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2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라면
손녀의 눈빛은 오래 남았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몇 번이고 그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왜 아무것도 없을까.”
그 짧은 질문이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발전하기까지
정보통신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신이 나라를 잇고,
전화가 사람을 잇고,
통신망이 산업과 경제를 움직였다.
그 중심에는 늘
이름 없이 일하던 기술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책장을 펼쳤다.
2018년에 썼던 『정보통신 1세대』였다.
그 책에는
내가 몸으로 겪은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성북전화국 기계실의 소리,
자동교환기의 움직임,
전국이 하나로 이어지던 날의 긴장감.
농어촌에 전화를 놓기 위해
전봇대를 세우고 선로를 끌어올리던 날들까지.
그 모든 기억은
내 안에서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세상에서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걸… 누가 남길 것인가.”
기다린다고
누군가 대신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정부도, 기관도
쉽게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해야 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말했다.
“내가 하자.”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조직도 없었고,
지원도 없었다.
다만 하나,
사라지기 전에 남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날 이후
내 삶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흩어진 자료를 모으고,
기억 속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확인하고 정리했다.
6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국립중앙도서관.
먼지 쌓인 기록들을 뒤적이며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전국을 돌며
유물을 찾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누군가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어떤 기록은
아예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 단단해졌다.
지금 하지 않으면
정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정보통신박물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돌아온 대답은 비슷했다.
“지금 와서 그걸 왜 합니까.”
“쉽지 않을 텐데요.”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나이도 적지 않았고,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고,
지원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결론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 생각 하나가
나를 다시 길 위에 세웠다.
돌이켜보면
그 시작은 아주 작았다.
거대한 계획도,
특별한 계기도 아니었다.
단지
한 아이의 눈빛.
설명할 수 없었던 침묵,
보여줄 것이 없었던 미안함.
그 순간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나는 이제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남기는 사람이 되었다.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아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일.
그 일을
나는 시작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라면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내 몫으로 다가왔다.
나는 늦은 나이에
다시 길을 걷는다.
편히 쉬어도 될 나이지만
오히려 더 바빠졌다.
그러나 마음은 분명하다.
이 일은
나 하나를 위한 일이 아니다.
함께했던 시대를 위한 것이고,
이름 없이 일했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무엇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 역사와 다르지 않다고.
그리고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라면
내가 해야 한다고.
첫댓글 맞아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 이인학 당신 이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는 그 시대의 유물, 체험했지만 가진 물건은 하나도 없는!
그래서 더욱 살피고 찾아내야 하는 흩어진 유물, 이제라도 찾고 모으고 정리 전시해야 남습니다! 전국 곳곳에 남겨진 물건을 찾아야합니다! 힘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