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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이씨 약사 (略史)
광산이씨(光山李氏)는 아득히 김알지대보공(金閼智大補公)으로부터 연원(淵源)하여
신라천년(新羅千年)의 영고(榮枯)를 거쳐 국운(國運)이 쇠잔(衰殘)함에 군웅(群雄)이 할거
(割據)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웅지(雄志)를 펼쳐 고려국(高麗國:)을 송도(松都)에
세운 궁예왕(弓裔王)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신라 헌안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두 딸이 있었는데 첫째딸과 결혼하여 왕이 된 경문
왕은 절세미인인 둘째 딸과도 결혼하여 왕비로 맞게 된다. 경문왕에게는 첫번째 왕비의
소생에게는 뒷날 헌강왕이 되는 왕자 정(晸), 정강왕이 되는 황(晃) 왕자와 진성여왕이
되는 공주 만(曼)이 있었다. 두번째 왕비는 궁예왕(弓裔王)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서기 875년 헌안왕이 죽고 첫째 왕비의 아들이 헌강왕이 되자 두 왕비로 인하여 나
라에 불길하다는 구실을 주어 둘째 왕비와 5월 5일 중오일(重午日) 명절에 왕자가 출생하
면서 기이한 출생설화(出生說話)를 만들어 두번째 왕비는 피살당하고 왕자는 유모의 기
지(機智)로 생명을 보전하여 경기도 안성에 있는 칠장사로 피신하였다.
칠장사에 피신한 왕자는 억센 어린 시절 유모로부터 왕자로 태어난 자신의 신세를
타이름 받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학문과 무술을 닦고 10 살 때쯤 강원도 영월에 있는
세달사(世達寺)에서 선종이라는 승려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5년(891년) 어지러운 세상에 큰 꿈을 이루고자 죽주기훤(竹州箕萱)
을 거쳐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 의탁하여 기회를 잡더니 전장(戰場)을 이리저리 누빈지
십년, 그 영용(英勇)함이 발군(拔群)이 더니 신라북변(新羅北邊) 전역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전진(戰塵)을 같이한 군민(軍民)의 개국을 바라는 기운이 팽창하여 짐에 효공왕 5년
왕건(王建)의 세거지(世居地)인 송도(松都)에 도읍을 정하여 ‘후고려국(後高麗國)’이라 칭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왕은 통치이념으로 불교개혁을 통한 지상낙원을 구현하려는 긴급한 정책추진
으로 민심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용의주도한 왕건(王建)은 왕의 신임으로 군권(軍權)을 장
악한 실세(實勢)를 십분 활용하여 세력있는 지방토호(地方土豪)들과 긴밀히 혈연(血緣)으로
기반을 확고히 넓히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경명왕2년(916년) 나주(羅州)에서 회군(回軍)한 왕건군(王建軍)이 도성에 입성하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속에 궁예왕(弓裔王)이 미처서 충간(忠諫)하는 처
자를 가혹한 방법으로 죽였다는 소문이 나돌자, 왕건 일당은 ‘이러한 광인을 왕으로 모실
수 없다’고 선동하여 수하군대(手下軍隊)로 궁성(宮城)을 급습하니 다급해진 궁예왕(弓裔
王)은 가속(家屬)을 돌볼 틈도 없이 필신부하(必臣部下)의 호위로 피난 중, 삼방땅(三防
삼척)에서 분사(憤死)하였다.이는 궁예왕(弓裔王)의 재위 18년 만의 일이다.
왕위를 쟁취한 왕건(王建)은 도읍을 다시 송도(松都)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고려
(高麗)’라 환칭(還稱)하였다.정변(政變)으로 분실된 왕손들의 운명은 확실한 실증이 없으나
전하는 말이‘고려 태종 23년(940년) 궁예왕(弓裔王)의 증손(曾孫) 경(敬)이 태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광산군(光山郡)으로 피거(避居)하였다’하고, 그 아들 구(球)가 광주호장(光州戶長)
을 지냈으며 지방토호(地方土豪)인 이씨가(李氏家)에 사위가 되어 광산이씨득관조(光山李氏
得貫祖)이신 종금(宗金 김일형)을 낳았다고 전한다.
고려(高麗)가 내치(內治)에 골몰하는 동안 중국에서는 당(唐)이 쇠망한 후 만주에서
거란(契丹)이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이 강대하여져서 송(宋)나라와 겨루어 오더니, 고려 성종
(成宗) 12년(993년) 1차 침공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강화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 후
현종(顯宗)원년(元年:1010년) 송(宋)과의 친교에 불만을 품은 거란(契丹)은 40만의 대군으로
고려를 재 침공하여
송도(松都)와 주(州), 읍(邑)이 쑥밭이 되고 현종(顯宗)은 남쪽으로 도망하는 혼란
속에 광산이씨득관조(光山李氏得貫祖)이신 종금(宗金)은
고 작은 전투에 참여하여 허다한 공적을 세웠다. 그리하여 재 침공도 국민의 결사적인 항쟁
으로 3 개월 만에 물리칠 수 있었다.
현종(顯宗) 9년(1018년) 거란(契丹)은 정예부대 10만으로 3차 침공을 감행하여 오니
조정(朝廷)은 상원사
조(光山李氏得貫祖)이신 김일형 뒷날 종금(宗金)은 휘하주군(麾下州軍)을 거느리고 선전하며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財貨)를 보전하는 공적을 이루셨다.
그 공적으로 덕종(德宗) 2년(1032년) 광산군(光山君)에 봉하여 지고 이종금(李宗金)
이라 사성명(賜姓名)받았다. 이후 후손들이 시조(始祖)로 받들고 광산군(光山君) 일원에 세
거(世居)하였다.
이후 고려(高麗)는 해외원방(海外遠邦)과 통호(通好)하여 고려문화(高麗文化)의 황금
기를 구가(謳歌)하였으나 사치와 낭비는 부패를 낳고 외위(外威)의 발호(跋扈)는 국권문란
(國權紊亂)으로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중국을 정복한 원(元)나라의 침공에 30년 항전도 무위
로 고종(高宗) 406년(1359년) 원나라에 항복하고 말았으며, 고려(高麗)는 충렬왕(忠烈王) 이
후 왕의 품계(品階)로 격하 당하는 등 일세기의 수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조(始祖) 이종금(李宗金)으로부터 팔전(八傳)하여 8대손 이순백(李珣白)은 이런 어
려운 시기에 청주장서기(靑州(淸州)掌書記)의 말직(末職)에서 기신(起身)하여 충숙왕(忠肅王)
7년(1320년) 상왕충선(上王忠宣)의 측근에 봉직(奉職)하던 중 상왕(上王)이 원궁환자(元宮宦
者 환관)의 참소(讒訴)로 토번(吐蕃)으로 유배형(流配刑)이 내려지자
그 많던 수종인(隨從人수행인)은 모두 숨어 버리고 박인헌(朴仁軒)을 비롯하여 이순백
(李珣白)등 18명만이 일만오천리의 험로(險路)를 유배소(流配所)까지 호종(扈從)하여 간난(艱
難)을 함께하여 충숙왕(忠肅王) 10년 원제(元帝)가 살해되자 3년만에 방면될 수 있었다. 왕은
그들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중용(重用)하니 좌복사사공상서(左僕射司空尙書)에 이르고
충장공(忠莊公)에 추대되었다.
그의 아우인 이숙백(李淑白)도 또한 동왕(同王) 15년에 무진문과(戊辰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직제학(翰林院直提學)에 이르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중시조(中始祖)로 봉안(奉安)하고
기일세(起一世)한후 소목종지(昭穆宗支)를 파악하여 지금에 이른다.
공민왕(恭愍王)초 의욕적인 족정(族政)으로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중원(中原)의 원명
교체기(元明交替期)를 대처하였다. 이때 이숙백(李淑白)의 아들 이순(李順) 초휘(初諱)는 충
화(充和)라 하였는데 재기(才器)가 출중(出衆)하더니 일찍이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났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년) 갑인문과(甲寅文科)에 급제하여 국사(國事)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해 왕(王)은 정치에 뜻을 잃고 주색(酒色)에 탐익(貪溺)하다 마침내 환자 최
만생(宦者 환관 崔萬生)에게 살해 당하고 10세된 우(禑)가 왕위에 오르니 국정(國政)은 간신의
손에 농락(籠絡)되고 왜구(倭寇)로 전국이 소연(騷然)하니 민생(民生)은 도탄(塗炭)에 빠진다.
이순(李順)은 여러 요직(要職)을 거쳐 헌납(獻納)에 올랐으나
한사람인
(疾視)로 외직(外職)인 풍해안염사(豊海按廉使)로 밀려나 많은 고역을 치룸은 고려사(高麗史)
에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이순(李順)은 벼슬을 던지고 낙향하여 광주구장(廣州舊庄)에 은둔
(隱遁)하였다.
우왕(禑王) 14년(1388년)
쟁취하자 자파(自派)의 중진(重鎭)으로 믿고 있던 이순(李順)을 사옹원정(司甕院正) 판도사판
서(版圖司判書)등 수차의 승차(陞差)로 초빙(招聘)하였으나 끝내 의를 지켜 영달(榮達)을 구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맏아들 이초(李椒)가 이숙번(李叔蕃)과 조선 건국(朝鮮建國)에 참여하였고,
이태조(李太祖) 2년(1393년) 계유문과(癸酉文科)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차남 이매(李
枚)는 태종(太宗)조(朝)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삼남 이환(李桓)은 사미사(司米寺) 주부(主
簿)로 사남인 이유(李柚)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삼전(三傳)하여 이세무(李世武)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평창현령(平昌縣令)으로
였다.
조선(朝鮮) 건국후 왕위승계 문제로 왕자의 난을 치루고 안정기에 들어선 세종(世宗)
원년(元年:1419년) 이순백(李珣白) 4대손인 이선제(李先齊)는 약관 20세에 기해증광문과(己亥
增廣文科)에 등제(登第)하니 참판공
어려서 양촌 권근(陽村 權近)과 매헌 권우(梅軒 權遇) 양선생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아
문장덕행(文章德行)이 세상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며 조선(朝鮮)의 찬란했던 문화의 개화기를
연 주역의 한사람으로 거보(巨步)를 남기셨다.
세종(世宗) 13년 맹사성(孟思誠)과 태종실록(太宗實錄)을 찬(撰)하고, 동왕 28년까지
형조(刑曹) 병조(兵曹) 예조참의(禮曹參議)를, 동왕 29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시 명(明)의
정조사(正朝使)로, 동왕 31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시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고려사(高
麗史) 개찬(改撰)의 대임(大任)을 맡아 문종원년(文宗元年:1451년) 이를 완성하는 대업을 이
루었고, 문종(文宗) 2년 경창부윤세자좌부빈객(慶昌府尹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
또한 그간 많은 정책의 상주문(上奏文)은 공(公)의 충성스러운 탁견(卓見)에 그저 탄
복할 뿐이다. 고향 광주(光州)가 그간 광주현(光州縣)으로 강등(降等: )되어 있음에 상소(上
訴)하여 광주목(光州牧)으로 승격케하니 광주민(光州民)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
받아 광주에는 필문로가 생겼다.
