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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백양사
2025년 11월 10일(일요일)
대한불교조계종 제 18교구 본사입니다.
632년(백제 무왕 33년)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암산백양사라고 했으며, 1034년(덕종 3년) 중연(中延)이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고 개명했습니다 1350년(충정왕 2년) 각진국사(覺眞國師)가 3창하고, 1574년(선조 7년) 환양(喚羊0이 현재의 백양사라고 개칭했는데 이것의 환양의 <법화경> 독송소리에 백학봉에 있는 흰 양떼가 자주 몰려온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1786년9정조10년)에 환성(喚星)이, 1864년(고종 1년)에는 도암(道巖)이 중건했습니다. 근세 이후에는 송만암(宋曼庵)에 희해 교세와 사운이 융성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26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43호)ㆍ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32호)ㆍ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ㆍ명부전ㆍ칠성각ㆍ진영각(眞影閣)ㆍ보선각ㆍ설선당(說禪堂)ㆍ선실(禪室)ㆍ요사채ㆍ범종각 등이 있습니다.
이 밖에 백양사 재흥헤 힘쓴 태능(太能)의 소요대사부도(逍遙大師浮屠: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56호)와 고려 때 각진국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절 주위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15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절에서는 전통적인 재식(齋式)이 집전되는데 관조부(觀照部)ㆍ전경부(轉經部)ㆍ정근부(精勤部)ㆍ송주부(誦呪部)ㆍ범음부(梵音部)가 각각 행해집니다.
백양사 일주문
일주문 백암산고불총림백양사(白巖山古佛叢林白羊寺) 편액
편액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 1947~2020) 선생의 글씨입니다. 학정 선생은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송곡 안규동으로 이어지는 호남 서예계를 대표하는 21세기 한국 서예 10대가 중 한사람으로 손꼽힙니다.
백암산 백양사 표지석
약수천
일광정
백양십이경의 하나인 일광정
매년 사월초파일에 불가의 시련법식(侍輦法食)이 거행됩니다.
일광정(一光亭) 편액
박세림(朴世霖)의 글씨입니다.
쌍계루와 백학봉
백암산 백학봉과 백양사 쌍계루 그리고 연못인 우화정의 전경은 남도 최고의 단풍명소로 유명합니다. 원래 백양사는 지금의 쌍계루 뒷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종 증조부가 즉위한 후 홍수로 인해 백양사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고 이 때 매화나무들도 옮겨 심어졌다고 합니다.
백학봉과 쌍계루가 비치는 그림같은 풍경입니다.
쌍계루
장성 백양사 쌍계루는 운문암 계곡과 천진암 계곡물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누각으로 고려 말인 1350년에 각진(1270~1335) 국사가 건립하고 이름을 '교루'라 하였으며, 1381년 이 곳을 찾은 목은 이색이 '쌍계루'라 명명하였습니다. 쌍계루는 여러 번 다시 짓기를 거듭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것을 1985년 복원하였고, 2009년에 해체하여 다시 세웠습니다. 쌍계루에는 앞뒤에 두 개의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백양사 종무소 앞에 세운 '만암대종사 고불총림 도량(曼庵大宗師 古佛叢林 道場)'이라 새긴 빗돌과 만암 스님의 화두 '이 뭣꼬'라 적혀 있습니다.
만암 스님의 발자취를 담은 수도량이란 점을 밝히고 있는 탑비로 선(禪) 화두(話頭) 중 '부모미생전 본래면모시심마(父母未生前 本來面目 是甚磨)'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나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를 '이 뭣꼬'하면 알아보면 본래 면목인 참나(眞我)를 깨달아 생사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만암종헌(曼庵宗憲 1876~1956)대종사
만암(曼庵)스님은 백양사에서 출가하였고 1912년 주지로 부임한 환응탄영(1847~19290스님에 이어 1916년 백양사 주지로 부임하시고 40년 가까이 주석하셨습니다.
당시 극락보전 한채만 겨우 있던 백양사에 10년 중창 불사 계획을 수립하고 스님들에게는 반선반농(하루에 반은 참선을 하고 반은 농사를 짓다)의 생활과 시주 이외에 죽제품과 꿀 등을 만들어 팔아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1927년 대웅전, 일주문, 천왕문, 범종각, 조사전, 명부전, 칠성각, 만세루, 사리탑 등 무려 150여 칸의 대가람으로 중창하였는데 지금 있는 백양사 전각들은 모두 이 시기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대가람 백양사(大伽藍白羊寺) 편액은 옛날 일주문에 달려 있던 편액인데 일주문을 새로 지으면서 사천왕문 입구의 우측 종무소 건물 뒷벽으로 옮겨 달았습니다.
