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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有非無妙有(비유비무묘유)의 서양철학적 분석
대승에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묘하게 있다’는 의미의 “非有非無妙有”라는 문장은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아마도 천여 년 이상 가장 많이 회자되어 온 구절의 하나일 것이다. 불과 여섯 자로 이루어져 외우기 쉽고 또 시적 표현의 묘미까지 있어서 읊조리는 이들에게 신비로운 감마저 준다. 본고는 “非有非無妙有”라는 짧은 구절 속에 담겨 있는 대승의 진리를 현대 서양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여 그 이해를 돕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非有非無妙有”라는 표현의 논리적 문제 겉으로 드러나는 이 구절의 신비감 속에 숨겨져 있는 논리적 결점부터 간단히 지적하겠다. 非有非無妙有란 (1) 非有: 세상의 사물이 자성(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 常主(상주)하지 않으며, (2) 非無: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斷滅(단멸)도 아니고), (3) 妙有: 사물은 이 상주와 단멸이라는 두 극단 사이 가운데 (中道(중도)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연기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現象(현상, phenomenon, 幻(환))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밑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묘하게 있다는 妙有란 이렇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俗諦 속제 the conventional truth)이며 그것은 동시에 본질이 없이 空(공)한 세계 (眞諦 진제 the ultimate truth)를 말한다. “非有”에서의 “有”는 상주론에서 말하는 자성을 가지고 영원히 있다는 존재자(恒有)를 의미한다. 그런데 “妙有”란 이 세상 사물이 연기로 인해 자성을 결여(空)한 채 현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결국 “非有非無妙有”에서 첫째 “有”는 상주하는 존재자라는 뜻이고 둘째 “有”는 “妙”라는 서술어를 가지고 연기로 인해 空한 현상으로서의 존재자라는 뜻이다. 한 문장에서 “有”라는 같은 글자가 두 개의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논리학에서 경고하는 모호한 표현의 오류(the fallacy of equivocation)에 해당된다. 의미의 섬세한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또 존재론적 특성의 차이를 무시한 채 대승의 가장 중요한 논제의 하나를 “非有非無妙有”와 같이 엄밀하지 못한 표현으로 이해해 왔음이 당황스럽다. 이 구절은 천 년도 더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니, 이제 우리는 비판적 논의를 통해 보다 엄밀한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외우기 쉽도록 짧게 표현하려고 진리를 왜곡시키면 안 되겠기 때문이다.
논의를 위한 방법론 나는 가급적 龍樹(용수 Nagarjuna)의 『근본중송(Mulamadhyamakakarika)』의 내용에 충실하게 이 논제를 이해하고 논의를 전개해 보겠다. 非有非無妙有라는 논제는 천여 년도 더 전에 완성되었는데, 그 동안 서양에서는 이와 유사한 주제들과 관련해 신학적 또 철학적으로 많은 이론적 발전이 있어 왔다. 그래서 나는 서양철학의 가장 최근의 경향인 분석철학의 관점에서 非有非無妙有 논제를 조명하고 비판하며 내 나름대로 그 이해를 향상시켜 보겠다.
논의를 위해 필요한 몇 가지 개념 정리 불교를 위해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다보니 불교를 공부한다고 했다. 구도자로서 가장 훌륭하고 정직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방법론적으로 달리 진리에 접근하려 해 온 나 또한 서양현대분석철학을 아무리 공부해 보아도 결국은 언제나 불교의 견해가 옳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서 불교(철학)를 계속 공부한다. 불교의 철학적 논의는 학문하는 사람들을 쉽게 지적 황홀경에 빠뜨릴 정도로 정말 깊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느 중요한 철학적 논의도 극히 진지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다. 또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해야 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 명확한 개념 정리가 요구된다. 그래서 본고에서도 몇 가지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1. 實在(실재 reality).
