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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9. 05. 15(수) ∼ 05. 29(수) - 14박 15일
장소 : 중국 윈난성 (쿤밍, 따리, 리장, 상그릴라 일원 )
참가자 : 안창성, 한경호, 황경철 (3명)
출국 전 준비 :
1. 중국 비자 발급 (1인 55,000원)
2. 항공권 예약 (1인 324,000원)
3. 쿤밍 한스 게스트하우스 예약 (1인 100,000원)
4. 수하물 1인 23㎏ + 기내 23㎏라서 넉넉히.
전체 일정 : 김해 → 쿤밍 → 따리 → 리장 → 상그릴라 → 리장 → 따리 → 쿤밍 → 김해
윈난성에 대하여 :
1. 날씨 : 중국 윈난(운남)성은 인구 4,714만(2014년) 정도에 면적이 남한면적의 4배이므로 연중 날씨는 한마디로 답할 수 없다. 즉,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횡단산맥의 끝자락이 속하는 고산지대가 존재하고 남쪽으로는 라오스와 접경지역인 아열대 기후가 상존하는 곳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본다면 4계절이 상존하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 관광지 날씨만 소개하면,
-쿤밍(해발 1,900m) : 춘성(春城)이라고 불릴 정도로 1년 내 봄 날씨로 여름은 더운 봄이고 겨울은 약간 추운 봄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 숙소에는 선풍기는 물론이고 냉난방기가 없었다. 저녁은 일교차가 커서 실온은 그리 낮지는 않지만 살짝 추위를 느낄 수 있다.
-따리(해발 2,100m) : 쿤밍과 비슷한 수준이다.
-리장(해발 2,400m) : 리장의 날씨도 연중 봄 날씨이지만 쿤밍과 따리보다는 지대가 높아 온도가 약간 낮은 정도라 보면 된다.
- 상그릴라(해발 3,100m) : 지대가 상당히 높아 아침, 저녁이 되면 조금 춥다.
2. 지리적 특성 : 윈난 성은 중국 남서부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북회귀선이 통과한다. 면적은 394,100
㎢로 중국 전체의 4.1%를 차지한다. 성의 북쪽은 윈구이 고원의 일부를 이룬다. 북서부는 티베트 자치구, 북부는 쓰촨 성, 북동부는 구이저우 성, 동부는 광시 좡족 자치구와 접한다. 서쪽으로 미얀마, 남쪽으로 라오스, 남동쪽으로 베트남과 총 길이 4,060km의 국경을 공유한다.
중국 내에서 초록의 삼림이 우거진 지역으로, 전체에 걸쳐 황량한 바위산이 눈에 두드러진다. 게다가 지형이 복잡하고, 남부의 저지대에는 아열대성 기후도 있으며, 북부의 고산 지대에서는 아한대성 기후도 있어, 다양한 기후대를 가진다. 이 때문에, 동식물 상이 풍부하고, 특히 원예 분야에서는 신종 화훼의 산지로서 알려져 있다. 1월 평균기온은 8~17 °C이고 7월 평균기온은 21~27 °C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2,300mm이고 이 중 절반이 7월과 8월에 집중된다.
지형은 주로 산지로 특히 북부와 서부가 높다. 서쪽으로는 협곡이 있고 동쪽은 고원 지역이다. 윈난의 주요 강들은 산들 사이의 깊은 협곡을 통해 흐른다. 평균 고도는 1,980m이다. 북쪽의 산들이 가장 높아 고도가 5,000m가 높은 반면 남쪽의 산들은 3,000m를 넘지 않는다. 가장 높은 지점은 북쪽 디친 고원의 더친 현에 있는 카와거보 봉으로 해발고도는 6,740m이다. 가장 낮은 지점은 허커우 현 훙허 계곡으로 76.4m이다. 성의 동쪽은 카르스트 지형과 깊은 협곡을 통해 흐르는 항해할 수 없는 강이 있는 석회암 고원 지대이다. 서쪽은 산맥에 의해 강이 남북으로 흐르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강들로 누 강(살윈 강), 란창 강(메콩 강) 등이 있다.
3. 인구 구성 : 윈난은 민족 전시장이라고 일컬을 만큼 많은 종류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으며, 소수민족의 인구가 가장 많은 성이다. 중국 정부에서 공인된 56개의 소수민족 중 25개의 민족이 윈난에 있고, 전체 인구 중 38%가 소수민족이다. 윈난성에서 가장 많은 소수 민족은 리족으로, 400만이 넘는 리족들이 윈난에 살고 있다. 또한 윈난은 소수민족의 천국으로 중국에서는 윈난성밖에 없는 소수민족이 열다섯 부족 정도가 존재한다. 그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리족은 11%, 바이족은 3.6%, 하니족들은 3.4%, 좡족은 2.7%, 먀오족은 2.5%, 후이족은 1.5%에 이른다. 그 외도 타이족, 다이족, 리수족, 라후족, 와족, 나키족, 야오족, 티베트족, 징포족, 부랑족, 푸미족, 누족, 아창족, 지눠족, 몽골족, 두롱족, 만주족, 수이족, 부이족이 있다. 다른 소수민족도 존재하지만, 군집을 이뤄 생활하지 않으며 중국 정부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나시족의 한 가지로 인식되어 공인된 모수오족 같은 종족은 과거에 소수민족을 신청하여 지금 공인된 민족이다.
쿤밍의 경제는 1992년에 중국 전체 도시 중에서 12위를 차지했다. 쿤밍은 중국 남서부의 다른 도시들을 뛰어넘는 세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다. 풍부한 천연 자원과 우수한 지역 소비 시장, 온화한 기후가 그것이다. 윈난의 지리적인 중심에 위치한 덕분에 쿤밍은 중국에서 가장 큰 농산물, 광물, 수력 전기의 생산지 중 하나이자 성의 방대한 자원을 위한 주요 상업 중심지이다.
< 여행의 출발 >
♠제 1 일 (2019. 05. 15. 수) 청도 → 김해 → 상하이 → 쿤밍
오후 2시 39분 부산행 무궁화 열차를 타니 동대구에서 탄 황선생이 반긴다. 구포역에서 내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다가 경전철로 환승,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상하이 항공 카운터에서 체크인하며 짐은 어떻게 되냐고 물으니 쿤밍까지 연결된다고 한다. 환승 시 항상 체크해야 할 점이 수하물 연결인데 수월하게 되어 다행이다. 17시 50분에 상하이 푸동 공항으로 가는 FM 830호를 타니 19시 10분 정시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쿤밍으로 가는 국내선으로 환승해야 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다는 푸동 공항에서 우린 과연 무사히 쿤밍으로 가는 우리 게이트까지 찾아갈 수 있을지.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 그리 걱정이 되지 않았고 또, 이미 인터넷에서 충분히 검색 결과 환승 도우미가 있다고 하니 공항에서 헤맬 일은 없을 듯하다.
< 상해항공은 저가 항공이 아니라서 기내식도 푸짐하게 주는데, 주는 것에 감사해야지 맛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게이트로 나가니 이미 환승할 사람 명단과 안내판을 든 남자 도우미가 환승객 이름을 체크하고 있다. 우리는 환승객이란 걸 의미하는 유대인들의 다윗의 별이 그려진 스티커를 어깨에 하나씩 붙이고 그의 안내에 따라 지문 등록과 입국심사, 보안 검색 등 국내선 환승 절차를 거처 드디어 쿤밍으로 가는 253번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큰일은 대강 끝난 듯하다.
20시 35분발 MU 748편 비행기가 30분 늦게 21시 05분이 되어서야 출발을 했다. 하룻밤을 비행기 안에서 지내야 한다.