공(公)은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顯達)하였다. 장자(長子) 양심당
(養心堂)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은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물러나 후학(後學)을 길러 많은 동량
지재(棟梁之才)를 배출하였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삼남 세심당(洗心堂)
은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요, 오남 성심당(惺心堂)
副提學)시 일본국통신정사(日本國通信正使)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이후 37년 만에 일본(日本)
으로 출발하였으나,
대마도주(主)의 간교(奸狡)로 일본 본토에 상륙을 못하고 병을 얻어 귀환하던 중 거제
지세포(巨濟知世浦)에서 운명하니 성종(成宗)은 공(公)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예조참판(禮曹
參判)을 증직(贈職)하였다.
이 사건으로 임진왜란 발생 전년에
년간 왜국(倭國)의 실상을 모르고 지내게 될 줄 이야 생각이라도 했을까?
이권생(李權生),근생(根生) 형제는 이순(李順)의 삼세손(三世孫)이다. 단종(端宗)이 폐
위되고 세조(世祖)가 등극하자 이근생(李根生)은 구연히 단종복위파(端宗腹位派)에 가담하였
는데 세조(世祖) 2년(1456년) 그간 회유책을 쓰던 왕은 위기정국(危期政局)을 풀기 위하여 강
경책으로 급선회하자 형인 이권생(李權生: )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꺽고 관악산(冠岳山) 기슭
에서 형제가 이별하면서 여형승지공증별운(與兄承旨公贈別韻)을 드렸다.
이 시에
父子蹄淸班(부자제청반) 부자가 淸官(청관)에 올랐으니
天恩是罔極(천은시망극) 天恩(천은)이 罔極(망극)도 하오이다.
白髮空傷時(백발공상시) 白髮(백발)에 마음은 서글프나
丹心己報國(단심기보국) 丹心(단심)은 나라에 보답했고
惟命有其歸(유명유기귀) 命(명)따라 돌아감 얻었으니
此身安所適(차신안소적) 이 내 몸 가는 곳 편안하네
相把涕漣泗(상파체연사) 형제가 붙들고 눈물지니
脊領分明翩( 령분명편) 友愛(우애)가 분명히 넘치어라.
이근생(李根生)은 후환을 피하여 영남 성주 소야방(嶺南星州所也坊)에 은거하여 도학
(道學)에 힘쓰니 이후로 영남파조(嶺南派祖)가 되었다. 이근생(李根生)의 삼대손(三代孫) 이수
(李樹)는 중종(中宗) 32년(1537년) 정유무과(丁酉武科)에 급제하여 주위의 신망(信望)이 두텁
더니 불행히 합포(合浦)땅(현 마산)에서 요절하였다.
졸지에 상주(喪主)가 된
나이로 치곡(治哭)함이 지극하여 묘부(墓府)의 상하이사(上下吏士)들이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반드시 예로써 염습하여 그들 효자의 마음을 져버리지 말자 결의하여 수백의 군
이(軍吏)가 자진하여 200여리길 선영장지(先塋葬地)까지 운구(運柩)하여 장엄한 장례를 치루었
고 3년 치곡(治哭)에 지성을 다하며 모부인(母夫人:固城李氏)와 형제간 효우(孝友)함이 지극하
니 세상에 널리 ‘영남(嶺南)의 착한 삼용(三容)’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그리고 형제가 공히 상문덕행(尙文德行)함이 놀라우니 영남(嶺南)의 일시명류(一時名流)
와 도의(道義)로서 추수(追隨)하기를 형제와 같이 하였다
.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이
不願富貴壻 부귀(富貴)한 집의 사위되기를 원(願)치 않고
願人李氏門 효제(孝悌)하는 李氏門에 가기를 원(願)한다.
이라 하여 부인(夫人)을 이문(李門)의 효제(孝悌)에서 취함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형제가 선조(宣祖)원년(元年:1568년) 무진 방(戊辰 榜)에 연벽사마(聯壁司馬)한 후 명리
(名利)를 구하지 않으며 오직 구도(究道)의 산림처사(山林處士)를 자처하였고
타계한후 이홍량(李弘量),홍우(弘宇)는 더욱 정진하니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儒林)의 숭
앙(崇仰)을 받았다.
(慌忙)중에 노구(老軀)를 무릎쓰고 김면(金沔)과 창의(倡義)하여 이전산(伊傳山)에 주둔하며 모
병관(募兵官)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 소임을 다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지리멸렬(支離滅裂)
한 민심(民心)의 수습책으로 유덕자(有德者)를 추대받아 공(公)을 진주현감(鎭州縣監)에 임명하
였다.
삼용(三容)이 타계하자 영남유림(嶺南儒林)의 총의(總意)로 삼형제(三兄弟)의 고결한 생
애를 기려 회연원향현사(檜淵院鄕賢祠)에 향배(享配)하였다. 문정공 허목(文正公 許穆)이 삼처
사비명(三處士碑銘)에 부치기를
百行之本(백행지본) 人間百行(인간백행)의 根本(근본)은
惟孝惟悌(유효유제) 오직 孝(효)하고 悌(제 공경)하는 것이니
卓卓三容(탁탁삼용) 卓越(탁월)하고 거룩하도다 三容(삼용)의 行跡(행적)이여
可以興善俗(가이여선속) 가히 착하고 선한 風俗을 일어나게하고
可以敎百世(가이교백세) 길이 後世(후세)에 가르침이 본보기가 되리라.
라고 탄식하여 마지 않았다.
한편 양심공당파에서는 광주이씨오원화족(光州李氏五元華族)이라 불러 많은 인재가 대를
이어 배출되는데 오원필벌(五元筆閥)의 행적을 소개하면. 이복선(李復善:
(大司憲)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이달선(李達善:亨元의 子) 성종(成宗)조(朝)에 호당(湖堂)
에 오르고 해박한 경연 (經筵)으로 왕으로부터 사유(師儒)의 호칭을 받았으며 정언(正言) 지평
(持平)을 거쳐 종부사지제(宗簿寺知製)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였다.
이희(李熹:好善의 三子) 대사간(大司諫)을 지냄 이공인(李公仁:達善의 子) 홍문관박사
(弘文館博士)시 요절(夭折)하는 애석함이 있었으나 그의 아들인
거쳐 전라감사(全羅監司)에 이르렀으며 그의 네 아들 모두 영명(英明)하니 그 중에서 특히 이발
(李潑)은 선조(宣祖)조(朝)에 동인(東人으로 광해군 때 사후 北人으로 모심)의 영수(領袖)요
그 아우인 이길(李洁)은 사인(舍人)으로 형제가 일찍이 호당(湖堂)에 올랐고 국정(國政)
에 임하여
강경행동파(强硬行動派)였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선조(宣祖)조(朝)에서는 뜻을 세울 수 없음
을 통감한 이발(李潑)은 부제학(副提學)의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간 것이 선조(宣祖)
22년(1589년) 9월이다. 기축역옥(己丑逆獄)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와 동인 몰락(東人 沒落)의
참변이 일어나려는 바로 한달을 앞둔 때 였으니 천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때까지 이발(李潑)의 위세에 눌려 지내던 정철(鄭撤:號 松江) 성혼(成渾:號 牛溪)
송익필(宋翼弼:號 龜峯)등 서인(西人)들이 이틈을 이용하여 전주(全州)거주 정여립(鄭汝立)을
모반죄로 올가미를 씌워 해명할 틈도 주지 않고 자살극으로 날조하여 평소 정여립과 가까이 지
내던 이발(李潑),이길(李洁) 형제와 백유양(白惟讓) 김우홍 (金宇 ) 정개청(鄭介請)
3년간에 걸쳐 일천이백 여명이 피화(避禍)하여 일천여명이 참혹히 피살되고 호남(湖南)
은 한때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인재등용(人才登用)을 금하는데 까지 확대되어 그 후 사백년
이 된 현재까지도 관련 성씨들과 혈연(血緣)을 거부하는 원한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 당시 선조(宣祖)는 왕권보호책(王權保護策)으로 시작한 소사(訴事)가 3년간이나 끌
어온 혹독한 옥사(獄事)로 진절머리 내기 시작한 왕은 간혼독철(奸渾毒撤)이라 이르며 이들을
매우 꺼려하기에 이르니 왕의 의중을 읽은 이산해(李山海)는 정철(鄭撤)의 건저의(建儲議)를
트집 잡아 서인(西人)을 공격하자, 정철(鄭撤) 일당도 마침내 낙조(落照)의 날을 맞았다.
이런 와중에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
사
못하리라. 이 사화(士禍)로 선비 1,200 여명이 피살된 여파로 인심이 흉흉하고 인재가 부족하여 국력이 매
우 쇠퇴해짐에 따라 선조(船祖) 25년(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이렇게 하여 막이 오른 것이다.
왜병은 부산포(富山浦)에 상륙한지 18일 만인 5월 2일 서울에 입성하고 왜군의 점령지
엔 만행이 자행되니 각지의 백성들이 기개있는 지사(志士)들의 창의(倡義)에 호응하여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게 되고 충무공
불안을 느낀 왜군을 평양(平壤)에 묶어두는 효과로 전세는 소강상태에 빠지게 된다.
영남(嶺南)의
(前述)한 바나 그에게는 19세 시집 안 간 딸이 있는데, 피난 중 왜병과 맏 닥드리게 되어 왜
병이 손목을 잡고 끌고 가려하자 스스로 칼로 손목을 자르니 왜병이 크게 놀라 달아났다. 그
러나,과다한 출혈로 죽으며 왜병이 잡은 더러운 손목은 같이 묻지 말라 하고 숨을 거두니 세
상 사람들이 그 절개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훗날
(烈女)라 함이 가하다‘고 하였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자책으로 목숨을 끊은 주종(主從)을
이때 호남(湖南)에서도
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온성(穩城)에 유배중적소에서 풀려나 기병(起兵)을 발의(發議)
하다 적종(賊鋒)에에 죽임을 당하고
이초(李椒)의 칠세손(七世孫)인
권표(權標)휘하에 투신하여 많은 공적을 세우니 훗날 금곡사(金谷祠)에 배향(配享)되어 그때
의 감투(敢鬪)를 길이 전한다.
영광(靈光)땅 이희직(李希稷)은
거동치 못하자 아우인 의익(希益),희 (希 ),희용(希龍)과 아들 효민(孝閔),효안(孝顔)등을
창의(倡義)케 하며 떠남에 격려하기를,
殊思到骨終何補(주사도골종하보) 사무치게 받은 은혜 언제나 갚겠는가
一死方知報主辰(일사방지보주신) 용감하게 한 목숨받쳐 나라님께 보답하세
이라 하였다.
이들은 영광(靈光)을 수호하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서 기개지사(氣槪之士) 모집 소식을 듣고 순천(順天)길을 재촉하던 중 남평 대화산(南平大花
山)에서 왜군을 만나 혈전을 벌리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순(李順)의 칠세손(七世孫) 이문(李汶)은 재기(才器)가 과인(過人)하더니 이때
대해전(嗚梁大海戰)에서 용약분전(勇躍奮戰)하다가 유탄에 맞아 순절(殉節)하니 참으로 장하
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宣祖) 31년(1598년) 왜(倭)의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으로 칠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으나 이로인한 인적,물적 피해는 필설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전진(戰塵)이 가
라앉자 조정(朝廷)은 다시 동인이 남인(南人)과 분인으로, 북인은 대북(大北) 소북(小北)으로
분열하여 세력을 다투기 시작하였다.
