전하다는 겁니까? 유대나라 자체가 완성한 거죠. 집단적 의로운 나라에요. 집단적 의죠. 그런데 말라기에서 누가 온다고 했습니까? 집단이 와요? 한 개인이 와요? 말라기에 보면 하늘에서 엘리야가 오죠. 엘리야가 개인입니까? 집단입니까? 개인이죠. 개인이면 이 유대나라의 집단적 이것은 이미 실패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엘리야가 온다 했으니까 개인이 온 거예요. 개인이 와서 뭐라 하느냐 하면 개인이 오게 되면 다른 사람이 연장하면 되지 않습니까? 말라기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이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백성에게 백성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린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엘리야가 안 와 버리면 어떤 관계입니까? 백성의 마음도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의 마음도 백성에게 안 돌아가는 형편이죠. 중간에 엘리야가 와서 둘을 연결시키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게 된다 말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이 왔다, 개인이 와서 장차 예수님의 바통을 이어서 그 다음에 뭐가 됩니까? 집단이 되죠. 그러면 예수님의 몸 자체가 예수님의 머리, 의가 되니까 그 속에 있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의인이 된다면 우리는 사적으로 의인일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사적으로 의인이 되면 안 되죠. 주님이 의인되게 한 게 있는데 왜 내가 따로 떨어져 나와서 내가 의인이 됩니까? 그러면 돼요? 안 돼요? 안되죠.
만약에 어떤 친구가 자랑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엉망인데 나는 착해! 이러면 그 이야기를 듣는 그 친구의 어른이 좋아합니까? 안 좋아합니까? 아이고 자식 교육 참 엉망 시켜 놨구나! 지가 지 잘난 맛 때문에 자기 집안 아버지 욕을 보이네! 성도라는 것은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누구를 자랑하라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거든요. 예수님만 잘나면 돼요. 다른 것은 일절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 잘나고 같이 나도 덩달아 잘나고 이러지 마세요. 잘난 사람이 두 사람 됩니다. 경쟁 가운데 있죠.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죠. 예수님은 관심 없고 내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그러니까 주께서 매일같이 반복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전쟁이 뭐냐 하면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라는 그 전쟁을 우리에게 일으키는 겁니다. 모세가 애굽에 왔을 때 바울에게 물어요. 너는 누구의 이름으로 왔느냐 할 때 내가 이름으로 왔습니다. 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왔습니까? 여호와가 누구관대? 모세가 모세 누구인데 하지 않잖아요. 여호와 누구 관대 이야기하잖아요.
이처럼 모세가 올 때 어떤 집단을 염두에 두고 오는 겁니다. 우리의 전쟁은 없어요. 나의 전쟁도 없고 주님의 전쟁터에 우리가 하나의 일꾼으로 참여 된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가 사적인 내 개인의 의로움과 잘남하고 관계없으니까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할 것이 있어요? 없어요? 할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조금만 움직인다 하면 자기 평가를 내거든요. 수능 끝나고 채점하잖아요. 우리는 일과, 자기 일에 대해서 채점을 합니다. 참 잘했어요. 할 수도 있고 못 했어요. 할 수도 있고 그런 채점을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이래도 주께서 시킨 것이고 저래도 주께서 시킨 것인데 왜 내가 내 일을 채점하느냐? 그것은 사적인 거예요. 그것은 집단적 의가 아니고 개인적 의를 은근히 기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태원에서 어떤 외국인 모습을 한 한국사람 둘이 어떤 사람을 하나 죽였잖아요. 자, 한 사람이 죽였습니까? 두 사람이 합쳐서 죽였습니까? 한 사람이 죽였죠. 한 사람이 죽였을 때에 다른 한국 사람들이 볼 때에 또는 유족이 보기에 친구 된 사람하고 죽였던 사람하고 친구는 착한데 한 쪽은 나쁘다 그렇게 봅니까? 둘 다 똑같은 인간으로 봅니까? 둘 다 똑같은 인간으로 봐요.