♠제 2 일 (2019. 05. 16. 목) 쿤밍 : 석림(石林) 투어→ 따리
쿤밍 창수이 공항에 00시 35분에 도착해 예정보다 1시간 늦었다. 게다가 비행기에서 내려 보니 대기한 버스가 아주 복잡했다. 곧 텅 빈 버스가 한 대 와서 그 버스를 타려는데 비닐로 된 명패 같은 것을 준다. “근참승객(近站乘客)”이라고 적힌 것 같았는데 영어나 다른 언어는 없어 의미는 무시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일단 받았다. 필요하든 필요 없든 여행할 때는 무엇이든 일단 받아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황선생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우리를 부르면서 복잡한 버스를 타야 한다고 하기에 별 생각 없는 나와 안선생은 마음을 바꾸어 복잡한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는 출발하지 않고 중국 아가씨가 무엇이라 큰소리로 말을 하는데 알 수가 없다. 여전히 버스는 출발하지 않고 아가씨는 계속 버스로 와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데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약 10분 정도 지체가 되었는데도 버스는 출발하지 않고 아가씨도 오고 청년도 와서 중국말로 무어라고 지껄이고 드디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중국 사람들도 무어라 투덜거리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안 가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마침 한국 관광객 한 팀이 있어 무슨 말인지 서로 궁금해 하며 두리번거리던 중 아가씨가 아까 우리가 무심결에 받은 비닐 명패를 흔드는 것이 아닌가! 안선생이 비닐 명패를 꺼내어 주는 것을 보고 나도 바로 밑장 끼워 넣기로 주었더니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무어라고 하는데 ‘왜 진작 주지 않았느냐?’고 힐난하는 듯했지만 우리는 그 말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말로 ‘무얼 달라는지 알아야 주지.’라고 했더니 중국 사람들도 그제야 소통의 문제였다는 걸 알았는지 조용해졌다. 우리 두 사람에게서 비닐 명패를 받자마자 바로 버스는 출발했다. 그 명패가 무슨 명패인지 그게 버스를 10분 이상 세워두고 찾아야할 중요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행의 큰 계획 중 하나는 베트남과는 달리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중국인지라 일단 여행의 앞부분은 쿤밍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의 투어 안내를 받기로 했다. 그래서 상글릴라까지 올라가는 5일 간은 함께 여행하다가 나머지는 우리끼리 여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새벽에 도착하는 비행시간에 숙소 찾기가 불가능할 듯해 픽업을 부탁했기에 거의 두 시간 이상 지체된 지금, 아마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듯했다. 게다가 짐까지 1시간이나 늦게 나와 2시 30분이나 되어서야 겨우 도착 로비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우릴 기다리느라 지친 표정이 역력한 쿤밍한스의 남(南) 사장을 만났는데 그는 마흔 중반 정도 보이는 남자로 보통 키에 마른 몸매를 가졌는데 목소리가 조용조용하고 차분하여 첫인상이 남 뒤통수를 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일단 비행기가 늦은 사연을 이야기하고 대기 중이던 SUV에 타니 한스 부인이 운전을 하였다. 한스 부인은 중국 한족(漢族)으로 한국말을 어느 정도는 하였는데 부부 간의 대화는 중국말로 하였다. 나중에 한스 이야기로는 두 사람이 다 이혼 경력이 있고 그녀는 현재 고등학교 1학년 아들과 함께 재혼했다고 한다. 그럼 아들이 17살이니 이십 초반에 결혼했다면 나이는 아마 40세 전후가 되겠는데 아침마다 배드민턴과 탁구 등으로 몸 관리를 해서 그런지 날씬하고 피부가 탱탱해 자기 나이만큼 보이지 않았다.
30분 정도 달려 도착한 아파트는 53평 크기로 방이 5개나 되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은 제일 큰 방이었는데 침대는 두 개밖에 없어 황선생과 내가 한 침대를 쓰기로 했다. 안선생은 베트남에서 남자 마사지사 손이 몸에 닿는 것을 질겁하며 거절하는 걸 보았기에 그런 개인적 취향을 고려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시간이 늦어 대강 씻고 안선생과 나는 소주 640ml 한 병을 나누어 마시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모든 것이 잘 맞아 떨어지다가 마지막 쿤밍에 와서 “근참승객(近站乘客)” 문제와 수하물 지연으로 시간이 늦어지면서 피곤한 하루가 되고 말았다.
7시 좀 넘어 일어나 세면 후 오늘 오후에 따리(大理)로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일단 가방부터 챙긴 후, 응접실에서 한스와 여행에 대한 전반적 계획을 점검 후 5박 6일 투어 비용으로 10,600 위안을 지불했다. 오기 전 예약금으로 지불한 1인당 10만원을 포함하면 1인당 투어 경비는 약 73만 원 정도다. 게다가 비자 발급에 5.5만 원, 비행기 삯이 32.4만 원이니 이미 110만 원 정도가 지불되었다. 내 경우 보통 하루 여행 경비를 비행기 삯 포함해 10만 원 정도로 잡고 있는데 이번 여행의 경우 15일짜리니까 150만 원이 기준경비인데 아마 이 기준이 깨어질 듯하다. 여행 자체가 물질적 측면에서는 소비적 행위이기에 여행을 하면서 돈을 적극적으로 아낄 이유는 없지만 굳이 필요 없는 돈을 쓸 까닭도 없다. 1일 10만 원이란 규칙도 꼭 지킬 필요는 없지만 가급적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8시 30분 쯤 아파트 정문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청화 소과 미선”(靑和小鍋米線)이란 다소 긴 이름의 식당에서 8위안짜리 쌀국수로 식사를 했는데 한스 말로 대단한 맛집이라 한다. 1,400원짜리 쌀국수가 맛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까 생각했는데 베트남 쌀국수와는 또 다른 독특한 맛이다. 마치 얼근한 육개장에 국수를 만 듯한데 국수 자체의 식감도 좋다. 게다가 각종의 꾸미가 많이 들어 있고 양도 푸짐하여 근처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엄마와 같이 와서 국수 한 그릇을 나누어 먹고 등교하는데 아예 식당에서 아이용으로 작은 그릇 하나를 서비스하고 있다. 가만 살펴보니 이 집 손님의 80% 정도는 우리가 시킨 소과류(小鍋类) 중 미선(米線), 미선 중 굵은 국수인 조(粗)와 가는 국수인 세(細) 중 세를 골랐다. 그리고 크기는 소완불소(小碗不小) 즉, “작은 주발이되, 작지 않다.”란 뜻이니 우리로 보면 보통에 해당할 것이고 대완흔대(大碗很大)는 “큰 주발은 흔대(很大)하다.” 즉, 매우 크다는 뜻이니 우리의 곱빼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당연히 우리는 8위안짜리 소완(小碗)을 주문했다.
< 현대 중국은 간체자(簡体字)를 쓰고 있어 한자를 번체자(繁体字 - 正體字)로 배운 한국 사람이 읽으려면 힘이 든다. 그래서 번연히 아는 한자도 처음 보는 글자처럼 생소하다. >
위의 메뉴판에서 “众人之味”에서 “众”은 간체인데 사람(人)이 셋 모였으니 번체자인 “衆(무리 중)”에 해당한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맛”이란 뜻이고, 소과류(小鍋類)중 “面条”의 “面”은 麵(밀가루 면), “条”는 “條”로서 가늘고 긴 것이란 뜻이니 미선(米線)이 쌀국수를 의미하는데 대해 면조(面条)는 밀가루 국수란 뜻이고 그 중 “寬”은 넓을 관이므로 굵은 국수란 뜻이다. 凉类(량류)는 시원한(凉) 종류(類)이고 鹵类(간류)는 육류·달걀 따위로 만든 국물에 녹말가루를 풀어 만든 걸쭉한 국물로 국수 따위에 부어 먹는데, 한국의 울면에 붓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 외 노란색의 큰 부류만 이야기 하면 加帽类(가모류-더할 가, 모자 모)는 일종의 토핑이라 보면 되겠고, 기타류는 말 그대로인데 그 중 마지막 外帶餐盒(외대찬합)은 테이크아웃 그릇 값으로 1개(个)에 1위안이라 적혀 있다. 그리고 盖饭类(덮을 개, 밥 반)는 밥 위에 덮은 종류니까 덮밥 종류란 뜻이다. 그리고 炒饭类(볶을 초)는 볶음밥 종류란 뜻이다. 그 중 鸡蛋(계단)은 알아 두어야 하니 계란이란 뜻이고 肉(육)이라 적힌 것은 돼지고기이고 소고기는 우육(牛肉)이라 적는다.
