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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연일정씨(延日鄭氏)
1. 입향유래
공주시 탄천면 국동리는 연일정씨의 오래 된 터전이다. 연일정씨의 공주 세거는 공주목사를 지낸 정무(鄭堥, 1641~1705)에 의해 마련되어, 350년 이상의 역사가 이어져 오고 있다. 당시 정무가 어떠한 까닭으로 국동리(菊洞里)와 인연을 맺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바가 없지만, 아마도 만년에 공주목사(公州牧使, 1699년 부임)를 지내며 마지막 임지에서 정착 할 만 한 곳을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후손들의 전언에 의하면 정무가 정착지를 선택할 당시 국동리의 국사봉의 기이한 풍수를 유념했다고도 한다. 실제 정무 자신의 묘역도 국사봉 바로 아래에 마련하였다.
국동리의 연일정씨는 정무의 셋째 아들인 정하언(鄭夏彦)의 후손들에 의해 이어졌는데 이는 첫째아들과 둘째아들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속칭 ‘국동정씨’로 널리 알려질 만큼 크게 성장한 공주의 연일정씨는, 입향조 이후에도 꾸준하게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한 인물을 다수 배출함으로서 향촌사회에서 사족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2. 배출인물(기간:1700~1910)
국동리에서는 정무의 입향에 이어 과거고시에 합격한 대사간과 이조참판을 지낸 정하언과 형조판서 정조영(鄭祖榮, 1763-1827)이 있으며,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조증문예 정수(鄭樹, 1727~1757), 통훈대부 정간(鄭刊, 1733~), 연일군수 정주(鄭柱, 1740~1799), 통덕랑 정우영(鄭祐榮 1769~1797), 아산군수 정지영(鄭祉榮, 1742~?), 천안군수 정식(鄭埴,1780~1856), 목천현감 정육(鄭堉, 1795~1863), 경상증군 정숙(鄭塾, 1819~1863), 양양도후부사 정필현(鄭泌鉉, 1820-1899), 생원 정제현(鄭濟鉉 1822~1895), 생원 정협(鄭埉, 1826~1868), 첨사 정유현(鄭遊鉉 1838~1914), 진사 정순(鄭洵 1855~?), 내부주사 정오(鄭墺 1859~1941), 주사 정은(鄭溵, 1862~1926), 주사 정박현(鄭博鉉 1852~1920)이 있으며 그 외에도 한말의 화가 정술원(鄭述源, 1885-1955)과 서예가 정성원(鄭成源 1881~1962) 등이 배출되었다.
연일정씨의 국동리 정착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공주목사 정무이다. 그는 정석기(鄭碩基, 1607-1647)와 남원양씨의 셋째 아들로 1689년(헌종 10)에 9세의 나이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운봉과 화순현감, 함양군수, 남원부사, 강화군수, 화양경역지 등을 두루 거쳐 공주목사가 되었으며 국동리에 정착하였다. 특히 정무의 공적을 보면 화순현감에 재직하면서 선민정치(화순현감시절 , 신유년 10월에 부임하여 병인년 8월까지 재임)를 하였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전남 화순군 동면 운동리 신운동 마을에 선민정치 마애비가 현존하고 있는데 동 비문에 ‘和順縣監위 鄭堥愛民善政“(갑자년 정월에 세웠으며 갑신년 10월에 다시 만들었다.) 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함양군수 재임시절(1692년, 숙중18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소실 된 학사루를 중수하여 현존하고 있다. 세상을 떠난 후에는 가선대부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셋째 아들 정하언(1785년, 영조11년)의 증광문과에 급제 관리 등용 후 후손들이 공주 국동리에 일가를 이루었다.
정무의 입향에 이어 국동리 연일정씨의 후계를 이어간 정하언의 행적에 대해서는 외손 임천상(任商天)의 행장에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하언(鄭夏彦, 1702-1769)의 자는 미중(美仲), 호는 지당(止堂)‧ 옥호자(玉壺子)로 공주목사 정무와 대사헌 노숙동(盧叔仝)의 후손인 풍천노씨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지만, 조실부모한데다 두 형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인근 부여군 빙고치에 살던 형(兄) 정하성(鄭夏盛)의 집에서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학업에 충실하였는데 1735년(영조 11) 어린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종사관으로서 경상도의 양곡을 중앙으로 내보내는 진휼사(賑恤使)에 임명되었다. 특히 영조와 함께『속대전(續大典)』의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좌부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각종 어제(御製)의 편제는 물론 홍화문(弘化門)의 편액을 쓰기도 하였다. 동해시 두타산 밑 무릉계곡에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의 웅필 자서 석각을 남기었으며 서울 수락산 밑에 명덕동 수옥대와 부여규암에 청풍정도 건립하였다. 공주 공산성 만하루(挽河樓)의 시(詩)와 친구 부여현감 윤경원(尹景元)의 부탁으로 지은 부여 청풍정(淸風亭)의 기문(記文)도 아직 남아 전한다. 유고로『지당집(止堂集)』6권이 전하며, 세상을 떠나자 국동리에 부인 조석명(趙錫命, 1674-1753)의 딸 풍양조씨(1707-1756)와 함께 묘소를 마련하였다.