왜냐하면 신고해야지 거기에 친구 의가 왜 들어갑니까? 뺑소니 쳐 놓고 뺑소니 칠 때 차에 세 명이 있었어요. 운전수가 뺑소니 치고 도망치니까 그 친구 둘 다 같이 협조한 거예요. 그럴 때 아 뺑소니 친 사람만 나쁘고 두 사람은 괜찮다 이렇게 합니까? 아니죠. 강도 만난 사람이 있을 때 누가 강도를 만나겠어요? 강도가 그 짓했죠. 그런데 강도 만난 사람이 누가 들어갑니까? 제사장과 레위 인이 들어갔죠. 제사장과 레위 인이 착합니까? 아니죠. 강도나 제사장이나 다 한 통속으로 보죠. 집단적으로 본다니까요. 집단적으로 봐야 사적인 의로움이나 그런데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개인 이름으로 천국 심사 받으려 하지 마세요. 개인 이름으로 심판 받지 않습니다. 너 어디서 왔느냐? 너 어디 전쟁터에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그게 바로 7절에 나옵니다. “내가 말한 것을 생각 하라 주께서 범사에 내게 총명을 주시리라,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여기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씨로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뭡니까? “죽은 자”이죠. 다른 구절에서는 죽은 자들이라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이 말을 복음에다가 집어넣는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죽은 자를 자기 이름으로 살려내는 기능과 역할이 거기에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여기 3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죠. 그러면 여기에 예수님만 계시는 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따로 있죠. 그런데 십자가는 뭡니까? 남들 보기에 예수님이 혼자 죽었다가 사흘 만에 혼자 살아났죠.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혼자 죽고 혼자 잘나서 혼자 살아나 버리면 이것은 함께 된 군사들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가운데서 없던 집단이 새롭게 발생되어야 되겠죠. 그 집단이 어디에 소속 되는가 다윗의 씨, 다윗 언약에 속한다 이 말입니다.
다윗 언약의 특징은 뭐냐 하면 왕만 훌륭하면 돼요. 그러면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우리는 상한 심령만 되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강의 하나도 안 들었다고 치고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천국입니다. 교회에 많이 전도하세요. 이러면 아무 이의 없이 깔끔하게 우리가 아는 전도에서 아멘! 납득 갑니다. 라고 전부 다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왜? 눈에 보이는 교회에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왔으니까 이게 전도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납득이 되는데 여기에 다윗의 복음이 왜 들어가느냐? 다윗의 자손, 씨가 왜 들어가냐 이 말이죠.
너희들이 아는 집단은 가시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이것은 취소하라 이 말이죠. 주님이 자기 영적 군사는 이미 아시고 따로 단 집단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중입니다. 이 명분, 이 복음을 위해서 싸워야 그게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라고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배당 세워 놓고 교회를 채우세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이야기해요.
그러면 수천 명 교인 가운데 복음을 거부하면 그 교회는 뭡니까? 적그리스도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죠. 다윗의 씨가 왜 필요해요?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 반복하라 되풀이 하게 된다.
전쟁을 하는 군사가 중요합니까? 전쟁터가 중요합니까? 전쟁터가 중요해요. 전쟁터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적은 역시 마귀가 보이지 않아요. 뭐 바로가 마귀다. 뭐 666은 교황이 666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탈락이에요. 요한계시록 666 할건데요.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니에요. 눈에 보이게 되면 반복이 안돼요.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 예수님을 싫어하는 요소가 반복이 되어야 돼요.
그 반복된 요소가 어디 있느냐? 저쪽에 있다, 이 쪽에 있다, 아니에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내가 지울 수 없는 아무리 착해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있습니다. 그 흔적이 뭐냐? 예수님께서 마귀한테 고발당해서 죽었던 그 십자가 사건이 이 안에서 터져요. 우리는 우리의 엔진 부분 십자가 사건이라 보면 됩니다. 엔진 부분 발동기가 돌아가야 배가 움직이잖아요. 돌아가는 모터가 매일같이 반복됩니다. 너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영적 전쟁의 군사야! 제가 뭘 할까요? 네 죄만 알면 돼! 그리스도께서 너를 용서한 것만 감사하면 돼!
햇빛 주는 것, 공기주는 것 주님이 십자가 때문에 주는 것이지 너를 먹여 살리려고 주는 게 아니야 십자가 증거하라고 주는 거야! 모든 것이 예수님의 언약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복음을 위해서 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주는 거야!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잖아요.
풍랑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풍랑이 일어납니다. 무서워요! 무서워 마라! 너는 기어이 로마에 가야 돼! 왜요?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가야 돼! 그러면 저는요? 거기 가서 죽어야지! 이것은 모든 발걸음이 주님 자기 마음대로 에요. 우연은 없습니다. 주님 마음대로 에요.