< 기본적으로 면과 육수를 부어주면 주방 앞에 각 그릇에 담겨있는 양념류를 각자 취향에 맞추어 넣는다. 나는 좋아하는 파와 간 마늘, 그리고 매운 고추를 넣었다. 앞에 보이는 노란색은 계란 지단 부친 것이라 생각했는데 두부를 얇게 가공한 것이라 식감이 쫄깃하였다. 8위안(1,400원) 내고 먹기 미안한 맛과 양이다. >
식사 후 아파트로 돌아와 석림(石林) 구경을 가기로 했는데 석림은 5A급 관광지라고 하는데 중국은 A의 개수로 관광지 등급을 매기는데 최고 등급이 5개이므로 관광지 급수 중 최고급이다. 운전은 한스 부인이 하였는데 한스는 한족(漢族) 부인과 결혼은 했지만 아직 한족의 권리를 누리지 못해 운전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가는 도중 국제 면허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중국은 국제 면허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가면서 보니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운전 장면이 몇 번 있어 인정하지 않는 것이 외국인 보호 차원에서 올바른 판단인 것 같았다.
< 차는 우리로 보면 ‘카니발’급인데 차 안이 넓고 묵직한 느낌을 주어서 난 처음에 차 앞 엠블럼이 “G” 비슷해서 “GM”에서 나온 미제 신형 SUV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광저우 자동차’에서 나온 ‘GAC’란 차였다. >
승차를 해보니 중국의 자동차 산업이 이 정도인가 할 만큼 차가 묵직하면서도 정숙했고 실내도 각종 사양이 뛰어났다. 중국은 자동차의 경우 이제 모방이나 카피의 단계를 넘어 선 듯했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기업들이 떼를 지어 중국에 들어와 합자회사를 세우고 기술 이전을 하다 보니 이젠 곧 명차라 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오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나는 1994년 중국 여행이 자유화 되자 바로 중국 여행을 했고 그 이후 몇 번 상하이와 북경 여행을 했지만 오늘 중국을 보기 전까지는 중국을 깔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선진국의 기술을 훔친다든지 디자인을 그대로 모방한다든지 짝퉁을 만든다든지 하는 등등의 이미지들이 중국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이미지였는데 이제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모인 기술들을 융합하고 개선하여 자기만의 물건을 만들 수준에 도달한 듯했다. 아마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곧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패권을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 공산주의 장점에 자본주의의 장점까지 융합하고 동양적 절제와 사고구조를 가진 국민으로 미국과 맞선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가 문제이지 승패는 결정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래서 트럼프가 견제를 하려는 것 같다만 문제는 현재 중국은 가급적 이웃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하는 반면 미국은 동맹국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 문제다.
< 중국 4대 자연경관의 하나인 석림(石林). 탄산칼슘의 석회암이 만드는 자연의 신비는 어둠 속 침식동굴과 더불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이런 뾰쪽한 첨탑의 숲을 만들어 우리의 감탄을 자아낸다. >
석림을 보며 지구과학을 공부한 나로서는 세로무늬의 생성은 비바람의 침식으로 이해가 되는데 가로 균열의 이유는 알 수 없다. 심해에서 융기과정 중 생긴 것인지 상대적으로 연질의 퇴적층이 침식되어 가로 균열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다. 절에 갈 때는 법정스님과 함께, 문화재 답사에는 유홍준 같은 학자를, 이런 석림에 올 때는 저명한 지질학자와 함께 올 수 있다면 큰 행복이겠다. 얼마 전 TV에서 방영한 “알쓸신잡”이란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을 보면 그 방면의 전문가가 출연해 현학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도 하고 익숙하던 현상이나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해 지적 만족을 제공하니 좋은 경치를 앞두고 견(見)은 있으나 문(聞)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문(聞)은 단순히 ‘듣다’는 뜻 외에도 ‘가르침을 받다’란 뜻이 있으니 더욱 문(聞)이 아쉬울 뿐이다. 물론 가이드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나는 가이드가 꺼내지 않는 화제의 경우 가급적 묻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가이드는 자기가 아는 것을 거의 대부분 이야기하는데 가로 균열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모르고 있거나 관심 밖이라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 어디 가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되 그것이 결국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 같다. >
오른쪽 두 번째 바위에 세로로 “天下弟一奇觀”이라 적고 그것을 만고에 알리고자 정으로 새기고 붉은 칠까지 했다. 그런데 이 명필께서는 차례란 뜻의 ‘第’를 적어야할 곳에 아우란 뜻의 ‘弟’를 잘못 적은 것을 알고나 돌아가셨을까? “천하제일의 기이한 경관”이 억지로 해석하지면, “천하에 동생 하나 있는 것이 꼴불견” 정도로 해석이 되니 만약 이 명필에게 동생이 있었다면 형의 과시욕을 탓할지 무식을 탓할지 궁금하다. 사람은 그냥 왔다가 그냥 가면 되는 것이지 흔적을 남기면 이런 누추한 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석림은 미로(迷路)에서 미로로 이어져 만약 우리끼리 왔다면 어디로 가야할 지도 알 수 없어 1/3도 제대로 못 보았을 것이다. 가다가 몇몇 길 잃은 중국 관광객이 한스에게 길을 물어 출구를 향하는 것을 보고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다른 투어 팀 뒤를 따라 졸졸 다녔겠지. 도중에 한스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했는데 한국에 있을 때 모 대학 농대에 입학해 일을 하다가 기계에 오른손이 말려들어가 손을 잃었다 한다. 이후 우연히 중국어와 접한 후 그것이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타국 생활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니 사람의 운명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어찌 알리오! 그의 말을 들으면 그의 직업에 대한 책임감과 그에 따른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소수민족인 이족(彛族)이 살던 지역을 수용하여 국가공원을 만든 후 생활 터전을 잃은 이족을 석림 곳곳에 고용하여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하였다 한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아가씨의 모자에 뾰쪽한 뿔 같은 것이 보이는데 뿔이 둘이면 미혼이고 뿔이 없으면 기혼이라 한다. 결혼 풍습도 모계사회 풍습을 지켜 여자가 주도권을 가지며, 특별히 막내절이라 해서 음력 7월14일~16일까지 여성의 한 쪽 가슴을 만질 수 있는 이색 전통축제가 열린다. 다른 한쪽 가슴은 장래의 남편을 위해 남겨 두는 것이란다. 막내절은 동정(童貞)인 상태로 전사(戰死)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한 축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사도 하지 않고 원혼도 아닌, 기혼의 외국인에게도 한쪽 가슴은 허용한다고 하니 정말 종족을 위해 싸우다 죽은 동정의 원혼은 뭔가 억울한 생각이 들겠다. 올해 음력 7월 14일을 찾아보니 양력 8월 14일이다. 오른쪽 나무 아래 앉은 아가씨 한쪽 젖을 만지려면 지금부터 세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하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
대석림 관광을 마치고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전동차를 타고 소석림을 향해 갔다. 소석림은 전설이 깃든 호수도 있고 넓은 초원도 있어 넓은 곳을 좋아하는 나는, 웅장하되 오밀조밀한 대석림보다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 대석림과는 분위기와 느낌이 다르다. 바위에 붉은 색, 푸른 색 글을 여기저기 적어둔 대석림보다, 또 온통 칼날 같은 뾰쪽한 바위 위에 지어져 발밑이 모두 바늘 지옥 같은 망봉정(望峯亭)의 풍경보다 이런 곳에 정자를 지어 새소리 바람소리나 들으면 좋을 듯하다. >
석림 구경을 마치고 기다리던 한스 부인의 차를 타고 2시경 석림 풍경구 입구에 있는 식당에 서 중국 가정식 백반으로 식사를 했다. 한스 부부를 잘 아는 듯 자두와 진보랏빛 과일을 서비스로 주었는데 살구는 늙은 할미처럼 시들어 쪼글쪼글했지만 당도와 맛이 훌륭했다. 반대로 보기 좋은 보라색 과일은 새큼하긴 했지만 별 맛이 없었다. 쿤밍은 남쪽 지방이지만 전체적으로 과일은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특별히 어떤 과일을 먹으려 노력한 적도 없고 과일 자체도 흔하지 않았다. 파와 돼지고기를 볶은 것 알맹이 없는 콩깍지 볶음과 여주인지 오이인지 모를 채소 볶음도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린 수세미 볶음이란다. 나중에 리장의 전통시장에서 수세미 파는 것을 보았는데 이때 한스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사람은 자기 경험 내에서 생각하는 편이니 그게 요리용이란 생각은 아예 못했을 것이다. 아마 미용 관련이나 세척용 도구로 판단했겠지. 그리고 오각형 고추 모양 볶음과 가지 볶음 등 대체적으로 더운 지방답게 볶음과 튀김 요리가 많았다. 날씨가 제법 더운데 시원한 음료는 없고 물조차 따뜻한 찻물이다. 중국 사람들은 여름에도 찬물을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슈퍼에서 파는 생수도 미지근한 것밖에 없다.