이서(李 :
: 號 寒岡)문하(門下)에 수학(修學)하며 한강(寒岡)이 그 특출한 재질을 사랑하여 그의 학통
(學統)의 후사를 의지함이 지극하였으며 선조(宣祖) 35년(1602년) 스승의 지시로 ‘오선생예설
(五先生禮說)’을 편찬하였고,
선조(宣祖) 38년(1605년) 입신(立身)에 뜻을 두고 을사증광사마(乙巳增廣司馬)에 급제
하고 더욱 학구(學究)에 진력(盡力)하나 광해군(光海君) 원년(元年:1608년) 스승이 혼조(昏朝)
로 치닫는 조정(朝廷)의 대세를 막을 수 없음을 실감하자 대사헌(大司憲)의 벼슬을 버리고 초
야(草野)에 묻히자 동호선생(東湖先生)도 영달(榮達)의 길을 버리고 오직 스승을 따라 구도(究
道)에 전념하였다.
광해군(光海君) 12년(1620년) 한강선생(寒岡先生)이 사상(泗上)에서 돌아가시자 스스로
삼년심상(三年心喪)을 입고 스승의 위대한 사상과 학풍울 계승발전(繼承發展) 시키기 위하여
여러 문인(門人)들과 한강전집(寒岡全集)을 편찬하고 스승의 신도비(神道碑)의 건립 및 회연
서원(檜淵書院)의 창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조(仁祖) 6년(1628년)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천거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젊은
한강문인(寒岡門人)들이 따르니 거처를 승호(承湖)으로 옮기고 동호학당(東湖學堂)을 열어 스
스로 야노(野老)라 부르며 후학을 훈회(訓誨)하는데 정성을 쏟으니 동문(同門)들이 한강선생
(寒岡先生)을 섬기듯 하니 모두 공문(孔門)의 유약(有若)의 일과 같았다 한다.
효종(孝宗) 원년(元年:1650년) 86세로 돌아가시자,유림(儒林)의 발의(發議)로 ‘덕요
선생(德耀先生)’이라 사 (私 )를 지어 공(公)의 정절정요(靖節貞耀)한 생애를 흠모하고 사론
(士論)에 붙여 회연서원(檜淵書院)의 선대 삼용(先代 三容)이 모셔진 향현사(鄕賢祠)에 향배
(享配)하였음은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겠다.
이 시기에 광산이씨(光山李氏)로서 이서(李 )와 같이 한강문인(寒岡門人)에 수학(修學)
한 이로(李 ), 당( ), 명용(命龍), 명 (命 ), 란귀(蘭貴), 란미(蘭美) 등 다재(多才)한 선비
들이 도학(道學)의 일가(一家)를 이루어 영남유림(嶺南儒林)에서 사론(士論)을 이끄는 화족
(華族)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기축역옥(己丑逆獄)으로 오원화족(五元華族)이 절멸(絶滅)하다시피 되고 생존한 몇
안되는 그 후손들은 사방(四方)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살아남은 남인(南人)들의 끈질
긴 주청(奏請)으로 인조(仁祖) 2년(1624년) 7월에 역명(逆名)을 거두고 복관(復官)이 허락되
니 35년만에 이루어진 일이며, 숙종(肅宗) 20년(1694년) 이발(李潑)에게 이조참의(吏曹參議)
가, 이길(李洁)에겐 부제학(副提學)이 추증(追贈)되어 실로 105년 만에 신원(伸寃)에 따른 마
무리를 지은 셈이다.
요행(僥倖)스럽다면 이발(李潑) 사형제 중 막내인 이직(李稷)의 유자(遺子:幼子)가 개
성(開城)으로 피거(避居)하여 이직 오세손(李 五世孫)인
무과(武科)에 등제(等第)하더니 그 아들 이태창(李泰昌) 그리고 손자인 이중빈(李重彬) 이중
진(李重晋), 증손에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운(家運)의 상승기(上昇期)를 맞은 영남(嶺南)도 이서(李 )의 사위인 허적(許積)의
서자 견(庶子堅)이 삼복(三福)의 변으로 역모죄(逆謀罪)로 몰리자 허적(許積)도 불진고(不盡
告)의 죄로 사사(賜死)되고 처가(妻家)인 이서(李 )가(家)도 수난에 휩쓸리는 인욕(因辱)을
치루니 이로 인하여 입신(立身)의 의욕상실은 가문창달(家門暢達)에 큰 장해 요인으로 작용
해 왔다고 하겠다.
이상의 글은 光山李氏 嶺南星州季派 雉山洞 八代玄孫 達生께서 쓰신 글임.
2.광산이씨 소고(光山李氏少考)
머 리 말
무릇 하나의 사물을 관찰함에도 긍정(肯定)과 부정(否定)의 양면성(兩面性)이 있음을
본다. 또한 역사를 보는 눈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니 주변 강국에 종속
된 과거의 기록이 어찌 정당하다 할 것이며 민족에게 자긍(自矜)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역사란 아(我)와 피(彼)의 투쟁의 기록임을 갈파(喝破)하신 단재(丹齋)
선생은
한민족(韓民族)의 웅비(雄飛)하는 긍정적(肯定的)인 면을 간과(看過)해 버리고 부정적(否定
的) 시각에서 기술됨으로 인한 민족긍지의 자해(自害)는 무력감과 패배주의의 조성으로 반도
(半島)의 한 모퉁이에서 소극적(消極的)인 삶으로 자위(自慰)하는 원인(遠因)이 되었다고 통
한(痛限)해 하셨다.
현금(現今)에 이르러, 버려지다시피 된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재조명하려는 노력과
기자위만조선(箕子衛滿朝鮮)의 사실(史實)과 위치를 밝혀 왜곡된 모화사관(慕華史觀)을 바로
잡고, 백제유민(百濟遺民)의 일본 건국설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승패의 재평가 및 8.15 광
복이 3.1운동이후 우리의 투쟁의 소산(所産)임을 주장하는 논리가 전국민의 공감대(共感帶)
를 형성,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탈피하려는 현실은 역사를 보는 방향의 대변혁(大變革)이
라 할 것이다.
고로 보첩(譜牒)을 편찬(編纂)하는 목적도 조상의 훌륭한 삶을 도출(導出)케 하여 후손
들이 숭문상조(崇門尙祖)의 정신을 심어주어 자중자애(自重自愛)하는 알찬 삶을 가꾸어 가도
록 하는데 뜻이있다 할 것이므로 부정으로 출발하는 폐쇄사고(閉鎖思考)에서 탈피하여 사물
을 긍정적 대상으로 보는 관염적개혁(觀念的改革)이 무엇보다도 전제(前提)되어야 할 것이다.
상고하건대 옛날 우리나라의 성씨(姓氏)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을 제외하고는 사용되지
않았다. 고려(高麗) 광종(光宗) 9년(985년) 과거재도가 틀을 잡아가는 단계에서 응시자의 성
명(姓名) 본관(本貫:出生性分)을 밝혀야 했던 것이니, 그때부터 성(姓)이 일반화 하는데 큰
구실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으로 각자는 자기직계(直系)를 초록(抄錄)한 가승(家乘)이나 가문의 내력을
구전(口傳)으로 전달된 것을 정리한 가첩(家牒)이 성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족보(族譜)가 문
헌적(文獻的)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고 완벽을 기한 족보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1522∼1566)이다.
그리고 선조(宣祖)조(朝)를 고비로 당쟁이 가열되어 문벌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임진왜란
(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치르는 과정에서 엄격했던 신분제가 붕괴(崩壞)됨에 이르
러 족보(族譜)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한다.
우리 광산이씨(光山李氏)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환란과 기축사화(己丑士禍)의 모진
고난을 거치면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명현(名賢) 현조(顯祖)가 면면히 천년의 시공(時空)을
이어왔다.
그간 상서공파(尙書公派)에서는 각 지파의 가첩(家牒)을 수합(收合)하여 미완(未完)의
상태이나마 임오보(壬午譜:1763)를 간행할 수 있었고 그 무렵 한림공파(翰林公派) 중 성주파
(星州派)는 전해오는 가첩(家牒)에 의하여 무술보(戊戌譜;1778)를 황계파(黃溪派)도 같은 방
법으로 병진보(丙辰譜)를 동(同) 영광파(靈光派)도 병신보(丙申譜)를 완성하게 되어, 비로소
상하좌우의 소목종지(昭穆宗支)가 명료(明瞭)해지기 시작하여 모든 광산이씨(光山李氏) 삼파
합보(三派合譜)인 병진보(丙辰譜:1856)를 탄생케 한 것이다.
그간에도 상서공파(尙書公派)의 정해보(丁亥譜:1827)가, 한림공파(翰林公派)에서도 성
주파(星州派)의 무술가보(戊戍家譜;1838)가 간행되어 미진한 곳을 바로잡고 불명한 곳을 보
완하는 작업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끊임없는 대동합보(大同合譜)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각 파간의 이견(異見)과 소아적인식(小我的認識)의 차이로 이루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로 인하여 광산이씨 연원록(光山李氏淵源錄) 등이 각 파보(派譜)에 막연한 단편적
사실로 왈가왈부(曰可曰否)되고 있을 뿐이라 이에 현존하는 사초(史草)를 모아 시대적 흐름
속에 위대한 삶을 영위하고 가신 조상들의 발자취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광산이씨 연원(光
山李氏淵源)을 기술(記述)하고자 하는 바이다
第1編(제 1편) 淵源(연원)과 都始祖(도시조)
우리 광산이씨(光山李氏)는 멀리 대보공김알지(大輔公金閼)로 부터 연원(淵源)하여 신
라 천년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쳐 국운이 쇠잔(衰殘)함에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는
난세에 웅지(雄志)를 펴 고려국(高麗國)을 송도(松都)에 세운 궁예왕(弓裔王)의 후예(後裔)
로 전한다.
태봉국주(泰封國主) 궁예왕(弓裔王)의 행적과 치세(治世)를 살펴보면,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두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경문왕(景文王)이 죽고 첫번째 왕비의 아들
이 왕(헌강왕)이 되자 5월 5일 중오일(重午日)에 두 왕비로 인하여 나라에 불길하다는 구
실을 만들어 둘째 왕비는 물론 왕자까지 죽이게 하였으나, 왕비는 피살당하고 왕자는 유
모의 기지(機智)로 경기 안성 칠장사로 피신하여 생명을 보전하였다.
억센
一轉)하여 신라의 왕자로서 버림받은 자신의 억울한 과거를 통한(痛恨)히 여겨 절치부심(切
齒腐心)하여, 학문과 심신을 단련 문무(文武)의 자질을 길러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아야겠다
는 결심으로,10세가 조금 넘은 어린 나이로 경기 여주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스님이 되어
선종(善宗)이란 승명(僧名)으로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때를 기다렸다.
신라 51대왕 진성여왕조(眞聖女王朝)에 나라는 날로 쇠약해져서 정치가 문란(吝亂)하
고 백성들은 관(官)의 악정(惡政)에 견디다 못해 분산(分散)하여 다른나라의 주현(主縣)으
로 반부(反附)하는 사람이 반이나 되고 원근각처(遠近各處)에 도적들이 때를지어 일어났다.
