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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125. [역경의 열매] 곽희문 (1-12) 인질극 참사 발생 나이로비는 나의 영적 전쟁터
지난 21일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웨스트게이트란 쇼핑몰에서 소말리아 이슬람 테러 단체가 인질극을 벌여 72명이 숨지는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웨스트게이트는 내가 사역하는 고로고초 엘토토 유치원과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사고가 난 시간, 우리는 예배를 위해 고로고초에 있었고 소식도 나중에 들었지만 마음 한켠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든지 내가 그 자리에 가 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폭탄 테러와 갖가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나이로비. 가끔씩 이곳은 전쟁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사람들은 위험의 척도를 재며 전쟁터로 평하겠지만 내 경우는 ‘영적 전쟁터’로 보이는 탓이다. 바로 이곳에서 나는 아내, 딸과 함께 6년째 살고 있다.
인생의 묘미 중 하나는 평범하게 지내던 삶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경우가 바로 이 ‘모범사례’에 해당된다. 그러나 나는 이 극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 비밀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우연한 사건들이 연결되고 이어진 것은 결국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음을 말이다. 정답을 알아버린 내 마음은 평온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친다. 외부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악조건이나 어려움도 내 속의 평강을 깨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2006년 당시 38세였던 나는 서울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하며 아내, 7살이었던 딸과 함께 아주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명문대 출신에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나서인지 학원이 잘돼 수입도 쏠쏠했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던 나는 잘 풀려가는 인생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신나게 보냈다. 물론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종교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을 만큼 스스로 행복했다. 이런 내게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이 덜컥 일어났다.
그해 겨울로 기억된다. 친구들과 어울리다 술이 얼큰해진 채 귀가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아내와 딸이 부둥켜안은 채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깜짝 놀라 사연을 들어보니 한편 어이가 없었다. 케냐 고로고초에 사는 한 소녀의 어렵고 힘든 삶을 소개한 동화책을 함께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쓰레기를 주워먹고 학교도 못 가는 이 소녀의 이야기가 너무 불쌍해 함께 울고 있었던 것이다.
딸과 아내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진짜 슬프게 울었다. 내가 감성이 메말라서인가. 뭐 이런 정도에 우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불쌍한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어깨를 다독였다.
고로고초는 지역명이다. 바로 이곳이 내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오게 될 줄 이때만 해도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고로고초는 케냐인들이 사용하는 스와힐리어로 ‘쓰레기더미’라는 뜻이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나오는 모든 쓰레기를 모아 버리는 곳이 바로 고로고초였다. 이 쓰레기장 주변에는 쓰레기 음식물을 먹거나 또 폐품을 건져 하루하루를 지내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곳의 한 소녀 이야기가 모녀의 눈물샘을 자극한 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이곳을 도울 수 있는 NGO 단체를 물색했고 한 단체의 후원회원으로 등록해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에 나섰다. 아내와 딸과 한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또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곽희문 (1) 인질극 참사 발생 나이로비는 나의 영적 전쟁터
* [역경의 열매] 곽희문 (2) 케냐 소녀 후원하던 온가족 "우리 케냐로 갈까?"
* [역경의 열매] 곽희문 (3) 기약없이 내뱉은 말까지 모두 이뤄주시는 주님
* [역경의 열매] 곽희문 (4) 예수 영접 1년만에 모든 것 내려놓고 케냐로
* [역경의 열매] 곽희문 (5) 합창단 지부장 내려놓고 쓰레기촌에 유치원을
* [역경의 열매] 곽희문 (6) 유치원 개원의 첫번째 과제 '불신의 벽을 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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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희문 선교사 약력=1969년 서울 출생. 고려대 행정학과 졸업. 전 청출어람학원 원장. 현재 케냐 나이로비 엘토토 미니스트리 대표
***[역경의 열매] 곽희문 (2) 케냐 소녀 후원하던 온가족 “우리 케냐로 갈까?”
우리 가족이 케냐 고로고초 쓰레기촌 어린이를 위해 정기후원으로 돕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딸이 자신이 다니는 초등학교 친구들에게도 저금통을 나눠주며 돕기를 권유했고, 우리가 사는 일산의 호수공원에까지 나가 어깨띠를 두르고 일명 ‘100원의 기적’ 캠페인을 펼쳤다. 어려움 없이 살아온 딸에게 비슷한 나이의 고로고초 소녀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고 이 때문에 돕고 싶은 마음이 여러 행동으로 연결된 것이다. 여기엔 아내도 적극 동조했다.
그런데 이런 순수한 우리의 나눔운동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도움을 주는 NGO단체가 우리 활동을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사에 알려줬는지 우리 모금 모습을 취재해 간 것이다. 이 내용은 저녁 9시 뉴스에 방영됐다. TV뉴스의 위력은 참으로 컸다. 의도와 달리 우리 가족이 화제의 인물로 세상에 떠버린 것이다. 우리는 “고통받는 지구촌 이웃을 위해 발벗고 모금하는 갸륵한 가족”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내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말은 마음에 담긴 생각이 언어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건 그렇지 않았다. 아내와 딸에게 나도 모르게 “우리 그냥 케냐로 갈까?”란 말을 한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쉽게 내뱉는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을까” 하는 말의 변형이었다. 당연히 아내와 딸이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뛸 줄 알았는데 반응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아내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동조의 뜻을 보낸 것이다. 나는 내친김에 더 세게 이야기했다. 아내가 만류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 학원 정리해 재산도 다 나눠주고 상민(딸)이도 데려가자.”