대가람 백양사(大伽藍白羊寺) 편액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 ~ 1933) 의 글씨입니다.
해강의 작품은 편액에 주로 사용한 호인(海岡) 혹은 (金圭鎭)이란 관지나 두인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어 쉽게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해강은 이밖에도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 무기옹(無己翁), 백운거사(白雲居士), 취옹(醉翁) 등 많은 별호를 사용했는데, 하나하나 그의 글씨에서 풍기는 낭만적인 성품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청나라 유학으로 연마한 대륙적 필력과 호방한 의기(意氣)를 폭넓게 발휘하여, 글씨에서는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의 모든 서법에 자유로웠다. 특히 대필서(大筆書)는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습니다.
백양사 사천왕문
장성 백양사 극락교를 건너 '이 뭣고'탑을 지나면 백양사 사천왕상을 모신 사천왕문이 있습니다. 사천왕문은 일제 강점기에 만암 대종사가 백양사를 다시 지을 때 건립하였으며, 1945년 8월 낙성식을 치르고, 그 다음 주에 해방이 되어 '해방 사천왕문'으로도 불립니다.
사천왕은 수미산에 사는 신들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여 동서남북 방향에서 부처님과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입니다. 사천왕문에는 흙으로 빚어 조성한 소조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사천왕문 앞쪽에는 고불총림백양사(古佛叢林白羊寺) 편액이 걸려 있는데, 1996년 백양사가 '고불총림'으로 지정되면서 이전에 '대가람백양사' 편액은 종무소 건물로 옮겨 달고, 이 편액을 새로 걸었습니다.
고불총림백양사(古佛叢林白羊寺) 편액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 1947~2020) 선생의 글씨입니다. 학정 선생은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송곡 안규동으로 이어지는 호남 서예계를 대표하는 21세기 한국 서예 10대가 중 한사람으로 손꼽힙니다.
사천왕문 뒷쪽 사천왕문(四天王門) 편액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의 글씨입니다.
전서체와 전각예술에있어 그를 두고 '근/현대 전각의 개창자'로 불리어집니다.
현재 문의 오른쪽에는 지국천왕, 증장천왕, 왼쪽에는 광목천왕과 다문천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인간의 감정 중 기쁨의 세계를 관장하고, 계절 중에서는 봄을 관장합니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의 향기만 맡는다는 음악의 신인 건달바와 부단나의 신을 거느리며 동쪽하늘을 지배하며, 동쪽을 상징하는 청색을 띤니다. 경전에는 손에 칼을 들고 있으나 음악의 신을 거느리고 봄을 관장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비파로 표현된 절이 많습니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며 여름을 관장합니다, 구반다(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말머리에 사람의 몸을 취하고 있다)와 아귀를 거느리고 남쪽 하늘을 다스리고 있으며 적색을 띤니다. 왼손은 주먹을 쥐고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습니다.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면서 가을을 관장합니다. 용과 혈육귀로 불리는 비사사신을 거느리고 서쪽 하늘을 다스립니다. 얼굴색은 백색입니다. 오른손엔 용을 쥐고 있으며, 왼속엔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겨울을 관장하며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북쪽하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얼굴색은 흑색입니다.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뜨고 있으며, 오른손엔 삼지창을, 왼손엔 보탑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천왕의 얼굴색이 비파를 든 지국천왕은 푸른색, 칼을 든 증장천왕은 붉은색, 용과 여의주를 든 광목천왕은 흰색, 보탑과 보당을 든 다문천왕은 검은색으로 각각 방위를 나타내는 색을 칠해져 있습니다. 이는 한국 전통의 오방색(오방정색)으로, 청(靑), 적(赤), 백(白), 흑(黑), 황(黃)을 표현한 것인데, 여기에 없는 황(黃)색은 이 사찰을 찾는 불자나 탐방객을 의미합니다.
백양사 범종루(白羊寺 梵鐘樓)
백양사 범종각은 정명 3칸, 측면2칸의 2층의 누각 형태이며, 1층에는 범종이, 2층에는 법고와 운판, 목어 등 불전 사물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범종루(梵鐘樓) 편액
범종루 뒷쪽 범종각(梵鐘閣) 편액
범종루의 뒷쪽 편액 '범종각'은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을 지낸 서옹(西翁 1912~2003) 스님의 글씨입니다. 서옹(西翁) 스님은 충남 논산군 줄신으로 속명은 이상순(李商純), 법명은 석호(石虎), 서옹(西翁)은 호입니다.