< 채소 볶음과 가지 요리가 맛있었다. 쌀 자체가 우리와 달라 퍼석한 알랑미(安南米)인지라 밥맛은 별로였다. >
다시 차를 타고 한스 아파트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다가 6시에 숙소를 나와 차를 타고 쿤밍역으로 갔다. 여기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볼 필요가 있어 한스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왜냐하면 곧 중국말도 모르는 우리가 차표를 끊고 수속을 밟아 승차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소수민족의 독립 요구로 테러가 더러 발생하기 때문에 기차역을 들어 갈 때도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타지 않는지 짐과 사람을 검색을 한다. 하긴 고속으로 운행하는 고속철에서 폭발물이 터진다면 그 인적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아니겠는가.
중국의 고속철도는 C, D, G등급이 있는데 C등급은 200km, D등급은 280km, G등급은 350km까지 속도를 내는데 G등급이 사고가 한번 나서 300km로 속도를 제한했다고 한다. 우리가 탈 기차는 D등급으로 28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지만 실제로는 199km가 최고 속력이었다. 아마 전체적으로 속도를 조금 하향 조정한 게 아닐까 한다. 2등석인 우리 차비는 145 위안이니 26,000원 정도이니까 우리와 비슷한 정도로 느껴졌다. 19시 44분 출발해 기차 안에
서 바나나와 메추리알과 계란을 사고 역 매점에서 산 맥주와 가지고 있던 소주를 섞어 저녁 요기를 대신했다.
< 곤명참 D8738 대리참이라 적혀 있고 날짜와 차량번호, 좌석번호가 적혀 있다. 중국에서 기차표는 여권으로 예약해야 한다. 그래서 아래 M502609**가 내 여권 번호이고 내 이름도 영어로 적혀 있다. QR코드가 있어 개찰구에서 이것으로 스캔한다. >
거지도 QR로 동냥하고 아이들이 세뱃돈도 QR로 받는다고 할 정도로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 QR이 발달해 현금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위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외국 여행객의 경우 계좌 개설부터 어려워 현금 사용이 편하다. 슈퍼나 대형 음식점의 경우 100위안 지폐를 주면 반드시 위폐 감별기로 감별하고 작은 상점은 불에 비추어 보는 행동을 한다. 이와 반대로 현금만 쓰는 선진국이 일본이다. 그래서 1엔, 5엔, 10엔짜리 동전까지 가지고 다니다 보니 일본 신사의 호주머니에는 동전 지갑이 반드시 있다. 그에 비하면 식당이나 백화점에서 손님의 서명을 주인이 창조적 지렁이로 대신해 줄 만큼 한국은 플라스틱 카드가 대세다.
대리역에 내리니 쿤밍보다 지대가 조금 더 높아서인지 시원한 바람이 분다. 한스가 부탁해둔 픽업 봉고를 타고 30분 정도 걸려 숙소 근처에 도착했는데 도로 공사를 하느라 도로 전체를 완전히 파헤쳐 놓아 차가 숙소 앞까지 갈 수 없었다. 캐리어를 끌고 한참 만에 골목 안에 숨어 있는 남작(藍雀-파랑새)이란 곳에 도착해 나와 황선생, 안선생과 한스가 한 방을 쓰기로 하고 일단 근처 식당으로 갔다. 대리의 풍화설월(風花雪月)이란 낭만적 이름의 맥주와 강산백(江山白)이란 백주를 섞어 마시며 늦은 저녁을 먹었다. 특히 “풍화설월(風花雪月)”은 대리 샤관(下關)의 바람, 상관(上關)의 동백꽃, 창산(蒼山)의 눈, 얼하이(洱海)의 달을 붙인 것으로 대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백족농가채”란 곳으로 “农”를 옷을 뜻하는 의(衣)로 생각했는데 농사를 뜻하는 “農”의 간체라 한다. 이 식당은 백족 농가 채소 음식을 주로 하되 대리의 특색 있는 돌판 구이 집이라 선전하고 있다. 간판 아래 걸린 것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이고 식당 앞에는 채소나 우렁이, 가재 , 버섯 등을 진열해 두었는데 이는 동내 사람이 사 가기도 하고 이런 재료로 어떻게 요리해 달라고 주문할 수도 있다. >
저녁을 먹으며 앞을 보니 혜원초시(惠源超市)라 적힌 가게가 있어 자세히 보니 초시(超市)가 우리의 슈퍼란 의미였다. 또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식당에 갔을 때 차를 내어 놓는 곳은 요리를 주문할 수 있는 나름 고급 식당이고 물을 내어 놓지 않는 집은 국수 같은 단품 식사를 할 수 있는 저렴한 식당이란 것이었다. 또, 한스의 경우 여러 번 팀을 데리고 왔을 것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가장 합리적 가격에 손님들이 싫어하지 않을 식당으로 데리고 다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집은 우리가 다음에 또 이용할 가능성이 높아 벽에 걸린 요리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해 다음에 우리끼리 올 경우를 대비했다.
< 한스의 말로는 중국 식당에서는 자기가 가져온 술을 마셔도 주인이 상관치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눈치 보는 타성에 젖은 우리는 백주는 앞의 초시에서 사오고 맥주는 이 집에서 주문했다. >
시간이 제법 되어 숙소로 돌아와 대강 씻고 누워 언제 잠에 빠져 들었는지 모르게 하루를 마감했다.
♠제 3 일 (2019. 05. 17. 금) : 따리 → 리장
아침에 일어나 일정을 생각하니 가장 큰일이 기차로 리장 가는 일이다. 따리 역에서 기차로 리장까지 가야하니 어제 큰길이 포장이 안 되어 고생한 걸 생각하며 가방 정리를 한 후 리셉션에 맡겼다. 아침은 숙소 왼쪽에 있는 동내 요깃집 정도였는데 여기도 백족이 운영한다. 죽과 소룡포, 콩국과 튀김 꽈배기로 식사를 했는데 담백하니 먹을 만하다. 가격도 일반 죽이 3위안, 흑미 죽처럼 조금 비싼 것이 4원이고 소룡포라는 작은 만두 한 채반이 10위안이니 1인 식비가 대강 7위안, 즉 1,200원 정도면 될 듯했다.
< 식당 메뉴를 사진 찍어 두면 다음 식사 선택에도 매우 유용하고 공부도 된다. >
< 아침에 죽을 먹으니 위장도 편하고 만두로 각종 필요한 영양을 채우니 손색없는 한 끼였다. >
식당은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사내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주인이었는데 남편은 요리를 만들고 아내는 홀 서빙을 하는, 탁자 두 개의 작은 식당이었다. 남편은 과묵한 편인지 말이 없고, 조금 야위고 얼굴이 검은 아내는 아이가 얼마나 좋은지 아이를 볼 때마다 그윽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아침을 그만 먹으려는 아이를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이려 달래고 있었다. 나는 문득 정지용 시인의 “향수(鄕愁)”에서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떠 올랐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또한 무엇일까? 문득, 얼마 전 TV에서 본 대한항공 조씨 집안의 여자들의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세상에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여성이라도 사랑으로 웃는다면 그녀는 행복한 여왕처럼 빛나게 보이는 것이다.