그러나 아내는 여기에도 신뢰를 보내며 긍정을 해주었다. 나는 당장 농담이었다고 무르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안했다. 정말 케냐로 가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재미있는 인생이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이 일을 정말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다. 그 결과 우리가 아프리카에 가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NGO나 선교전문단체의 선교사 파송을 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NGO 대부분이 기독교정신으로 출발했고 구성원이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생짜 비기독교인이었다. 교회를 다녀야 파송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 상황을 비로소 인지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2007년 3월 어느 주일날, 누구의 인도함도 없이 자의로 교회에 출석했다. 이는 부족한 우리 부부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쓰시겠다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교회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목사님 설교는 표현이나 내용이 이해가 안 되니 자장가처럼 들렸고 즐기던 술 담배는 도저히 끊지 못했다. 난 2층에 있던 교회의 예배 후에 1층에 있던 삼겹살집에서 소주를 마시곤 했다.
이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방향키 역할을 해 줄 집사님 한 분을 붙여주셨다. 그분은 내가 기독교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도 쉽게 받아넘겼고 중보기도학교에서 훈련받을 것을 권유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이 이곳으로 인도하라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이다. 난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그 중보기도학교가 신청자가 많아 오히려 면접 후 선발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와 맞물려 NGO에서 케냐지부장을 모집하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꿈이 이루어지는가 흥분이 되었다. 일단 중보기도학교 면접에 응시해보기로 했다. 여기서 난생처음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역경의 열매] 곽희문 (3) 기약없이 내뱉은 말까지 모두 이뤄주시는 주님
교회 다닌 지 3개월 된 햇병아리 신자가 깊은 영성을 체험하는 중보기도학교 입학생이 되기 위해 면접을 보러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면접관인 두 명의 여선교사가 나를 골방에 앉혀 놓고 대뜸 “형제님이 먼저 기도해 주시죠”라며 고개를 숙였다. 기도하는 수준도 면접에 포함되는 것이라 짐작됐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목소리를 내어 남 앞에서 기도해 본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못한다고 할 순 없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드디어 내 입에서 기도가 나왔다.
“주님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늦어서 죄송한데 절 받아주시면 안될까요. 잘못 살아서 안 받아주셔도 할 말은 없지만 받아주시면 이제 안 떠나겠습니다.”
내 의지와 다르게 튀어나오는 기도였다. 초등학생 수준, 아니 유치원생 같은 기도였다. 이와 동시에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내 몸에 이렇게 많은 눈물이 저장돼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눈물을 흘리면서 이 눈물의 근원이 궁금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실체감이 느껴지면서 완악한 내 안의 나를 울게 만들고 있었다. 스스로 울었다는 사실은 내 인생에 엄청난 사건이었다. 외부의 특별한 힘이 내게 작용한 것이 분명했다. 후일에야 그 힘이 바로 ‘성령’이었음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난 눈물 속에서 하나님께 나의 잘못을 고백했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난 이날 주님을 뜨겁게 또 감격적으로 만났다. 중보기도학교 면접시간의 기도가 나를 변화시킨 것이다.
그러니 중보기도학교를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주 이어진 케냐지부장 면접은 여지없이 딱지를 맞았다. 사실 내가 가진 신앙경력으론 언감생심이었다. 대신 6개월간 이어진 중보기도학교를 통해 신앙에 대한 다양한 훈련과 지도를 받았다. 그동안 믿지 못했던 ‘노아의 홍수’ 등 성경이야기들에 대한 의문도 풀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키는 일은 사실 힘들었다. 나는 강사들에게 성경적 의문에 대해 가차없이 질문을 퍼부었고 이 과정 속에서 조금씩 빛을 찾아 나가고 있었다. 속사람과 겉사람이 계속 싸우는 좌충우돌 속에서 오랫동안 눌어붙었던 죄의 찌꺼기들을 하나 둘 처리해 나갔다.
돌이키면 나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었다. 그분이 발걸음을 먼저 떼면 나는 따라갔고 그때 그 사건과 상황을 만든 것은 나를 향한 연단과 정리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나는 선택되고 붙잡힌 행복한 크리스천이었다.
지부장 모집에 탈락했지만 고로고초 어린이들을 모아 생긴 합창단이 한국에 오는데 언어통역 자원봉사를 해 줄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다른 때 같으면 ‘아니오’라고 했겠지만 신앙의 깊이를 알아가던 나로서는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네’를 했다. 아내와 나는 졸지에 40여명의 합창단 어린이들을 돌보는 ‘마마’ ‘파파’가 됐다.
열심히 봉사했다. 빨래도 해주고 운전수에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오랜 시간 이들과 지내다 보니 합창단 어린이들은 청중들에게 적당한 감동과 안타까움, 놀라움을 주는 앵무새들이었다. 이들에겐 정작 예수님이 주는 감사와 기쁨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물만 끌어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깊이 실망했다.