만세루(萬歲樓, 雨花樓)
장성 백양사 만세루는 들어가는 방향(정면) 에는 '만세루', 후면에는 '우화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준2층 건물로 '루'라는 명칭을 쓰지만, 실제는 단층짜리 건물입니다. '누하진입'이 아닌 '우각진입'을 하도록 지어졌으며, 전면 7칸, 측면 3칸의 큰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17년 만암 대종사가 백양사를 중창할 때 지었습니다.
사찰에 들어서 법당을 행해 들어가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누하진입(樓下進入)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우각진입(隅角進入)하는 방식입니다. 간략히 ‘누하진입’은 누각 아래 통로로 들어가는 것이고, 우각진입은 누각 옆의 길로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만세루(萬歲樓) 편액
설선당
ㄷ자 형태의 팔작지붕 요사채로 스님이 수행하시는 공간이라 담과 대문으로 경계가 되어 있습니다.
설선당에 걸려있는 염화실(拈華室), 설선당(說禪堂), 회승당(會僧堂) 편액
우화루는 바깥쪽은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깐 2층 누각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법당 쪽은 건물을 지면에 세운 단층 강당의 형태이며, 정면 7칸 측면 3칸에 이익공 양식의 주심포집으로 겹치마 맞배지붕을 올리고 풍판이 달린 건물입니다. 우화(雨花)'는 부천님과 성중이 있는 곳에 꽃들이 비처럼 쏟아졌다는 법화경 서품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범종루 방향의 편액에는 우화루, 극락보전 방향의 편액에는 만세루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화루(雨花樓) 편액
우화루 편액 좌측에 11세불하당(十一歲 不睱堂), 김진민인(金瑱珉) 도서가 있습니다. 정읍 출신의 천재 여류 서예가 몽연 김진민(夢蓮 金瑱珉 1912~1991)이 11세 때 쓴 해서체 글씨입니다.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의 제자로 호는 몽연 (夢蓮), 불하(不睱), 불하자(不睱子)를 사용하였습니다.
김진민 서예가는 영광 불갑사, 김제 금산사 미륵전, 완주 위봉사 나한전, 예산 정예사 등 편액과 내장사 부도전에 학명선사사리탑명의 금석문 글씨를 남겼습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1896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각 주두(柱頭)마다 공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전내에는 흙으로 조성한 시왕(十王)과 목조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백양사 명부전은 지옥중생을 전부 제도한 후, 성불하리라고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명부의 시왕을 모신 전각으로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도 불립니다.
명부전 편액이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기둥의 주련(柱聯)은 극락보전 주련과 마찬가지로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의 글씨입니다. 염재는 구한말부터 근세기에 활동했던 서화가입니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명부전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 및 사자, 판관이 모셔져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높이 110cm, 폭 77cm로 앉아 있는 모습이며, 도명과 무독귀왕은 입상으로 높이 144cm입니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은 목조이고, 시왕상은 소조상으로 만암스님이 중창불사를 할 때 조성한 것입니다. 지장보살은 승려의 머리 형태를 가지고 얼굴 아랫볼이 부풀어 오르고 목이 거의 없는 모습입니다. 손에는 아무런 지물을 들지않고 아미타수인을 결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좌상은 근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불상 내부의 복장을 조사하던 중, 발원문인 '조성필공기'가 발견되어 효종 4년(1653년) 조각승 15인이 에 조성한 것으로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목조지장보살
지장보살이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하품중생(또는 중품하생)의 수인을 하였습니다.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지장시왕탱화로 지장보살을 가운데로 좌우에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주위에는 시왕, 판관, 녹사, 사자, 옥졸, 선악동자 외 여러 권숙이 배치된 그림입니다.
명부전 소조시왕상 일괄
명부전 내 좌우에는 흙으로 빚어 만든 명부의 시왕상과 판관, 동자, 인왕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극락보전(전남 유형문화재 제32호)
백양사 극락보전(極樂寶殿)은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 된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선조 7년(1574년)에 문정왕후(1501~1565)가 참여하여 승려 환응이 지었습니다.
