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도, 진주에 살던 고월이 잠시 서울에 올라와 반조에서 같이 차를 마시고 영등포에 있는 내 거처로 와서 오랜만에 우리 부모님께도 인사드리고, 다시 진주로 돌아갔던 적이 있다. 그게 4월 말이었는데, 고월이 진주로 돌아 가는 날 봄비가 촉촉히 내렸고, 우리가 함께 오랜만에 서울에서 다시 어울린 정취가, 문득, 두보의 <春夜喜雨>를 떠올리게 하여,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을 인용하며 <春夜喜緣>이라는 짧은 글을 쓴 기억이 있다.
https://blog.naver.com/hopeforplace/222324589943
그 사이, 고월은 다시 파주로 터를 옮겼고,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더 단단해지는 중이고, 나는 서울에서 대책없는 장사꾼이 되어 끝간데 없이 안팎이 너저분해지는 중에, 이번 상해 출장길을 수년만에 나서게 되었다. 상해에서 만나야 할 중국 파트너사의 대표님이 글씨와 그림에 깊은 조예가 있는 분으로, 한국에 들어 오실 때 귀한 서화 여러점을 이미 선물로 받은 터에 맨손으로 뵙기가 민망하여 급히 고월에게 연락을 해 작품 한점을 구해서 상해 파트너사 사장님에게 선물로 드렸다. 고월의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감탄하고, 사진을 찍고 박수를 치고, 왁자지껄 만찬을 하고, 마지막으로 사장님의 갤러리(?)를 소개시켜 주신다고 하여서 작은 전시장에 들어가보니 벽 한면을 뒤덮을 정도의 큰 서예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글의 정체가 바로 두보의 <春夜喜雨>가 아닌가.
하, 이 무슨 기연奇緣인지!
사람은 만나고 헤어지고, 늙고 또 죽어가지만,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의 아름다움만큼은 밤하늘의 별과 같이 성성하여 변함이 없었다. 그간, 내가 영영 알지 못할 풍성하고도 다사로운 인연법의 보호하심 속에 늘 안기어 있었구나 싶어, 고개 숙여 감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과 진주와 상해를 가로질러 방긋 솟아난 백련白蓮 같은 인연 앞에서, 잠시 두 손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