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다. 일본의 침탈로 나라를 빼앗기고 노예처럼 살았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을 했던 선열들의 투쟁과 연합군의 승리로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의 온전한 힘에 의해 되찾은 나라가 아니어서 우리는 분단의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이데올로기로 인한 남북의 전쟁, 수많은 민중이 죽었다. 그렇게 남북의 골은 깊어갔다.
미국과 보수파를 등에 업고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영구독재의 길을 걷고, 3.15 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무고한 시민의 희생으로 쟁취한 민주주의는 군부에 의해 무참히 말살되고 군사독재정권은 시작되었다. 3선 개헌과 유신, 5.18 광주민중항쟁을 발판삼아 재집권한 제2의 군부독재, 시민혁명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 평화적 정권교체, 재집권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등장은 피흘리며 쟁취한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버렸다.
해방은 되었지만 진정한 독립은 이루어진 것인가? 일본의 침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지난 세월의 침탈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반성할 줄 모른다. 위안부, 징용자, 약탈한 문화재, 등등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 반성하고 사죄하기는 커녕 아직도 독도가 제 나라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도 야스쿠니신사에 묻힌 군인들이 범법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국군주의의 부활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기려야 할 광복의 의미가 무엇일까? 안중근, 윤봉길, 김좌진, 유관순, 김구 등 많은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단순한 의례적 행사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을 갖는 그날까지 노력해야 한다.
광복절 연휴 덕분에 아이들과 설악산을 등산했다. 딸 아이는 회사에 근무해야 해서 처음부터 제외하고 대학에 다니고 있는 세 아이들과 모처럼 산을 타기로 한 것이다. 셋째 석민(전남대 4년)이가 ROTC문제로 못가게 되어 장남 석인(외국어대 4년)이와 넷쩨 석산(한양대 1년)이 그리고 늦둥이 진영이와 집사람, 이렇게 다섯 사람이 출발을 했다.
13일(토) 9시에 점봉산생태관리센타에 등록하고 진동리에서 강선마을을 거쳐 점봉산 곰배령까지 왕복 4시간짜리 트레킹을 했다. 점봉산은 오색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과 마주하고 있어 명산임에도 불구하고 그늘에 가려졌던 산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생태환경보호라는 명분으로 입산이 금지된 산이다.
한계령 방향에서는 설악산 못지 않은 암릉미로, 그 뒷쪽에 있는 진동리는 오지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곳이었으며, 곰배령은 천상화원으로 산군들의 사랑을 받았었던 산이다. 지금은 진동리까지 거의 포장이 완료되어 오지라고는 할 수 없으나 아직도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인터넷으로 점봉산 생태관리센타로 접속하여 예약신청을 하면 된다. 넓은 주차장과 강선마을까지는 계곡을 낀 완만한 트레킹코스로 강선마을에서부터도 급한 경사가 없는 완만한 숲길로 누구나가 쉽게 오를 수 있는 코스다. 특히 곰배령에 오르면 온갖 들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흘린 땀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6살짜리 늦둥이 진영이도 혼자의 힘으로 곰배령에 올랐으니까.
오후 오색온천으로 느긋하게 피로를 풀고 다음날 좀 늦은 새벽(7시 다되어서) 오색에서 출발하여 대청봉을 오르고 희운각을 거쳐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하였다. 구름에 가려 대청봉에서 바라보는 장엄한 풍광은 놓쳤지만 부자간의 정은 오롯이 간직하게 됐다. 중청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소청을 거쳐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하였다.(석인이가 무릎이 좋지 않아 백담사로 하산할 계획을 변경하였음) 신흥사에서 진영이와 집사람이 우리를 반겨준다.
아이들과 폭탄주를 마시며 등정을 자축하고 1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귀경길 차량이 붐벼 6시간이나 걸렸다.
점봉산 생태관리센타 앞에서
곰배령에서(석산이와진영이)
천상화원 곰배령
설악산 천불동계곡 하신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