나도 케냐에 들어가 사역을 한다고 했을 때 이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갑자기 현장 의욕이 식었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선교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합창단을 데리고 케냐로 들어가게 됐다. 현장을 볼 수 있도록 NGO가 배려해 준 것이다. 내가 내뱉은 말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곽희문 (4) 예수 영접 1년만에 모든 것 내려놓고 케냐로
케냐를 잠시 방문한 것을 계기로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이 불타올랐다. 현장에 가면 마음이 돌아섰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케냐 사람들, 그 검은 얼굴들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국 NGO에서 합창단 관련 케냐지부장이란 직책을 주었다. 우리 가족은 예수 믿은 지 정확히 1년 만인 2008년 3월, 나이로비행 비행기에 올랐다.
숨 가쁘게 이어진 우리 가족의 삶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몰아가심’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 난 내가 걸어왔던 길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 초보인 내게 ‘선교사’란 딱지도 참 어색했다. 난 하나님이 만드신 속성 선교사였다. 힘든 결정과 판단을 빠르게 내리게 한 것은 나를 둘러싸는 포근함, 평안, 기쁨이었다. 그것은 인간이나 환경이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잘되던 학원을 정리한 뒤 나온 물질을 아낌없이 나누었다. 그러고 훌훌 떠나는 모습에 어머님은 물론 형제들, 지인들 모두 놀라고 또 놀랐다. 정신이 확 돌아버린 것으로 이해를 했다. 모두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고, 딸 교육은 어떻게 시키며, 장래가 어떻게 될지 혀를 찼다. 그러나 그것을 염려했다면 난 케냐로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초보신자라도 그것을 초월했기에 비행기 안에서 태평스럽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나의 변화와 함께 아내 역시 동일한 변화를 겪은 것도 신기하다. 나나 아내 중 한 사람만 변화돼 상대를 물고 늘어지면 우리의 케냐행은 분명 물거품이 된다. 그런데 아내가 더 적극적이었다.
아내의 우상은 딸이었다. 남들보다 영민한 딸을 두었다고 확신한 아내는 상민이를 대한민국 상위 1% 리더로 키우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딸의 교육에 열과 성을 바쳤다. 그런데 그것을 내려놓고 더구나 그 소중한 딸을 데리고 케냐로 간다는 사실. 이것은 나 이상의 ‘내려놓음’이 있어야 가능했다.
케냐 생활이 시작됐다. 아프리카를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원시부족과 동물의 왕국을 연상하겠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것은 똑같다. 다만 삶의 질과 문화, 음식이 다를 뿐이다.
우리 가족은 자리를 잡고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내 업무는 현지 합창단 어린이들이 노래훈련을 잘 받고 해외공연을 잘하도록 스케줄을 짜고 돕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연스러움보다 인위적인 흐름에 ‘이건 아닌데’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 상황을 잘 극복하고 오히려 기도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와 딸을 울게 하고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쓰레기 더미 고로고초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쓰레기차가 오면 남보다 먼저 고르려고 벌떼처럼 사람이 모여든다. 이 가운데 먹을 만한 음식이 보이면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들어갔다. 쓰레기에서 줍고 먹고 이를 통해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은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아이러니였다. 특히 어린이들은 이 속에서 무엇이 신나고 즐거운지 깔깔거렸다. 난 그 천진한 웃음을 보며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이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 들어간다면 이들은 더 이상 불행한 아이들이 아니고 정말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지부장 1년 만에 나는 용단을 내렸다. 사표를 던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일은 준비하거나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래야 될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곽희문 (5) 합창단 지부장 내려놓고 쓰레기촌에 유치원을
합창단 지부장 사표를 쓰고 나니 홀가분했다. 더 이상 갈등을 안 해도 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가 신학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한 신앙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 하나님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한 지인이 “어렵게 용단을 내리고 아프리카에 왔는데 돌아가느니 한국에서 학원 운영 경험을 살려 슬럼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봉사활동을 계속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것도 선교일 수 있었다. 그러나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을 지켜본 나로서는 나 역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일단 귀국을 결심했다. 가구를 정리하고 짐을 싸다 우리의 케냐행을 부추긴 쓰레기장 고로고초를 아내와 다시 한 번 찾았다.
쓰레기장은 여전했다. 치열한 생존터였다. 서로 더 나은 것을 주우려고 바둥거렸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아이가 혼자 놀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그 아이의 손 안에 어린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인체의 안구’가 쥐여져 있었다. 우리 부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이런 것을 갖고 논단 말인가.
우리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며 할 말을 잊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아내와 딸이 책을 통해 본 고로고초 소녀 ‘소피아’의 가슴 아픈 삶 때문이었다. 그런데 1년6개월 만에 케냐 생활을 접고 돌아가려는 이때, 고로고초에서 이 아이를 또 보여주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래 주님은 아이들을 위해 일하라고 이곳에 보내신 것인데 엉뚱한 일만 하다 이제는 돌아가려 하다니. 원래 가족이 온 목적대로 일해야 하는 것 아니냐. 놀 것이 없어 사체 일부를 갖고 노는 이 척박한 땅의 아이들을 위해 너희가 발 벗고 일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한국행 전에 우연히 한번 더 들른 고로고초. 하나님은 손해나는 장사를 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억지로 나를 끌어 이곳에 오도록 만드셨는데 떠나려는 나를 또 다른 어린아이를 만나게 함으로써 붙드시는 것 같았다.
