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뉴스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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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걸의 무술동작들은 보통사람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경지를 보여주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들 자체는 대부분 그저 그런 오락영화 언저리에서 맴돈 것 같다. 그런데 근래에 나온 진가신 감독의 [명장]은 씁쓸하면서도 꽤 강렬한 여운을
던진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어지러운 청말, 지원부대의 배신으로 전투에서 부하들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패장 방청운(이연걸)은 산적 마을에 몸을 의탁한다. 그러나
산적질도 여의치 못하자, 굶지 말고 인간답게 살자는 명분으로 마을 주민들을 관군에 끌어들이고 이들과 다시 필사의 전투를 벌인다. 그는 빠른 시일
안에 전쟁을 끝내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겠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은 한없이 뒤로 미뤄지고 전쟁은 끝 모르게 계속된다. 인간답게 살자는 출발 명분도 희미해져간다. 이기기 위해 적을 속이고, 과거의 원수와도
손을 잡으며,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지면 무자비한 대량학살도 감행한다. 그 잔혹한 처사를 언젠가 형제들도 이해할 날이 오리라고 자위하면서 그는 좀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태세를 취한다. 더 큰 권력을 잡아야 더 많은 백성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명분이다. 마침내
많은 전공을 세워 그는 고위 관리에 임명되지만, 자신에게 반발하는 의형제 조이호(유덕화)를 죽이고, 그 자신도 정적들의 견제와 술수에 희생된다.
방청운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며, 자신의 권력의지가 커감에
따라 명분을 바꿔간다. 그렇다고 형제를 죽인 그의 죄를 피로써 묻고자 하는 또 다른 의형제 강오양(금성무)의 생각처럼 방청운이 처음부터 교활한
속임수를 쓴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그를 그렇게 얄팍한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대의명분을
믿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다른 악인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행보는 현실 정치판 어디서라도, 특히 거창하고 그럴듯한 명분이 대중들의 마음을 흔드는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운동이나 정치가 방청운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라도 그의 길에 합류할 개연성이 높다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방청운을 응징하려드는 강오양도 실은 무장해제된 소주성 병사들을 학살한 공범이었다. [명장]은 대의를 팔아먹으면서 상황논리에 밀려 양보하거나
희생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살피라고 가르쳐준다.
그러한
자각과 반성 없이도 현실적 역학관계 덕분에 한동안 성공가도를 달리고 상당한 권력을 누릴 수는 있다. 방청운이 좀 더 악랄한 인물이었다면 암살을
모면하고 더 높은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어느 때든 처참한 결말이 그와 그의 주변을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각종 대의명분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 깃발마다 서민이나 경제라는 말은 활자 모양만 다른 상태로 빠짐없이 새겨져 있다. 처음부터 표를
위해 자신도 믿지 않는 헛구호를 뿌려대는 정치집단이 이번 선거에는 왜 없겠는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속 보이는 말들에 현혹되거나, 때
묻은 깃발로 얼굴을 가린 채 알량한 코앞의 미끼들을 좇으려 들 것인가.
허나
그보다 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선의에 입각하여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명분을 우리 자신이 조금씩 갉아먹고 뒤집어 버리면서 힘없는 이웃과
형제들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희생을 요구하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최악의 사태, 즉 더불어 행복을 나누려는 우리의 본능마저 위축되고 냉소주의와
회의주의와 무기력증이 기승을 부리는 사태는 자신의 몰골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우리의 오랜 악습에서 자라나오는 듯하다. 이 경우 아마 우리에게는
절망할 여유가 별로 없다는 객관적 사실 속에서 겨우 희망의 불씨가 살아날 것이다.
[명장]은 희망의 불씨를 별로 남겨놓지 않는다. [야연], [황후화], [연인], [영웅] 등의 화사한 색채놀이와 대조되는
리얼 칼라와 리얼 액션으로, 대의명분의 어떤 초라한 결말을 상당한 개연성 및 보편성과 더불어 냉정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로 인한 불편함은 영화적
진실성이 주는 깊은 맛으로 상쇄되고도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