웅지(雄志)를 가슴에 묻고 기다리던 선종(善宗)도 웅지(雄志)를 품고 진성왕(眞聖王)
5년(891) 죽주적괴(竹州賊魁) 기훤(箕萱)을 찾아갔으나 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자 진성왕
(眞聖王) 6년(892) 기훤(箕萱)의 부하인 원회(元會)·신용(申熔)을 대동하고 북원(北原:) 양
길(梁吉)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양길(梁吉)은 선종(善宗)의 영용(英勇)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기용하더니 드디어 일군
(一軍)을 나누어 동쪽 지방을 경략(經略)하게 하였다. 이에 궁예(弓裔)는 주천(酒泉)·내성
(奈城)·욱조(郁鳥)·
진성왕(眞聖王)8년(894) 궁예(弓裔)가 명주(溟洲: )를 치매, 무리 3,500명을 14대로
나누어 금대검(金大鈐) ·모흔(毛昕)·장귀평(長貴平)· 장일(長一) 등을 사상(舍上)( )으로
임명하고 병사들과 고락(苦樂)을 한가지로 하며 취함에 공사를 구분, 상은 후히 하고 벌은
엄히 하니 이에 모든 군민이 그를 공경(恭敬)하여 장군으로 추대(推戴)하였다.
뒤이어 저족(猪足)·광천(狂川)·부약(夫若)·금성(金城)·철원(鐵圓:鐵原)을 격파
하니 군세(軍勢)가 심히 강성하여졌다. 궁예장군은 군영본부(軍營本部)를 철원(鐵圓)에 두고
사방을 진압하기에 이르니 저강 이서(沮江以西)와 오대 이북(五垈以北)의 무리들이 다투어
내항(來降)하는 자가 많아졌다.
이렇게 되자, 궁예(弓裔)는 조직을 확장하여 내외관직(內外官職)을 설치하였고 군민들
사이에 개국(開國)을 원하는 여론이 무르익어가자 송악군 토호(松岳郡 土豪)인 사찬(沙粲)
왕륭(王隆)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궁예(弓裔)의 위세에 위협을 느껴 진성여왕(眞聖女王)
9년(895년) 아들 왕건(王建)과 같이 귀순(歸順)하니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건(王建)을 금
성 태수(金城太守:金化)로 봉하고 왕륭(王隆)에게 송악군(松岳郡)을 진수(鎭守)하라 하였다.
왕륭(王隆)이 진언하기를 ‘만약 장군이 조선(朝鮮) 숙신(肅愼) 변한(卞韓)의 땅에 왕
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松嶽)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함이 상책이라’하니 궁예(弓裔)는
그 말이 옳다하여 왕건(王建)으로 개성 주위에 최초로 축성을 맡기니 그때 왕건(王建)의 나
이 20세였다.
진성여왕(眞聖女王) 10년(896) 왕건(王建)으로 하여금 승령(僧嶺)·임강(臨江)의 두현
(縣)을 공취(功取)케하고 신라 효공왕(孝恭王) 원년(897년)에 인물현(仁物縣)의 항복을 받았
다. 광할한 영토와 강성한 군대를 보유한 궁예(弓裔)는 한북명군(漢北名郡)으로서 산수가
수려한 송악군(松岳郡)에 도읍할 것을 내정하고 관궐(官闕)을 준비케 하는 한편 공엄(孔嚴)
·검포(黔浦)·대구성(大口城)을 차례로 취하였다.
이때 국원(國原)등 30여성을 거느리고 있던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이 궁예(弓裔)가
송악군(松岳郡)에서 개국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대노(大怒)하여 30여 성(城)의 경병(勁兵)을
총동원하여 습격을 감행(敢行)하나 이 정보(情報)를 미리 알고있던 궁예군에게 도리어 가평
(加平)땅 요충지에서 역습을 받아 궤멸(潰滅) 당하고 말았다.
효공왕(孝恭王)3년(899) 2월 궁예(弓裔)는 송악성(松岳城)을 보수 확장케하며 왕건(王建)을 정기
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 견주(見州)를 정복하였다. 그해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였다. 효공왕(孝恭王) 40년 경신년(庚申年:900년)에 왕건(王建)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충주(忠州)
·당성(唐城)·청주(靑州)·괴양(槐壤) 등지를 거두어 드렸다. 왕건(王建)은 그 공으로 아찬(阿飡:6급)의
벼슬을 내렸다.
효공왕(孝恭王) 5년 신유년(申酉年:901) 선종(善宗) 궁예(弓裔)는 고구려 유민을 기반
으로 송악(松岳)에 도읍을 정하고 고려국( )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말하기
를, 지난날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으므로 엣날 평양구도(平壤
舊都)는 사냥터가 되어 초목이 우거지게 되었으니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하였다.
궁예왕이 어느 때 남쪽으로 순행(巡行)하여 흥주(興州)의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렀을 때
에 신라왕상(新羅王像)의 벽화가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이를 쳐서 없앴는데 지금도 그 자
취가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궁예왕(弓裔王)이 출생때 신라 왕실(王室)에서 버림을 받은
원한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겠다.
그런데 국호를 고려(高麗)라 한 것은 고구려 유민을 포용하여 위대했던 지나간 영광을
재현하려는 착상은 좋았으나 궁예왕(弓裔王)의 기반인 철원(鐵圓)을 떠나 서울을 송악(松岳)
으로 정한 것은 시기상조(時機尙早)의 대단한 실책이었다. (弓裔王 高麗國創建 - 三國遺事)
송악(松岳)은 원래 왕건세거(王建世居)의 땅으로 누대(累代)에 걸쳐서 예성강(禮成江)
을 오르내리며 전국 귀족과 토호(土豪)들과 연계된 밀접한 상권을 형성하여 개성(開城) 특산
물을 중국(中國) 등에 수출하고 중국비단 등을 수입하며 해마다 막대한 부(富)를 누리게 하여
왕씨일가(王氏一家)에 인적조직과 경제적기반이 확고히 형성되어 있던 곳으로 왕건(王建)이
궁예(弓裔)에게 자진항복(自進降伏)할 때도 송악의 안전을 보장 받기위함 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개국 전후 왕건(王建)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 의존의 증대는 혈족(血族)과 인맥(人脈)이
없는 궁예왕(弓裔王)으로서는 나라를 만들어 왕건(王建)에게 넘겨 주는 작업으로 적당하였고
궁예왕(弓裔王)의 정치적 실패는 송악정도(松岳定都)에서 비롯하게 되었으니 몇년후 번창개경
(繁昌開京)과 비례되어 기존의 개성 상권이 전국을 지배하여 강대해지는 왕건일족(王建一族)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송악(松岳)에 도읍을 두고는 불가능하다고 깨닫게 되었을 것이
다.
그리하여 궁예왕(弓裔王)은 고심 끝에 왕건(王建)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유민들의 재
기의 상징인 고려(高麗)의 국호를 버리기로 한 것 같다. 효공왕(孝恭王) 8년(904) 7월, 국호
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년호를 무태(武泰)라 하여 신왕조 탄생을 확고히 국민들에게 인식
시키려 하여 철원(鐵圓)으로 환도(還都)를 단행(斷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로서 광평성
(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다.(註1)
신생국의 강대한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그해 상주(尙州) 등 30여성의 주현(州縣)을 공취
(功取)하니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왔고 효공왕(孝恭王)
9년 패서(浿西)를 13진으로 분정(分定)하였는데 평양성주(平壤城主) 검용장군(黔用將軍)이 투
항해오고 증산성(甑山城)의 적의(赤衣) 황의적(黃衣賊) 명귀(明貴) 등이 항복하여 왔다.
이후 궁예왕(弓裔王)은 스스로 강성함을 믿고 신라를 합병할 뜻을 두고 신라 경주(慶州)
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였다. 효공왕(孝恭王) 15년(911) 궁예왕(弓裔王)은 삼분되어 있는
천하를 통일하여야 한다는 큰 포부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년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원년이라 불러 이 왕국이 길이 번영할 것이라 하였다.
‘새로운 나라는이재까지와는 달라야 한다.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수도에 적합한 궁성이 있어야 한다’하고 궁예왕(弓裔王)은 철원(鐵圓) 북쪽 27리 풍천원(楓川
原)에 큰 궁전을 건축하였고( )이 궁성을 지키기 위하여 20여곳에 성곽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궁예왕(弓裔王)의 두번째 실책이었다.
원래 철원지역을 중심으로 유랑농민 대중을 규합하여 이들의 추대로 위대한 지도자로
떠올라 국가를 세웠으나 아직은 왕권이 확고히 다져지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계속되는 전쟁으
로 허약한 재정을 무릅쓰고 왕의 주력기반인 철원·평강·윤천 등지의 농민을 부역시켜 궁성과
성곽축조를 강행하니 이 지방 대중의 신망을 잃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감지한 궁예왕(弓裔王)은 실추된 인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왕건(王建)으로
하여금 수군(水軍)으로 서해를 돌아 금성(錦城)을 공격시켜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가두어
놓은 호랑이를 풀어주는 세번째 실책을 저질렀다고 하겠다.
송악(松岳)에서 궁예왕(弓裔王)에게 불안을 준 왕건(王建)은 철원 천도 후 내정에는 일
체 관여하지 않으려는 조심성을 보여 은인자중(隱忍自重)하여 오던 중 금성출전으로 왕과의
불편한 관계를 유보할 수 있었다.
궁예왕(弓裔王)은 뿌리깊은 왕건일당(王建一黨)을 금성(錦城)에 진주시켜 놓고 신라
병탄(新羅倂呑)의 상호 장해세력이었던 후백재왕 견훤(甄萱)과의 천하 쟁탈전에 대비한 포석
(布石)을 마친 뒤 내정을 쇄신하고 특히 궁예왕(弓裔王)이 세달사(世達寺)에서 뼈져리게 느껴
온 불교(佛敎)의 타락은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큰 명재였다.
신라(新羅)의 국교(國敎)인 불교(佛敎)는 그 때 귀족(貴族)과 특권층의 전유물화(專有
物化)되어 절과 승려(僧侶)는 오직 권도(權道)에만 아부하였으니 백성(百姓)은 부처를 떠난
지 오래 되었다. 궁예왕(弓裔王)은 이러한 백성에게 말하기를,‘부처(석가불)의 시대는 갔다.
새로운 세상의 부처인 미륵불이 이 세상을 구원 할 것이다.’라고 설파(說破)하고
새로운 불교생성에 전력을 기울여 왕 스스로 경서(經書) 20권을 지어 강설(講說)함에
힘을 쏟으며 자신을 미륵불(彌勒佛)(註2)이라 칭하고 이자(二子)를 청광보살(靑光菩薩)·신광
보살(神光菩薩)이라 하여 비단으로 장식한 백마를 타고 동남(童男) 동녀(童女)로 번개향화
(幡蓋香花)를 받들고 그 앞에 비구승(比丘僧) 200명에게 범패(梵唄) 염불(念佛)을 하게 하였
다 한다.