다윗의 씨로 죽은 자가 살다났다는 것은 그런 능력을 같이 공유할 때 집단적으로 주어질 때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은 예수님께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역시 해당이 됩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살아났을 때 남이 보기에 그 사람이 사람으로 보입니까? 흙으로 보입니까? 그냥 죄인으로 보이죠. 허구, 자, 저거 의미 없다!
오늘 강의하기 전에 먼저 강의 제목을 제가 정해 봤어요. 강의 제목이 이상해서 채택을 안 하려 하는데요. “뾰족한 수가 없다”인생 살면서 할 것 다 해 봤는데 그게 영원한 진리가 아니에요. 뾰족한 수가 없어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알 때에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입니다. 뾰족한 수가 없을 때 나도 뾰족한 수가 없지만 너도 뾰족한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나는 알고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 차이점이죠.
그들은 무슨 인기라든지, 특히 연예인들이 인기가 뭐 인생을 한 방에 다 행복할 것 같지만 막상 해 봐야 별수 없어요. 살아봐야 별수 없습니다. 결혼 해 봤자 뭐 별 뾰족한 수 없어요. 안 해 봤자 또 뾰족한 수가 없고 도대체 가시적인 것을 끌어 보은다고 해답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비가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가시적인 쪽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전혀 없어요.
그러면 그 영적 세계를 찾기 위해서 기도원에 가자! 기도원에 갈 필요 없습니다. 지금 우리 몸 안에 있어요. 뾰족한 수는 없는데 그래도 세상은 좋아! 역시 뾰족한 수는 없는 줄 아는데 돈은 허무한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지금도 좋은지! 그게 상처라니까요. 그게 내 속에 있는 상처에요. 나는 주님! 주님보다 돈이 더 좋아요! 마음 같으면 의존교회가 많으면 골치 아프니까 작게 잡아 교인 700명, 예배당은 한 2천 평, 부교역자 한 7명 정도, 사모님은 벤츠 몰고 그랬다 칩시다. 그게 뾰족한 수입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행복해 지고 뾰족한 수입니까? 그래 이거였어! 이겁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사도 바울에게는 교인수 5천 명 없었고 사도 베드로에게 5천 평 예배당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그냥 시키는 대로 살뿐이에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따로 내 것을 가질 이유가 없었어요. 왜? 가지면 그게 우울증 되니까요. 그것을 가지면 우울증 걸려요. 그것을 지킨다고 지킬만한 것도 아닌데 지킨다고요.
특히 자식 키우는 사람들은 다 알잖아요. 자식이 이거 되면 좋겠다. 수능 잘 봤으면 좋겠다. 뭐 어쩌면 좋겠다! 하는데 수석 되어 본들 뾰족한 수가 없어요. 자식 잘 키웠다 칩시다! 그래서 뭐?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살아 왔습니까? 그게 분명히 해답이 아니에요. 해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또 예수님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에요. 이러니까 예수 믿자! 그런 생각도 없어요. 그게 영원한 죽을 때 까지 하는 나의 상처가 되는 겁니다. 주여! 만날 죄인입니다. 만날 술이야! 진짜 술을 못 먹어서 그렇지 술 먹을 수 있는 허락만 준다면 신자라도 만날 술 먹고 싶어요.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예수님을 좋아하지도 않고요. 영적 군사들이 바로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나 아무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말 주님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예수 믿게 되었어! 나는 결과물이고 주님은 원인 제공자이고 내 팔자가 이런 팔자, 이게 야곱의 팔자이고 아브라함의 팔자고 요셉의 팔자에요. 이게 이삭의 팔자이고 예레미야와 다윗과 모세의 팔자이고 신약 12제자의 팔자입니다. 네 속에 말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고 네 속에 성령께서 친히 이야기한다. 그러면 그들은 훌륭합니까? 사도 베드로는 훌륭해요? 뭘 할 줄 몰라요. 어떻게 할 줄 몰라요. 어떻게 전도할 줄도 몰라요.
사도 바울이 전도하니까 회개했어요? 아니에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결과에 대해서 자기 담당이 아니에요. 그저 사는 대로 살아가는 이것이 훌륭한 정말 완벽한 복음의 군사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뾰족한 수가 없는데 그래도, 그래도를 남발하면서 색다른 것, 새로운 자극적인 것, 멋있어 보이는 것, 남들이 기대할 만한 것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께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으로 죄인 줄 깨닫게 해 주시니 이미 용서하셨기에 주의 군사이기에 깨닫게 해 주시니 이런 못난 자를 은혜 주신 주님에게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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