문정왕후는 1544년 인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된 이후 백양사에서 역대 조선왕실의 임금을 위한 국혼제(國魂祭)를 지냈으며, 이후 백양사에서는 왕실을 위한 축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전각은 네 번째로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2066호)
극락보전에는 목조기법과 소조기법이 함께 사용된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1741년 개금했다는 복장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높이2m가 조금 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목조상으로 나발의 머리에 정상의 계주가 높이 돌출해 있고 전면 중앙 계주는 반달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수인은 두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결하고 있습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보물제2066호)
극락보전에 모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선조 40년(1607) 현진(玄眞) 등 3명의 조각승이 제작한 불상으로 왕실 조상들의 성불을 기원할 목적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진행된 불교 복구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1610년 이전에 조성된 불상 중 규모가 가장 큰 대형 불상입니다. 이 불상을 주도적으로 만든 현진스니미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으로,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그의 알려진 작품 중 가장 일찍 조성된 것입니다.
독특하게 목조(木造)와 소조(塑造)기법을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먼저 나무로 불상의 전체적인 모습을 만든 후, 자연스런 모습을 위해 일부 진흙을 사용해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장대한 규모에도 불고하고 자연스러운 비례와 당당한 얼굴과 몸, 신체의 굴곡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주름이 돋보입니다.
후불탱화인 아미타여래설법도(보물 제2133호)는 1994년 도난당했으나, 2006년 극적으로 회수되어, 현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보물제2066호)
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돌아가신 선왕과 선왕후를 비롯한 왕실 조상들의 성불을 기원할 목적으로 조선 선조 40년(1607)에 현진 등 3명의 조각승이 제작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조성한 것으로 1610년 이전에 조성된 불상 중 규모가 가장 큰 대형 불상으로써 17세기 불교 조각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2020년 보물 제2066호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제작 기법이 목조와 소조를 함께 사용한 것으로, 나무로 불상의 전체적인 모습을 먼저 만든 후 진흙을 사용해 마무리하였습니다.
산신탱화
신중도
백양사 진영각(좌) 칠성전(우)
장성 백양사 진영각과 칠성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의 벽을 경계로 같은 건물에 '각(閣)'과 '전(殿)'을 함께 조성하였습니다. 통상 불보살을 모신 건물을 '전'이라 하고, 그 외는 '각'이라고 하는데, 백양사는 유일하게 칠성을 '전'에 모시고 있습니다.
괘불석주는 법당 밖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 때 걸어 놓는 탱화, 즉 괘불(그림으로 그려서 걸어 놓은 부처의 모습)을 걸 수 있도록 쾌불대를 세우는데 사용하는 돌기둥을 말합니다. 당간지주와는 달리 한쌍으로 있습니다.
진영각(眞影閣) 편액
누구의 작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알맞은 비수(肥瘦)에 힘차면서도 파격에 가까운 결구에서 대략 조선 후기로 연대 추정되는 해서채(楷書體) 편액입니다.
현재 진영각(眞影閣)에 모셔 둔 조사 진영(眞影)들은 모두 최근에 새로이 조성한 것입니다. 원래는 조사전(祖師殿)에 여환(如幻) 조사, 중연(中延) 선사, 각엄(覺儼) 존자 등 개산조와 대중창주의 진영들이 모셔져 있었고,
도의(道義) 영당(影堂)에는 가지산 선파(禪波)의 제1세 조사인 도의 국사와 그 문중 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아쉽게도 도난을 당해 모두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조계종 제18교구 본사답게 진영각 내부에는 고승들의 진영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칠성전(七星殿) 편액
구하 천보(九河 天輔 1872~1965)의 글씨입니다. 구하(九河) 천보(天輔)의 해서체(楷書體) 글씨로, 취산(鷲山)이란 관지와 도서 1과가 새겨져 있습니다.
법명은 천보(天輔), 법호는 구하(九河)입니다. 축산(鷲山)이란 자호(自號)를 사용했는데, 통도사의 영축산(靈鷲山)을 상징합니다.
칠성전 내부
칠성각(전)은 수명 장수신으로 불리는 칠성(북극성)을 봉안한 전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전각입니다.
칠성전에는 칠성광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 칠원성군이 조각되어 모셔져 있습니다. 본존은 근래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칠성과, 일광, 월광 두 보살은 소조상으로 높이가 대략 80cm내외인데, 1880년 작품입니다.