“여보. 우리 그냥 여기서 일하자. 저렇게 할 일 없이 떠도는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자.”
아내는 이번에도 오케이였다. 신기할 정도로 잘 따라주는 아내, 크리스천이 된 후 아내는 정말 변해 있었다. 나와 아내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앞뒤를 재지 않았다. 필요하니까, 마음에 감동이 와서, 어린이들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하나님이 하라고 시키는 것 같아 그저 실행에 옮기는 것뿐이었다.
애써 싸 놓았던 짐을 다시 풀었다. 섭섭하고 후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마음이 편안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했다. 쓰레기촌 어린이를 잘 돌보는 길은 유치원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슬럼가에 유치원을 열려고 시작을 해보니 장소 선택부터 돈도 많이 들고 풀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나님, 쓰레기장과 가깝고 임대료가 싼 좋은 건물을 주세요.”
며칠을 기도했지만 세 가지를 다 갖춘 그런 곳은 없었다. 그런데 쓰레기장 바로 뒤 건물인데 임대료가 저렴해 가 보았다.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다. 건물이 낡고 파리떼가 들끓는 폐가였다. 사람이 서 있는데도 쥐들이 자유롭게 건물 사이를 드나들었다. 아내가 기겁을 했다. 이날 밤 집에 돌아와 한숨을 쉬는데 순간 ‘폐가를 쓸 만한 곳으로 직접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스쳤다. 다음날 이곳 집주인을 만나 계약한 뒤 대대적인 집 손질에 들어갔다. 그리고 간판을 내걸었다. 보라색 페인트로 엘토토유치원이라고 써 붙였다. 엘(EL)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이란 뜻이고 토토(TOTO)는 케냐 스와힐리어로 ‘아이들’이란 뜻이다.
***[역경의 열매] 곽희문 (6) 유치원 개원의 첫번째 과제 ‘불신의 벽을 깨라’
엘토토유치원이 문을 열었다. 파리떼를 쫓고 쥐구멍을 막고 벽지를 바르고 페인트칠을 하니 제법 번듯한 모습을 갖췄다. 어린이를 모집하는 데 유치원비를 받아야 하나 안 받아야 하나 고민됐다. 그러나 이들의 자존심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 보육비로 20실링(300원)을 받기로 했다. 간식비도 안 되는 돈이었다.
아이를 모으는 일이 남았다. 엄마들이 쓰레기를 줍는 동안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이 생긴다면 모두들 좋아할 것이라 판단했다. 나는 마을 반장 아주머니에게 엘토토 취지를 설명하고 유치원생을 모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반응이 시큰둥했다. 알았다고 했는데 연락이 없었다. 애가 탄 내가 또 찾아갔다.
“엄마들이 당신을 믿을 수 없대요. 우선 유치원비가 너무 싼 것이 수상하고 애들 사진만 잔뜩 찍고 도움을 요청해 당신 배만 불리게 해주는 것 아니냐고 그러네.”
이들은 그런 경험을 당한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애들이 마음만 다치고 유치원이 흐지부지 문 닫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나는 선교사이고 그러지 않는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나는 엄마들을 직접 만나겠다고 했다. 그들이 사는 동네이름은 ‘덤핑사이트’로 불렸다. 이곳은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무장경찰들도 무서워하는 곳이었다. 나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작정 이곳으로 들어갔다.
“여러분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엘토토유치원은 절대 여러분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후원자도 지금 가진 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라고 시키니 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좋은 대학까지 가게 해 훌륭한 삶을 살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한다고 진실한 표정과 목소리로 호소했다. 나는 한국에서 고등학생을 가르치던 입시학원 선생이었다고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웅변하듯 엄마들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이날 유치원으로 돌아온 우리 부부는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다음날 반장 아주머니는 유치원을 방문해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물은 뒤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정확히 일주일 뒤 엘토토는 33명의 어린이를 받아 정식으로 개교할 수 있었다. 2009년 9월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를 했고 그 말에 그들이 순종하고 따라온 것이라 여긴다. 엘토토의 아침은 활기차게 시작된다. 쓰레기 악취가 진동을 하고 먼지가 날려 환경은 엉망이지만 환한 얼굴의 어린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7시 반이면 유치원에 나타난다. 나는 3∼4세 베이비반, 5∼6세 유아반, 7세 유치반으로 세 클래스를 만들었다. 각 반을 현지 전문교사를 채용해 맡기고 교육과정은 우리가 짰다. 이때를 위해 하나님은 오래전에 우리 부부에게 학원을 운영케 하셨으니 대차대조표가 정확한 하나님이셨다.
아침기도회 시간과 점심식사 시간에 어린이들은 기도하기 위해 모두 고사리 같은 손을 모은다. 우리 부부는 이 어린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얼굴도 천진하고 예뻤지만 우리에게 착착 감기며 좋아는 것에 보람과 기쁨이 솟아났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다. 일방적인 사랑은 소통이 끊긴다. 우리는 아침마다 어린이들과 수십 번의 뽀뽀와 포옹을 하며 사랑을 확인했다. 내가 없는 날은 나를 찾으며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난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다. 한국에 안 돌아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이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그것을 넘어서야 더 큰 상급이 있는 것이 신앙의 법칙인 것 같다.