< 우리가 아침 식사를 주로 한 곳으로 북방조점면식이라 한 것으로 보아 아침, 점심 전문점이다. >
호텔을 나와 호텔 주인의 일제 닛산 차를 타고 얼하이(洱海) 호수로 갔다. 한스가 표를 끊고서 “洱海”라는 글자를 수놓은 붉은 하트 모양의 패찰을 주었다. 아마 이 패찰은 유람선 선착장과 호수 안 섬 구경 후 다시 승선할 때 입장권을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쿤밍 공항에서 비닐 패찰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혹, 나중에 내릴 때 이것을 다시 회수할까 해서 끝까지 보관했지만 비닐 패찰보다 더 예쁜 이 패찰은 나의 집까지 따라와 지금 옷장 손잡이에 걸려 있다. 유람선은 얼하이 남안(南岸)의 하관진과 북서쪽에 위치하는 호접천을 오가는데 선내에서 바이족(白族)의 삼도차(三道茶)를 제공하고 민속춤을 선보이는 공연이 시간에 맞추어 있다.
< 따리는 그 높이가 4천m에 이르는 창산(蒼山)을 등지고 얼하이 호수를 앞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도시다. 말이 창산이지 봉우리가 13개가 되고 얼하이로 흘러드는 물길이 열대여섯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산이다. 때문에 칭키스칸이 침략해 왔을 때 창산 넘는 길을 몰라 침략을 못했는데 나씨족(納西族)의 길잡이가 길을 가르쳐 주는 바람에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다. 이후로 바이족과 나씨족은 원수지간이 되고 두 민족은 지금도 통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위 지도에서 왼쪽 대리항에서 승선해 중앙의 소보타섬에 들렀다가 그 위 남조풍경도에서 다시 1시간 정도 놀다가 북서쪽의 호접천이란 곳에서 하선하게 되어 있다. 얼하이 호수 주변으로 자전거 도로가 완공되었는데 그 길이가 120㎞라 하니 이틀 정도 자전거 탈 각오를 해야 할 듯하다. >
얼하이는 실제로는 담수호이지만 운남에서 뎬츠호 다음으로 커서 바다 같이 크다는 의미에서 “洱海”라고 한다. 호수는 해발 1,972m의 고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길이 약 42.6 km, 동서로 약 8 km의 폭을 가지고 있다. 전체의 형태가 조금 구부러져 있고, 귀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해(耳海)로 불렸고 고유명사화 시키기 위해서 이해(洱海)라고 하는 글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호수의 평균 깊이는 11m, 최대 깊이는 20m정도로 주위를 창산(蒼山) 등의 산에 둘러싸여 있어 몇 개의 강으로부터 물이 흘러들지만, 외부에 흐르는 강은 따리(大理)시 하관진 부근의 서이하에서 란창 강을 거쳐, 최하류인 메콩 강으로 연결된다.
< 바이족의 민속공연인데 아가씨는 고산족답잖게 피부도 희고 세련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다. 오른쪽 뒤에 “一苦 二甘 三回味”라 적은 것이 보이는데 이는 바이족 손님 대접 풍습 중 삼도차(三道茶) 대접을 적어둔 것이다. 첫째 잔의 차는 청년기의 고난과 고생을 뜻하는 쓴 맛, 둘째 잔의 차는 중년기의 즐거움과 기쁨을 뜻하는 단맛, 셋째 잔은 생강과 계피를 넣은 차인데 지나간 삶을 회상하며 마시는 매운 맛이다. 나는 공연 구경을 하며 이 세 잔의 차를 마셨다. >
유람선은 소보타(小普陀)섬에 닿아 올라가 보니 부처를 모신 작은 사당이 하나 있고 상인들이 각종 음식이나 기념품을 팔고 있다. 길과 계단은 좁은데 사람이 너무 많아 장차 개간(開墾)이라도 해야 할이다. 다시 배를 타니 남조풍경도(南詔風景島)라는 제법 큰 섬에 대는데 관광지답게 조각과 불상 등이 여기저기 만들어져 있는데 역사성이나 예술성은 전혀 없고 상업적 조악함이 가득하여 차라리 자연 그대로 방치해 두었으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건 지나가는 나의 생각이고 이 섬에서 사진 찍는 사람이나 음료를 파는 사람들은 여기가 생활 터전이니 그들 위주가 되어야겠지. 또 이런 조각이나 건축을 좋아하는 관광객도 있을 것이다.
< 포토 존을 만들어 두고 사진사들이 사진을 찍어주는데 여자들은 어떻게 아는지 금방금방 멋진 포즈를 취한다. 저기서 누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남자들은 생각해낼 수 없는 발상이다. 이로 볼진대, 남자와 여자는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내면을 보면 종류가 전혀 다른 족속이다. >
배는 우리가 승선한 남쪽의 하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북서쪽의 호접천이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 주었다. 조금 걸어 한스가 대절한 차를 타고 따리고성으로 내려오는데 길가 석재상에는 엄청난 크기와 기묘한 무늬의 대리석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왜 대리석(大理石)이 대리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나 무늬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신비감마저 느끼게 했다.
따리고성에 도착해 “소원(小院)”이란 작은 식당에서 중국 가정식 식사를 했는데 거의 모든 음식은 기름에 튀기거나 볶은 것이 많아 전체적으로 맛이 느끼했다. 아마 오랜 세월의 지혜가 축적되어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이 만들어진 것이니 이런 조리법은 이곳의 여러 환경요소와 관계가 깊을 것이다. 날씨가 덥고 습하니 식중독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고 쉬 상하기 때문에 가장 위생적이고 오래 보관이 되는 조리법인 튀기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고 기름의 느끼함을 잡기 위해서 매운 맛이나 신 맛을 선택했을 듯하다. 동남아 쪽으로 가면 음식 중 매운 맛이나 신 맛의 음식이 많은 것도 다 합리적 이유가 있을 것 같다.
< 살짝 맵고 산초를 넣어 혀가 아리는 가지 튀김인데 뚝배기 밑에 완두 줄기는 왜 깔았는지 모르겠다. >
< 고성 안 천주당(天主堂)이라 적힌 성당을 찾았다. 마침 부활절인지라 왼쪽 벽에 그 의미를 분필로 적어 두었다. 건축 양식이 지붕 아래 단청(丹靑)을 입히고 조각을 새긴 것이 불교와 가깝게 느껴졌다. >
< 소를 탄 목동과 새와 꽃을 조각한 것이 절의 벽에서 흔히 보아온 그림과 닮아 있다. >
대리국은 중국 남조 시대를 거쳐 원나라에 복속되기 전 8∼12세기까지 거의 5백년 가까이 존재했던 나라인데 지금 대리고성(古城)에는 왕궁이 없다. 그 이유가 불교를 믿어 왕궁 대신 세 개의 탑이 있는 숭성사라는 절을 왕궁으로 대신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아마 지배층의 백성 수탈이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왕릉이 없는 것도 불교식 장례절차인 다비로 했기 때문이리라. 백족은 어순(語順)이 우리와 같고, 색동옷과 단오 때 그네와 널뛰기, 김치와 장류 등 발효음식을 먹는 것 등에서 고구려 고선지 장군이 데리고 온 고구려 유민이란 설이 있다.
숙소로 돌아와 쉬다가 캐리어까지 챙겨서 따리역으로 갔다. 18시 06분 기차로 리장(麗江)으로 가는데 차표에 K9629라 적혀 있다. 침대차는 아마 K라 표기되는 모양으로 이 기차는 좁은 침대칸에 8명이 마주보며 가는 구조로 천장 높이도 낮고 의자도 딱딱하고 좁아 아주 불편하다. 덩치가 있는 안선생은 허리도 제대로 못 펴고 앞의 아가씨 둘은 아예 바깥 복도에서 지내다가 반 이상 가서야 안으로 들어왔다. 창밖의 풍경은 점차 어두워지는 탓도 있겠지만 갈수록 황량해졌고 갈수록 산들도 많아져 대리에서 리장까지 대강 100개 이상이 되지 않을까 할 정도로 터널이 많았다.