칠원성군(七元聖君)은 원래 고종17년(1880) 경진년에 왕의 명으로 조성하여 운문암에 봉안하였습니다. 이후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운문암에서 위험을 느껴 이곳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합니다.칠원성군은 모두 문관의 복장을 한 모습으로 머리 위에 하얀색 별이 달려 있고 검은색 단이 둘러진 빨간색 또는 파란색의 윗옷과 노랑, 파랑색의 내의를 입고 있습니다.
칠성전 불단
칠성전 중앙에는 북극성을 상징하는 칠성광여래(북극성)가 모셔져 있고, 좌우에 흙으로 만든 소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보살의 모습에 왕관형 관을 쓰고 있습니다. 머리위에 일광보살은 빨간색의 해를 월광보살은 노랜색의 달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치성광여래(북극성)
치성광여래가 결가부좌하고 앉아 아미타여래 9품인 중 하품중생(또는 중품하생)의 수인을 하였고 있습니다.
백양사 대웅전(전남 유형문화재 제43호)
장성 백양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형 법당으로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며,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공포는 내 3출목, 외 2출목으로 구성된 건물입니다. 처마를 길게 내기 위해 활주(처마를 받치는 기둥)를 세웠고,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 둥근 기둥을 하고 있습니다.
1917년 만암대종사가 백양사 중창시 건립하여 역사는 길지 않으나, 화려한 단청은 조선후기 불화의 맥을 잇는 보응스님의 제자인 일섭스님(마곡사 불모)의 마지막 작품으로 희귀성이 인정된다고 합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979년 보각행이 조성하여 새로 모신 10척 높이의 불상, 그 왼편에 용두관음탱화가 봉안되어 이씨습니다. 또한 대웅전 내 오른쪽으로 바늘귀를 꿰는 모습, 등을 긁는 모습 등 해학적인 모습을 한 나한상 23체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은 조선후기 서예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입니다. '대(大)'자는 오른발을 힘차게 딛고 앞으로 가는 사람처럼 보이고, '웅(雄)'자와 '전(殿)'자가 '대(大)'자를 따라가는 모습으로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대웅전 편액 글씨는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편액 글씨를 집자하였기 때문에 똑같습니다.
대웅전 편액 우측에 원교 관지가 있습니다.
백양사 대웅전에 봉안된 본존불은 금,은을 합금한 청동불로 높이 6자(180cm), 폭 4자(120cm) 크기이며 협시보살은 높이 5자(150cm) 크기입니다. 삼존불에는 사리, 경전 등 전통양식의 복장물과 이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 물품으로 복장하여 후대에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도록 했습니다.
백양사는 삼존불 봉안과 함께 수미단, 닫집, 탁자 등을 법당과 불상 크기에 맞춰 새롭게 조성했습니다.
삼존불을 조성한 불모(佛母) 이진형(1954~ 무형문화재 6호)씨는 “석가모니불은 신라불상의 섬세함과 백제불상의아름다움, 고려불상의 당당함을 갖춘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했으며, 협시불은 백제보살상의 역동성을 강조했다”고 밝혔습니다.
백양사는 1982년 조성한 대웅전 철불이 법당 규모에 비해 너무 크고 부식으로 예경하기가 어렵게 되자,
2005년 6월부터 삼존불 불사를 시작해 2007년 4월 20일 봉안하였습니다.
대웅전이 근래에 조성되어 내부에 국보나 보물급은 없으나, 불상과 후불탱화, 닫집까지 비례와 마감 등이 매우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닫집에는 '내원궁(內院宮)',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작은 편액이 상하로 걸려 있습니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과 실천의 상징 보현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 차림으로 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선정인을 하고 오른손으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였습니다.
좌우에는 화려한 보관을 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영락을 목에 걸어 치장하고 통견 차림으로 천의를 팔에 걸쳐 늘어뜨린 모습을 하였으며, 팔을 서로 대칭하여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연의와 연꽃을 들고 서 있습니다.
석가모니 삼존불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서 연의와 연꽃을 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주위에는 용왕과 용녀, 10대 제자, 6대 보살 그리고 사천왕을 배치한 모습입니다.
석가여래삼존불 양쪽에는 걸려있는 불화는 신축년(2021)에 조성된 오백 나한도로 좌측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50 나한을, 우측에는 석가모니삼존불과 250 나한을 그린 나한도 2점 즉 500 나한도가 걸려 있습니다.