그리고 ‘실재하는’이라는 형용사는 영어로는 ‘real’에 가깝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이 ‘real’이라는 말이 그 뜻이 분명치 않게 쓰여 왔다. 아비달마론 계통에서는 ‘real’에 대한 분명한 정의(definition)를 하지 않은 채, 다르마(dharma 法)에 대해 ‘impartite(부분이 없는, 복합체가 아닌)’이라고 하며 다르마들만이 실재한다(real)면서 ‘real’과 ‘impartite’를 의미는 다르나 그 적용 대상은 같은 동연적(同延的 coextensive)인 두 개념으로 보고 있다. 디나가(Dinnaga)와 다르마키르티(Dharmakirti)를 중심으로 하는 Yogacara-Sautrantica 학파에 와서는 ‘real’이 ‘causally efficacious (인과적으로 능력이 있는)’이라는 뜻으로 정의되고 이해된다. 중관의 空(공)사상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과적으로 능력이 있는’이라는 구절을 ‘연기의 그물망 안에 존재하는’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겠다. 한편 내가 읽을 기회가 있었던 한글로 된 몇 글들에서 “非有非無妙有”에서 “妙有”를 현상세계를 가리킨다면서 “實在(실재)한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는데, “실재한다”를 내가 해석하는 대로 ‘실제로 존재한다(actually exist)’라고 이해한다면 옳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40여 년 동안 서양현대철학에서 實在論(실재론 Realism)과 反實在論(반실재론 Antirealism)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실재론이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그것들을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주관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그 스스로의 본질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식인 견해지만, 현재 서양 철학자들 가운데 이렇게 순진하게 존재세계의 독립적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실재론은 실제로 독단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론 (dogmatic metaphysical realism)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요즈음은 ‘real’이라는 의미와 관련해서 “실재”라는 말을 쓰면 ‘자성을 가지고 (인식주관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는 의미를 강하게 함축하게 되어, 현상세계로서의 妙有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힐 위험이 있다. 그래서 나는 현상세계에 대해 “실재하는”이라는 표현보다는 좀 번거롭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actually existing)”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妙有고 또 이것이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라면 우리가 이 ‘번거로운’ 표현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
2. 實體(실체 substance).
즉 독립적 존재(independent existence)라면 그것이 실체이다. 한편 基體(기체 substratum)라는 개념이 가끔 실체의 개념과 혼동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체란 실체와는 다르다, 우리가 사물의 존재방식을 파악하려 할 때, 사물을 속성들이 어떤 한 바탕에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 바탕이 바로 기체가 된다. 혹자는 기체를 속성 걸게(property hang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연기법을 받아들이는 불교는 이렇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나 기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불교는 우리에게 삼라만상을 잘 설명하고 이해시킨다. 불교에서는 실제로 있다고 인정하는 존재자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존재와 사유의 경제성의 원리에도 - 오컴의 면도칼 (Occam’s Razor) - 잘 맞는다.
3. 同一性(동일성 identity).
4. 不一不二(불일불이).
사진=장명확 칸트와 不二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 장미의 색깔과 향기 등을 느끼고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개는 색맹이어서 이 장미의 빛깔을 볼 수 없다. 그러면 벌집모양의 수 만개의 낱눈으로 형성된 겹눈을 가진 잠자리는 이 장미를 어떻게 볼까? 부엉이는 적외선도 볼 수 있다고 하며, 매나 독수리는 놀라운 시각을 가졌다. 하지만 시력이 거의 없어 음파로 사물을 감지해야 하는 박쥐들에게 이 장미는 달리 보일(?) 것이다. 이 모든 種(종)의 개체들이 하나의 같은 꽃송이를 모두 다르게 본다. 그렇다면 이 꽃송이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모습일까? 칸트식으로 질문하자면, 그것의 物自體(물자체)는 무엇일까?