그러나 기성불교(旣成佛敎)의 뿌리깊은 항거(抗拒)가 있어 승(僧) 석청(釋聽)이 말하기
를 "이는 사설괴담(邪說怪談)이라 가르칠 것이 못된다" 고 악평하자 궁예왕(弓裔王)이 대노
(大怒)하여 철추(鐵椎)로 그를 때려 죽였다 한다.
신라 신덕왕(神德王) 2년(913년) 금성(錦城)에 주둔하고 있던 왕건(王建)은 불안감이
감도는 왕성의 정세를 파악하는데 힘쓰며 끊임없이 자기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지방토호
중에서 세력있는 자와 혼인을 통한 기반구축에 힘씀으로( ) 왕도 왕건의 세력을 어쩌지 못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유추하건데, 궁예왕(弓裔王)은 하는 수 없이 방향을 바꾸어 무마책(撫摩策)을 써서
장남인 태자(太子)를 나주(羅州)에 파견(派遣)하여 형세를 살피는 한편 군심(軍心)을 안정
시키기 위해 왕을 대신하여 시상(施賞)을 하며 진주군의 교체방법과 절차를 협의케 하였다.
그 후 왕건수하의 장수를 개별적으로 소환하여 궁성내의 한직(閑職)에 승진시키는 방
법으로 이들의 세력(勢力)을 거세(去勢)하는데 힘쓰고 때를 기다려 도성의 군사 수천을 나
주(羅州)의 왕건군(王建軍)과 교체케 하였다. 회군(回軍)하는 왕건에게 백강장군(百舡將軍)
을 겸하여 수군도 통괄하는 훈령(訓令)도 내려졌다.
다시 불안하여진 왕건은 비장한 각오로 정주(貞州)에 철군(撤軍)하여 심복부하를 단속
(團束)시켜 군영(軍營)을 엄히 하며 정세를 관망(觀望)하였다. 그러자 궁예왕(弓裔王)은 왕
건(王建)을 파진창시중(波珍滄侍中)으로 승진시켜 조속히 부임(赴任)하라 명하고, 군사들은
원정의 노고를 위로하여 후상을 내려 가족을 만나도록 휴가를 내린다 하여 불렀지만
왕의 의도를 읽은 왕건(王建)은 수하참모들과 숙의(熟議)끝에 대결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정주군영(貞州軍營)에서 이핑계 저핑계로 미동(微動)도 하지 않으며 도성내 자기
세력의 동태를 예의주시(銳意注視)하며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왕명을 시행하려는 왕사의 끊임없는 독촉도 강도를 더하였고 결과적으로 격
돌은 면하기 어렵게 되고 결과는 실전으로 단련된 왕건군은 왕명을 등에 업고 방심한 도성
군의 허를 찔러 철원(鐵圓)으로 입성하였던 것이다.
신덕왕(神德王) 4년(915) 항명(抗命)으로 도성에 입성한 시중(侍中) 왕건군은 궁예왕
(弓裔王)에게 왕건(王建)을 시기모함(猜忌謀陷)한 중신의 처벌을 요구하였을 것이고 왕당파
(王黨派)는 궁성을 고수하여 왕건(王建) 제거에 혈안이 되었을 것이니 도성과 궁성은 소란
과 혼란의 뒤범벅이 된 와중에 궁예왕(弓裔王)의 심복은 하나하나 사라져 갔을 것이다.
이와같은 정세로 궁예왕(弓裔王)은 내치(內治)는 부진하고 신불교(新佛敎)를 통한 국
기 확립(國基確立)으로 낙토(樂土)를 이루려던 통치이념은 반대에 부딪칠 뿐 아니라 궁내로
스며드는 왕건(王建)의 밀탐자(密探者)로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의심으로 고심하던 때,
충간(忠諫)하던 처자(妻子)를 가혹한 방법으로 죽였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는 분명히 상식에 어긋나며 현실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정치적인 중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朝鮮)조(朝) 우왕(禑王)을 신돈(辛旽)의 자식(子
息)으로 몰아 왕권을 탈취하는 구실로 삼았으나 오늘날 이를 믿는 역사가가 아무도 없듯이
이 또한 궁예왕(弓裔王)을 완전한 광인(狂人)으로 만들어 인간파산적 폐인으로 국민
에게 인상을 심어주며
려서 왕건(王建)의 반역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나아가 왕건(王建)이 나면서 겨드랑이에
용린(龍鱗)이 돋아 있었으니 왕이 될 천운(天運)을 타고 났다고 선전(宣傳)(註 4)하여
왕건(王建)의 왕위찬탈(王位纂奪)의 당위성을 백성들에게 이해 시키려고한 철저히 계
획된 조작극임을 쉽게 인지하는 바나, 고려조(高麗朝) 500년의 기정화(旣定化)를 여하히
규명하여 바로 잡을 것인지 두고두고 우리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실상을 바로보자면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 2년(918) 태봉왕국(泰封王國)
의 조정은 왕건의 세력으로 다지어지고 민심도 용의주도(用意周到)한 왕건(王建)에게 기울
자 왕건 일파(王建一派)는 무서운 음모로 왕(王)이 미쳐서 관심술(觀心術) 운운하며 왕비
(王妃)와 태자(太子)를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조작 유포하여 이러한 광인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다고 선동(煽動)하여
장군 홍술(弘述)·백옥(白玉)·삼능산(三能山)·복사귀(卜沙貴: )등 4명이 왕건(王建)
을 끼고 반란을 일으키니 다급해진 궁예왕(弓裔王)은 가족친권(家族親眷)을 구원할 틈도
없이 필신부하(必臣部下) 군사의 호위속에 6월 야중(夜中)에 궁성을 빠져나와 현 군탄리
(軍炭里)를 경유, 명성산(鳴聲山)에 은거(隱居)하면서 부하들과 항쟁을 다짐하며 이 산
8분능선(八分陵線)에 급히 석성(石城)을 쌓고, 왕건군(王建軍)과 대치(對峙)하였다.
그러나 구름같이 포위운집하는 추격군을 노려본 궁예왕(弓裔王)은 대세(大勢)가 이
미 기울어졌음을 직감하고, 수행(隨行) 군사를 모아 사태가 절망인 점 을 설명하고 각기
생명을 보전토록 타이르며 군사의 해산령을 내리게 하였다. 떠나는 군사들이 소리내어
슬피우니 산골이 울음소리로 요란하였다. 지금도 이슬비 내리고 바람부는 날에는 울음소
리가 들린다 하여 명성산(鳴聲山)이라 이름한다고 한다.
궁예왕(弓裔王)은 측근 몇 사람을 거느리고 현 평강(平康)방면으로 도망 중 수풀
속에 숨은 폭도의 죽창에 찔려 삼방(三防)땅에 이르러 마상(馬上)에서 분사(憤死)하였으
나 생시(生時)처럼 꼿꼿히 앉아 있었다 한다.
왕건(王建)이 달려와 조문(弔問)하나 유해(遺骸)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이
겁내어 부득이 직립(直立)한 채로 입관(入棺)케하여 석축(石築)으로 수십 길이나 높다란
분묘(墳墓)를 만들어 왕후(王侯)의 예(禮)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고 하며 오래도록
년1회 향사(享祀)를 올렸다고 전한다.
궁예왕(弓裔王)은 진성여왕(眞聖女王) 5년(891) 천하를 도모(圖謀)하려는 웅지(雄志)
를 품고 전장(戰場)을 횡행(橫行)하기 28년 태봉왕국(泰封王國: )을 세워 견훤(甄萱)의
후백제국(後百濟國)과 더불어 후삼국(後三國)을 정립하였으며 천하를 통일하여 종교개혁
(宗敎改革)을 통한 지상낙토(地上樂土)를 이루려던 위대한 꿈이 무너지니 왕위(王位)에
재위(在位)한지 18년만의 일이다.
궁예왕은 믿고 중용(重用)한 부하 왕건(王建)의 치밀한 계략에 말려들어 일세를 풍미
(風靡)하던 효웅(梟雄)도 씻을 길 없는 오명(汚名)에 천추(千秋)의 한을 남겼으리라. 화려
했던 풍천원(楓川原) 관지(官趾)에는 석등 하나 외로이 서있어( ) 그날의 영화를 전하여
주고 평강(平康) 검불랑(劒拂浪)의 연병장 고사(古事)하며
문막(文幕)뒤 건등산(建登山)에서 견훤(甄萱)의 대부대를 격파하던 용장(勇將)의 무
용담(武勇談)은 촌노(村老)들의 입으로 전하여지고 홍지리(洪之里)의
송면(東松面) 금학산(金鶴山)의 칠성대(七星臺)등 영웅은 가고 전설 만이 전해진다.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 2년(918) 나라를 찬탈(簒奪)한 왕건(王建)은 국호를 고려
(高麗)로 환원(還元)하고 송도(松都)로 천도(遷都)하여 노련한 외교술로 신라의 중신들을
회유(懷柔),농락(籠絡) 경주(慶州)를 제외한 신라의 전 국토가 고려(高麗)에 반부(反附)하
니 경순왕(敬順王) 9년(935) 12월 왕은 태자(太子)의 간곡한 만류와 반대를 무릎쓰고 쇠잔
(衰殘)해진 나라를 왕건(王建)에게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992년간 존속(存續)해온
신라(新羅)는 멸망하였다.
또한 후백제왕(後百濟王) 견훤(甄萱)은 경순왕(敬順王) 원년(927) 기백(幾百)의 군병
으로 5천의 신라(新羅)를 구하러온 왕건군(王建軍)을 팔공산(八公山) 동수(桐藪)땅( )에서
맞아싸워 결정적인 대승을 거두니 그 전투에서 왕건(王建)은 사지에서 부하장수 금락(金樂)
과 용장(勇將) 신숭겸(申崇謙)의 죽음의 항쟁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견훤(甄萱)은 그 후 승전(勝戰)한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과 경산부(京山府 )·강
주(講州)를 노략한다. 그러나 견훤(甄萱)은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여 의성부(義城府)의
태수(太守)총신(寵臣) 홍술(洪述)이 대항하다 죽는것을 구경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천재
적 전략가 이건만, 왕건(王建)의 반간지계(反間之計)의 술수에 말려들어 내분으로 인한 부
자형제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우(愚)를 범하게 되니 결국, 건국 45년만에 자멸(自滅)
의 길을 걷게된다.
이로써 고려(高麗)는 서기 936년에 비로서 청천강(淸川江)이남의 삼국통일국가(三國
統一國家)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 즈음에 비운의 왕가인 궁예왕(弓裔王)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을까?
망국의 격변속에 산실(散失)한 왕손들은 생존을 위한 고초를 짐작할 뿐 확실한 사증
(史證)은 찾을 길 없으나 구전(口傳) 가첩(家牒)의 기록을 토대로 추고(推考)되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광산이씨(光山李氏) 득성조(得姓祖) 궁예왕(弓裔王)으로부터 오전(五傳)하
여 형성된다.
설에 의하면 고려태조(高麗太祖) 23년(940) 경담(敬曇)께서 태조(太祖)의 만류를
뿌리치고 광산군(光山郡)으로 피거(避居)하였다 하며 그의 아들 구(球)께서 광주호장(光
州戶長) 지방토호(地方土豪)인 이씨가(李氏家)의 서(壻 사위)가 되어 득관조(得貫祖)이신
종금(宗金)을 낳으셨다고 하나 진위(眞僞)는 확인할 길이 없다.