석가모니삼존불 나한도
삼존불 우측에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한 석가모니 삼존불 주위를 2백5십 십 나한이 에워싼 장명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한도 중 오른쪽 문수보살 옆에는 백양사 방장을 지내신 1대 만암스님과 2대 서옹스님 그리고 안경을 끼고 계신 3대 수산당 지종스님의 모습도 있습니다.
독성탱화
가로 130cm, 세로 158cm의 크기로 장지에 채색하여 그렸습니다. 1925년에 대웅전 후불탱화를 그렸던 금어 봉영(奉榮)과 화사(畫師), 춘화(春化)가 제작하였습니다.
폭포가 흘러내리는 험준한 바위산이 빽빽이 들어찬 언덕에 두 동자를 거느린 나반존자가 않아 있습니다. 나반존자는 붉은 해무리 모양의 두광을 가지고 있고, 턱밑까지 내려오는 긴 눈썹, 구레나릇 수염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신중탱화
일반적인 신중탱화화는 달리 범천과 제석천, 위태천왕 등이 상단에 흩어져 크게 그려져 있고, 많은 신중들이 대략4개의 단으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습니다. 화면 하단부터 그 크기가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급격하게 작아져서 거리감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금어는 봉영(奉榮)입니다.
신중이란 고대 인도 신화 속에 등장하는 토속신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되면서 불법을 옹호하는 수호신이 된 신들입니다.
제석천을 상단 중앙에 두고 좌우에 범천, 동진보살, 예적금강을 배치하였으며, 주위를 천부, 명왕부, 천룡팔부 등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아미타삼존불 나한도
삼존불 좌측에는 하품중생의 수인을 한 아미타불을 가운데로 좌우에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한 아미타삼존불 주위를 2백5십나한이 에워싼 장명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팔층 진신사리탑(白羊寺 眞身舍利塔, 2009년)
장성 백양사 대웅전 뒤에 있는 팔층석탑은 1924년에 건립되었으며, 팔정도(八正道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여덟가지 바른 길)를 상징하기 위하여 8층으로 조성하였으며, 내부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白龍城 1864~1940)스님이 간직하고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앞에는 예배나 의식을 할 때 향로나 촛대를 등을 놓기 위한 배례석입니다.
기단부는 3중이며, 최상층 기단은 원기둥 4개를 세워 탑신부를 받치도록 하였습니다. 탑신부는 기둥무의 등의 조각이 없으며, 지붕돌은 전체적으로 얇고 받침이 얕게 조각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보주형으로 간략합니다.
ㄱ자 형태의 팔작지붕 요사채인 염화실(적적요)
적적요(寂寂寮) 편액
청운당
1918년 만암선사가 건립한 청운당
청운당(靑雲堂) 편액은 전남 화순 출신 문인으로 일제강점기 망국의 한을 시(詩)·서(書)·화(畵)로 남긴 호남 화단의 마지막 삼절(三絶)로 불린 염재 송태희(念齋 宋泰會 1872-1942) 글씨입니다.
안선국
안선국은 백양사 포교당이자 접견실로도 사용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이익공 양식의 공포를 하고 겹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었습니다.
안선국(安善國) 편액
범종각에서 본 방향에서는 서옹(西翁 1912~2003)스님의 글씨로 안선국(安善國)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백양사란 편액
백양사 편액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손가락으로 썼다는 글씨입니다.
백양사 편액. 우측 난(蘭) 그림, 좌측 대나무(竹) 그림을 그린 안순환(安淳煥) 관지가 보이고, 백양사 글씨 우측에 해강(海岡) 관지가 보입니다.
운문암 2.5km, 백학봉 1.9km, 약사암 1.0km, 청량원 0.1km
국기제단
약사암, 백학봉 들머리
운문암 2.1km, 백양사 0.5km, 백학봉 1.2km, 영천굴 0.5km, 약사암 0.4km
약사암
약사암 편액이 걸린 대웅전 법당은 2013년 법당을 신축하였다고 하는데 신축 당시 크게 발견된 유물은 없었다고 하며 다만 영천굴로 향하는 등산로에서 고려, 조선후기 유물이 소량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백양사 1.0km, 백학봉 0.9km, 연천굴 0.1km
약사암(藥師庵) 편액
현각(玄覺), 김상효 각(金相孝 刻) 관지가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로는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신중도
산신탱화
영천굴
2층 전각의 아래층은 신비의 약수를 마시는 영천굴
2층은 관음전이 있었는데 옛 전각은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 전각은 2013년에 복원하였습니다.