물자체로부터 인식주관 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해석해서 얻어진 현상으로서의 세계만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種(종)도 다른 종보다 물자체에 더 접근했다고 볼 수는 없다. 결국 물자체는 우리가 그 모습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that we know not what).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천적 직관 형식으로 받아들인 잡다한 내용을 12개의 개념(범주)로 질서지어주어 우리의 경험적 지식을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구성한 현상에 불과하며, 따라서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물자체는 우리 현상의 인과적 근원으로서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일상의 상식과 통하는 견해이고, 또 한편 바라문교(힌두교)와 같이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하는 주장과도 쉽게 양립가능하다. 한편 칸트는 경험적 실재론(empirical realism)은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이것을 경험적으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현상 세계가 선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12개의 개념(범주)로 구성된 관념의 세계와 존재론적으로 (수적으로) 하나라는 주장이라고 해석한다. 20세기에 들어와 비트겐슈타인도 말하듯이, 실재론(realism)과 관념론(idealism)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불교에서는 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견해가 언뜻 불교의 不二論과 유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하고서 출발하는 바라문교의 견해에 더 가깝다.
현상세계의 현대철학적 이해 지금 이 시각에도 여러 이론이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지만, 불교의 아비달마론과 유사한 트롭론(trope theory)이 많은 주목을 받아 오고 있다. 트롭이란 아비달마론의 다르마(dharma 法)와 유사한 존재자인데, 트롭론은 만물을 속성개별자(property trope)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먼저 트롭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어떤 이가 검은 색 구두를 신고 있다고 가정하자.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에서는 이 두 짝의 구두가 검은 이유가 ‘검정’이라는 보편자(universal 또는 보편적 속성)가 이 두 짝의 구두에 예화(instantiation)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트롭론은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대신 각각의 구두 짝에 우리가 통상 ‘검정’이라고 부르는 속성개별자(trope 또는 property instance)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트롭론에 의하면 만물이란 아무런 基體(기체 substratum)도 없이 온갖 다양하며 무수히 많은 속성개별자들만의 집합체이다.
데이빗슨과 不二 정신(마음)과 물질이란 이 하나의 실체가 가진 두 양상(mode)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17세기 스피노자의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데이빗슨(Donald Davisdon)의 사건이론(event theory)은 不一不二를 설파하는 불교철학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다. 나는 그의 철학이 불교의 깊은 진리에 그래도 많이 접근한 견해로 판단한다. 그의 사건이론을 예를 들며 간단히 설명해 보겠다.
마포구에서 여의도를 잇는 서울대교가 무너졌다. 한강 다리 하나가 구조상의 문제점으로 무너졌다. 다리 하나가 갑자기 무너졌다. 어제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사건이 한강 위에서 벌어졌다. 어제 모든 석간신문 1면을 장식한 일은 한강에서 벌어졌다. 한강 다리 하나가 어제 오후 4시 35분에 무너졌다…. 원칙적으로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모두 어제 한강 다리가 무너진 사건에 대해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기술(describe)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수많은 문장들이 수많은 다른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기술들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머릿속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자. 물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어떤 신경다발이 흥분된 (excitation) 현상이지만 심리적으로 볼 때는, 예를 들어, 어떤 통증이 일어난 사건이다. 존재세계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사건만이 존재하지만 물리적 관점과 심리적 관점을 적용해 보니 신경다발흥분이라는 사건과 통증이라는 사건으로 달리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데이빗슨의 견해는 어떤 사건이란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이지만 두 관점(개념)으로 기술된다는 것으로,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사건이 두 개의 주요 관점(심리적 물리적)에 따라 심리사건으로 또 동시에 물리사건으로도 기술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두 개의 사건이 실은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時空 속에 존재하는 어떤 구조가 없는 개별자 (a spatiotemporally bound unstructured particular)를 두 개의 관점에서 보고 기술한 것들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데이빗슨을 비롯해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은 이 두 기술이나 관점들이 서로 상호교환가능하거나 환원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데이빗슨은 자신의 견해를 존재론적 일원론이자 개념적 이원론 (ontological monism & conceptual dualism)이라고 결론짓는다. 不一不二를 연상시키는 데이빗슨의 주장이 반갑기는 하지만, 나는 그가 여전히 현상의 근원이 되는 그 자체로는 알려질 수 없는 존재자로서의 사건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그의 견해가 칸트와 마찬가지로 불교보다는 바라문교의 관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event)의 개별성(individuation)과 동일성(identity)이 그 사건이 다른 여러 사건들과 맺는 인과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그의 견해도 대승의 非有非無妙有의 논제를 보여주는 모델로 나쁘지는 않으나, 우리의 기술과 관점에 존재적으로 선행하는 사건의 實在性(실재성)을 인정한다는 한계가 있다. 사건이 일단 우리의 인식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적용하는 관점에 따라 사건이 이러저러하게 기술된다는 것인데, 엄밀히 말해 이것은 여전히 實在論(실재론)의 입장이어서 反實在論(반실재론)의 입장을 취하는 대승불교와는 거리가 있다.