***[역경의 열매] 곽희문 (7) 재정 바닥에 “돈벌어 보낼게요” 아내 홀로 한국행
엘토토유치원은 금방 유명해졌다. 좋은 환경에서 잘 가르치고 점심도 잘 먹이니 어머니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고마운 곳이었다. 우리 부부도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너무 예뻐 아낌없이 정을 주었다. 그것은 사랑의 파장이 되어 번져나갔고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되돌아왔다.
우리 가족은 인근 현지인 교회에 출석했었다. 그러다 어느 주일날은 유치원에서 아내와 딸 상민이, 사역을 도와주는 우현 자매와 넷이서 자체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주일날에도 유치원을 나와 이리 저리 둘러보던 아이들이 신기한 듯 예배드리는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아이들을 오라고 손짓해 같이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이 숫자가 매주 늘어났다.
주일날도 무료하고 따분하게 보내야 했던 아이들이 우리 예배에 모여들었고 우리는 이 어린이들과 함께 예수님을 찬양하고 성경 말씀을 나누었다. 처음엔 유치원생만 오다가 나중엔 고교생, 대학생까지 점점 인원이 늘었다. 나의 부족한 설교에도 눈망울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듣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설교 준비를 더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느 사이 아이들이 놀랍게 변화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치원만 하려고 했던 나를 이제 복음의 도구로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참으로 황공하고 감사했다. 유치원이 이제 주일은 인근 주민도 출석하는 번듯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나는 학부모들에게 예배에 참석하라고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다. 그런데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에 부모들도 교회에 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오면서 부모들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심령을 파고들어가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고 삶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느끼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만든다. 이것이 복음인 것을 나는 엘토토교회를 통해 배우고 깨달았다.
이렇게 유치원과 교회를 운영하며 지내던 우리에게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퍼주기만 했으니 재정이 바닥을 보인 것이다. 조금 갖고 있던 예금도 다 썼고 선교후원금도 거의 없다 보니 적자로 운영되는 유치원과 교회가 써야 할 돈이 시급했다. 그렇다고 도움을 요청할 만한 곳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내와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다 결론이 나왔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운영비를 보내주자는 것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나보다는 아내가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여기는 내 몫이라 여겨졌다. 우리는 원치 않게 생이별을 해야 했다. 엄마의 손길을 받지 못하게 된 딸은 슬퍼하지 않고 공항서 씩씩하게 “가서 돈 많아 벌어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꼬마선교사다웠다.
그런데 속사정을 모르는 이곳 학부모와 성도들은 우리가 부부싸움을 해서 아내가 한국에 가 버린 것으로 오해했다. 기도하면서 “마마와 파파가 다시 화합하게 해 주세요”란 말을 유독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아내는 한국에서 학원 강사를 하며 열심히 송금을 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이 돈으로 거의 1년을 버티며 유치원과 교회를 운영했다. 아내와 전화하면서 필요한 것을 이야기할 때마다 아내는 돈이나 물건을 보내왔다. 아내가 간 것이 백번 다행이다 싶었다.
우리의 생이별 사역을 지켜본 선교후원자들이 도움을 조금씩 주시면서 아내는 다시 이곳에서 합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 일은 이곳 성도들에게도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우리의 모습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유치원생 규모와 주일예배 인원이 늘면서 넓은 곳으로 이사를 하고픈 거룩한 욕심이 생겼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가 막힌 방법으로 우리에게 멋진 곳을 예비해 놓으셨다.
***[역경의 열매] 곽희문 (8) 유치원 안정되자 지역 비행청소년 선교 소명이
엘토토유치원은 쓰레기장 옆이라 냄새와 파리떼 때문에 늘 골치였다. 그런데 근처에 있던 케냐 청각장애인협회가 이사를 하면서 임대공고를 냈다. 운동장도 있어 우리에겐 최적이었다. 바로 달려가 임대를 요청하니 유치원이 사용하면 아이들 때문에 건물이 망가진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 달 전부터 청각장애 어린이를 모아 북찬양 연습을 시작했는데 이 사실을 알고 금방 표정이 달라졌다.
“청각장애 어린이들을 잘 보살펴주세요. 그래서 특별히 허락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 새로 이사를 한 넓은 건물에서 축구도 하면서 신나게 놀 수 있었다. 뒤뜰에 허술하지만 대충 함석지붕을 얹어 강당도 만들고 아이들 유치원복도 디자인해 입혔다. 70벌의 원단비 150만원은 한 자매가 때맞춰 헌금해 은혜롭게 채워졌다.
유치원생에 단체복을 입히니 원생들은 물론 학부모들의 긍지가 대단했다. 이제 엘토토는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유치원으로 부상하며 서로 들어오려는 곳이 되었다.