1층 영천굴 영천수
조선 후기 호남지역에 대 유행병이 돌아서 전라감사 홍락인(洪樂仁)이라는 사람이 영조(1724~1776)왕에게 상소를 올리니 '영지(靈地)를 찾아 크게 기도를 올리도록 하라'고 명하자 백양사 바위에 국제기(國際基)라 새기고, 영천굴 바위굴에서 솟아나오는 영천수를 제단에 올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약수를 마시게 하니 신기하게도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이에 전라감사 홍락인이 보은의 의미로 그곳에 암자를 짓고 영천암이라 하였는데,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영천수를 마시고 고질병을 낫는 의지처가 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2013년에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2층 관음전
관음전(觀音殿) 편액
동굴속에 자리잡은 관음전
중심 해수관음상과 주변에 천불로 보이는 작은 불상으로 인등을 켜 놓아 장엄함합니다.
석조 관세음보살입상
연꽃대좌위에 석조관세음보살입상은 불교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의 근거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대자비심을 베푼다는 보살로 관자재보살 또는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 합니다.
백학봉
상왕봉
사자봉
청량원 표지석
청량원(淸凉院)
청량원(淸凉院) 편액
서옹(西翁 1912~2003)스님의 글씨입니다.
아미타불
산신각
산신각(山神閣) 편액
산신탱화
청량원에서 바라본 백학봉
쌍계루
1350년에 각진국사가 처음 세웠고, 큰 비로 무너져 1377년에 청수스님이 다시 세울 때, 목은 이색이 기문을 쓰고, 포은 정몽주가 시를 지은 이후 쌍계루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85년에 복원되었으나, 주춧돌이 땅에 묻혀있고 처마가 썩어 2009년에 해체하고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180여 점의 한시가 걸려 있고, 연못 쪽에는 서옹스님의 쌍계루 편액이 경내와 측면 쪽에는 강암 송성용선생의 쌍계루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쌍계루(雙溪樓)의 경내와 측면 쪽 편액은 김제 출신의 서예가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1913~1999) 선생의 글씨입니다. 강암 선생은 꼿꼿한 선비로 창씨개명과 신학문을 반대하고, 보발(保髮)과 한복을 고집한 인물입니다.
쌍계루의 연못인 우화정 쪽 편액은 조계종 제5대 종정을 지내신 서옹 상순(西翁 尙純 1912~2003) 스님의 글씨입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만남은 쌍계루 편액 글씨에서도 나타납니다
현대 유가(儒家)를 대표하는 명필 강암 송성룡(剛菴 宋成鏞)의 편액 글씨와 현대불교를 대표하고 참사랑운동으로 시대에 맞는 불교운동을 일으킨 서옹 상순(西翁 尙純)대종사의 편액 글씨가 함께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쌍계루를 찾은 많은 문인들은 정몽주의 시를 차운하여 수많은 시를 지었는데, 쌍계루 2층을 가득 메우고 있는 현판들이 모두 그것들입니다.
정몽주의 왼쪽에 바로 붙어있는 시는 조선시대 문인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의 것이고, 최근의 것으로는 서울시장과 경제부총리를 지낸 약천 조순(若泉 趙淳)의 시가 정도전의 현판 밑에 붙어있습니다.
쌍계루에 있는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의 시입니다.
寄題雙溪樓(기제 쌍계루) 쌍계루에 시를 지어 붙이다
求詩今見白巖僧(구시금견백암승) 지금 시를 써달라는 백암스님을 만나서
把筆沈吟愧未能(파필침음괴미능) 붓 들어 가만히 읊어보나 미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淸叟起樓名始重(청수기루명시중) 청수(쌍계루를 세운 스님)가 쌍계루를 세워 그 이름이 비로소 무게를 더하고
牧翁作記價還增(목옹작기가환증) 목옹(목은 이색)이 기문을 지어 가치가 더하였도다
烟光縹渺暮山紫(연광표묘모산자) 안개빛 자욱하고 저무는 산은 붉게 물들고
月光徘徊秋水澄(월광재회추수징) 달 빛에 서성이니 가을 물이 맑구나
久向人間煩熱惱(구향인간번열뇌) 오랫동안 사람 향한 번뇌로 뜨거웠네
拂衣何日共君登(불의하일공군등) 언제 옷 털고 일어나 그대와 함께 오를까.