현상과 空 그리고 不二 常主도 斷滅도 아니라는 차원(非有非無)을 넘어서 妙有에 해당하는 空과 현상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해 보자. 不二가 진정한 진리라면 모든 차원의 존재에 끝까지 적용되어야 할 테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현상(phenomena)으로만 존재한다는 견해는, 앞에서 논의한 대로 삼라만상을 속성개별자들의 (trope 또는 property instance) 집합체로 보거나 또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와 소립자들로 이루어진 것들로 보는 견해보다도 오히려 더 세련된 철학적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객관 세계가 그것을 파악하는 주관의 인식능력과 구조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관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그 모습이 현상으로만 드러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대철학에서 받아들이는 反實在論(antirealism)의 입장인데, 지금은 상식이 된 이 반실재론은 서양에서 198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현응스님(현 조계종 교육원장)은 그가 1980년대에 쓴 글을 모아 놓은 『깨달음과 역사』에서 이미 우리 일상의 경험세계를 반실재론의 입장에서 단지 현상으로 또는 幻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常主와 斷滅뿐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二分法(이분법)도 넘어서는 不二를 주장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의 책이 ‘실재’라는 개념을 현대철학의 입장에서 보아도 문제가 없이 사용한 한글로 된 유일한 불교관련 서적이다.
‘空’이란 개념은 ‘(본질 또는 자성이) 결여되어 있다 (is empty of (svabhava))’라는 형용사로부터 생겨났지만, 자성을 결여한다는 존재의 양상(mode)을 표현하는 명사로도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명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빨갛다”라는 형용사로부터 “빨강”이라는 명사가 나왔는데, “빨강”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어떤 형이상학적 공간에 빨강이라는 추상적 존재자가 있고 그것이 존재세계에 예화된다는 (instantiated) 플라톤류의 철학은 역사상 수많은 반론에 직면해 왔다. 그리고 현대철학에서는 거의 설득력 없는 주장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결여되어있다(空)”라는 형용사로부터 “결여(空)”라는 명사를 만들어 낸 후 이 존재세계에 그것이 지시하는 ‘결여(空 또는 空性)’라는 존재자가 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많은 비약을 내포하는 주장이다. 그 스스로 철학자였던 루이스 캐롤의 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어 이 점을 더 명확히 해 보겠다.
“여기 오는 길에 누구 본 사람 있어?”
이 대화가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는 질문자가 답변자의 “nobody”라는 단어를 실제로 존재하는 “Nobody”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자들이 즐길 법한 논리적 코미디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I saw nobody”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Nobody가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듯이, “결여(空)”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결여(空 또는 空性)가 존재자로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오해한다면 불교의 空사상이 서양철학자들 사이에 회자할 또 다른 코미디의 주제가 될지도 모른다.
“자성을 결여함이란 (즉 空이란) 언제나 否定的으로 또 俗諦(현상)세계의 한 특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Lack of inherent existence must always be understood as negative and as a feature of conventional reality).” 그리고 시더리츠(Mark Sideritz) 교수가 주장하듯이 “空은 경험을 개념화하는 하나의 편리한 방법 이상의 것이 아니다 (Emptiness is no more than a useful way of conceptualizing experience).” 내가 다른 에세이에서도 한번 밝혔지만, 나는 空을 논리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空은 연기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결과여서, 연기와 공은 결국 같은 진리에 대한 두 다른 관점에서의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현상세계 사물의 생멸에 연기법을 적용해 이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동시에 공의 관점을 적용해서 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동아시아 불교 일각의 空사상에서 空이 어떤 존재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하는 신비주의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제되지 않은 채로 空사상이 서양에 더 많이 알려진다면 머지않아 뉴욕 브로드웨이에 空을 주제로 한 코미디 뮤지컬이 오를지도 모른다, 역사상 성리학자들이 불교의 여러 모습을 가혹하게 조롱거리로 만들어 책을 써 냈듯이.