유치원이 안정되자 나는 지역 슬럼가 청소년들을 선교대상으로 삼았다. 할 일없이 본드를 흡입하며 어슬렁거리고 있는 그들에게도 복음이 나눠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문제 청소년들을 엘지아(El Gia)라고 불렀다. 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이고 지아는 스와힐리어로 ‘거리’라는 뜻이다. 이들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바르게 살자며 몇몇 비행 청소년들을 유치원에 데리고 왔다. 한국이름을 지어주고 씻기고 새 옷을 입혔다. 이 선교하는 과정에서 나는 본드에 취한 한 청소년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다리를 맞아 뼈가 부서져 기절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만약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못했다면 난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순교도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다리 때문에 한국에 치료도 받으러 가야 했고 지금도 온전치 않지만 선교사 훈장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청소년들은 유치원에서도 물건을 팔아먹는 등 구습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그저 인내하며 기다렸다. 사랑만이 이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불량 청소년들을 데려와 순화시키는 일에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너무 위험하고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키시니 하는 것뿐이었다. 나도 힘들고 현재 유치원 운영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자꾸 하라는 감동을 주시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엘지아들을 모아 1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엘지아들은 암담한 가정환경과 주변이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방황하며 사고를 치게 만들었다. 계속 사랑으로 보듬고 격려하니 엘지아들도 서서히 변화를 보였다. 학교를 가겠다고 했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엘토토 북찬양단을 만들게 된 사연이 있다. 고로고초에서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데도 그냥 걸어가던 어떤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다행이 많이 다치지는 않아 내가 집에 데려다 주었는데 이 아이가 청각장애아인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조차 ‘듣지 못하는 바보’라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알고 지내던 아프리카 전통 북연주자인 프란시스를 찾아가 청각장애아들을 모아 북찬양단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가 내가 하도 졸라대니 일단은 해보자고 승낙했다. 케냐는 말라리아에 걸린 후유증으로 청각을 잃은 아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역경의 열매] 곽희문 (9) 한국어로 성경공부 ‘복음학교’ 6곳까지 늘어나
엘토토유치원에 이어 청소년을 위한 엘지아가 만들어졌고 세 번째 사역이 바로 청각장애 어린이를 위한 엘고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북’이란 이름의 찬양단이다. 소리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데 음악을 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청각장애아도 인간의 심장 소리와 가장 닮은 북소리는 낼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북찬양단을 만들 수 있었다.
8명을 모아 연습을 시작했다. 소리로 하는 연습이 아니라 눈짓과 몸짓으로 맞추는 것이니 몇 배나 힘이 들었다. 지도교사 프란시스가 인상을 쓰면 못한 것, 웃으면 잘한 것이 되었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연습하면서 함께 기도하고 예배도 드렸다.
이들이 외교관배우자협회가 주최한 자선 만찬회에 초대돼 첫 연주를 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 내는 하모니에 참석자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나도 울컥 눈물이 나왔다. 그만큼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북찬양단원들도 자신이 무엇을 해냈다는 뿌듯한 자신감과 함께 벅차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누구도 이렇게 외교관들이 잔뜩 있는 장소에서 멋진 공연을 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엘고마 공연 내용은 동부아프리카 유력 일간지 ‘데일리네이션’에 게재됐고 이 때문에 북찬양단은 일약 유명해졌다. 역시 하나님은 멋진 분이셨다.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표정과 몸짓으로 호흡을 맞춘 단원들이 참 자랑스러웠다.
복음 사역에 탄력을 받은 나는 쓰레기장인 덤핑사이트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시작했다. 스태프들이 큰일 난다고 했지만 난 자신이 있었다. 처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현지인들이 하나둘 모였고 이제는 주 2회 예배가 정착됐다.
아직 난 선교사로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무모하더라도 믿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철저히 느낀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성령)이 확고하면 그곳엔 반드시 능력과 기적이 따른다.
나와 아내는 감성이 풍부한 편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느껴지고 안타까운 일을 만나면 이와 연결된 사역을 저지르길 좋아한다. 하나님이 나의 이런 성격을 쓰시는 것이라면 선택을 잘하신 것이란 생각도 든다.
사역들이 늘면서 내 업무도 더 바빠지고 물질도 더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필요를 항상 하나님이 채워주셨다. 절대 넘치는 법은 없었다. 주어지는 것으로 아끼고 아껴 사용하면 가능했다. 무리하게 하지 않았다.
유치원에 청소년 선도, 북합창단, 덤핑사이트 예배에 이어 인근 중·고등학교 교장을 찾아갔다. 난 한국에서 온 선교사인데 1주일에 한 번 시간을 주면 원하는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성경을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뭔가 도움을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난 그럴 형편은 아니었다.
열심히 기도했더니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복음학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기독교를 주제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면 기독교 복음을 습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학교를 돌며 ‘복음학교’를 열었다. 이렇게 시작한 복음학교가 6개까지 늘어났다. 나는 신이 나서 가는 학교마다 기독교 복음을 한국어로 전파했다. 따라서 이들이 가장 먼저 습득한 한국어는 ‘십자가’ ‘하나님’ ‘예수님’ ‘교회’ ‘사랑’ ‘은혜’ 등의 단어였다.
내가 이곳 케냐에서 이런 사역들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후원자들의 기도와 정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수시로 단기선교팀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엘토토유치원을 찾아주어 큰 힘이 됐다. 그들의 물질과 정성, 달란트가 모여 이곳 사역이 점점 풍성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며 도우신다.