정몽주 : 1337년(충숙왕 복위 6)∼1392년(공양왕 4).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습니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습니다.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자는 정책에 반대하고, 끝까지 고려를 받들었다. 정도전(鄭道傳) ‧ 이성계 같은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 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하여, 이성계 세력에게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습니다.
호남 선현으로는 유일하게 공자를 모신 대성전 문묘에 오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가 늘그막에 백양사에 갔다가, 쌍계루의 사연을 듣고 정몽주의 시를 따라 읊었습니다.
雙溪樓 敬次圃隱韻(쌍계루 경차포은운) 쌍계루의 포은의 시를 공경히 차운하다
樓頭識面兩三僧(누두식면 양삼승) 누각 위에 안면이 익은 몇몇 승려들,
持守前規喜爾能(지수전 규희이능) 기꺼이 예전 법규를 지키니 기쁘구려.
絶澗言因淸叟懇(절간 언인 청수간) 절간(絶磵)이 청수(淸叟)의 간절한 요청을 전달하여,
烏川句爲牧翁增(오천구위 목옹증) 오천(烏川)이 목옹(牧翁)을 위해 시구를 보탰다네.
曾聞寫記巖爲幻(증문사기 암위환) 일찍이 환암(幻庵)이 기문을 베꼈다고 들었는데,
今見隨行號偶澄(금견수행호우징) 이제 보니 수행한 도반의 법호가 우연찮게도 징(澄)이로군.
扶病懶經頑石路(부병나경완석로) 아픈 몸 이끌고 느릿느릿 돌길을 지나다보니,
春風奈負少年登(춘풍내부 소년등) 봄바람은 소년 시절 산에 올랐던 일을 저버리지 않았네.
목옹은 목은 이색, ‘징(澄)’은 청수의 법호, 오천(烏川)은 영일(迎日)의 옛 이름으로 정몽주의 별호였습니다. 그러나 쉽게 호출할 수 있는 이름이 된 것일까? 정도전은 나오지 않습니다.
제6구의 「쌍계루기」를 베꼈다는 환암(1320∼1392)은 평안도 용천 태생으로 법명은 혼수(混脩), 자는 무작(無作), 시호는 보각(普覺)이었습니다. 일찍이 태고보우의 법맥을 이었고 나옹혜근에게 신표를 받았습니다.
승탑전(僧塔殿)
비자나무로 감싸인 곳에 오른편 언덕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입니다. 돌계단을 올라 팔각의 문 안으로 들어오면 승탑전이 있습니다.
승탑전 입구
승탑전에는 1650년에 조성된 소요대사탑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백양사에서 배출, 주석하였던 휴정(休靜)·유정(惟政)·모운(慕雲)·태능(太能)·범해(梵海) 등 열여덟 분 승려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석종(石鐘) 모양의 탑과 비(碑)가 있습니다.
가장 윗단에 6기, 중간단에 15기, 아랫단에 6기, 담장 밖에는 2기 등 총 29기의 승탑과 비석이 있습니다.
만암당·묵담당·영월당·벽허당 등의 승탑과 금해대선사·화담선사·양악선사 등의 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보물 제1346호로 지정된 '백양사 소요대사 승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산대사의 제자로 백양사 21세 주지를 지낸 벽송대사 지엄(1463~1534)의 승탑을 비롯한 몇몇 승탑은 도난당했습니다.
백양사 승탑전에 있는 만암스님 승탑(부도)
탑신 위패형 액 속에 당호 만암당(曼庵堂)을 새겼습니다.
백양사법계
사찰 경계를 나타내는 석물로 2.5m 사각 석주가 동쪽과 서쪽에 1기씩 있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장승이 있었는데 마을사람과 스님들이 1924년 장승을 없애고 법계를 세웠습니다.
동쪽 법계석
호남경승 불기이구오일년(湖南勝景 佛紀二九五一年) 호남의 뛰어난 경치 불기 2951년
시풍언악이상정(施風偃嶽而常靜) 바람이 불어와 산에 드리우니 언제나 고요하고
서광조만기(舒光照萬機) 흩어지는 광명은 萬機(천하를 다스리는 모든 일)를 비춘다.
서쪽 법계석
백양법계 갑자욕불일입석(白羊法界 甲子浴佛日立石) 백양법계 갑자년(1924년) 사월초파일 세움
암단천차로(嵒斷千差路) 바위가 천 갈래 길로 끊어지고
강하긍주이불류(江河兢注而不流) 강은 다투어 흐르나 바다에 다다르면 흐르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