(註1) 이때 설치된 관부(官府)는 광평성(廣評省:신라의 집사성(執事省)과 같은 최고행정부),
병부(兵府),대용부(大龍附:후 개창부(改倉部)),수춘부(壽春部:예부(禮部)),봉빈부(奉
賓部:예빈부(禮賓部)),의형부(義刑部:형부(刑部)),납화부(納貨府:대부사(大府寺)),
내봉성(內奉省:도성(都省)금서성(禁書省;비서성(秘書省)),남상단(南廂壇:장작감(將作
監)),수단(水壇:수부(水部)),원봉성(元奉省; 한림원(翰林院)),비룡성(飛龍省;대복사
(大僕寺)),물장성(物藏省;소부감(少府監)),사대(史臺;사역원(司譯院)),식화부(植貨府
: 과수(果樹) 재배를 맡음),장선부(障繕府;성곽수리를 맡음), 주도성(珠淘省)등 인데
광평성(廣評省)의 장관은 광치내(匡治奈;후개시중(後改侍中)) 차관은 서사(徐事;시랑
(侍郞)) 다음은 외서(外書;원외랑(員外郞))요, 이밖에 품직(品職)을 설(設)하여 정광
(正匡)·원보(元輔) 대상(大相)·원윤(元尹)·좌윤(佐尹)·정조(正朝)·보윤(甫尹)·
군윤(軍尹)·중윤(中尹)이라고 하였다.
(註2) 자씨(慈氏)라 번역.현재는 보살(菩薩)로 그 정토(淨土)인 도솔천(兜率天)의 천인(天人)
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지만 석가불(釋迦佛)의 예언에 의하여 그 수(壽)가4000歲(인간의
567천만년)가 되었을때 이 세상에 하생(下生)하여 용화수(龍華樹)밑에서 성불(成佛)하
고 삼회(三會)에서 설법할 약속임. 이때는 불(佛)의 자격을 얻으므로 미륵불(彌勒佛)이
라 함.
(註3)
어떠한 사람을 보니 용모가 기이하고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 낡은 의관(衣冠)을 하고 왼
손에 자완(慈椀)을 들고 오른손에 고경(古鏡)을 들고
의 이 거울을 사겠는가?" 함으로 이를 기이하게 여겨 고경(古鏡)을 쌀과 바꿨는데 그
사람이 쌀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뒤에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에
그 면에 가느다란 글씨가 보였음으로 읽어본즉 다음과 같은 고시(古詩)가 나타났다.
上帝降子於辰馬(상제강자어진마)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리시니
先操鷄後搏鴨(선조계후박압) 먼저는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으리라
於巳年中二龍見(어사년중이룡견) 사년(巳年) 사이에 두용이 나타나
一則藏身靑木中(일측장신청목중) 하나는 몸을 푸른 나무속에 감추고
一則顯形黑金東(일측현형흑금동) 하나는 모양을 검은 금이 동쪽에 나타났도다.
하였다.
명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교삽사(敎颯寺) 불당에 진성소상(鎭星塑像)이 그 사람과 닮았다는
보고에 궁예왕(弓裔王)은 이상이 여겨 송관홍(宋官弘)·백정(白貞)·
불러 뜻을 풀어 알리라 명하였다.
3인이 이 고시(古詩)를 보니, 상제(上帝)가 이들을 마진(馬辰)에 내렸다 함은 마한(馬韓)
과 진한(辰韓)을 말함이요. 이용(二龍)이 나타나 하나는 푸른나무 속에 감추고 하나는
검은 금속 속에 나타났다 하는 것은 푸른나무는 곧 소나무(松)로 송악군(松岳郡)을 이름
이며, 송악(松岳)의 용(龍)은 왕건(王建)을 일컫음에 틀림없으며 금은 곧 쇠(鐵)니 철원
(鐵圓)을 일컫음이니 지금의 왕이(궁예왕) 여기서 일어나고 여기서 망한다 하는 뜻이다.
그리고 먼저 닭(계림(鷄林))을 잡고 뒤에 오리(압록강(鴨綠江))까지 점령하여 나라를
통일한다는 뜻으로 풀이를 하였으나 궁예왕(弓裔王)에게 이와같이 보고하면 왕건(王建)의
목숨은 물론 자신들도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단정하고 마침내 좋은 말로 적당하게 꾸며
보고하여 넘겼다고 한다.
(註 4)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용종(龍種)임을 자처하고 그 물증(物證)으로서 용
린(龍鱗) 곧 용비늘을 고려왕조 대대로 계승해 내려왔다. 이 고려 용비늘에 대한 조선조
(朝鮮朝) 중종(中宗)때의 기록을 보면‘잘 살펴보니 대모갑(玳瑁甲 : 열대 해양에 서식하
는 거북이의 등껍질)을 깎아 용비늘 처럼 만든것‘이라 하였다. 이 용비늘은 명종(明宗)
때 경복궁(景福宮)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한다.
第 2 編 高 麗 時 代
1. 득관조(得貫祖)와 고려(高麗)
역경을 딛고 일가를 일으키신 시조(始祖) 이종금(李宗金)의 충절하고 용기있는 삶과
다난하였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고려(高麗)가 통일을 완성한 힘은 토호(土豪)의 이익을 최대로 보장한 왕건(王建)의
결연정책(結緣政策)에 있었음으로 고려(高麗)초기의 중앙정부는 지방토호(地方土豪)를 효
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태조(太祖)로 부터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한반도 중남부의 호족세력(豪
族勢力)을 평정해 가며 집안의 수많은 이복남매(異腹男妹)를 결혼케 하여 외척수(外戚數)
를 줄이는 노력과 광종(光宗) 7년(956)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여 전쟁중 양민
의 노비화를 환원복권(還元復權)케 하여 호족세력(豪族勢力)의 기반을 축소약화(縮少弱化)
시키고
또한 광종(光宗) 9년(958)에 중국에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유교(儒敎)의 학문성적(學
問成績)으로 인재를 등용케 하여 벌족(閥族) 골품제약(骨品制約)의 유폐(遺廢)를 일신(一
新)하고 신진세력을 확충(擴充), 무신(武臣)들을 점진적(漸進的)으로 교체케 하는 등 힘
겨운 노력을 거쳐 국경을 청천강(淸川江) 이북으로 북진(北進)시키는데 6대 성종(成宗)까
지 80년이란 세월이 걸려 겨우 성과를 거둘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중국과 만주지방의 정세는 서기 907년 당(唐)이 쇠망(衰亡)한 후 50년 동안
5,60국의 전란기를 거쳐 새로운 통일재국인 송(宋)이 세워졌다. 그러나 송(宋)이 북방에는
중국의 전란기를 틈타 부족을 통합한 거란족(契丹族)이 요(遼)나라를 건국하여 천진(天津)
이북과 몽고지방, 만주일대를 석권하고 대륙의 송(宋)과 겨루는 강대한 세력으로 커졌다.
거란(契丹)이 송(宋)과 대결함에 있어서 고려(高麗)의 북진정책을 견제하고 불안한
후방의 적대세력을 말살하려는 것은 정해진 순서라 할 것이다. 따라서 성종(成宗) 12년
(993년) 10월 거란(契丹)의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이 대군을 거느리고 봉산군(蓬山郡)
을 공격하며 항복할 것을 요구하여 왔다.
고려조정은 내사시랑중군사(內史侍郞中軍使) 서희(徐熙)를 화통사(和通使)로 하여
양국의 수호가 원만치 못한것은 중간에 여진족(女眞族)의 방해가 원인 임을 주장, 여진족을
몰아내고 국경인 압록강(鴨綠江) 근처에 성루(城樓)를 싸서 통호(通好)하기로 합의하여 싸
우지않고 강화(講和)에 성공하고, 성종(成宗)13년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압록강 이남지역
에
하고 처음으로 압록강도구당(鴨綠江渡勾當: )을 건설하였다.
그간 요(遼)는 중원의 송(宋)과 10년에 걸쳐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다가 1003년
12월 강화를 하고 휴전기에 들어갔다. 요성종(遼聖宗)은 송(宋)과 교전할 때 고려(高麗)가
송나라와 우호(友好)를 청산하지 않음을 마음속으로 불만이 여기다가,
마침 고려(高麗) 목종(穆宗)12년(1009)에 목종(穆宗) 모후 천추태후(母后天秋太后)가
외척(外戚)인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하여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목종(穆宗)
이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道巡檢使) 강조(康兆)에게 급사(急使)를 보내 군사 오천을 이끌고
와서 반역 행위를 진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강조(康兆)는 개경(開京)으로 오던 중 변심하여 목종(穆宗)을 위시, 김치양(金
致陽) 천추태후(天秋太后) 모두를 제거하고 18세의 현종(顯宗)을 추대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거란(契丹)의 성종(聖宗)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 이를 구실로 제2차 고려침공(高麗侵攻)을
결행하였다.
현종(顯宗) 원년(元年:1010) 11월 1일 성종(聖宗)은 40만대군을 거느리고 친히 흥화진
(興和鎭)을 포위하니 바야흐로 전단(戰端)의 막이 올랐다.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康兆)
는 부통사(副統使) 이현운(李鉉雲)·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성종(聖宗)은 흥화진(興和鎭)을 포위하고 순검사(巡檢使) 양규(楊規)에게 투항하도록
갖은 선무공작(宣撫工作)을 폈으나 장병이 일치단결 굳게 지켜 20 여일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자 20만 병력을 인주(麟州) 남방에 무노대(無老代)에 주둔시킨 다음 나머지 20만군사를
이끌고 통주(通州)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11월 24일 통주성(通州城) 밖 삼수채(三水砦)에 진을 친 강조(康兆)는 지리적인 우위를
이용, 적절히 방어함으로 거란군(契丹軍)의 공격을 번번히 패퇴(敗退)시켰다. 그러나 날이 갈
수록 강조(康兆)는 적을 경시(輕視)하게 되고 결국은 그 오만(傲慢)이 패전(敗戰)을 자초, 3
만명의 병력 손실과 많은 군비를 잃고 강조(康兆)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성종(聖宗)은 강조(康兆)의 편지를 날조하여 흥화진(興化鎭) 양규(楊規)에게 항복을 권
유했으나 실패하자 거란군(契丹軍) 주력(主力)은 일로(一路) 완항령(緩項嶺)까지 진격하다가
고려좌우기군(高麗左右奇軍)
거란군(契丹軍)은 삼수채(三水砦)에서 나포(拿捕)한 노진(盧晉)등을 통주성(通州城)에
격문(檄文)을 보내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 등과 방어사
방어사(郭州防禦使) 조성유(趙成裕)는 달아나고 대장군 대회덕(大懷德)등 많은 장사(將士)들이
항전하다가 낙성(落城)과 함께 전사하였다.
12월 8일 거란군(契丹軍)이 청수강(淸水江)에 도달하고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 박
섬(朴暹)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주민들도 모두 흩어졌다. 12월 10일 거란군(契丹軍)은 숙주
(肅州)를 함락시키고 서경(西京)으로 향하였다.