***[역경의 열매] 곽희문 (10) 광주의 한 작은교회 목사님 “선교비는 우리가…”
아내가 한국에서 학원강사로 번 돈을 보내 사역하던 일이 1년 만에 종료될 수 있었던 것은 광주의 한 귀한 목사님 덕분이다. 우리 부부의 사연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아내 강동희 선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번 보자고 하셨단다. 아내는 광주로 목사님을 뵈러 갔는데 예상 외로 작은 건물의 2층 임대교회였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가 필요한데 부부가 이렇게 떨어져 지내나요.”
“꽤 들죠. 엘토토에 앨고마에 엘지아까지 거두어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내가 기도하고 성도들과 의논하고 연락 드릴게요.”
멀리서 왔는데 식사도 한 끼 나누지 않고 돌려 보내는 그 목사님에게 섭섭했다고도 한다. 200석 정도 되는 그 교회는 사택도 교회 한쪽을 막아 사용하는,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는 교회가 아닌가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교회 목사님에게서 전혀 예상치 않은 연락이 왔다.
“강 선교사님. 우리 교회에서 말씀하신 선교비를 책임질 테니 케냐로 들어가세요. 부부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고 아내와 한 번 만난 것뿐인 광주 M교회 목사님. 도대체 우리의 무엇을 보고 매달 거금을 주시겠다고 한 것일까. 내가 믿는 하나님이 M목사님이 믿는 하나님과 같고, 또 같은 아버지시니 서로 좀 돌려쓰라고 명령해 주신 것이 분명했다. 이 목사님은 건축헌금으로 모아놓았던 거금도 엘토토학교 건립에 아낌없이 주셨다.
아내의 귀환을 가장 좋아한 것은 역시 딸 상민이다. 딸은 혼자 지내며 성큼 성숙해져 있었다. 엘토토교회 유치부 반사로 활동하며 이것저것 사역을 도왔다. 한국에 있었다면 아내의 뜻대로 ‘상위 1% 리더’로 성장하는 것에 만족했을 아이였다. 그러나 상민이는 부모의 뜻을 따라 케냐에 왔고 선교사명을 다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이런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내가 이곳에 다시 오면 내가 그동안 펼쳐놓은 사역들을 함께 해 나갈 것으로 나 역시 흐뭇했다. 내가 조금은 편해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웬걸, 아내는 스스로 사역을 찾아 일을 만들어 냈다. 정말 못 말리는 부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보 예전부터 봐 왔던 케냐 마사이족 카지아도 마을로 선교 갔으면 해요. 그곳은 정말 교회도 없고 학교도 없잖아요.”
나도 몇 차례 다녀온 그곳은 문명과 담쌓은, 오지마을이다. 원시적인 삶을 사는 그곳을 아내가 선교한다니 사실 걱정이 앞섰다. 당장 무슨 일이 생겨도 외부에 전할 수단이 없는 곳이었다. 다행히 대학교수로 은퇴한 마사이족 출신 노인 한 분이 아내와 동역자로 따라나서 주었다.
아내는 나이로비에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카지아도에 도착하니 바로 근처에서 표범 우는 소리가 들려 몸이 오싹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아내는 대여섯 명을 모아 놓고 성경공부를 가르치며 복음을 증거했다. 한번 가면 길게는 3주 정도 머무르며 복음을 전했다. 아내는 이곳 마사이부족을 위한 복음학교를 짓는 데 신경을 쓰느라 한동안 나이로비를 나오지 못했다. 이렇게 세워진 학교가 바로 ‘올로이 랄레이 복음학교’다. 우리는 이 학교를 다 건립한 뒤 지역마을에 기증하고 운영만 맡기로 했다.
이곳은 무슬림이 많은 지역이라 위험도 있고 복음전파에 대한 방해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어려움은 있어도 결국 승리는 우리 것이다. 우리 부부는 케냐인들에게 무엇을 준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그저 그들과 함께 지내며 사랑을 배달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하신다.
***[역경의 열매] 곽희문 (11) 성경퀴즈대회 ‘골든바이블’… 6개 학교 불꽃 경쟁을
의욕과 활기가 넘치는 청년들이 케냐로 자원봉사를 와 6개월, 1년씩 사역을 돕는 것도 큰 힘이 된다. 또 마음에 소원이 일어난 기독 청년들이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이곳으로 날아왔다. 이들은 정말 열심히 땀 흘렸다. 이들의 땀방울이 모여 엘토토와 엘지아, 엘고마, 복음학교, 부족전도 등 모두가 열매를 맺고 자리를 잡았다. 청년들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해 칭찬하고 박수쳐주고 싶다. 그러나 사람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최고이기에 생략하려 한다.
그런데 이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많은 것을 배우고 얻어 간다고. 난 청년들이 오는 것을 언제나 환영했고 믿음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불편하지 않으냐고 주위에서 물어보기도 했는데 난 아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삶과 사역이 더 조심스러워지고 긴장되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
엘토토유치원이 두 번째 졸업생을 냈다. 가운까지 빌려 입고 멋진 졸업식을 치렀다. 그런데 이들을 이어 가르칠 초등학교가 아이들을 전혀 보살펴주지 못한다는 데 부모들의 고민이 불거졌다. 그동안은 우리가 먹이고 씻기고 하루 종일 보살폈는데 초등학교는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쓰레기장에서 일해야 하는 부모 입장에선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문제를 놓고 스태프와 교사 중심으로 회의를 열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시작할 교실이 없으니 졸업생들은 근처 초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교사들은 생각이 달랐다. 일단 유치원 졸업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 1학년 한 반만 열면 되니 초등학교까지 만들자는 것이었다. 부모들도 그렇게 될 줄 믿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안 된다고만 생각했는데 방법을 찾아보니 칸막이를 막으면 교실 한 칸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엘토토는 결국 졸업생이 밀려 나오는 통에 초등학교까지 시작하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학부모와 아이들은 좋아서 환호성을 질렀다.