정조영(鄭祖榮, 1763-1847) 자는 자승(子承), 호를 국사(菊士)로 정간(鄭杆) 장남이나 정수(鄭樹)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이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문집5권이 전하며 묘소는 역시 국동리에 있다. 그 외 생원‧ 진사시 급제자수도 아산군수 정지영(鄭祉榮) 등 16명이나 된다.
한편 국동리에서는 두 명의 걸출한 서화가가 배출되기도 하였는데 정조영의 현손들로 두산 정술원(斗山 鄭述源, 1885-1959)과 현암 정성원(玄菴 鄭成源, 1881-1962)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재종간으로 두 화가 모두 향사에 묻혀 작품 활동을 계속해왔는데 정술원은 명절을 빼놓고는 거의 집을 비웠다고 할 정도로 방랑벽이 심했다고 한다. 정술원은 절지(折枝), 영모(翎毛), 인물(人物)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그 중에서도 산수화(山水畵)가 가장 능하였다. 특히 그의 산수화는 ‘미점법(米點法)을 사용하되 능히 고인의 필의(筆意)도 살려 냈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정성원 역시 서예와 그림 모두에 뛰어났으며 특히 행서(行書)와 산수화로 유명했다. 유작으로 부여팔경도(夫餘八景圖) 등이 전한다.
3. 소장유물의 성격
국동리 연일정씨 가계에는 다양한 문서류가 전해져 오다가 최근 관리상의 이유로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에 이관하여 소장되고 있다. 문서는 족보류와 가승(家乘)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18세기에 정리 된『오천세보(烏川世譜)』에는 연일정씨가 국동리에 입향 한 시기의 인물들의 가계와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여 잘 정리해 놓아 마을의 변천사를 이해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교지류로는 1737년(영조 13) 정하언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으로, 1822년(순조 22)에 정조영을 강계도호부사로 임명하는 문서 등이 있다.
특히 이번에 전시되는 연일정씨가의 문서류 중에서는 새롭게 발견 된『국동리지(菊洞里誌)』는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국동리지』는 영일정씨 정협(鄭埉, 1826~1895)이 본인 가계의 세거지인 공주 국동리에 대한 마을 기록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필자의 생몰년으로 볼 때 19세기 중후반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서는 기존의 읍지(邑誌)류 체제를 일부 차용하여 마을 일대의 지명(地名)을 상세하게 서술한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내용은 역원(譯院), 읍치(邑治), 나루, 점촌, 주요마을, 경도(京道)의 방위와 거리가 적시되었고, 이어서 건치연혁(建置沿革), 동명연혁(洞名沿革), 방근동명, 산록(山麓), 방곡(坊曲), 정리(程里), 분묘(墳墓) 등도 차례로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중 마을 내의 성곽을 기록 할 때에는 필자가 직접 답사하고 성곽의 길이와 높이까지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여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이밖에도「공주공자손계파(公州公子孫系派)」, 정협의 삼종조(三從祖)가 지은「제종완의서(諸宗完議序)」, 사대부가의 도리를 밝힌「여추하초인상약서(與楸下樵人相約序)」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이처럼 19세기 무렵 특정 지역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기록은 거의 유례가 드문 선구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정협이 이와 같은 국동리와 주변마을의 사정을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지역에 기반을 둔 향촌지식인이었음을 대변해 준다.
이외에도 이번 전시에서는 1900년대 어간까지 기록 된 정만원의 일기와 ‘국동정씨’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칠노회첩(七老會帖)’, 수연시(壽宴詩)의 기록과 호패류 등 집안에서 전승되어온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첫댓글 조선후기 문인 정하언의 삶과 예술적 공간(영일정씨)에 대하여 신간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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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동리 정착전을 살펴보면 경상도 영일(오천)에서 고려시대 성주배씨꼴에 문정공(정사도)이 잠시 정주하다가 경기도 파주시 영태리에서 정연공(병조판서) 자손으로 병자호란의 피신을 전라도 익산군 여산면에원수리에서 정석기공이 계시다 가 공주목사 정무공에 의해 공주 국동마을에 입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