서경(西京)은 혼란에 빠졌으나 현종(顯宗)의 지시로 화주(和州) 주둔군(駐屯軍) 지채문
(智蔡文)의 원군이 원군으로 이동되어와서는 항복 동조자(降伏同調者)를 제거하고 동북 계도
순검사(東北界都巡檢使) 탁사정(卓思政)의 합류로 방어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거란군주(契丹
君主)는 총력으로 서경(西京)을 공격함에 지채문(智蔡文)은 승장(僧將) 법언(法言)과 임원역
(林原驛)에서 승리하나 다음날 12월 17일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세불리(勢不利)를 직감한 탁사정(卓思政)이 출전한 대도수(大道秀)를 속이고 달아나자
대도수(大道秀)는 자기 부대를 이끌고 거란군(契丹軍)에게 항복하고 말아, 서경(西京)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등이 잔병을 수습(收拾)하고 군민이 통군
록사(通軍錄事) 조원(趙元)을 병마사(兵馬使)로 추대하여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12월 27일 패장(敗將) 지채문(智蔡文)은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적정을 보고하자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자고 하였으나 오직 예부시랑(禮部侍郞)
인이 강조(康兆)의 난(亂)에 있는 만큼 우선 적의 예봉(銳鋒)을 피해 놓고 강화책을 씀이 옳
다고 주장하여 현종(顯宗)으로 하여금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에게 금군(禁軍) 50
명의 호위군을 딸려 남방(南方)으로 파천(播遷)토록 결정, 실행하였다.
현종(顯宗)은 전 상서좌사랑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의 건의를 받아 화친사로
정하고 12월 28일 창화현(昌化縣)에서 거란군(契丹軍)을 만나 화친(和親)을 거론하였으나 서기
1011년 현종(顯宗) 2년 1월 1일 거란군(契丹軍)은 마침내 개경(開京)에 입성(入城)하고 태묘
(太廟)와 궁궐(宮闕) 민가를 위시, 주변 주군(州郡) 중요시설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러나 급한 진군으로 미함락주성(未陷落州城)의 항거로 후방의 불안을 더 이상 감당하
기 어려운 거란주(契丹主)는 고려왕이 입조(入朝)한다는 조건으로 하공진(河拱辰)의 화친을
받아들여 1월 11일 철군령을 발(發)하였다.
1월 17일 구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 등의 추격과 1월 18일 양규(楊規)는 무노
대 주둔적(無老代駐屯敵)을 치고 1월 19일에는 이수(梨樹)에서 적을 맞아 석령(石嶺)까지 몰
아내고 1월 22일 여리참(餘里站)에서 양규군(楊規軍)은 3차에 걸친 교전을 모두 승리하여 적
에게 막대한 인명과 군수품의 손실과 포로로 끌려가는 3만명의 동족을 구출하는 대공을 세웠
으나, 1월 28일 애전(艾田)에서 거란군(契丹軍) 주력과 하루종일 접전,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고, 중과부적(衆寡不敵)의 기진절시(氣盡切矢)하여 전원이 전사하였다.
거란군(契丹軍)은 철수 도중 도처에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 속에 1월 29
일 간신히 압록강 도강(渡江)을 하던 중 흥화진사(興化鎭使) 정성(鄭成)이 후미를 기습하여
마지막 통타(痛打)를 주었으며 점령 당한 주군(州郡)이 모두 수복하게 되고 나주(羅州)까지
파천(播遷)했던 현종(顯宗)이 개경(開京)에 돌아옴으로 약 3개월간에 걸친 거란(契丹)의 2차
침공이 끝나게 되었다.
거란 성종(契丹聖宗)은 철수 중 고려군의 결사적 반격에 막대한 출혈을 강요당하고 간
신히 귀국하였던 것이다. 고려왕이 입조(入朝)가 이행되지 않자 재출병을 준비하는 한편, 고
려 북방지역에 6년간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인 타초곡작전(打草穀作戰)으로 분풀이를 하였으나
고려군은 이에 대비, 조직적인 방어로 거란군(契丹軍)은 번번히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현종(顯宗) 9년(1018) 12월 10일 거란주(契丹主)는 3년 동안 엄선한 정예 10만여를 도
통 소배압(都統 蕭排押)에게 주어 3차침공을 단행하였다. 고려(高麗)는 상원사
하여 지금의 삼교천(三橋川)을 막아 거란군(契丹軍) 선진(先陣)의 도착에 맞추어 터놓아 일만
이천 명의 복병으로 수공과 함께 엄습(掩襲)하여 대패시켜 초전(初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소배압(蕭排押)은 조전강공(早戰强功)으로 일로(一路) 개경(開京)을 향하여 전진하자
강민첨(姜民瞻)은 이들을 추격,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에서 따라잡아 격전 끝에 승리하였
고, 한편 시랑 조원(侍郞 趙元)의 부대는 마탄(馬灘)에서 추격하여 일만여명의 거란군(契丹軍)
의 손실을 입혔다.
현종(顯宗) 10년 1월 2일
만 명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게 3,300 명의 군사를 주어 개경(開京)의 왕궁(王宮)을
호위(扈衛)하게 하고 도성(都城) 밖 백성을 성안으로 수용하여, 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
이러한 철통방어(鐵通防禦)에 거란군(契丹軍)은 개경(開京) 주변을 유답(蹂踏)할 뿐 시
일을 끌다가 불안한 후반의 보급부진으로 1월 23일 드디어 거란군(契丹軍)은 연주(漣州) 위주
(渭州)로 철수하게 되자 이를 기다려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고 2월 1일 거란(契丹) 주력
부대가
동쪽 벌판에서 처음으로 일대 결전(一大決戰)을 벌였다.
마침 개경(開京)을 수호(守護)하던
바람이 남에서 북으로 휘몰아치면서 깃발이 북쪽으로 세차게 펄럭이자 용기백배(勇氣百倍)한
고려군(高麗軍)이 분발 총공격을 감행하여 거란군(契丹軍)은 대패(大敗)하여 달아나게 되니
이 전투에서 거란군(契丹軍)주력 천운(天雲) 석피실(石皮室)의 2개군이 전멸 당하고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발해상온고청명(渤
海詳穩高淸名), 천운군산온(天雲軍詳穩)·해리(海里) 등 거란(契丹) 용장(勇將)들이 전사하는
혹심(酷甚)한 참패는 거란(契丹) 건국(建國)후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고려군(高麗軍)은 도주하는 적을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까지 추격하였다. 거란군
(契丹軍)의 사체(死體)는 들판을 메웠고 획득한 전리품은 산을 이루었다. 겨우 생명을 부지하여
돌아간 거란군(契丹軍)은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역사는 구주대첩(龜州大捷)이라 하며
영양왕(瓔陽王) 23년(612) 7월 수군(隨軍)을 청천강(淸川江)에서 격멸(擊滅)한 을지문덕(乙支
文德)과 아울러 일컫는 해동(海東)의 명장(名將)이었다.
참패의 보고를 받은 거란주(契丹主)는 대노(大怒)하여 소배압(蕭排押)에게 "경적(輕敵)
하다. 패전하였으니 내 기어이 네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야 말겠다" 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후 거란군(契丹軍)은 두번 다시 고려국(高麗國)을 침입하지 못했다.
현종(顯宗)은 영파역(迎波驛)까지 삼군을 영접 채붕(綵棚)을 치고 왕은 친히 금화팔지
(金花八枝)를
경하(慶賀)하였다.
우리의 조상(祖上) 본명 김일형인 휘(諱) 종금(宗金)께서도 현종(顯宗) 원년(1010년)
거란군(契丹軍)이 침입하자 장사(壯士)로서 어찌 우국(憂國)의 충정(衷情)이 없었겠는가?
으며,
특히 거란국주 성종(契丹國主 聖宗)의 친정과 소배압(蕭排押)의 침공으로 개경(開京)
주변이 초토화(焦土化)하는 와중에
당시 수도인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를 전화(戰禍)에서 보전하는데 크
나큰 공적이 인정되어 덕종(德宗) 2년(1033)에 광산군(光山君)에 봉하여지고 이종금(李宗金)이
라 사성명(賜姓名)을 받았다.(註5)
이후 이종금(李宗金)을 후손이 광산이씨(光山李氏)의 시조(始祖)로 받들게 되었으며 광
산군(光山郡)에 세거(世居)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팔전(八傳)한 290여 년간의 직계손(直系孫)
만 기록되어 전하여올 뿐 지손(支孫)들의 종지(宗支)는 알길이 없다. 다만 충렬왕(忠烈王) 조
(朝)에 영광김씨(靈光金氏) 장흥파시조(長興派始祖)인
보광(光山李寶光)의 따님임을 확인시켜 주고있다.
이를 추고(推考)하건대 충렬왕(忠烈王) 조(朝) 이전 부터 분파된 광산이씨(氏山李氏) 일
파는 정승(政丞)의 배열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수 있겠고 그간 여러 보서(譜序) 중에도 평양(平
壤)·개성(開城) 등 종인(宗人)의 합보(合譜)를 거론 만하고 뜻을 이루지 못함은 상계(上系)가
일치하지 않는 종인(宗人)이 있음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註5) 이종금(李宗金) 사성명(賜姓名), 봉군(封君)의 년도 고증(年度考證)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
하여 그 시대의 실상을 기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遼)가 성종(成宗) 12년(993)에 1차, 현종(顯宗) 원년(1010)에 2차,동 9년(1018)까지
3차에 걸친 거란(契丹)측의 일방적인 도전행위로 시작되어 비록 구주대첩(龜州大捷)으로 고
려(高麗)는 당시 조야(朝野)의 인심을 통쾌(痛快)하게 하였으나 쌍방의 피해는 필설(筆說)
로 다하지 못할 것이다.
요(遼) 성종(聖宗)은 무력으로 고려(高麗) 정복이 불가능 함을 깨닫고 국교의 수립과
요(遼) 년호(年號)의 사용 및 압록강(鴨綠江) 동(東) 6주중 보주(保州)·선주(宣州), 2개 주
의 점거(占據)를 조건으로 강화를 제시해 옴으로 고려(高麗)도 현종(顯宗) 11년(1020) 한계
에 달한 현실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복구에 전념하던 조정은 오랜 전쟁 후 나포
(拿捕)되어간 부로송환(孚虜送還)과 강점(强占)된 2성의 철퇴문제로 고려조야(高麗朝野)의
적개심은 가시지 않았다.
현종(顯宗) 20년(1029) 9월 요(遼)의 동경(東京:요양(遼陽))사리군(舍利軍) 상온(詳穩)
인 대연림(大延琳:발해인)이 반란을 일으켜 국호(國號)를 흥요(興遼)라 하고 년호(年號)를
천경(天慶)이라 하여 일시는 보주황룡부(保州黃龍府:금풍안(今豊安))의 발해인까지 호응하는
세력으로 커져 고려(高麗)에도 구원을 청하여 왔다.
고려의 형부상서(刑部尙書) 곽원(郭元) 등은 이 기회에 북벌(北伐)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문하시중 최사위(門下侍中 崔士威)등의 신중론(愼重論)으로 응하지 않으니 곧
평정되고 말았다.