리장 역에서 내려 중국아줌마가 운전하는 SUV를 타고 리장고성에 내리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식당에서 저녁을 마치고 걸어서 “쌍계별원”이라는 숙소에 도착했는데 시설과 위치도 좋고 직원들도 친절하다. 몇 가지 빨래를 한 후 소맥 몇 잔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제 4 일 (2019. 05. 18. 토) : 리장 - 옥룡설산
< 세수하고 숙소를 나와 한스가 맛있는 국수집이 있다는 충의시장에 가는데 돌로 된 길바닥에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물어보니 “汚”라 적힌 곳은 “汚水” 즉, 하수관이 묻힌 곳이고 “”給水“라 적힌 곳은 상수도관이 묻힌 곳이라 한다. 일찍부터 수리(水理) 관리에 힘쓴 흔적 같아 문득 로마의 대수로가 떠올랐다. >
충이 시장으로 가는 길은 이리저리 굽고 좁은 골목으로 이어졌고, 바닥에는 돌을 깔아 리장의 고성(古城)다운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내리막길을 다 내려간 곳에 충의시장이 있었고 길가에는 돼지 훈제한 것이나 각종 이름 모를 한약재,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흠이 있는 과일 등을 팔고 있었다. 리장에 오기 전부터 한스가 자기 집 앞 국수집과 더불어 맛있다고 자랑하던 국수집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웬일인지 문을 열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쌀국수 맛을 들인 후 은근히 쌀국수에 관심이 있던 차라 나는 상당히 섭섭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가던 길을 되돌아와 흰죽, 만두, 간장 계란과 리장 바바라는 구운 빵과 콩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곳의 음식 값도 우리 관점에는 매우 쌌다. 대륙의 수많은 인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문제이니 위정자는 식량문제 해결에 온 신경을 쏟아 붇지 않을 수 없다. 굶주린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민란이 일어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 먹을 것이 싼 것은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굳게 지킬 불문율 같은 것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인구의 대부분 외식(外食)하는 식문화에서는 말이다.
< 우리는 흔히 고성이라 하면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이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구경거리로 관리되는 고성을 생각하는데 대리고성이나 리장고성의 경우는 사람이 실제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라 출퇴근하는 우리의 민속촌과는 또 다른 현실감이 있는 공간이다. >
식사 후 다시 충이시장 쪽으로 가다가 한스가 길가에 한약재(韓藥材)을 내어 놓고 파는 상점에 들러 이것저것 물어 보는데 우리나라와는 너무 달라 처음 보는 이상한 약재가 많았다. 평소에 약에 관심이 있던 터라 혼자라면 호기심도 풀 겸 한두 시간 그곳에 놀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한약재의 경우 보면 대강은 무엇이라는 감이 오기도 하는데 여긴 전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지라 사고 싶어도 무엇인지, 어디 쓰는지 몰라 못 사겠다. 그러더니 한스가 근처 또 다른 약재상에 들어가는데 아마 주인아줌마와는 상당히 잘 아는 듯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에게 “흑구기자(黑拘杞子)”를 권했다. 가격은 재배한 것은 40위안, 다른 지방 것은 50위안, 청해(靑海)산 야생 구기자는 60위안이란다. 청해(靑海)는 중국말로 칭하이인데, 중국 북서부에 있는 티베트 고원의 북동부에 위치한 칭하이는 대부분 지역이 산맥과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고원지대에 자라는 칭하이 것이 가장 비싼 것인 모양이다. 문득 예전 한국에서 흑구기자를 검색해 본 생각이 나고 그 때 상당히 고가(高價)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야생 칭하이산 500g 한 봉지를 사기로 했다. 홍경천(紅景天)도 고산병에 사용되는데 혈관을 확장시키는 기능이 있어 혈압에 좋다는 말을 듣고 역시 500g을 50위안에 샀다. 혈관이 확장되는 유명한 약은 비아그라가 아닌가? 박근혜의 청와대에서 팔팔정과 같이 고산병에 효능이 있다는 바로 그 약 말이다.
< 맨 앞 왼쪽 “皂角米(조각미)”는 “쥐엄나무 열매”이고, “桃胶”라 적힌 구슬 같은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차근히 생각해 보니 “胶”는 갖풀 교(膠)의 간체자로 흔히 우리가 아교라고 쓰는 그 글자이다. 그러니까 도교(桃胶)는 복숭아나무의 갖풀, 즉 진액을 말린 것인데 신장병과 안면마비, 폐결핵 등에 좋은 효과가 있는 약이란다. 특히 배에 물이 차는데 대단히 좋은 약이라는데 우리나라에 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00g에 25,000원에 판다고 한다. 살 사람이 있다면 사겠지만 글쎄. 그 옆 “墨紅玫瑰(묵홍매괴)”는 “검붉은 장미꽃이나 찔레꽃 말린 것”이다. “辣木籽(라목자)”는 매운 나무 열매란 뜻으로 5가지 맛이 나는 모링가 열매인데 먹고 물을 마시니 입안이 단맛이 오랫동안 느껴졌다. “拉丝雪燕(라사설연)”에서 “丝”라 적은 것은 “絲”의 간체자인데 라사설연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라싸”는 티베트 포탈라궁이 있는 곳의 지명인데 그곳의 겨울 제비라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蒲公英”(포공영)“은 ”민들레“를, “菊(국)”자가 붙은 것은 “국화꽃”을 말린 것이다. 셋째 줄 白合(백합)옆은 무화과이고 그 옆의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알았다면 당뇨가 있는 안선생에게 사라고 권했으련만. 나중에 조사해 보니 “罗汉果”는 羅漢果(나한과)“를 간체로 쓴 것인데 ”개여주 열매“라 한다. 우리나라 여주와 모양이 완전 다르다. 그래도 당뇨병에 효과는 같겠지. >
< 바깥 진열대도 살펴보았다. “木通(목통)”은 으름나무 열매인데 “血木通(혈목통)”은 어디 쓰는지 모르겠고, 옆의 “回心草(회심초)”는 심장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便秘果(변비과)”는 안에 씨가 들어 있는데 모양도 변비로 똥구멍이 찢어져 피가 묻어 굳은 똥 모양이다. “覇王花(패왕화)”는 과일 껍질이 용의 비늘과 비슷하다고 용과(dragon fruit)라 불리는 과일이 달리는 삼각 선인장 꽃을 말린 것 같다. “山楂(산사)”는 감기 기침은 물론 소화불량을 치료하는 약으로 애기 사과를 닮은 산사자(山査子)를 말린 것이고, 그 옆에 팻말이 엎어져 있는 것이 내가 산 홍경천이다. “減肥果(감비과)”는 풋사과를 썰어 말린 것인데 말 그대로 비만에 효과가 있다 하여 국내에서도 유행한 적이 있다. “锁阳(쇄양)”은 鎖陽의 간체자인데 몽골에서 나는 버섯이라 한다. 그 외, 丹蔘(단삼), 靈芝(영지)도 보인다. >
< 가운데 뽕나무 열매인 오디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누에처럼 길다. 색깔도 검보라색인 우리와 달리 녹색이 많다. 그러나 그 맛은 우리의 오디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식감도 좋고 엄청나게 달다. >
< 시장에는 호박, 꽈리 고추, 마늘종도 판다. 이 중 가운데 있는 것이 수세미인데 식재료로 파는 것이다. >
시장을 나와 어제 밤에 탄 아줌마 SUV를 타고 A 다섯 개짜리 옥룡설산 풍경구를 향해 갔다. 도중에 검문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보니 여러 다른 기관에서 나온 듯 입은 옷들이 각기 달랐다. 옥룡설산을 보호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고 이곳이 티베트와 가까운 곳이니 아마 티베트 독립투사의 테러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 같았다.
< 멀리서 본 옥룡설산의 자태, 리장 시내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어 고성에서도 보였는데 해발 5,596m의 나시족의 성산이다. 풍경구는 크게 감해자(甘海子), 빙천 공원(冰川公园), 운삼평(云杉坪), 모우평(牦牛坪), 백수하(白水河) 로 나뉘는데, 매표소를 지나서 15분 더 달리면 감해자에 도착한다. 이곳에 있는 관광 안내 센터에서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케이블카와 셔틀버스 표를 구입해 빙천공원, 운삼평, 모우평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구경한 뒤, 마지막에 백수하를 보고 나오면 된다. 우리는 모우평(牦牛坪)에 가기로 했다. >
셔틀버스를 타고 나시족들의 민가가 드문드문 있는 구불구불한 비포장의 산길을 40분 정도 올라가니 모우평 리프트 하부 정류장에 도착한다. 깡통을 펴서 만든 듯 부실해 보이는 2인승의 리프트로 다시 20분간 올라가는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안선생은 죽을 맛인지 고통스런 표정이 역력하다. 우리가 도착한 상부 정류장 만해도 그 높이가 3,800M라 하니 인도차이나 반도 최고봉인 3,143m의 베트남 판시판 산 정상보다 더 높다. 오늘로서 등반 최고 고도에 대한 기록이 다시 정정되어야겠다.