7,000장의 기저귀 갈기 수행 마지막을 좀 가벼운 이야기로 맺으려 한다. 원래 어려운 이야기도 웃으며 해야 덜 어렵게 느끼기에 그렇다. 전통적으로 선문에서는 실참을 통해 깨침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가르쳐 왔는데, 좀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나는 실제로 14년 전 태어난 우리 쌍둥 아이들 기저귀를 2년 반 동안 7,000장쯤 갈았을 때 살짝 깨쳤다는 경험을 했다. 내가 종신교수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조교수였을 때 당시 듀크대학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던 아내가 내가 있던 미국 미네소타주로 돌아와 쌍둥이를 출산했다. 사고무친한 곳에서 첫 아이를 쌍둥이로 얻은 우리는 물론 어떤 일들이 닥쳐올지 아무런 감이 없었다. 한국에서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다니고 군복무를 마친 후 유학해 미국대학에서 미국현대분석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될 때까지 나는 누구 못지않게 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겪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종신교수심사 준비하며 강의하고 그 와중에 대학원생이었던 아내를 뒷바라지하며 집안일과 쌍둥 아이들 양육을 거의 도맡아 한 2년 반이 이제 한국 나이로 50대 중반에 접어든 내게 아마도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쌍둥이여서 작게 태어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더 자주 먹었어야 했기 때문에 첫 6개월은 하루에 기저귀를 하루 종일 밤새도록 20~40장까지도 갈았어야 했다. 도와 줄 일가친척 한 명도 없는 곳에서 그랬다. 종신교수가 되자마자는 2년 동안 휴직하고 아내의 대학원이 있던 1,800마일 떨어진 노쓰 캐롤라이나주로 가족이 모두 내려가 내가 아이들 키우고 집안 살림하며 아내 박사과정 공부 뒷바라지했다. 여러 모로 무척 바쁘고 어려웠던 기간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두 살 반 정도 되던 어느 날 여전히 기저귀를 갈고 있던 나는 홀연히 모든 것이 시원하게 내려가면서 극히 상쾌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정말 멋지고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꽤 여러 날 지속되었다. 그 경험 후 나는 불교(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러 해 동안은 영어로 된 책들밖에 구할 수 없었지만. 복이 많은 나는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곳이 숭산스님이 미국에 와서 처음 세운 관음선원(Providence Zen Center)이 있는 곳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어서, 바쁜 대학원 생활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음선원에 다녀왔고 또 숭산스님이 그곳에 들리셨을 때는 법회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정작 서양현대분석철학이 전공인 내게 불교 공부를 하게 만든 것은 엉뚱하게도 기저귀 7,000장의 수행(?)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틈만 나면 자기들 덕분에 아빠가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내가 불교공부로 쌓는 공덕은 자기들 덕이라고 뽐내곤 한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한국에서 여성재가불자들이 보살님이라고 불려야만 하는 이유를 좀 알게 된 것도 같다, 남성재가자들은 아무리 올라가도 거사에 불과한데 말이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기저귀를 떼지 않았더라면, 기저귀를 끊임없이 갈았었어야 했을 나는 언젠가 결국 완전히 깨쳐 금강열반에 들어 명호를 ‘기저귀 가는 부처님’으로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아쉽게도 되었다. 그래도 온 가족의 성원 아래 아내는 대학원을 성공리에 마쳤고 지금은 생명과학철학 전공으로 미네소타주립대학 맨케이토 철학과 교수가 된지 9년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 가정과는 달리 우리 집에서는 엄마보다 기저귀를 더 많이 간 아빠가 보살님이다.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들 가시라고 농담 같은 진담으로 살아 온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열반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철학적 분석 자체가 열반을 직접 가져다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열반을 가리키는 여러 손가락 가운데 하나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필자 홍창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