고려(高麗) 9대 덕종(德宗) 원년(1031) 10월에 류교(柳喬), 김행공(金行恭)을 요 흥종
(遼 興宗:重熙元年)에게 보내 요(遼)가 압록강(鴨綠江)에 가설한 부교(浮橋)와 보주(保州)·
선주(宣州)2성의 파괴와 부로반환(孚虜返還)의 요구가 거부되자 고려(高麗)는 단호히 국교를
단절하고 국가비상(國家非常)을 선포하여 다음 세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 유소(柳韶)에게 압록강구(鴨綠江口)에서 동으로 뻗쳐 영흥(永興)에 이르는 천리장
성(千里長城)을 축조하는 공역(工役)을 명하였고,
둘째,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구판(舊板)) 주조를 더욱 서둘러 불심(佛心)에 의지(依持)
하여 환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백성들의 믿음을 편케하고 또한 요구(遼寇) 때부터 유공(有功)
하였던 조정의 중신에 대한 포상·봉군(封君:이종금 광산이씨시조(李宗金 光山李氏始祖), 이광
고성이씨 시조(李壙固城李氏始祖))을 시행하여 국민의 단결과 화합을 도모케하고,
셋째,태조(太祖)로부터 목종(穆宗)까지 7대에 이르는 소실된 실록을 수국사(修國史) 황량
주(黃亮周)등에게 찬수(撰修)하도록 명하니 고려(高麗)는 상하가 일체되어 이 일에 전념하여
점차 실효를 거두어가자
정종(靖宗)원년(1035년) 요국(遼國)의 강경한 항의가있었고 같은왕 3년 10월 요(遼) 병선
(兵船)이 정주 (靜州)에 침입하였으나 곧 격퇴 되었다. 그 후 요국(遼國)은 강성 해지는 고려
(高麗)를 어쩌지 못하였다.
2. 중세조(中世祖)와 고려(高麗)
우리 조상들의 영명(英明)함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신명(身命)을 바쳐 보국(報國)하였으니
중세조(中世祖)로 숭앙(崇仰)하는 이순백(李珣白)께서는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조(朝:1314 ∼
1339)에 청주장서기(靑州掌書記)에서 기신(起身)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좌복사사공상서(左僕射
司空 尙書)에 이르기까지 남다른 충절과 인고(忍苦)로 그 당시 일신(一身)의 영달(榮達)을 위하
여는 못하는 짓이 없던 암흑시대에서 참으로 우리 종문(宗門)에 등불이라하여 마땅할 것이다.
그 시대상에서 꿋꿋이 성심을 다한 이야기를 적어보자.
외구(外寇)를 물리친 고려(高麗)는 11대 문종(文宗:1048∼1083) 때부터 서(西)는 송(宋)과
서북은 요(遼)와 평화책을 쓰고 일본(日本), 기타 해외원방(海外遠邦)과 통호(通好)하고 국력을
내치(內治)에 충실하니 16대 예종(睿宗)때까지 76년간 고려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謳歌)하였다.
그러나 17대 인종(仁宗) 조(朝:1123)부터 외척세력(外戚勢力)의 발호(跋扈)는 귀족의 패로
시작하여 국권문란(國權紊亂)은 내란과 외구(外寇) 등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19대 명종(明宗)
26년(1196)
다음해 명종(明宗)을 패위시키고 신종(神宗)을 옹립(擁立)하니 이로부터 고종(高宗) 46년
(1259)까지 60여년간의 최씨세습무단정치(崔氏世襲武斷政治)로 국권을 전단(專斷)하니 국왕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문무(文武)의 분규(紛糾)와 내란은 국력을 더욱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때 몽고족(蒙古族)의 징기스칸(成吉思汗)이 송(宋)의 북부를 장악(掌握)하고 유럽까지
정복하여 원(元)나라를 세워 동쪽으로 전국을 장악하려던 중 병사하였다. 원(元)의 태종(太宗)
이 고종(高宗) 17년(1230) 금국(金國)을 정복하면서 별군을 사리타이(撤禮塔)에게 주어 고려
(高麗)를 침공케 하였다.
고종(高宗) 18년 8월 고려군(高麗軍)은 항전하는 한편 같은해 12월 1일 강화하였으나 이
로부터 기나긴 30년 항전의 제1차 몽고(蒙古)의 침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종(高宗) 19년 무인정권에 의한 국력의 피폐(疲弊)로 개경(開京)을 지키지 못 할 것을
우려하여 단행한 강화도(江華島)로의 천도(遷都)로 원(元)의 재침(再侵)을 불렀음으로 원장
(元將) 사라타이(撤禮塔)가 처인성(處仁城: )에서 화살을 맞고 죽으니 부장(副將) 철가(鐵哥)
는 군을 철수시켰다.
고종(高宗) 22년 원(元)의 3차침공은 26년 봄 고려(高麗)가 항복할 때까지 전국이 유린
당하는 참화(慘禍)를 입으면서 강도(江島)에 있는 조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 국왕입조(國王
入朝)를 왕족으로 대신케 하고 왕족의 질자(質子)와 매년 과중한 세공(歲貢)을 조건으로 군사
를 거두어갔으니 이로 인하여 나라는 점점 피폐하여 갔다.
고종(高宗) 38년 원(元)의 헌종(憲宗)이 즉위하고 다시 왕의 입조(入朝)와 개경환도(開京
還都)를 요구하다 실현되지 아니하매 고종(高宗) 40년 4차 몽고(蒙古)의 침공을 당하였다.
충주(忠州)까지 내려간 원군(元軍)을 승장(僧將) 김윤후(金允候)는 성안의 군사들과 일치단결
하여 선방하니 적은 예기(銳氣)가 꺾이어 더 남하하지 못하매
조정(朝廷)은 원장(元將) 야굴(也窟)과 교섭(交涉),왕이 강도(江島) 대안(對岸)인 승천부
(昇天府)에서 원장(元將)을 영견(迎見)하고 왕자 창(昌)을 원도(元都)에 보내어 항복하는 조건
으로 철군케 하였다.
고종(高宗) 41년 원주(元主)는 고려왕(高麗王)의 입조(入朝)를 요구, 다시 원장(元將)
차라대(車羅大)로 5차 침공을 감행한바 이 전란으로 고려(高麗)는 최대의 피화(被禍)를 당
하는데 포로 남녀 206,800여 명이 끌려가고 살륙 당한 사람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고
려사(高麗史)는 기록하고 있다.
고종(高宗) 42년 6월 6차 침공이 있었는데 주로 호남지방을 공략하였으나 항거가 심하
여 원군(元軍)도 상당한 피해를 입어 다음해(1256) 가을 퇴병(退兵)하였다.
고종(高宗) 44년(1257) 권신(權臣) 최항(崔沆)이 침공이 거듭되니 세공(歲貢)을 정지해
버리자 7차 침공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원장(元將) 차라대(車羅大)는 안북부(安北府)에
본영을 두고 성읍을 차례로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고종(高宗)은 김수강(金守剛)을 원주(元主)에게 보내 군사를 거두어 줄 것을 애걸하니
원(元) 헌종(憲宗)이 이를 허락하여 철병(撤兵)이 이루어졌다.
다음해 최항(崔沆)이 죽자 최의(崔 )가 뒤를 이었는데 고종(高宗) 45년
이 최의(崔 )의 심복을 죽이고 대사성(大司成) 유왕경(柳王敬) 등과 더불어 최의를 습격하여
죽이고 대권을 고종(高宗)에게 바치니 4대 60여년 간의 최씨 병정(崔氏秉政)은 끝나게 되었다.
고종(高宗) 46년(1259) 더 이상 항전할 수 없음을 느낀 왕은 태자(太子) 전( )에게 항표
(降表)를 가지고 원도(元都)로 출발하게 하니 이로써 30년 긴 전란은 끝이 났다.
고려(高麗) 원종(元宗) 11년(1270) 강도(江都)에서 개경(開京) 환도(還都)가 결정되자
배중손(裴仲孫)을 중심한 삼별초(三別抄)가 항몽(抗蒙)을 부르짖고 강화(江華)·진도(珍島)·
제주도(濟州島)로 옮겨가며 4년간을 결사 항전하여 비록 패하기는 하였으나 고려무인(高麗
武人)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원(元)의 위력에 굴복한 고려(高麗)는 양차에 걸친 원(元)의 일본 정벌에 끌려 다니는
피해를 당해야 했다. 자주성을 잃은 고려(高麗)는 충렬왕(忠烈王) 2년 (1276) 왕의 품계(品
階)도 격하 당하는 일련의 조치를 감수하였으며 왕후(王后)는 원국 공주(元國公主)로 짝지
어지고 태자 왕손(太子王孫)은 (인)질자(質子)로 원도(元都)에 체재(滯在)하여야 하는 수모
(受侮)와 절제를 제31대 공민왕(恭愍王) 5년(1356)까지 일세기에 걸쳐 감내(堪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나라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신고(辛苦)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그 간 저변(低邊)에
깔려있던 삼국 유민( )들의 뿌리깊은 지방색(地方色)이 희석(稀釋)되면서 모두가 단군(檀君)
의 뿌리임을 이후 민족사에 확고한 동질성이 이루어지는 원인이 된다.(註6)
(註6) 일연(一然) : 고려 희종2년(1206년) ~ 충렬왕15년(1289년)
고려시대의 중(僧),학자. 호(號)는 무극(無極) 목암(睦菴)이고 속성명(俗姓名)은 김
경명(金炅明), ‘일연’은 자(字)이다. 언필(彦弼)의 아들로서 경북 경산(慶山)에서 출생,
고려 고종(高宗) 1년(1214년)에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서 중이 되고 1227년 승과(僧
科)에 급제(及第), 불문에 요직을 두루거쳐 원종(元宗) 9년(1266년) 조지(朝旨)를 받고 대
장경 낙성회(大藏經落城會)의 맹주(盟主)가 되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러한 것이 경북 의성 인각사(麟角寺)의 탑과 비석에 기록되어 있고 행적비(行跡碑)
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있다. 그는 귀중한 저서(著書)를 남겼는데 그 중 삼국유사(三國
遺事)는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史料)가 된다.
일연(一然)의 시호(詩號)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신화(檀君神話)에
서 그 깊은 뜻이 있슴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압제로 정치에 싫증을 느낀 충렬왕(忠烈王)은 23년에 원주(元主)에게 상주
(上奏)하여 세자(世子: )에게 양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충선왕(忠宣王)은 왕비(王妃: )와 더불어 귀국하여 젊은이답게(당시24세) 대륙국가
에서 자란 포부와 견식으로 과단성있게 구제(舊制)를 개혁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의
'좀'을 도려내는 유신(維新)의 정치를 함에,
기존 권문세족이 크게 반발하여 비난과 참무(讒誣)가 원정(元廷)에 비화(飛火)되고
또한 왕비(王妃)가 총(寵)을 오로지하려고 조비(趙妃)을 원태후(元太后)에 참소(讒訴)함에
이르러서는 원주(元主)는 일년을 넘지 못해 조비(趙妃)를 잡아가고 왕(王)과 왕비(王妃)를
소환하여 8개월만에 왕위(王位)를 다시 충렬왕(忠烈王)에게 양위(讓位)하도록 했다.
종친 현덕 이병완님글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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