< 상부 정류장 의자에 앉아 충의 시장에서 사온 빵과 과일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하며 바라본 라마 사원. 부지런한 황선생 혼자 트레킹을 떠나고 게으른 두 사람은 그늘에 앉아 장엄한 자연과 공기의 간지러운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가한 시간을 나른하게 보냈다. 지대가 높아 자외선이 강해 조금 부주의하면 피부가 까맣게 탄다. >
다시 리프트를 타고 내려와 남월곡과 백수하(白水河) 풍경구를 보았는데 석회암이 녹은 물이라 옥빛 물색이 신비하다. 이런 풍경은 인도네시아 디엥 고원에도 있었지만 가장 훌륭한 것은 터키의 ‘목화의 성’, 파묵(목화)칼레(성)이다. 파묵칼레는 온천이라 따뜻한데다가 생긴 모습은 흡사 계단식 다랑이 논을 닮았다. 하얀 석회층이 다랑이 논처럼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석회를 머금은 은은한 옥빛 물이 흘러내리면서 맑은 날이면 석회층은 물과 함께 청아하게 빛나 이 세상이 아닌 듯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산 후 일단 쌍계별원 객잔에 도착 후 좀 쉬었다. 6시 반에 나와 리강고성 곳곳을 구경하다가 계단을 조금 올라 만고루(万古楼) 부근 식당의 루프 탑에서 잉어 튀김과 닭을 뼈 체 쪼아 조린 것을 안주로 해서 맥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었다.
< 마을의 중심인 쓰팡제(四方街)에서부터 골목이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다. 골목을 따라 나시족의 전통가옥이 이어지고,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골목 구석구석으로 흘러든다. 골목은 반들반들 윤이 나는 돌길이 이어지고, 대문 앞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하지만 요즘은 가장 사람이 붐비는 신화제(新华街) 광장에는 전통 춤을 추는 사람들이 모여 느릿한 춤사위를 보이는 반면 광장을 둘러싼 주변의 풍선이 가득한 무도장에서는 짧은 치마를 입은 무희들이 무대에 올라 심장을 강하게 쥐어짜는 음악에 맞춰 선정적으로 온몸을 비틀며 흔들고 있다. >
고성의 밤 골목은 낮보다 화려하고 인파의 물결로 낮보다 더 붐비는데 뚜렷이 갈 곳 없는 세 나그네는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가 객잔으로 돌아와 206호에서 술 한 잔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제 5 일 (2019. 05. 19. 일) : 상그리라
일어나 짐을 챙겨 8시에 체크아웃 후 고성 내 작은 식당에서 죽과 콩국, 만두로 아침을 먹고 리장 고쾌객운잔(고속버스 터미널)에서 9시 30분 차 시간을 기다렸다.
< 고속 터미널에 이 같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어 시간도 남아 뭔가 하고 봤더니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라 해서 국가와 사회와 공민(公民)이 지녀야 할 가치를 밝히고 있다. 국가는 부강, 민주, 문명, 화해를 지향하고 사회는 자유, 평등, 공정, 법제를 지향하며, 공민은 애국, 경업(직업을 귀히 여긴다) 성신(성실과 믿음) 우선(우애와 착함)을 지향한다고 적혀 있다. 나는 문득 박정희 시대에 암기해야 했던 온갖 좋은 단어를 이어 붙인 국민교육헌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내 곳곳에 이 문구들이 게시되어 있고 사회악을 없애자는 현수막도 눈에 많이 띄었다. >
시간이 되어 고속버스를 타고 상그리라로 향했다. 리장 시내를 벗어나자 가끔씩 넓은 들 사이로 점점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다보니 머리에 하얗게 눈을 덮어 쓴 엄청나게 높은 산이 보여 알고 보니 이 길이 호도협(虎跳峽) 가는 길이기도 했다. 상그리라로 가는 도중 강물이 모두 뿌연 색이어서 석회암이 많아 물색이 흐린가 했더니 곳곳에 고속도로를 뚫고 강을 넓히고 철도 공사를 하는 등 청도의 산성철교 아래처럼 일 년 내 공사 중이라 강이 제 물색을 찾을 날이 없는 모양이다.
< 불도저 크기로 강의 폭을 짐작할 수 있겠다. 오른쪽 강물을 보면 시멘트를 탄 듯 뿌연 색이다. >
< 점점 지대가 높아져 차는 산을 깎아 만든 길을 따라 가보지 못한 곳으로 힘겹게 올라가는데 우리가 지나온 길은 어느덧 까마득한 과거처럼 저 아래 띠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고 있다. >
도중에 휴게소에 한 번 들리고 4시간 걸려 오후 1시 30분에 상그리라 터미널에 도착했다. 택시로 고성(古城)국제주점이란 호텔에 체크인 후 식사를 위해 나왔다. 한스 말로는 여기는 야크 고기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야크는 한자로 모우(牦牛)라 쓰고 리장 시내에서 모우 전문점이라 간판을 걸고 장사하는 집들도 보았다. 야크는 우리가 흔히 TV에서 보았듯이 무거운 짐을 나르기도 하고 우유와 고기를 얻기 위해 사육하며, 옆구리의 긴 털은 끈이나 로프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야크의 똥은 말려서 티베트 고원지역에서의 유일한 연료로 사용한다고 하니 정말 야크는 고산지대에서는 없어서 안 될 유익한 동물인 듯 했다.
< 식당에 가면 이처럼 포장된 것을 주는데 찢어보면 밥그릇과 잔 같은 식기류가 들어 있다. 그리고 사용한 그릇은 모아 두면 전문 업체에서 가져가 설거지 후 다시 이처럼 포장해 가져 온다고 한다. 문제는 이것도 돈을 받는다는 것이다. >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저급한 식당에서라도 무상으로 제공되는 식기류와 찬류, 그리고 식수와 휴지까지 중국과 동남아에서는 식당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식탁 위에 없거나 주인이 주문하지 않았는데 주는 것이 아니면 대부분 금액을 지불해야하는 것으로 알면 된다. 반찬도 다 먹었다고 더 달라고 하면 값을 쳐서 받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은 외국에 나가면 인심의 각박함에 놀라고 손이 오그라들고 외국 사람이 한국에 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free”인지에 몰라 괜히 주인의 눈치를 보게 된다.
< 야크고기 전골인데 상당히 큰 뚝배기에 별다른 양념 없이 채소에 육수, 그리고 익힌 야크 고기를 넣고 끓이는데 고기가 부드럽고 순한 맛이다. >
< 마침 결혼식이 있어 사람들이 모였는데 남녀 모두 키가 크고 골격도 커 어제까지 보던 작고 까무잡잡한 백족과 다르다. 아가씨들이 코도 쭉 뻗고 피부도 흰 것이 미녀 축에 들 만하다. >
식사 후 다시 중년의 남자가 운전하는 SUV를 타고 상그리라에서 서북쪽으로 7km 떨어져 있는 나파하이(纳帕海)로 향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처음 진입하는 부분은 거의 초원이라 할 정도에 겨우 얕은 물에 고기가 튀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띌 정도였지만 한참을 가니 제법 배를 띄우고 그물로 고기를 잡을 만큼 수심도 상당해 보였다. 가는 도중 2차선 도로에 차가 막혀 한참을 지체했는데 그때 차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운전기사의 꼬질쪼질한 흰 와이셔츠 앞섶이 너덜너덜하게 올이 나가 찢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웬일인가 하고 한스가 물었더니 아침에 마누라에게 쥐어 뜯겼다는 것이다. 생각에 그럼 갈아입고 나올 일이지 찢어진 옷을 그대로 입고 나온단 말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이마까진 중년의 뚱뚱한 사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헷갈렸다.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여권이 신장되어 아내에게 뺨 맞는 남편은 흔하다고 하니 중국 여자와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 나파하이는 7~9월이면 설산에서 흘러내린 물과 충분히 내린 비로 인해 호수가 되었다가, 10월부터는 습지와 초지로 변한다. >
< 갈단 송찬림사(噶丹松贊林寺) 입구. 갈단은 지명(地名)이 아닌가 하는데 일반적으로 송찬림사라 불린다.>
< 티벳 불교의 사찰로 언덕에 조성되어 그런지 규모와 화려함이 대단하다. 한참을 올라 가 그 안을 보니 일반적 사찰과는 조금 내용이 다른 듯 했다. >
이 절은 1681년 달라이라마 5세 때 창건된 라마교 사원으로 티베트 라샤의 포탈라궁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티베트의 장전불교는 흔히 라마교라 불리는데 중국 무협소설에 황금색 승복을 입은 호색한(好色漢)인 괴승이 기이한 무술을 펼치는 것으로 많이 나온다. 안내문을 보니 해발 3,380m에 위치하는 운남 최대의 장전(藏传)불교 사원이며, 청나라 옹정황제가 “귀화사(归化寺)”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운남에서 장족의 종교와 삶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라 하겠다. 참고로 티베트인을 장족(藏族)이라 한다. (위의 장전의 “传”은 번체자 전할 傳이고 귀화사의 “归”는 번체자로는 돌아갈 “歸”이다.)