하나님은 2012년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셨다. 초등학교까지 수용해 넉넉하게 공부할 수 있는 더 넓고 안락한 장소로 학교를 옮기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로 사용됐던 건물주가 나를 찾아와 이곳을 빌려 쓸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마침 기존 건물주인 청각장애인협회도 우리에게 나가달라고 요청하는 시기와 맞물려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인도하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이곳으로 이사한 뒤 한동안 학교 가꾸기에 힘을 모았다. 새로 칠하고 잡초를 뽑고 먼지를 떨어내고 문패를 달아 멋진 학교로 탈바꿈시켰다. 이곳이라면 초등학교 6학년까지 다 수용할 공간이 되었다.
이사를 한 기념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하나 벌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바로 ‘골든 바이블’이다. 우리나라 TV 프로 ‘골든벨’과 같다고 보면 된다. 성경 내용으로 문제를 내는데 ‘창세기’ ‘요한복음’ 등 2주 전에 범위를 정해 공부하도록 한 뒤 우승자에겐 한 학기 학비를 상금으로 주었다. 처음에 학교들이 시큰둥하더니 우승자가 나오면서 학교 간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6개 학교가 나중에는 성경 교사까지 초청해 공부를 시켜 선수를 내보내는 등 그 열기가 대단했다. 2주마다 골든바이블 행사가 열렸다. 이를 보려고 학생은 물론 학부모, 주민들까지 새까맣게 몰려왔다. 내가 낸 성경 문제를 학생들이 맞히고 박수치고 환호성을 지를 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나님, 보셨죠. 이 많은 사람 모두 창세기를 읽은 셈이 됐잖아요. 제 아이디어 짱이죠?”
***[역경의 열매] 곽희문 (12·끝) “하나님, 케냐 선교사명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성경 퀴즈 ‘골든바이블’ 성공 이후 힘을 받아 청년 대상 바이블 세미나를 열었다. 가난한 이 나라가 잘사는 길은 결국 예수 믿고 복음을 수용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진리를 캐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가 이곳에서 땀 흘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들보다 우리가 나은 것이 무엇인가.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경제적으로 풍요하다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에게 더 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갖고 너희가 이들을 도우라’고 말이다.
본드에 취한 청년에게 쇠파이프로 얻어맞아 다리뼈가 으스러졌던 나는 또 한번 죽음의 위기를 만났다. 하나님은 이 사건들을 통해 인간에게 죽음은 순식간에 찾아온다는 사실, 인간은 결국 천국에 소망을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사실, 내 사역은 언제든지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각인시켰다.
엘지아들이 사는 숙소 기뚜라이에서 자고 아침예배를 위해 운전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반대쪽 차가 내 차로로 역주행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는 순식간에 핸들을 꺾었고 내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한바퀴 돌면서 뒤집어졌다.
“아, 이렇게 죽는 것이구나. 오, 하나님. 제가 이제 주님 곁으로 가는 것입니까?”
외마디 기도가 터져 나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살아 있었다. 주위를 보니 운전석만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찌그러지고 부서지고 난리였다. 목에서 피가 올라왔다. 충격으로 출혈이 된 게 분명했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했고 아내가 급히 달려왔다. 응급처치 후 집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으나 놀란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한 마디가 모든 상황을 잠재웠다.
“여보. 당신이 순교하기엔 아직 때가 차지 않은 것 같아. 더 열심히 사역을 하라는 신호 같아. 마사이부족 사역 가는 길에 다시 전화할 테니 좀 쉬고 있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한번도 큰 사고를 겪은 적이 없던 내가 예수 믿고 왜 이런 일들을 겪는 것일까. 그것은 나의 남아 있는 자아를 내려놓고 더 내려놓고 맨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한 뒤에야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하길 원하시는 표증이란 생각도 든다.
그동안 연재한 엘토토 케냐 사역 소개를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내가 케냐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의 역사를 일일이 다 기술하는 것은 무리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사역이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숨결을 느끼는, 성숙되고 헌신된 크리스천이 되시길 바랄 뿐이다.
나의 엘토토 사역 이야기는 평신도 선교사로 어떻게 부름받아 하나님을 만나고 현장 사역을 펼치는지를 기록한 간증집 ‘복음이면 충분합니다’(아카페북스)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또 ‘엘토토 미니스트리’란 틀 안에서 다양한 사역을 펼치는 내용을 블로그(blog.naver.com/soyeon4895)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단 기간에 예수 믿고 부름받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음의 사명, 그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나는 지금 이미 승패를 알고 있는 게임을 뛰고 있다. 다소 고전을 하고 위기를 넘기고 고통이 있어도 끝내 우리 팀의 깃발이 번쩍 올려질 것을 나는 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는 선교는 이미 이긴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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