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기 13차 산행
복사꽃 피어있던 무릉대간
제13구간: 부항터널-부항령-1030봉(백수리산)-1170봉-삼도봉(1172)-삼마골재- 해인동
산은 얌전하고 순했다. 산을 걷는 내내 걸음은 바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삼도봉이 호락한 산이었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걸어 온 능선을 돌아보거나 앞으로 뻗어난 능선을 바라보면 산의 골간들은 피라미드를 여러 겹 겹쳐 놓은 것처럼 기세가 등등한 산이었다. 그럼에도 산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숲길에는 온갖 야생화가 강인하게 앙증스럽게 피어있었다. 그들에 눈길을 다 주고 걸어도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던 대간 구간이었다.
부항령을 오르는 초입부터 복숭아꽃은 환상적으로 피어있었고, 해인동을 내려가는 마지막 자락에서도 복숭아꽃은 눈부셨다. 산마저 엷은 안개가 살포시 깔려 도화의 그 화사한 꽃빛을 따라가면 마치 그 어디쯤 무릉도원이 펼쳐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도연명이 쓴 그 이상향에도 도화꽃이 있었고,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노닐었던 도원을 그린 ‘몽유도원도’에도 복숭아꽃이 있었으니. 오늘 우리에게도 심상치 않는 무릉대간이 펼쳐질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따라 우리 산행팀은 컨티션과 기분이 다 좋아 보인다. 대간이 끝나는 지점 해인산장에서 먹을 그 특별한 돼지구이와 한 잔의 와인을 생각하고 있는지 다들 즐거워 보인다. 미리 예상하는 행복감. 100점 받으면 뭐 사줄게 하면 더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처럼, 아무래도 입맛을 다시며 걷는 느낌이었다. 하긴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가. 이른 새벽부터 산을 향해 달려가서 하루 종일 산을 타는 일. 거기에는 별 잡념 없이 단순해지면서 꽃, 새, 나무, 흙 그 자연에 나의 청각과 시각, 후각, 촉각을 모두 내 맡기는 것이다. 한 숨 들이쉬는 순간 도화의 향기에 심장이 멈칫 놀라기도 하고, 작디작은 하얀 개별꽃이 천지의 드센 바람 앞에서도 무심히 당당히 피어있는 것을 보면 생명력에 대한 경이와 그 아름다움에 놀라고 만다. 그리고 내가 저 길을 다 걸어 왔나하는 부듯함에 놀라고. 그 놀람이 근심 걱정이 아닌 환희와 기쁨을 안겨주는 등산은 현대인들이 즐길 수 있는 잠시의 무릉도원이 아닐까.
숲은 노랑제비꽃, 개별꽃, 얼레지, 괭이밥 조팝나무, 진달래..등 온갖 꽃으로 뒤섞여 있는 길을 따라 몇 개의 봉을 오르고 내리니 삼도봉이다. 삼도봉은 조선 태종 때인 1414년 조선을 팔도로 나눌 때 충청, 경상, 전라 삼남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 삼도봉에서 석기봉(1200미터), 민주지산(1242미터), 각호산(1176미터)으로 산줄기가 이어지면서, 활처럼 휜 능선안에는 물한리계곡이 흐르고 있다. 작년 가을 대불리에서 석기봉으로 이어지는 삼도봉까지의 산행이 왜 그리 힘들었는지 결국 삼도봉을 포기하고 말았던 기억과 그 계곡의 맑고 청아한 물소리가 생각난다. 넓은 정상에는 화강암으로 된 세 마리의 거북 등 위에 세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바치고 있는 기념탑이 참으로 생뚱스럽게 서 있다. 삼도의 화합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처럼 인위적인 상징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은 이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만 보라는 듯, 앞의 뽀족하게 솟은 봉이 석기봉, 그 옆으로 각호산, 민주지산 뒤로는 1030봉, 대덕산, 가야산 저 멀리 향적봉까지 시야를 열어준다. 대단한 대간의 능선을 다시 실감한다.
삼마골재에서 김천 해인동쪽으로 하산하는 내리막이다. 산자락과 자락이 만나는 긴 계곡은 너덜바위가 깔려있다. 큰 돌이 아닌 낮고 고른돌 사이로 물이 흐르는지 물소리도 들리고 돌 틈 사이에 핀 야생화와 양쪽으로 우거진 잡목들의 새 순과 드문드문 피어있는 복숭화꽃 진달래로 산길은 참으로 한적하면서도 봄의 기운으로 화사하였다. 긴 내리막의 끝자락에 이르니 첫 집 해인산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인산장’은 위치적으로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이 삼도봉을 오르거나 하산할 때 한번쯤 거쳐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도 두 번째 산장과 그 주인 김용원씨를 만나는 셈이다. 산을 아는 사람 아니고서는 이런 깊은 곳에 산장을 차릴 수 없는 느낌을 주듯, 이 산장의 주인의 산 경력은 암벽과 빙벽을 탔든 사진과 등산장비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산꾼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캡 모자를 눌러쓴 다부진 모습으로 고기도 구워주고 등산하는 이들과 산 이야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그는 정말 자신이 좋아서 하는 산장지기 모습이다. 해안리 출생답게 이 해안리의 지명과 역사에 대해 말해준다. 해인(海印)은 아득한 옛날 삼도봉이 바다였는데, 임금이 옥새를 잃어서 생긴 이름으로 ‘정감록’에 의하면 바다 해(海)자 도장 인(印)자 해인이라는 옥새를 잃어버려 쇠말뚝에 배를 매어 놓고 도장을 찾았다고 해서 ‘해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실제 쇠말뚝은 삼도봉 정상에 박혀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쇠공출로 빼앗겼다는 것이다. 아직 해인마을은 버스가 오지 않는 오지이지만, ‘정감록’에는 해인동 어딘가에는 만인의 난을 피할 수 있는 우리나라 10지 중 한 곳이란다. 그는 오랫동안 서울서 살다가 몇 년전 고향으로 이사를 와 노모와 아내와 노년을 보내려 했지만 몇 달전 아내를 잃었다. 초로에 접어든 그는 아내가 없는 빈 자리를 인생의 50프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80프로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다고 고백하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등산을 댁의 사모님과 항상 같이 다니라는 그의 당부는 뼈아픈 후회에서 나오는 교훈처럼 들렸다.
연기와 와인에 모두 복사꽃처럼 익어가고 대간의 진행도 익어가고 봄날도 익어가는 저녁 한나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산행일시: 2007년 4월 22일
산행시간: 약7시간
이정표거리: 11.4킬로 (대간거리:9.2킬로)
첫댓글 됴화향기가 글에서 묻어 나오네요.
아득한 산 너울은 선경처럼 신비롭고, 정다운 풀꽃 위로 복사꽃은 화사했지. 봄이 짙은 산장의 참숯불에 익던 구이, 적포도주 4리터로 건배하던 칭구들. 무릉도원 하루가 저 글 속에 다 있구나.
글을 읽으니 그날 같이 산행하지 못 했음이 더욱 아쉽습니다.환상적으로 피어 있었다는 복사꽃,온갖 야생화들,그리고 강한 산의 기세.
뭇 생명의 경이와 아름다움에 놀라 환희심이 일어난 경지는 깨달음의 경지가 아닐까요? 초록님의 산행기에서 수행의깊이를 봅니다.
마치 초록님따라 무릉대간을 쉬엄쉬엄 걸어 가면서 길가에 지천으로 핀 야생화에 마음을 온통 빼았긴 듯한 환상에 빠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