< 사원에서 내려오니 이 두 사람이 절의 반대방향으로 두 손을 모우고 잔뜩 허리를 굽혀 예를 취하는 것을 보고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있나 하고 살펴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보니 바람이 몹시 불어 바람을 피해 담뱃불을 붙이려 한 행동이었다. 젠장. >
< 해질 녁 독극종 고성의 쓸쓸한 풍경. 이곳이 아마 이 거리의 중심인 듯 청동으로 만든 조각도 있고 불탑 아래 작은 마니차도 있어 차마고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이 광장에서 마니차를 돌리며 여행의 안전과 무사를 기원 했을 것이다. 굳이 절까지 가지 않더라도 바로 길에 기원할 대상과 방법을 두어 생활과 종교의 거리를 최대한 좁힌 것이다. 지금의 저 아이는 무엇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정류소까지와 택시를 호출해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다녀 피곤하여 조금 쉬다가 독극종(独克宗) 고성(古城) 구경을 위해 나와 이리저리 다녔는데 2014년 1월 11일, 독극종고성에서는 화재가 발생했고 고성 핵심보호구역 총 면적의 17.8%가 불 타버려 2016년 1월 1일 정식 개방되었다고 한다. 재건작업은 낡은 것은 낡은 대로 고치고 새로운 것은 낡은 것처럼 고쳤다고 하니 지금 보이는 대부분은 새로 복구한 건물들이다. 고성 길 곳곳에 은방(銀房)이 많아 작은 모루와 화로를 집 앞에 두고 은 세공을 하는 모습이 눈에 자주 띄었다. 특히 큰 칼집에 은세공을 한 것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항시 칼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관습이므로 이러한 어마어마한 장식의 칼은 아마 부의 상징이 아닌가 한다.
< 각종의 보석을 박은 크기와 모양도 다양한 은장식의 칼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라 값도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한번 물어볼 걸하는 생각이 든다. >
< 일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소리로 손님의 주의를 끌기도 하고 아들에게 가업 전수하기도 하고 참 열심히 산다. >
< 독극종(独克宗) 고성(古城)의 상징인 거대한 돌리는 불경, 십 명 정도가 힘을 모아야 돌아가는 마니차(摩尼車)로 세계 최대의 크기라 한다. >
< 이곳에도 한식 전문점이 있는데 주인은 한국인 아래 배운 티베트 아줌마라 하는데 삼겹살이 인기 메뉴고 김밥도 팔고 김치찌개, 된장찌개도 판다. 솜씨도 상당하여 먹을 만하다. >
한스가 45° 짜리 마오타이주를 한 병 사는 바람에 식당에서 이미 제법 술이 거나해서 호텔로 돌아 왔다. 화장실 변기에 소변을 보다가 머릿속이 갑자기 띵하더니 다리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며 몸이 휘청거리는 듯했다. 술이 과했나라고도 생각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일종의 고산병(高山病) 증세였다. 피곤한 몸에 맥주와 백주를 섞어 한잔 더 하니 세상모르고 곯아 떨어졌다.
♠제 6 일 (2019. 05. 20. 월) : 상그리라 → 수허고성
과음으로 늦게 일어나 호텔 조식 후 9시에 체크아웃하고 9시 30분에 리장행 버스를 탔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오다가 휴게소에 들러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소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갔더니 아직 여기까지는 청결한 화장실 문화가 전파되지 못한 모양이다. 소변보는 곳은 그냥 칸막이도 없이 함께 스텐레스로 된 벽을 향해 깔기는 구조이고 대변보는 곳은 칸막이는 두었으되 대변이 떨어지는 30cm 아래는 쭉 통하게 해서 물을 흘러내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맨 아래 칸에서 볼일 보는 사람은 그 앞 사람들의 전날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장(腸) 건강 상태는 어떤지 그들의 대변을 잘 관찰하면 알 수 있을 정도로 리얼하다.
< 오른 쪽 두 번째 사람의 뒷모습이 왠지 낮 익다. >
오후 1시 20분 경에 리장 고쾌객운잔에 도착해 한스에게 부탁해 우리 3명이 22일 다리(大理)로 갈 버스 승차권을 구매했다. 그리고 한스에게 쿤밍의 집으로 가라고 했더니 숙소를 잡아주고 점심때까지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한다. 별로 말은 없지만 대화를 해보면 자기의 직업에 대한 식견과 가이드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지고 은근히 믿음을 주는 사람이다. 리장에 있는 또 하나의 고성인 수허고성(束河古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10분 정도 가니 수허고성이 나타났는데 리장고성의 1/4 크기로 규모가 작고 조용해 개인적으로는 이곳이 리장고성보다 더 운치가 있었다. 공터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예약한 호텔에서 운영하는 전기차를 타고 유경호텔에 도착, 체크 인하니 3인실인 6215호 방을 주었다.
일단 짐을 풀고 나니 점심때가 된지라 바깥에 나가 현지인 식당에서 잉어찜과 감자요리 등으로 식사했다. 이제 곧 한스와 헤어져야할 두려움에 한스에게 22일에 가서 묵을 대리의 숙소인 “남작”에 연락해 예약해 줄 것을 다시 한 번 부탁하고 25일 쿤밍의 한스 집으로 갈 것을 약속했다.
식사 후 우리를 이끌어주던 한스는 리장역으로 가 기차로 쿤밍으로 가고 중국말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한국인 세 사람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우리 세 사람의 힘으로 이 여행을 이끌어 가야한다. 지금부터가 진정한 자유여행인 것이다. 한스를 보낸 후 비장한 각오로 방으로 돌아와 우선 좀 씻고 세탁도 좀 하고 오후는 느슨한 자유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2층 창문으로 흘러드는 서늘한 바람에 벌거벗은 몸을 맡기고 풍욕을 했고 부지런한 두 사람은 산책을 나가 용천루와 사방가의 아기자기한 가게와 집들을 둘러보고 왔다는데 리장고성보다 조용하고 아늑하다고 한다.
< 일반적 호텔이 아니라 고성의 호텔답게 바닥이 나무 바닥이다. 호텔 규모는 2층이지만 방 숫자가 엄청나게 많아 안내하는 아가씨가 우리 방을 못 찾아 전화로 위치를 물어보고 안내할 정도였다. 방 숫자가 엄청나게 많고 시설과 분위기가 고성의 호텔답게 전통적 가옥구조로 되어 고급스럽다. 이 집은 과거 이 지방 유지의 집이었거나 고위 관리의 집이었는지 모른다. 방도 싱글침대 2개와 별실의 더블침대 1개로 가격이 1박에 330위안 밖에 안 된다. >
< 한스는 가기 전 이런 요리를 우리에게 선 보였는데 이름은 모르겠다. 잉어 포를 뜬 후 뜨거운 기름에 튀겨 소스를 뿌려 재미있는 모양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감자 요리도 시켰는데 익숙한 감자가 마음에 들었다. >
저녁에 황선생 방에서 과일 안주와 컵라면을 안주로 해 맥주와 백주를 섞어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늘도 취하고 말았다.
< 운남 여행기 1부 맺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